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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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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玄 在馬融門下注+① 融自敍曰 “融, 字季長, 右扶風茂陵人. 少而好問, 學無常師. 大將軍鄧騭, 召爲舍人, 棄遊武都. 會羌虜起, 自關以西, 道斷. 融以謂 ‘古人有言「左手據天下之圖, 而右手刎其喉, 愚夫不爲.」 何則? 生貴於天下也. 豈以曲俗咫尺羞, 滅無限之身哉.’ 因往應之. 爲校書郎, 出爲南郡太守.”러니 三年不得相見하고 高足弟子 傳授而已 嘗筭渾天 不合하고 諸弟子莫能解 或言玄能者라하니 融召令筭 一轉便決하니 衆咸駭服이라
及玄業成 辭歸하고 旣而 融有禮樂皆東之歎注+② 玄別傳曰 “玄, 少好學書․數, 十三誦五經, 好天文․占候․風角․隱術. 年十七, 見大風起, 詣縣曰 ‘某時當有火災.’ 至時果然, 智者異之. 年二十一, 博極群書, 精歷數․圖緯之言, 兼精筭術. 遂去吏, 師故兗州刺史第五元先, 就東郡張恭祖, 受周禮․禮記․春秋傳. 周流博觀, 每經歷山川, 及接顔一見, 皆終身不忘. 扶風馬季長, 以英儒著名, 玄往從之, 參考同異. 季長, 后戚, 嫚於待士, 玄不得見. 住左右, 自起精廬, 旣因紹介得通. 時涿郡盧子幹, 爲門人冠首. 季長不解剖裂七事, 玄思得五, 子幹得二, 季長謂子幹曰 ‘吾與汝, 皆弗如也.’ 季長臨別, 執玄手曰 ‘大道東矣, 子勉之.’”하고 恐玄擅名而心忌焉이라 亦疑有追하고 乃坐橋下하여 在水上據屐한대 果轉式逐之라가 告左右曰 玄 在土下水上而據木하니 此必死矣라하고 遂罷追하니 竟以得免注+③ 馬融, 海內大儒, 被服仁義, 鄭玄, 名列門人, 親傳其業, 何猜忌而行鴆毒乎. 委巷之言, 賊夫人之子. ○或出門人, 未可知也. 或如神秀之徒惠明乎.이라
【頭註】
有一作所.
李云 “必是盧子幹逐之.”
劉云 “式, 所以卜追也. 其兆如此, 故知其死, 而不知出於逃遁之術也.”
又云 “皆其門人互相神聖所傳, 不足多辨.”
王云 “註駁甚正.”


7-2 정현鄭玄마융馬融의 문하에 들어갔는데,注+마융馬融의 〈자서自敍〉에 말하였다. “마융은 자가 계장季長이니 우부풍右扶風무릉茂陵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질문하기를 좋아하고 배우는 데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 대장군大將軍 등즐鄧騭사인舍人으로 삼기 위해 그를 불렀는데, 그는 그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양주凉州무도武都에서 유람하였다. 그때 마침 오랑캐인 강족羌族이 거병하여 함곡관函谷關 이서 지역의 길이 차단되었다. 마융이 생각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하였으니, 무엇 때문인가? 자신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중하기 때문이다. 어찌 세속에 조금 굽히는 것을 수치로 여겨 무한 가치의 몸을 죽인단 말인가.’ 하고는 가서 〈등즐의 부름에〉 호응하여 〈출사出仕하였다.〉 교서랑校書郎이 되고, 지방으로 나아가 남군태수南郡太守가 되었다.” 3년 동안 마융을 만나지 못하고 〈마융의〉 수준 높은 학생으로부터 학업을 전수받을 뿐이었다. 한번은 〈마융이 로〉 천체天體의 도수를 계산했는데 정확히 일치하지 않고, 그의 모든 제자들도 풀이할 수 없었다. 어떤 이가 정현은 풀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자, 마융이 정현을 불러 계산하게 하였다. 〈정현이 혼천의를〉 한번 돌려 즉시 해결하니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탄복하였다.注+② 〈정현별전鄭玄別傳〉에 말하였다. “정현은 어릴 때부터 문자와 산술의 학습을 좋아하였다. 13세에는 오경五經을 암송하고, 천문天文을 좋아하였다. 17세에는 거센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현청縣廳에 나아가 ‘모시某時가 되면 틀림없이 화재가 발생할 것입니다.’ 했는데, 그 시각이 되어 과연 그의 말처럼 〈화재가 발생하자〉 지혜롭다는 자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21세에는 다방면의 서적을 섭렵하여 통달하고, 에 관한 학설에 정통하며, 아울러 산술算術에도 정통하였다. , 연주자사兗州刺史를 역임했던 제오원선第五元先을 스승으로 섬기고, 동군東郡장공조張恭祖에게 나아가 ≪주례周禮≫․≪예기禮記≫․≪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배웠다. 