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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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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叔廣 甚辯給하고 而摯仲治 長於翰墨한대 俱爲列卿이라 每至公坐 廣談하면 仲治不能對 退하여 著筆難廣하면 廣又不能答注+① 王隱晉書曰 “太叔廣, 字季思, 東平人. 拜成都王爲太弟, 欲使詣洛, 廣子孫多在洛, 慮害乃自殺. 摯虞, 字仲治, 京兆長安人. 祖茂, 秀才, 父模, 太僕卿. 虞少好學, 師事皇甫謐. 善校練文義, 多所著述, 歷秘書監․太常卿. 從惠帝至長安, 遂流離鄠․杜間. 性好博古, 而文籍蕩盡. 永嘉五年, 洛中大饑, 遂餓而死. 虞與廣, 名位略同, 廣長口才, 虞長筆才, 俱少政事. 衆坐廣談, 虞不能對, 虞退筆難廣, 廣不能答. 於是, 互相嗤笑, 紛然於世. 廣無可記, 虞多所錄, 於斯爲勝也.”이라
【頭註】
云 “廣, 晉宗室屬.”


8-42 태숙광太叔廣은 말재주가 매우 뛰어나고 지중치摯仲治(지우摯虞)는 글짓기에 뛰어나 모두 열경列卿(구경九卿)의 지위에 올랐다. 매번 공좌公坐(조정朝廷)에 나아갔을 때 태숙광이 담론하면 지중치는 대답할 수 없었으나, 〈공좌에서〉 물러나 〈지중치가〉 문장을 써서 태숙광을 논박하면 태숙광이 또한 답변할 수 없었다.注+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태숙광太叔廣계사季思로, 동평東平 사람이다. 뒤에 〈(남경南京)에 있던 그를〉 낙양洛陽으로 보내고자 하니, 태숙광의 자손이 대부분 낙양에 있었기 때문에 해를 입을까 우려하여 자살하였다. 지우摯虞중치仲治로, 경조京兆장안長安 사람이다. 조부 지무摯茂수재秀才였고, 부친 지모摯模태복경太僕卿을 역임하였다. 지우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황보밀皇甫謐을 스승으로 섬겼다. 문장의 의미를 연구하고 고증하는 데에 뛰어나고 저술한 글이 많았으며, 비서감秘書監태상경太常卿을 역임하였다. 혜제惠帝(사마충司馬衷)를 따라 장안에 갔다가 결국 호현鄠縣두양현杜陽縣에서 떠돌아다녔다. 성품이 를 좋아하여 문적文籍을 〈구하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영가永嘉 5년(311)에 낙양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마침내 굶어 죽었다. 지우와 태숙광은 명성과 지위가 대체로 같았는데, 태숙광은 말재주가 좋았고 지우는 글재주에 뛰어났으나 모두 정치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은 부족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태숙광이 담론을 하면 지우는 그에 대해 대답할 수 없었으나, 물러난 뒤에 〈지우가〉 문장을 써서 태숙광을 논박하면 태숙광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로 비웃느라 세상에 떠들썩하였다. 태숙광은 기록할 만한 내용이 없으나 지우는 저술한 바가 많으니, 이런 점에서는 〈지우가〉 더 뛰어나다.”
두주頭註
유응등劉應登태숙광太叔廣나라 종실宗室의 혈족이다.


역주
역주1 成都王(司馬穎)이……봉해진 : 성도왕이 齊王 司馬冏(사마경)의 擧義에 호응하여 趙王 司馬倫을 죽이는 데 공적을 세웠는데도 자못 겸손하자 인심이 그에게 기울었고, 이후에 제왕이 공적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자 인심이 더욱 그에게 기울었다. 제왕이 실각하자 그는 鄴에서 실권을 장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왕보다 심하게 교만하고 사치하였다. 마침 河間王 司馬顒(사마옹)이 태자 司馬覃을 폐위하고 성도왕을 皇太弟로 세우자, 그는 더욱 교만하여 천자를 무시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世說新語補觿≫, ≪世說箋本≫)
역주2 博古 : 古書畫나 古器物 등을 널리 收藏하고 감상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역주3 (劉)[應登] : 安永本에는 ‘劉’으로 되어 있으나, 元刊本 ≪世說新語≫에 의거하여 ‘應登’으로 바로잡았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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