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보補】
명산빈明山賓이
청주靑州에 부임한 처음에, 관할하던
평륙현平陸縣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쌀을 내어 빈민들을 구휼하였다. 후임
자사刺史는 명산빈이 〈나라의 곡식을 써서〉 손실을 냈다고 생각하였고 담당 관원이 소급하여 책임을 물어 명산빈의 집을 몰수하여 관에 귀속시켰다. 그런데도 명산빈은 잠자코 스스로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다시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注+① ≪양서梁書≫ 〈명산빈전明山賓傳〉에 말하였다. “명산빈明山賓은 자字가 효약孝若이고 평원平原 격鬲 사람이다. 부친 명승소明僧紹는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명산빈은 7세 때 현묘한 이치에 대한 말을 잘하였고, 13세 때 경전經傳에 널리 통달하였다. 상喪을 당했을 때 예법을 다하여 상기喪期가 끝난 뒤 주州에서 종사사從事史로 초빙하였으며, 봉조청奉朝請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중서시랑中書侍郎에 이르렀다.”
에 말하였다.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가 명산빈이 집을 짓다가 완공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고 지시하기를, ‘명좨주明祭酒는 지방으로 나가 큰 번藩을 다스리면서 군대의 깃발을 잡고 황제의 격려를 받았으며 금인金印을 잡고 인끈을 늘어뜨리는 지위에 있었으나 늘 쌀독이 빌 정도로 가난하였다. 내가 들으니, 그가 집을 짓다가 아직 완공하지 못하였다 하니 지금 약간의 지원금을 보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