사방을 두루 유람하면서 광범위하게 구경했는데, 매번 산천을 지날 때에 한번이라도 직접 목격한 것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다. 부풍의 마계장馬季長(마융)이 노사숙유老師宿儒로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그를 찾아가 종유하면서 경전에 대한 서로의 견해 차이를 살피고자 하였다. 그런데 으로서 선비를 대접하는 데에 소홀했기 때문에 정현은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정현은 그 근처에 머물면서 스스로 서재를 지어 거처했는데, 얼마 뒤에 〈어떤 사람의〉 소개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에 탁군涿郡노자간盧子幹(노식盧植)이 마계장의 문인 가운데 으뜸이었다. 마계장에게는 분석하지 못한 일곱 가지 사안이 있었는데, 정현은 다섯 가지를 해득解得하고 노자간은 두 가지를 해득하자, 마계장이 노자간에게 ‘나와 네가 모두 〈정현만〉 못하구나.’ 하였다. 마계장이 정현과 이별할 때 그의 손을 잡고는 ‘대도大道가 동쪽으로 옮겨가니 그대는 부디 힘쓰라.’ 하였다.”
정현이 학업을 마치고 마융에게 고별인사를 올린 뒤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현이 떠난 지〉 얼마 뒤에 마융은 ‘예악이 모두 동쪽으로 옮겨가는구나.[예악개동禮樂皆東]’라고 한탄하고, 정현이 명성을 독점할까 두려워하면서 마음속으로 그를 시기하였다. 정현 역시 〈마융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추격할 것이라고 의심하고는 〈흙으로 만든〉 다리 아래에 앉아 물가에서 나막신을 신고 걸터앉아 있었다. 마융은 예상대로 을 돌려 점을 치면서 정현을 추격하다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정현이 이는 틀림없이 그가 죽었다는 점괘이다.” 하고는 마침내 추격을 멈추었다. 정현은 이로써 마침내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注+마융馬融은 천하의 알아주는 위대한 유학자로서 인의仁義를 몸소 실천하였고, 정현은 마융의 문인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직접 그의 학업을 전수받았으니, 어찌 〈마융이 정현을〉 시기하여 악독한 짓을 했겠는가. 이는 길거리에 떠도는 유언비어가 남의 자식(마융)을 해치는 것이다.
○어쩌면 마융의 추천장을 요구한 문인으로부터 나온 말일 수도 있는데,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어쩌면 과 같은 경우일 수도 있다.
두주頭註
◦ 〈계장유부해부열칠사季長有不解剖裂七事의〉 ‘’는 ‘’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이지李贄노자간盧子幹이 〈정현鄭玄을〉 추격한 것이 틀림없다.
유진옹劉辰翁은 추격하는 것에 대한 점을 칠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그 점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정현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점이 나오도록 취한 조처가〉 도망치기 위한 술수에서 나왔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유진옹劉辰翁:〈이런 내용은〉 모두 그 문인이 서로 신성神聖하게 여겨 전수한 것이니, 많은 변론이 필요치 않다.
왕세무王世懋:원주 ③의 반박이 매우 정확하다.


역주
역주1 왼손에……것이다 : ≪文子≫ 〈上義〉에 보이는 구절이다.
역주2 渾天儀 : 璇璣玉衡이라고도 하는데, 日月星辰의 天象을 그려서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기계로, 네 개의 다리를 지닌 틀 위에 올려놓고 회전시키면서 관측하였다.
역주3 占候 : 天象의 변화에 근거하여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이다.
