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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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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太丘 子紀 紀子羣 竝有髙名注+① 後漢書曰 “寔少著淸德, 連辭徵命, 閉門懸車, 棲遲養老. 中平四年卒于家.” 傅子曰 “寔亡, 天下致弔, 會葬者三萬人, 制衰麻者百數.” 後漢書曰 “紀亦以至德稱, 兄弟孝養, 閨門雍和.” 魏志曰 “魯國孔融, 才高倨傲, 年在羣․紀之間. 先與紀友, 後與羣交, 更爲紀拜, 由是顯名.”이러니 天下以爲 公 慚卿하고 慚長注+② 博物記曰 “太丘長陳寔․寔子鴻臚紀․紀子司空羣․羣子泰, 四世于漢魏二朝, 竝有重名, 而其德漸減. 時人爲其語曰 ‘公慚卿, 卿慚長.’”이라하다


17-8 진태구陳太丘(진식陳寔), 〈그의 아들〉 진기陳紀, 진기의 아들 진군陳羣은 모두 명성이 높았는데,注+① ≪후한서後漢書≫에 말했다. “진식陳寔은 젊어서부터 맑은 덕을 드러냈고 조정에서 부르는 명을 연달아 사양하였으며 문을 닫아걸고 수레를 걸어두고서 한가로이 쉬며 노년을 보냈다. 중평中平 4년(187)에 집에서 죽었다.”
에 말했다. “진식이 죽자 천하 사람들이 조문했는데, 장례식에 모인 사람이 3만 명이었고 상복을 지어 입은 사람이 백 명이 넘었다.”
후한서後漢書≫에 말했다. “진기陳紀도 지극한 덕으로 칭송을 받았다. 형제 〈모두〉 효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였고 가정이 화목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에 말했다. “노국魯國공융孔融은 재주가 높고 거만했는데 나이는 진군陳羣진기陳紀 중간이었다. 먼저 진기와 벗했다가 나중에 진군과 교제하게 되자 〈진군의 부친인〉 진기에게 절을 하는 것으로 바꾸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천하 사람들은 ‘(진군)은 (진기)에게 부끄럽고 경은 (진식)에게 부끄럽다.’라고 하였다.注+에 말했다. “태구太丘 진식陳寔, 진식의 아들 진기陳紀, 진기의 아들 사공司空진군陳羣, 진군의 아들 진태陳泰는 4대에 걸쳐 두 나라에서 모두 명망이 있었으나 그 덕은 점차 줄어들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 때문에 ‘에게 부끄럽고, 에게 부끄럽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補】 : 저본에는 ‘補’가 없으나, 이 일화는 ≪世說新語≫에는 실려 있지 않고 ≪何氏語林≫에 실려 있는 것에 의거하여 ‘補’자를 보충하였다.
역주2 ≪傅子≫ : 晉나라의 傅玄(217~278)이 편찬하였고, 주로 儒家사상을 선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儒家類에 속한다. ≪隋書≫ 〈經籍志〉와 ≪新唐書≫ 〈藝文志〉에는 140권이라 하였으나, 唐宋시기에 점차 散失되어 ≪宋史≫ 〈藝文志〉에는 5권이라 하였다. 淸나라 때 집록한 輯本 여러 종이 있다.
역주3 ≪博物記≫ : ≪博物志≫라고도 한다. ≪隋書≫․≪舊唐書≫․≪新唐書≫에 따르면 晉나라의 張華가 지었으며 10권이다. 현재는 일부만 전한다.
역주4 縣長 : 현의 장관이다. 인구가 萬戶 이상이면 縣令으로, 만호 이하면 縣長이라고 칭했다.
역주5 鴻臚 : 官署의 이름으로 최고 책임자는 卿 또는 正卿으로 불렸다. 빈객을 접대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는데, 周나라 때는 大行人, 秦과 漢나라 초기에는 典客으로 불렸으며, 景帝 6년에 大行令, 武帝 太初 원년에 大鴻臚로 명칭이 바뀌었다. 東漢 이후에는 주로 조정의 제례의식을 관장하였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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