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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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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山賓 初臨靑州 所部平陸縣歲儉하니 啓倉出米하여 以贍貧民하다 後刺史 山賓爲耗闕하고 有司 追責하여 籍其宅入官이어늘 山賓 黙不自理하고 更市地造宅注+① 梁書曰 “明山賓, 字孝若, 平原鬲人. 父僧紹, 隱居不仕. 山賓七歲能言玄理, 十三博通經傳. 居喪盡禮, 服闋, 州辟從事史, 起家奉朝請, 累遷中書侍郎.” 劉墦梁典曰 “梁昭明太子聞山賓築室不就, 令曰 ‘明祭酒, 出撫大藩, 擁旄推轂, 攝金拖紫, 而恒事屢空. 聞構宇未成, 今送薄助.’하다


2-13【명산빈明山賓청주靑州에 부임한 처음에, 관할하던 평륙현平陸縣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쌀을 내어 빈민들을 구휼하였다. 후임 자사刺史는 명산빈이 〈나라의 곡식을 써서〉 손실을 냈다고 생각하였고 담당 관원이 소급하여 책임을 물어 명산빈의 집을 몰수하여 관에 귀속시켰다. 그런데도 명산빈은 잠자코 스스로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다시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注+① ≪양서梁書≫ 〈명산빈전明山賓傳〉에 말하였다. “명산빈明山賓효약孝若이고 평원平原 사람이다. 부친 명승소明僧紹는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명산빈은 7세 때 현묘한 이치에 대한 말을 잘하였고, 13세 때 경전經傳에 널리 통달하였다. 을 당했을 때 예법을 다하여 상기喪期가 끝난 뒤 에서 종사사從事史로 초빙하였으며, 봉조청奉朝請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중서시랑中書侍郎에 이르렀다.”
에 말하였다. “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가 명산빈이 집을 짓다가 완공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고 지시하기를, ‘명좨주明祭酒는 지방으로 나가 큰 을 다스리면서 군대의 깃발을 잡고 황제의 격려를 받았으며 금인金印을 잡고 인끈을 늘어뜨리는 지위에 있었으나 늘 쌀독이 빌 정도로 가난하였다. 내가 들으니, 그가 집을 짓다가 아직 완공하지 못하였다 하니 지금 약간의 지원금을 보내라.’ 하였다.”


역주
역주1 劉墦의 ≪梁典≫ : ≪梁典≫은 梁(南朝)나라에 관한 기록으로, 北周의 관원인 劉墦이 30권으로 편찬하였다. 유번(510~568)은 字가 寶義이고 沛國 沛縣 사람이다.
역주2 : ≪何氏語林≫에는 이 글자 앞에 “州 관아의 잃어버린 문서들을 조사하다가[檢州曹失去簿書]” 7자가 더 있다. 그에 의하면 明山賓이 재임하던 때의 州의 공문서가 없어져서 그간의 기록이 사라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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