褚彦宣
注+① 南史曰 “褚炤, 字彦宣, 淵從父弟也. 父法顯, 鄱陽太守. 炤少有高節, 除國子博士, 以一目眇不拜.”은 常非從兄彦回身事二姓
注+② 蕭子顯齊書曰 “褚淵, 字彦回, 河南陽翟人. 祖秀之, 宋太常, 父湛之, 驃騎將軍, 尙主. 彦回, 少有世譽, 復尙文帝女. 湛之卒, 彦回推財與弟, 惟取書數千卷. 仕宋爲司空, 後爲齊朝佐命, 官至侍中․司徒.”이라 彦回子賁
注+③ 南史曰 “淵長子賁, 字蔚先, 少耿介. 父背袁粲等, 附高帝, 賁深執不可, 終身愧恨, 有棲退之志. 位侍中.”이 往問訊彦宣
하니 彦宣問曰
不知汝家司空이 將一家物하여 與一家하니 亦復何謂오하다
索火燒之
하니 馭人奔車
하여 乃免
注+④ 司馬光通鑑曰 “宋下詔, 禪位於齊, 而不肯臨軒, 王敬則勒兵入迎, 宋主出, 就東邸. 光祿大夫王琨, 在晉世已爲郞中, 至是, 攀車慟哭曰 ‘人以壽爲歡, 老臣以壽爲戚. 旣不能先驅螻蟻, 乃復頻見此事.’ 鳴咽不自勝, 百官雨泣. 司空褚淵等奉璽綬, 詣齊宮勸進. 齊王卽皇帝位, 以褚淵爲司徒, 賀者滿座. 炤歎曰 ‘彦回, 少立名行, 何意披猖至此? 門戶不幸, 乃復有今日之拜. 使彦回作中書郞而死, 不當爲一名士邪? 名德不昌, 乃復有期頤之壽.’”하다
11-37 【
보補】
저언선褚彦宣(
저소褚炤)은
注+① ≪남사南史≫ 〈저소열전褚炤列傳〉에 말하였다. “저소는 자字가 언선彦宣으로, 저연褚淵의 사촌아우이다. 부친 저법현褚法顯은 파양태수鄱陽太守를 역임하였다. 저소는 젊을 때부터 고상한 절개를 지녔다. 국자박사國子博士에 제수되었으나, 한쪽 눈이 애꾸라는 이유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항상 사촌형
저언회褚彦回(
저연褚淵)가 몸소
를
注+② 의 ≪남제서南齊書≫ 〈저연열전褚淵列傳〉에 말하였다. “저연은 자字가 언회彦回로, 하남河南 양적陽翟 사람이다. 조부 저수지褚秀之는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태상太常을 역임하였고, 부친 저담지褚湛之는 표기장군驃騎將軍을 역임하고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저언회는 젊을 때부터 세상의 명성을 지녔고, 다시 문제文帝(유의륭劉義隆)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저담지가 세상을 떠나자, 저언회는 재물을 양보하여 아우에게 주고 〈자신은〉 단지 수천 권의 서적만 취하였다. 송나라에서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고, 이후에 제齊나라 조정의 좌명佐命(개국공신)이 되고 관직이 시중侍中과 사도司徒에 이르렀다.” 섬기는 것을 비난하였다. 저언회의 아들
저분褚賁(저비)가
注+③ ≪남사南史≫ 〈저분열전褚賁列傳〉에 말하였다. “저연褚淵의 맏아들 저비는 자字가 울선蔚先으로, 젊을 때부터 바르고 곧았다. 부친이 원찬袁粲 등을 배반하고 〈남조南朝 제齊〉 고제高帝(소도성蕭道成)를 따르자, 저비는 옳지 않다는 견해를 강하게 주장하였고, 죽을 때까지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은거할 뜻을 품었다. 시중을 역임하였다.” 저언선을 찾아가 문후를 여쭙자, 저언선이 물었다.
“사공司空(저언회)은 오늘 어디에 계시느냐?”
“옥새와 인끈을 받든 채
제齊나라
에 있습니다.”
“너의 집의 사공(저언회)이
도 모르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느냐.”
저언회는 장난을 좋아하여 칙명으로
를 〈저언선에게〉 지급하니, 저언선이 버럭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이것을 받는 것은 가문을 욕되게 하는 일이니, 어찌 다른 사람들이 보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불을 찾아 그것을 태우려고 하니, 마부가 수레를 내몰아서 겨우 〈재앙을〉 면하였다.
注+④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제기齊紀 1〉에 말하였다. “〈남조南朝〉 송宋나라 군주가 제齊나라에 제위를 선양한다는 조서를 내렸는데, 〈송宋 순제順帝가〉 하려 하지 않으니 왕경칙王敬則이 군대를 거느리고 〈순제를〉 맞이하기 위해 들어오자, 송나라 군주(순제)가 나와 동저東邸로 갔다. 진晉나라 때에 이미 낭중郞中을 지냈던 광록대부光祿大夫 왕곤王琨은 이때에 이르러 〈순제가 탄〉 수레를 부여잡고 대성통곡하면서 ‘사람들은 장수를 기쁨으로 삼지만, 늙은 저는 장수를 근심으로 삼습니다. 이미 이제 다시 이런 일을 자주 보게 됩니다.’ 하고는 오열하면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니, 모든 관료들이 비처럼 눈물을 흘렸다. 사공司空 저연褚淵 등이 옥새와 인끈을 받들고 제왕齊王(소도성蕭道成)의 궁궐에 가서 제위에 오르라고 권하였다. 제왕은 황제의 지위에 오른 뒤에 저연을 사도司徒로 삼았는데, 〈사도 취임을 축하하는〉 자리에 축하객들이 가득하였다. 저소褚炤가 탄식하면서 ‘언회는 젊을 때부터 명성과 덕행을 확립했으니, 어찌 미쳐 날뛰어 이런 지경에 이를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가문이 불행하여 다시 오늘날의 임명이 있게 되었구나. 만일 죽었다면 응당 한 명의 명사名士가 되지 않았겠는가. 명예와 덕행이 창성하지 않으니, 다시 의 수명을 두겠구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