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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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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人 樂曠하고 多奇情이라 故其言語文章 別是一色하니 世說可覩已 說爲晉作하고 及于漢魏者 其餘耳 雖典雅 不如左氏國語하고 馳騖 不如諸國策이로대 而清微簡遠하고 居然玄勝이라
槩擧如衛虎度江 安石教兒하면 機鋒似沉하고 滑稽又冷하여 類入人夢思하고 有味有情하여 嚥之愈多하고 嚼之不見이라
盖于時諸公 剸以一言半句 爲終身之目하니 未若後來人士 俛焉下筆이라야 始定名價
臨川 善述하고 更自高簡有法이나 反正之評 戾實之載 豈不或有리오마는 亦當頌之하여 使與諸書竝行也어늘 晚後淺俗하니 解人 正不可得
嗚呼 人言江左清談遺事라하나 槃槃一老 出其游戲餘力하여 尙足辦此百萬之敵하니 玆非談之宗歟 抑吾取其文하고 而非論其人也
丙戌長夏 病思無聊하여 因手校家本하여 精剗其長註하고 間疏其滯義하여 明年 以授梓하니 迺五月既望 梓成하다 耘廬劉應登 自書其端하여 是爲序하노라
嘗攷載記所述하니 晉人話言 簡約玄澹하고 爾雅有韻이라 世言江左善清談이라한대 今閱新語하니 信乎其言之也 臨川 撰爲此書한대 採掇綜敍 明暢不繁하고 孝標所注 能收錄諸家小史하여 分釋其義하니 詁訓之賞 見於高似孫緯略이라
余家藏宋本하니 放翁校刊本이라 謝湖 躬耕之暇 手披心寄라가 自謂可觀하여 爰付梓人하여 傳之同好
因歎昔人 論司馬氏之祚 亡於清談하니 斯言也無乃過甚矣乎 竹林之儔 希慕沂樂하고 蘭亭之集 咏歌堯風하며 陶荊州之勤敏이요 謝東山之恬鎮이라
解莊易하여는 則輔嗣 平叔 擅其宗하고 析梵言하여는 則道林 法深 領其乘이라 或詞冷而趣遠하고 或事瑣而意奧하여 風旨各殊하고 人有興託이라
王茂弘 祖士雅之流 才通氣峻하고 心翼王室 又斑斑載諸冊簡하니 是可非之者哉 不云乎 濟濟多士 文王以寧이로다 余以瑯琊王之渡江 諸賢弘贊之力爲多하니 非强說也
夫諸晤言 率遇藻裁하여 遂爲終身品目하니 故類以標格相高하고 玄虛成習하여 一時雅尙하니 有東京廚俊之流風焉이라 然曠達拓落하여 濫觴莫拯하여 取譏世教하니 撫卷惜之 此於諸賢 不無遺憾焉耳矣하노라 刻成 序之하노라
嘉靖乙未歲立秋日也 吳郡袁褧하노라
【頭註】
李云 “何必如此.”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 옛 서문 2수
1.
나라 사람들은 광달曠達함을 좋아하고 기이한 정취가 많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언어와 문장은 색다른 특색이 있었으니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세설신어≫는 나라 위주로 편찬되었고 나라와 나라에 대한 것은 부수적일 뿐이다. 비록 전아典雅함은 좌씨左氏의 ≪국어國語≫만 못하고 종횡무진함은 만 못하나, 깨끗하면서 은미하고 간결하면서 심원하며, 확연히 세속을 초월하였다.
을 예로 들어보면 기민하면서도 침착한 듯하고 해학적이면서도 냉정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꿈속에서도 생각하게 하고, 맛이 있고 정취가 있어 삼키면 삼킬수록 더욱 〈그 맛이〉 풍부해지고 아무리 씹어도 〈그 정취를〉 다 알지 못하게 한다.
대체로 당시의 인사들은 오로지 한마디 말이나 짧은 구절로 일생을 품평했으니, 후대의 인사들이 부지런히 붓을 놀려 〈많이 써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값이 정해지는 것과는 달랐다.
임천臨川(유의경)은 저술을 잘하였고 또 스스로 고상하고 소탈하며 법도가 있었으나, 〈이 책에〉 어찌 정도正道에 어긋난 비평과 실제에 맞지 않는 기술이 더러 포함되지 않았겠는가. 그래도 칭송하여 여타의 다른 서책과 나란히 행해지게 해야 마땅하나, 후대의 습속이 천박해져서 〈이 책의 진가를〉 아는 사람을 딱히 찾을 수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아, 사람들은 강좌江左(육조六朝)에서 청담淸談하느라 정사를 등한시하였다고 말하나, 이것이 담론의 으뜸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그 문장을 취할 뿐이고 그 사람됨을 논평하지는 않겠다.
