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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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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江州注+① 宋書曰 “王弘, 字休元, 瑯琊臨沂人. 曾祖導, 晉丞相, 祖洽, 中領軍, 父珣, 司徒. 弘少好學, 以淸恬知名, 與尙書僕射謝混善. 弱冠, 爲會稽王驃騎參軍.” 欲識陶淵明이나 不能致 淵明嘗往廬山한대 令淵明故人龐通之 齎酒具하여 於半道栗里要之 淵明有脚疾하여 使一門生二兒 擧籃輿하고 旣至 欣然便共飮酌하고 俄頃王至어늘 亦無忤也注+② 梁昭明太子撰淵明傳曰 “淵明, 字元亮, 或云 ‘潛, 字淵明.’ 潯陽柴桑人. 曾祖侃, 晉大司馬. 潛少有高趣, 博學不群. 親老家貧, 爲州祭酒, 少日自解歸. 州召主簿, 不就, 躬耕自資, 遂抱羸疾. 後復爲彭澤令, 不以家累自隨, 送一力給其子, 書曰 此亦人子也, 可善遇之, 在官八十餘日, 郡遣督郵至縣, 吏請曰 ‘應束帶見之.’ 潛歎曰 ‘我豈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 卽日解印綬去, 賦〈歸去來辭〉. 妻翟氏亦與同志, 能安勤苦, 夫耕於前, 妻鋤於後. 潛自以先世爲晉宰輔, 耻復屈身後代, 自宋高祖王業漸隆, 不復肯仕. 是歲將復徵之, 會卒, 世號靖節先生.” 晉書潛本傳曰 “潛旣絶州郡覲謁, 未嘗有所造詣, 惟至田舍及廬山遊觀而已. 或有酒要之, 或要之, 共至酒家坐, 雖不識主人, 亦欣然無忤. 刺史王弘, 以元熙中臨州, 甚欽遲之, 潛稱疾不見. 弘每令人候之, 密知當往廬山, 遣其故人龐通之齎酒, 先於半途要之, 便引酌, 欣然忘進. 弘乃出與相聞, 歡宴窮日.” 續晉陽秋曰 “王弘造淵明, 無履, 弘從人脫履, 以給之. 弘語左右, 爲彭澤作履, 左右請履度, 淵明卽衆坐伸脚. 及履至, 著而不疑.” 吳正傳詩話曰 “本傳‘潛故人龐通之’, 此有〈答龐參軍〉四言及後五言, 皆敍隣曲契好, 明是此人. 又有怨詩示龐主簿者, 豈卽龐參軍耶? ‘半道栗里’, 亦可證移家之事.”


13-20 왕강주王江州(왕홍王弘)가注+① ≪송서宋書≫ 〈왕홍열전王弘列傳〉에 말하였다. “왕홍은 휴원休元으로, 낭야瑯琊 임기臨沂 사람이다. 증조부 왕도王導나라 승상丞相을, 조부 왕흡王洽중령군中領軍을, 부친 왕순王珣사도司徒를 역임하였다. 왕홍은 어릴 때부터 배움을 좋아하였고, 청렴과 담백함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상서복야尙書僕射 사혼謝混과 사이가 좋았고, 약관의 나이에 회계왕會稽王(사마도자司馬道子)의 표기참군驃騎參軍이 되었다.” 도연명陶淵明과 교제하고 싶었지만 〈그를〉 이르게 할 수 없었다. 도연명이 한번은 여산廬山에 갔는데, 왕강주가 도연명의 벗인 방통지龐通之(방준龐遵)로 하여금 술상을 준비하여 중도의 율리栗里에서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도연명은 각질脚疾을 앓고 있어서 문하생 한 명과 아들 두 명으로 하여금 를 들게 하였다. 〈방통지가〉 이른 뒤에 기쁘게 즉시 함께 술을 마셨고, 잠시 뒤에 왕강주가 도착했는데 역시 거스름이 없었다.注+남조南朝 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소통蕭統)가 찬술한 〈도연명전陶淵明傳〉에 말하였다. “도연명은 원량元亮인데, 혹자는 ‘도잠陶潛가 연명이다.’라고 하였다. 심양潯陽 시상柴桑 사람이다. 증조부 도간陶侃나라에서 대사마大司馬를 역임하였다. 도잠은 어릴 때부터 고상한 아취를 지녔고 박학다식하며 출중하였다. 부모님이 연로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좨주祭酒가 되었는데, 며칠 만에 스스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에서 주부主簿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몸소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다가 마침내 이질羸疾(이질, 영양실조)에 걸렸다. 이후에 다시 팽택현령彭澤縣令이 되었는데, 가족을 데리고 오지 않고 혼자서 부임하면서 아들에게 일꾼 한 명을 보내면서 편지를 써서 ‘이 사람도 역시 남의 자식이니 잘 대우해주어야 한다.’ 하였다. 관직에 있은 지 80여 일이 되었을 때, 에서 독우督郵을 파견하여 팽택현에 도착하자, 아전이 ‘응당 정장 차림으로 그를 만나야 합니다.’ 요청했는데, 도잠은 탄식하면서 ‘내가 어찌 〈봉급으로 받는〉 다섯 말의 쌀 때문에 동네의 어린아이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겠는가.’ 