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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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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신어보(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宣武 移鎮南州 制街衢平直이라 人謂王東亭曰注+① 王司徒傳曰 “王珣, 字元琳, 丞相導之孫, 領軍洽之子也. 少以淸秀稱. 大司馬桓溫辟爲主簿, 從討袁眞, 封交趾望海縣東亭侯. 累遷尙書左僕射, 領選, 進尙書令.”
丞相 初營建康 無所因承하고 而制置紆曲하니 方此為劣注+② 晉陽秋曰 “蘇峻旣誅, 大事克平之後, 都邑殘荒. 溫嶠議徙都豫章, 以即豐全, 朝士及三吳豪傑, 謂可遷都會稽. 王導獨謂 ‘不宜遷都. 建業, 往之秣陵, 古者旣有帝王所治之表. 又孫仲謀․劉玄德俱謂是王者之宅. 今雖凋殘, 宜修勞來旋定之道, 鎭靜群情. 且百堵皆作, 何患不克復乎.’ 終至, 導之策也.”이라하니
東亭曰
丞相乃所以為巧 江左 地促하여 不如中國하니 若使阡陌條暢이면 則一覽而盡이라 紆餘委曲하여 若不可測이라하다


4-66 선무宣武(환온桓溫)가 남쪽 고을(형주荊州)로 을 옮기고서 길을 평탄하고 곧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왕동정王東亭(왕순王珣)에게 말했다.注+① 〈왕사도전王司徒傳〉에 말하였다. “왕순王珣원림元琳이고 승상丞相 왕도王導의 손자이며 영군領軍 왕흡王洽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맑고 수려하다고 칭해졌다. 대사마大司馬 환온桓溫이 불러다가 주부主簿로 삼았는데, 〈환온을〉 따라 원진袁眞을 토벌하여 교지交趾 망해현望海縣 동정후東亭侯에 봉해졌다. 여러 벼슬을 거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어 관리의 천거를 담당했으며, 상서령尙書令에 올랐다.”
승상丞相(왕도王導)이 처음 건강建康에 〈도읍을〉 조성하면서 옛 제도를 따르지 않고 구불구불하게 〈길을〉 처리하였는데, 이것과 비교하자면 뒤떨어집니다.”注+② ≪진양추晉陽秋≫에 말하였다. “소준蘇峻이 이미 주살되고 대사大事가 평정된 후에 도읍都邑이 황폐하였다. 온교溫嶠는 도읍을 예장豫章으로 옮겨 번영과 온전함을 이루려 꾀하였고, 조사朝士들과 호걸豪傑들은 회계會稽로 천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왕도王導만 홀로 ‘천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건업建業은 과거의 말릉秣陵으로, 예부터 이미 제왕帝王이 다스렸던 표지가 있습니다. 또 손중모孫仲謀(손권孫權)와 유현덕劉玄德(유비劉備)이 모두 왕자王者의 터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황폐하지만 마땅히 〈백성들을〉 위로하고 안정시키는 방도를 닦아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켜야 합니다. 또 건물들이 모두 지어지면 원래대로 회복하지 못할까 어찌 근심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끝내 안정에 이르렀으니, 이는 왕도의 시책 덕분이었다.”
왕동정이 말했다.
“이것이 승상이 뛰어난 이유입니다. 강좌江左 지역은 땅이 좁아 중원과는 다릅니다. 만약 길을 남북으로 곧게 만든다면 한번 보고는 다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불구불하여 헤아릴 수 없을 듯이 한 것입니다.”


역주
역주1 三吳 : 晉에서는 吳興․吳郡․會稽를 ‘삼오’라고 하였다. 시대에 따라 대상이 달라졌는데, 唐에서는 吳興․吳郡․丹陽을, 宋에서는 蘇州․常州․湖州를 가리켰다.
역주2 (建康)[康寧] : 저본에는 ‘建康’으로 되어 있으나, 安永本에 의거하여 ‘康寧’으로 바로잡았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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