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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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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侯仲權 入蜀注+① 魏志曰 “夏侯覇, 字仲權, 夏侯淵子. 素爲曹爽所厚, 爽誅, 自疑, 亡入蜀.”일새 姜伯約 問之曰
司馬公 旣得彼政한대 還復有征伐之志不아하니
仲權曰
此人 方營立家門하여 未遑外事 有鍾士季者한대 其人雖少 終爲吳蜀之憂注+② 蜀志曰 “姜維, 字伯約, 天水冀人. 少與母居, 好鄭氏學. 諸葛亮辟爲奉義將軍. 與長史張裔參軍蔣琬書曰 ‘姜伯約忠勤時事, 思慮精密, 考其所有, 永南季常諸人不如也.’ 傅子曰 ‘維好立功名, 陰養死士, 不修布衣之業.’ 郤正論曰 ‘姜伯約據上將之重, 處群臣之右, 宅舍敝薄, 資財無餘, 側室無妾媵之䙝, 後庭無聲樂之娯, 衣服取供, 輿馬取備, 飮食節制, 不奢不約, 官給費用, 隨手消盡, 察其所以然者, 非激貪厲濁, 抑情自割也, 直謂如是爲足, 不在多求. 凡人之談, 常譽成毁敗, 扶高抑下, 咸以姜維投厝無所, 身死宗滅, 以是貶削, 不復料擿, 異乎春秋褒貶之義矣. 如姜維之樂學不倦淸素節約, 自一時之儀表也.’”리니이다라하다


14-7 【하후중권夏侯仲權(하후패夏侯覇)이 나라에 〈망명하여〉 들어갔을 때注+①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하후연전夏侯淵傳〉에 말하였다. “하후패夏侯覇중권仲權이고, 하후연夏侯淵의 아들이다. 평소에 조상曹爽에게 신임을 받았는데, 조상이 살해되자 스스로 〈화가 미칠까〉 의심하여 나라로 망명해 들어갔다.” 강백약姜伯約(강유姜維)이 그에게 물었다.
사마공司馬公(사마의司馬懿)은 이미 정권을 잡았는데 여전히 다시 정벌할 뜻이 있습니까?”
하후중권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지금 가문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어 대외적인 일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종사계鍾士季(종회鍾會)라는 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젊긴 하나 결국에 오나라와 촉나라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注+②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강유전姜維傳〉에 말하였다. “강유姜維백약伯約이고, 천수군天水郡 기현冀縣 사람이다. 젊어서 모친과 함께 살았는데 을 좋아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이 초빙하여 봉의장군奉義將軍으로 삼았다. 〈제갈량이〉 장사長史 장예張裔, 참군參軍 장완蔣琬에게 보낸 편지에, ‘강백약姜伯約(강유)은 시사時事에 충실하고 근면하며 생각이 정밀하니, 그가 지닌 능력을 따져보면 이나 등 여러 사람보다 낫다.’ 하였다. ≪부자傅子≫에 말하였다. ‘강유는 공명功名을 세우기를 좋아하여 은밀하게 죽음을 무릅쓰는 용맹한 군사를 양성하였고, 평민으로서의 생업을 꾸리지 않았다.’ 이 논하였다. ‘강백약姜伯約상장上將이라는 중한 자리를 차지하여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처하였는데도 거처하는 집이 초라하고 재산에 여유가 없으며 측실側室에 총애하는 첩이나 시비侍婢[잉인媵人]가 없고 후정後庭에서는 즐기는 음악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의복은 공급되는 것만 입고 수레와 말은 준비된 것만 탔다. 음식은 절제하고 사치하지도 절약하지도 않았으며, 에서 주는 비용은 손닿는 대로 다 써버렸다.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살펴보니, 탐욕을 억제하고 부패에 엄격하며 욕심을 억누르고 끊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많이 구하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개 사람들은 말할 때 늘 성공한 자를 기리고 실패한 자를 폄하하며 〈지위가〉 높은 사람을 칭찬하고 낮은 사람을 억누르게 마련이라서, 모두들 강유가 자신의 몸을 장사 지낼 곳도 없이 자신을 죽게하고 친족도 망하게 하였다고 여겨 이것으로 폄하하고 더 이상 재고하지 않는데, 이는 ≪춘추春秋≫의 포폄하는 의리와 다르다. 이를테면 강유가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고 청빈하고 절약하였던 점은 그 시대의 표상이었다.’”
강유姜維강유姜維


역주
역주1 鄭氏의 학문 : 东汉 末에 郑玄이 창시한 经学学派를 말한다. ‘郑学’, ‘通学’, ‘综合学派’ 등으로도 불린다. 정현의 학문은 古文经学을 위주로 하면서 今文经学의 장점을 채택하여 하나로 융합하였다고 평가된다. 郑玄은 东汉의 儒学者로 중국 역사상 저명한 经学家이며, 그를 따르는 제자가 수 천 명에 달하여 魏晉에서 隋唐에 이르는 시기에 광대한 영향을 미쳤다.
역주2 永南(李邵) : ?~225. 字는 永南이고, 廣漢郡 郪縣(지금의 四川省 三台縣) 사람이다. 형인 李朝ㆍ李邈과 더불어 재주와 명망이 높아 당시 사람들이 ‘李氏三龍’이라 불렀다. 劉備가 蜀나라를 세운 뒤 諸葛亮이 그를 초빙하여 西曹掾으로 삼았다.
역주3 季常(馬良) : 187~222. 字는 季常이고 荊州 襄陽郡 宜城県(지금의 湖北省 宜城市) 사람이다. 눈썹에 흰 털이 섞여 있어 ‘白眉’라고도 불렸는데, 이후 뛰어난 인물을 일컫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蜀漢의 뛰어난 家臣으로 평가 받는다.
역주4 郤正 : ?~278. 본명은 郤纂이고, 字는 令先이다. 好学하여 광범위하게 독서하였고 문장을 잘 지었다. 蜀汉의 秘书吏ㆍ秘书令을 지냈으며, 263년에 曹魏가 촉한을 정벌하였을 때 后主 刘禅의 投降書를 그가 지었다. 후에 晉 武帝(司马炎)의 인정을 받아 巴西太守에 임명되었다.(≪三國志≫ 〈蜀书 郤正传〉)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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