하고는 그날로 를 풀어놓고 떠나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었다. 그의 아내 적씨翟氏도 그와 뜻을 같이 하여 힘든 생활도 편안히 여겨서 남편은 앞에서 밭을 갈고 아내는 뒤에서 잡초를 제거하였다. 도잠은 스스로 선조가 진나라의 재보宰輔(재상宰相)를 역임했다는 이유로 〈본인이〉 다시 후대의 〈조정에〉 몸을 굽히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남조南朝 고조高祖(유유劉裕)의 왕업이 차츰 융성해진 이후로는 더 이상 벼슬하려고 하지 않았다. 에 〈조정에서〉 장차 다시 그를 부르려고 했는데 마침 세상을 떠났으니, 세상에서 〈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불렀다.”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에 말하였다. “도잠은 이미 자사刺史태수太守를 찾아뵙는 일을 끊어버리고 한번도 〈그들을〉 방문한 적이 없고, 오직 농막에 가거나 여산廬山에 가서 유람할 뿐이었다. 혹 어떤 사람이 술을 마련하여 초대하거나, 혹 그를 초대하여 함께 술집에 가서 앉으면 비록 〈초대해준〉 주인을 〈본래〉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흔쾌히 거스름이 없었다. 자사刺史 왕홍王弘이 〈 공제恭帝원희元熙 연간(419~420)에 강주江州에 부임하고는 도잠을 몹시 흠모했으나, 도잠은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왕홍은 매번 사람을 시켜 도잠을 살피게 했는데, 〈도잠이〉 여산에 가게 될 것을 은밀히 알고는 도잠의 벗인 방통지龐通之(방준龐遵)를 보내 술상을 마련하여 도중에서 미리 그를 맞이하게 하니, 곧장 술을 마시고 기뻐하면서 갈 길을 잊었다. 왕홍이 그제야 나타나 서로 통성명을 한 뒤에 온종일 유쾌하게 술을 마셨다.”
단도란檀道鸞의 ≪속진양추續晉陽秋≫에 말하였다. “왕홍이 도연명을 방문했는데 〈도연명에게〉 신발이 없자, 왕홍의 시종이 〈자기〉 신발을 벗어 도연명에게 주었다. 왕홍이 측근에게 팽택현령(도연명)을 위해 신발을 만들어 주라고 하자, 측근이 〈도연명에게〉 신발의 크기를 물었더니 도연명은 즉시 〈예법에 맞지 않는데도〉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다리를 뻗었다. 신발이 도착하자, 〈도연명은 그것을〉 신고 의심하지 않았다.”
에 말하였다. “〈≪진서晉書≫〉 본전本傳에서 언급한 ‘도잠의 벗인 방통지’는, 여기에 이라는 사언시와 뒤의 〈같은 제목의〉 가 있는데, 모두 이웃과의 정다운 우호를 서술한 것이니 확실히 이 사람이다. 또 이라는 시가 있으니, 〈방주부가〉 어찌 바로 방참군이겠는가. ‘중도의 율리栗里’라는 〈말을 보면〉 이는 역시 이사했던 일을 증명할 수 있다.”


역주
역주1 【補】 : 저본에는 ‘補’가 없으나, 이 일화는 ≪世說新語≫가 아닌 ≪何氏語林≫에 있으므로 ‘補’를 보충하였다.
역주2 籃輿 : 대를 엮어서 만든, 뚜껑이 없이 의자처럼 된 작은 가마이다.
역주3 印綬 : 신분이나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官印을 몸에 찰 수 있도록 관인의 꼭지에 매단 끈이다.
역주4 그 해 : 원문의 ‘是歲’는 ≪文選≫ 〈陶淵明傳〉에는 ‘元嘉四年’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가’는 南朝 宋 文帝(劉義隆)가 424~453년에 사용한 연호이다.
역주5 吳正傳詩話 : 본래 제목은 ≪吳禮部詩話≫로, ‘정전’은 吳師道(1283~1344)의 字이다. 그는 婺州 兰溪 사람으로, 元 英宗 至治 원년(1321)에 진사에 합격하고, 寧國路錄事과 建德縣尹을 역임한 뒤에 国子助敎教와 國子博士가 되었는데, 朱熹의 취지를 근본으로 삼고 許衡의 교육 방법으로 가르쳤고, 義理를 발휘하고 異端을 배척하는 것에 힘쓰는 것을 학문의 임무로 삼았다. 저서로 ≪敬鄕錄≫․≪敬鄕後錄≫․≪戰國策校注≫․≪詩雜說≫․≪書雜說≫․≪易雜說≫․≪春秋胡氏傳附辨≫․≪蘭溪山房類稿≫․≪禮部集≫ 등이 있다.
역주6 答龐參軍 : 陶淵明 60세인, 南朝 宋 文帝(劉義隆) 元嘉 원년(424)에 지은 시로, 4언 48구이다.
역주7 오언시 : 陶淵明 60세인, 南朝 宋 文帝(劉義隆) 元嘉 원년(424)에 지은 〈答龐參軍〉으로, 5언 16구이다.
역주8 怨詩楚調示龐主簿鄧治中 : 陶淵明 54세인, 晉 安帝(司馬德宗) 義熙 14년(418)에 지은 시로, 5언 20구이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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