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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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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彦升注+① 劉璠梁典曰 “任昉, 字彦升, 樂安人. 四歲誦古詩數十篇, 十六擧秀才第一. 辭章之美, 冠絶當時. 好交結, 獎拔士友, 得其延譽, 率多升擢. 衣冠․貴遊, 爭與交親, 坐上賓客, 恒有數十. 時人慕之, 號曰任君. 官至寧朔將軍․新安太守.” 在齊할새 意於梅蟲兒注+② 南史曰 “梅蟲兒, 吳興人. 齊東昏時, 爲制局監, 甚見愛幸, 東昏敗, 伏法.”하여 用爲中書郞이라 彦升 造謝尙書令王亮하니 亮曰
宜謝梅 那忽謝我오하니
彦升大慚注+③ 南史曰 “王亮, 字奉叔, 王瑩從父弟也. 父昌, 宋太宰中郞. 亮以名家, 宋末選尙公主. 齊竟陵王開西邸, 延才俊, 以爲士林, 使工圖其像, 亮亦與焉. 任中書監, 加散騎常侍.”하다
【頭註】
昌一作攸


11-36 【임언승任彦升(임방任昉)이注+의 ≪양전梁典≫에 말하였다. “임방任昉언승彦升으로, 낙안樂安 사람이다. 4세에 고시古詩 수십 편을 암송하였고, 16세에 가장 뛰어난 수재秀才로 천거되었으며, 문장의 아름다움은 당대에 가장 뛰어났다. 〈사람들과〉 친분 맺기를 좋아하고 사우士友들을 격려하여 발탁했는데, 그의 칭찬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발탁되어 승진되었다. 의관衣冠(관료)과 귀유貴遊(귀족)들이 다투어 그와 친분을 맺고자 하여 자리에 있는 빈객들이 항상 수십 명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여 임군任君이라고 불렀다. 관직은 영삭장군寧朔將軍신안태수新安太守에 이르렀다.” 남조南朝 나라에 있을 때, 매충아梅蟲兒에게 아부하여注+② ≪남사南史≫ 〈매충아렬전梅蟲兒列傳〉에 말하였다. “매충아는 오흥吳興 사람이다. 〈남조南朝 동혼후東昏侯(소보권蕭寶卷) 때에 제국감制局監이 되었는데, 크게 총애를 받다가 동혼후가 〈나라 건국자 소연蕭衍에게〉 패배한 뒤에 국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중서랑中書郞으로 기용되었다. 임언승이 상서령尙書令 왕량王亮에게 가서 감사하니, 왕양이 말하였다.
“그대는 마땅히 매충아에게 감사해야지, 어찌 뜬금없이 나에게 감사하는가?”
임언승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注+③ ≪남사南史≫ 〈왕량열전王亮列傳〉에 말하였다. “왕양은 봉숙奉叔으로, 왕영王瑩의 사촌아우이다. 부친 은 〈남조南朝나라 태재중랑太宰中郞을 역임하였다. 왕양은 명문가의 사람으로서 남조 송나라 말엽에 선발되어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나라 경릉왕竟陵王(소자량蕭子良)이 서저西邸를 설치하여 인재들을 초청하여 사림士林으로 삼고, 화공에게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왕량도 역시 그 안에 있었다. 중서감中書監에 임명되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다.”
임방任昉임방任昉
두주頭註
◦ ‘’은 어떤 본에는 ‘’로 되어있다.


역주
역주1 劉璠 : 510~568. 沛國 沛縣 사람으로, 字는 寶義이다. 6세조 劉祖敏이 永嘉의 난리를 피해 廣陵으로 이주하였다. 南朝 梁나라 著作郞․樹功將軍․雍州刺史․黃門侍郞 등을 역임했고, 北朝 北周에서 中外府記室․儀同三司․内史中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역주2 王昌 : ≪南史≫ 〈王亮列傳〉에 “부친 왕유는 자가 창달이다.[父攸 字昌達]” 하였다.
역주3 (紓)[紆] : 저본에는 ‘紓’로 되어 있으나, ≪何氏語林≫에 의거하여 ‘紆’로 바로잡았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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