郗太傳가 在京口에 遣門生하여 與王丞相書하여 求女壻하니 丞相語郗信하되
王家諸郞은 亦皆可嘉니이다 聞來覓壻하고 咸自矜持어늘 惟有一郞이 在東狀上에 坦腹臥하여 如不聞이니이다
訪之
하니 乃是逸少
라 因嫁女與焉
注+① 王氏譜曰 “逸少, 羲之字. 羲之妻, 太傅郗鑒女, 名璿, 字子房.”이라
注
劉云 “晉人風致著此, 故爲第一, 在古人中, 眞不可無.”
12-23 치태전郗太傳(치감郗鑒)가 경구京口에 있을 때 문하생을 보내 왕승상(왕도王導)에게 편지를 보내 사위를 구하니, 왕승상이 치태부의 심부름꾼(문하생)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동쪽 사랑채로 가서 마음대로 선택하시오.”
“왕씨 집안의 여러 젊은이들은 역시 모두 혼례를 치를 만합니다. 사위를 찾으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스스로 진중한 모습을 보였는데, 오직 한 젊은이만이 동쪽 평상 위에서 배를 드러내놓고 누운 채 〈소식을〉 듣지 못한 듯했습니다.”
〈치공이 왕승상의 집을〉 방문하니 〈그 젊은이는〉 바로
왕일소王逸少(
왕희지王羲之)였다. 그래서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注+① ≪왕씨보王氏譜≫에 말하였다. “일소逸少는 왕희지王羲之의 자字이다. 왕희지의 아내는 태부太傅인 치감郗鑒의 딸로, 이름은 선璿, 자字는 자방子房이다.”
注
◦ 유진옹劉辰翁:〈위진魏晉시대〉 진나라 사람의 품격이 이런 면에 있기 때문에 최고가 되지만, 옛사람 가운데 진실로 〈이런 경우가〉 없을 수는 없다.
注
◦ 왕세무王世懋:〈위진魏晉시대〉 진나라 사람들은 심부름꾼을 ‘신信’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