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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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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子敬 病篤 道家上章應首過할새 問子敬하되
由來有何異同得失고하니
子敬云
不覺有餘事하고 唯憶與郗家離婚注+① 王氏譜曰 “獻之娶高平郗曇女, 名道茂, 後離婚.” 獻之別傳曰 “獻之, 字子敬. 祖曠, 淮南太守, 父羲之, 右將軍. 中, 詔尙餘姚公主, 遷中書令卒.”이라하다
【頭註】
劉云 “人生至此, 足稱寡過, 更以尙主爲嫌耳.”
王云 “此得入德行者, 見子敬生平無隱慝耳. 離婚, 以奉詔尙主. 子敬嘗有書遺故婦, 辭甚楚. 宋弘律之, 不得爲無過.”


1-48 왕자경王子敬(왕헌지王獻之)이 위독할 때였다.
왕헌지王獻之왕헌지王獻之
“지금까지 무슨 잘잘못이 있었습니까?”
왕자경이 말하였다.
“특별히 어떤 일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오직 치가郗家와 이혼한 것이 기억난다.”注+① ≪왕씨보王氏譜≫에 “왕헌지王獻之고평高平 치담郗曇의 딸 치도무郗道茂에게 장가들었다가 나중에 이혼하였다.” 하였다.
왕헌지별전王獻之別傳〉에 말하였다. “왕헌지王獻之자경子敬이다. 조부 왕광王曠회남태수淮南太守였고, 부친 왕희지王羲之우장군右將軍이었다. 함안咸安(371∼372) 연간에 황제의 명으로 에게 장가들었다.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러 죽었다.”
두주頭註
유진옹劉辰翁:사람의 인생이 이 정도였다면 잘못이 적었다고 칭찬할 만하지만, 다시 공주에게 장가간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왕세무王世懋:이것이 〈덕행德行〉편에 들어간 것에서 자경子敬(왕헌지王獻之)이 평생 숨기고 꺼릴 일이 없었음을 볼 수 있다. 이혼은 조칙을 받들어 공주에게 장가들기 위해서였다. 〈왕자경에게〉 잘못이 없을 수 없다.


역주
역주1 道家에서는……물었다 : 후한 말에 일어난 天師道 이후 道敎의 신자는 병들었을 때 자신의 도덕상의 과오를 고백하여 쾌유를 청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王獻之 집안은 천사도를 믿었다.
역주2 餘姚公主 : 東晉 简文帝의 셋째 딸 司馬道福이다. 처음에 餘姚公主에 봉해졌다가, 新安公主에 追封되었다. 桓溫의 아들 桓濟와 혼인하였다가 이혼하고 王獻之와 재혼하였다.
역주3 咸(寧)[安] : 저본에는 ‘咸寧’으로 되어 있는데, 함녕(275∼279)은 西晉 武帝의 연호이므로 王獻之(348~388)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에 ≪世說音釋≫에 의거하여 東晉 簡文帝의 연호인 咸安(371~372)의 오류로 보아, ‘寧’을 ‘安’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역주4 자경은……애절하였다 : 이 편지는 ≪全晉文≫ 권27과 ≪淳化閣帖≫ 권9에 실려 있다. 일명 〈奉對帖〉으로도 불린다.
역주5 宋弘은……만들었으니 : 송홍은 漢 光武帝 때 관리로, 청렴하고 품행이 고상하기로 정평이 났다. 광무제의 누이 湖陽公主가 그를 배우자감으로 지목하자 광무제가 송홍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 “속담에, 신분이 귀하면 친구를 바꾸고, 부자가 되면 아내를 바꾸는 것은 人之常情이 아닌가?” 하고 말하니, 송홍이 “저는 어려울 때 마음을 같이했던 친구를 잊어서는 안 되고, 고락을 같이했던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여 혼사가 성립되지 않았다.(≪後漢書≫ 〈宋弘傳〉)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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