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偉元門生이 爲本縣所役하여 求屬令爲脫하니 王曰
卿學은 不足以庇身하고 吾德은 不足以庇卿하니 屬之何益이리오하고
乃步擔乾飯하고 兒負鹽豉하여 送所役生하여 到縣하니 諸生隨者千人이러라 令이 以偉元詣己라하여 整衣出迎이라
偉元乃下道
로 至土牛傍
하여 罄折立
하고 自言 門生爲縣役
하여 故來送別
이라하고 因執手涕泣而去
하니 令
이 卽放遣此生
하다 一縣皆以爲耻
注+① 王隱晉書曰 “王裒, 字偉元, 城陽營陵人. 祖修, 有名魏世. 裒少立操. 裒以父儀爲晉文王所害, 絶世不仕, 立屋墓側, 隱居以敎授爲務. 旦夕常至墓前朝拜, 悲號斷絶. 墓前一栢, 裒常所攀, 枝葉爲之枯.”하다
注
李云 “巧於屬託, 道學之宗祖也. 倘若逢卓老, 計不行矣.”
1-30【보補】왕위원王偉元(왕부王裒)의 문하생이 본현本縣의 역役을 지게 되자 〈스승에게〉 현령에게 부탁하여 자신을 역에서 빼줄 것을 청하니 왕위원이 말하였다.
“경의 학문은 자신을 비호하기에 부족하고 나의 덕은 경을 비호하기에 부족하니 부탁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마침내 도보로 〈자신은〉 마른 밥을 지고 아이에게는 된장을 지게 하여 역을 지러 가는 문하생을 전송하러 현에 도착하니 그를 따르는 생도들이 천 명이었다. 현령은 왕위원이 자신을 만나러 온다고 생각하여 의복을 갖추고 환영하러 나왔다.
왕위원이 마침내
공손히 몸을 굽히고 서서 문하생이
현역縣役을 지게 되었기 때문에 작별하러 왔노라고 스스로 말하고는 〈문하생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고 떠났다. 현령이 즉시 이 문하생을 역에서 풀어주고 돌려보냈다.
注+①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왕부王裒는 자字가 위원偉元이고, 성양城陽 영릉營陵 사람이다. 조부 왕수王修는 위魏나라 때 명성이 있었다. 왕부는 젊어서부터 절조가 있었다. 왕부는 세상과 단절하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부친의 묘 옆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생도들을 가르치는 것을 책무로 삼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묘 앞에 가서 참배하였는데 슬프게 부르짖는 소리가 매우 처절하였다. 묘 앞에 전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왕부가 항상 그 나무를 어루만져 나뭇잎이 그 때문에 말라버렸다.”
注
◦ 이지李贄:청탁을 교묘하게 하였으니 도학道學의 종조宗祖이다. 만약 탁월하고 노련한 사람을 만났다면 계책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注
◦ 원문에는 〈묘전조배墓前朝拜의〉 ‘조朝’자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