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조광록祖光錄(
조납祖納)은 젊어서 부친을 잃고 빈곤하였는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항상 모친을 위하여 직접 불을 때서 음식을 만들었다.
注+①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말하였다. “조납祖納은 자字가 사언士言이고 범양范陽 주遒 사람이며, 9대 동안 효렴孝廉이었다. 조납의 세 이복형이 행실과 절조가 가장 뛰어났고 청언淸言에 능하였다.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정위경廷尉卿을 지냈다. 피난지인 강남에서 온교溫嶠가 그를 천거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았다.” 왕평북王平北(
왕예王乂)이 그의 훌륭한 명성을 듣고 계집종 둘을 보내 접대하게 하고, 그를
중랑中郎으로 기용하였다.
注+② ≪왕예별전王乂別傳≫에 말하였다. “왕예王乂는 자가 숙원叔元이고 낭야瑯琊 임기臨沂 사람이다. 당시 촉蜀나라가 새로 〈위魏나라에〉 평정되었는데 가 난을 일으키자 위魏 문제文帝가 서쪽의 장안長安으로 옮겨 가 왕예를 불러 상국사마相國司馬로 삼았다. 를 지냈고, 지방으로 나가 유주제군사도독幽州諸軍事都督 평북장군平北將軍을 지냈다.” 어떤 이가 농담으로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