見紫芝眉宇
면 使人名利之心都盡
注+① 劉昫唐書曰 “元德秀, 字紫芝, 河南人. 性純朴無緣飾, 動師古道. 父爲延州刺史. 德秀少孤貧, 事母以孝聞. 開元中, 遊京師, 不忍離親, 每行則自負板輿, 與母詣長安. 母亡, 廬於墓所, 食無鹽酪, 藉無茵席, 刺血畫像寫佛經, 久之. 以孤幼牽於祿仕, 授邢州南和尉, 佐治有惠政, 召補龍武參軍. 終魯山令.”이라하다
16-49 【보補】 방태위房太尉(방관房琯)가 말했다.
“
원자지元紫芝(
원덕수元德秀)의
용모容貌를 보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모두 사라지게 한다.”
注+① 유후劉昫의 ≪구당서舊唐書≫에 말했다. “원덕수元德秀는 자字가 자지紫芝로 하남河南 사람이다. 천성이 순박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항상 옛 법도를 본받았다. 부친은 연주자사延州刺史였다. 원덕수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는데 모친을 효성으로 모셔 〈이름이〉 알려졌다. 개원開元 연간(713~741) 경사京師에 다녔는데 차마 모친과 떨어지지 못해 갈 때마다 직접 를 메고 모친과 함께 장안長安에 갔다. 모친이 돌아가시자 묘소에 여막을 짓고 소금과 식초도 없이 식사를 했고 자리에는 요와 방석도 없었으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어 〈모친의〉 상像을 그리고 불경佛經을 베껴 썼다. 오랫동안 나이 어린 고아라는 이유로 오래도록 에 제재를 받았는데, 형주邢州의 남화위南和尉에 제수되어서는 보좌하며 백성들에게 혜택이 가는 정치를 펼쳤고 〈도성으로〉 불려와 용무참군龍武參軍에 보임補任되었다. 노산령魯山令으로 있다가 죽었다.”원덕수元德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