역주4 風角 : 고대에 유행하던 占卜術의 하나로, 五音으로 사방의 바람을 점쳐서 길흉을 정한다.
역주5 隱術 : 기후를 점치는 하나의 방법이다. ≪世說音釋≫에서 ‘隱身術[隱形之術]’이라 했는데, ≪世說箋本≫에서 “隱祕術이니, 은신술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역주6 歷數 : 天象이 운행하는 度數로, 이를 통해 달력을 만든다. 아울러 帝位의 계승이 천상의 운행에 상응한다고 인식하여 제왕을 계승하는 순서를 지칭하기도 한다.
역주7 圖讖 : 제왕이 천명을 받는 징험에 관해 方士나 儒生이 엮어 만든 책으로, 대부분 은어와 예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秦나라 시기에 발생하여 後漢시대에 대유행하였다.
역주8 緯書 : 前漢 말기에 발생하여 後漢시대에 대유행했던, 유가 경전의 의미에 의탁하여 인사의 길흉을 판단하고 미래의 흥망성쇠를 견강부회한 책으로, 經書에 상대하여 ‘위서’라고 부른다. ≪詩經≫․≪書經≫․≪易經≫․≪禮記≫․≪樂經≫․≪春秋≫․≪孝經≫에 대해 모두 위서가 있는데, 이를 ‘七緯’라고 부른다.
역주9 마침내……그만두고 : 鄭玄은 젊은 시절 鄕嗇夫가 되었는데, 관리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관직생활을 그만두었다.(≪世說新語補觿≫)
역주10 마계장은……인척 : 後漢 明帝의 馬皇后는 馬援의 딸이고, 마융은 마원의 형인 馬余의 후손 馬嚴의 아들이다.(≪世說箋本≫)
역주11 : 栻의 통용자이다. 고대에 時日을 점칠 때 사용하던 기구로, 후대에는 星盤(별을 관측하는 쟁반)이라고 불렀다. ≪史記≫ 〈日者列傳〉의 ‘旋式正棋’에 대한 司馬貞의 ≪索隱≫에서 “式은 바로 栻이고, 旋은 돌리다라는 뜻이다. 栻의 모양은, 상층은 天綱으로 하늘의 모양을 본떠 원형이고 하층은 地辰으로 땅의 모양을 본떠 사각형이다. 이것을 사용할 때는 천강을 돌리고 지신을 더하기 때문에 旋式이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역주12 흙……있으니 : 죽어서 관에 들어가 있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역주13 神秀의……惠明 : ≪六祖法寶壇經≫에 따르면 六祖 慧能이 五祖 弘忍에게 衣鉢을 전수받고 남쪽으로 떠난 지 두 달 만에 大庾嶺에 이르렀을 때, 홍인의 수제자였던 神秀의 무리 수백 명이 의발을 탈취하기 위해 추격해왔는데, 그 무리 중에 俗姓이 陳으로 四品將軍을 역임했던 혜명이 누구보다도 앞서 혜능을 찾으려 하였다.(≪世說新語補考≫)
역주14 : 安永本과 ≪後漢書≫ 〈馬融傳〉에는 ‘之’로 되어 있다. 각본의 ≪世說新語≫에는 ‘爲’로 되어 있다.
역주15 (又)[有] : 저본에는 ‘又’로 되어 있으나, 安永本과 ≪世說新語補考≫에 의거하여 ‘有’로 바로잡았다. 각본의 ≪世說新語≫에는 ‘又’로 되어 있다.
역주16 求帖 : 李贄의 ≪初潭集≫에는 ‘投刺’로 되어 있다.(≪世說新語補考≫)
역주17 盧植 : ?~192. 後漢시대 학자로, 字는 子幹이며 幽州 涿郡 涿縣 사람이다. 젊었을 때 鄭玄과 함께 馬融 문하에서 몇 년 동안 수학하였다. 마융이 주변에 여자들로 하여금 춤추고 노래 부르게 해도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아 스승의 존중을 받았다. 저서로 ≪尙書章句≫와 ≪三禮解詁≫가 있으며, 蔡邕ㆍ楊彪ㆍ韓說과 함께 ≪漢記≫를 집필하였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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