魏武嘗過曹娥碑下에 楊修從이러 碑背上에 見題作黃絹幼婦外孫韲臼八字라 魏武謂修曰
黃絹은 色絲也니 於字爲絕이요 幼婦는 少女也니 於字爲妙요 外孫은 女子也니 於字爲好요 韲臼는 受辛也니 於字爲辭니 所謂絕妙好辭也라
我才不及卿
이 乃覺三十里
注+① 會稽典錄曰 “孝女曹娥者, 上虞人. 父盱能撫節按歌, 婆娑樂神. 漢安二年, 迎君神, 泝濤而上, 爲水所淹, 不得其尸. 娥年十四, 號慕思盱, 乃投于江, 其父尸曰 ‘父在此, (瓜)[衣]當沈.’ 旬有七日, (瓜)[衣]偶沈, 遂自投於江而死. 縣長度尚悲憐其義, 爲之改葬, 命其弟子邯鄲子禮爲之作碑.” 按曹娥碑在會稽中, 而魏武․楊修未嘗過江也. 異苑曰 “陳留蔡邕避難過吳, 讀碑文, 以爲詩人之作, 無詭妄也. 因刻石旁作八字. 魏武見而不能了, 以問群寮, 莫有解者. 有婦人浣於汾渚, 曰‘第四車解.’ 既而禰正平也. 衡即以離合義解之. 或謂此婦人即娥靈也.”라하다
注
劉云 “雖經論註, 猶覺難解, 不知古人何見作此.”
21-3
위무제魏武帝(
조조曹操)가 언젠가
조아曹娥의 비문 옆을 지날 적에
양수楊修가 따라 갔다.
위무제가 양수에게 물었다.
“경은 아직 말하지 말고, 내가 생각해 낼 때까지 기다리라”
그리고는 양수에게 알고 있는 내용을 따로 쓰게 하였다. 양수가 쓰기를,
“
황견黃絹은 색깔 있는 실[
색사色絲]이니 ‘
절絶’자이고,
유부幼婦는 어린 여자[
소녀少女]이니 ‘
묘妙’자이며,
외손外孫은 딸[
여女]의 아들[
자子]이니 ‘
호好’자이고,
이른바 ‘
절묘호사絶妙好辭’이다.”라고 하였다.
위무제 역시 글로 썼는데 양수와 〈내용이〉 같았다. 위무제가 마침내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의 재주가 경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30리 차이라는 것을 깨달았네.”
注+① 에 말하였다. “효녀 조아曹娥는 상우上虞 사람이다. 부친 조우曹盱는 장단을 맞춰 노래하고 춤을 추어 신神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한안漢安 2년(143)에 을 맞이하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물에 빠졌는데 그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 이때 조아는 14살이었는데 통곡하며 부친 조우를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강에 옷을 던지며 자기 부친의 시신屍身에게 빌기를, ‘아버지가 여기에 계시면 옷이 가라앉게 하소서.’ 라고 하였다. 17일 만에 옷이 가라앉자 조아가 마침내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현장縣長 이 조아의 뜻을 가엾게 여겨 그녀를 다시 장사지내주고, 자신의 제자 한단자례邯鄲子禮(한단순邯鄲淳)에게 명하여 조아의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내(유효표劉孝標)가 살피건대, 조아의 비석이 회계會稽 땅에 있었으나 위무제와 양수는 강을 건너간 적이 없었다.
에 말하였다. “진류陳留 사람 채옹蔡邕이 난리를 피해 오나라를 지나다가 비문을 읽고 시인이 지은 내용에 거짓되고 허황한 내용이 없다고 생각하여 비석 옆에 8글자를 새겼다. 위무제가 보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관료들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그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때 강가에서 빨래하던 부녀자가 말하기를, ‘4번째 수레〈에 탄 이〉가 알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잠시 후에 〈보니〉 예정평禰正平이었다. 예형은 즉시 글자를 분리하고 합하는 방식으로 그 뜻을 해석하였다. 혹은 이 부녀자가 바로 조아의 혼령이었다고도 한다.”
注
◦ 유신옹劉辰翁:〈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韲臼에 대한 풀이는〉 그것을 논한 주해를 읽어도 여전히 난해하니, 옛사람이 무엇을 보고 이것을 지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