병술년丙戌年(1226) 6월에 병으로 생각이 무료해져 직접 교감한 가본家本을 토대로 긴 주석을 정밀하게 깎아내고 간간이 풀리지 않던 의미를 통하게 하여 이듬해에 재인梓人에게 주니 마침내 5월 16일에 간행하게 되었다. 운려耘廬 이 스스로 첫머리에 써서 서문을 삼노라.
2.
내가 전에 에 기술된 것을 보니 나라 사람의 일화와 대화는 간결하고 담박하며 아정雅正하고 운치韻致가 있었다. 세간에서 강좌江左 사람들은 청담淸談을 잘하였다고 말하는데 지금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열람해보니 참으로 그 말과 같다. 임천臨川(유의경劉義慶)이 이 책을 편찬하였는데 일화를 선별하고 종합한 것이 분명하고 번잡하지 않으며, 유효표劉孝標제가諸家소사小史들을 수록하여 그 뜻을 분석하였으니, 그 훈고에 대한 칭찬이 의 ≪위략緯略≫에 실려 있다.
우리 집안에 보관된 송본宋本이 교감하여 간행한 본인데, 나 사호謝湖(원경袁褧)가 농사짓는 틈틈이 직접 열람하면서 마음을 붙이다가 스스로 볼만하다고 생각하여 재인梓人에게 맡겨 함께 즐길 거리로 전하게 되었다.
나는 옛사람들이 사마씨司馬氏(나라)의 국통國統청담淸談으로 인해 망했다고 논한 것에 대해 탄식하니, 이 말은 지나치게 심한 말이 아닌가. 을 사모하였고 에서는 임금의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노래하였으며, 는 근면하고 기민하며 은 조용하며 진중하였다.
장자莊子≫와 ≪주역周易≫을 해석하는 데는 종주宗主를 차지하였고, 부처의 말을 분석하는 데는 불단佛壇을 이끌었다. 혹은 말은 냉정하나 취지는 심원하며 혹은 일은 자잘하나 의미는 심오하여 풍지風旨가 각기 다르고 사람마다 흥취興趣가 있었다.
의 무리는 재기才氣가 빼어났고, 그들이 마음을 다해 왕실을 도왔던 자취가 여러 서책에 여기저기 실려 있으니 어찌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많고 많은 선비들이여. 문왕文王이 이들 때문에 평안하도다.” 나는 여러 현사賢士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니, 이는 억지가 아니다.
담화談話는 대부분 화려한 수식이 더해져 마침내 평생의 품평品評이 되었으므로 품평으로 서로를 높여주었고, 현원玄遠하고 허무虛無함을 추구하는 풍조가 습속을 이루어 당대에 극히 숭상을 받았으니 이 있었다. 그러나 활달豁達하고 방탕放蕩함이 도를 넘는 것을 막지 못하여 세교世敎(유교)의 비난을 받았으니 이 책을 어루만지며 〈그 점을〉 애석하게 여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현사賢士에게 유감이 없을 수 없다. 판각이 완성되어 서문을 쓰노라.
가정嘉靖 을미년乙未年(1535) 입추일立秋日오군吳郡이 짓다.
두주頭註
이지李贄:〈사마씨의 국통이 청담으로 인해 망했다는 말은〉 어찌 반드시 이와 같겠는가.


역주
역주1 世說新語補舊序二首 : 이 두 서문은 ≪世說新語補≫의 서문이 아니라 ≪世說新語≫의 서문이다.
역주2 諸國策 : 여러[諸] 나라[國]의 책략[策]을 모은 ≪戰國策≫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전국책≫은 중국 고대 전국시대 여러 국가의 유세객들의 언행이나 각 국가의 정치 책략, 변론술 등을 기록한 33권 12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로, 원저자는 미상이고 한나라의 劉向이 編訂하였다.
역주3 衛虎(衛玠)가……말 : ≪世說新語≫ 〈言語〉에 나오는 일화로, 衛玠가 난리를 피해 양자강을 건너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망망한 물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만감이 교차한다…….”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역주4 安石(謝安)이……일 : 안석은 東晉의 정승인 謝安의 字이다. ≪世說新語≫ 〈德行〉에 나오는 일화로, 사안의 부인이 남편에게 “왜 당신은 아이들을 통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겁니까?” 하자, 사안이 “나는 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소.”라고 대답한 일을 말한다.(≪世說新語≫ 〈德行〉)
역주5 걸출한……충분하였으니 : 여기서 걸출한 노인은 謝安을 가리킨다. ≪晉書≫ 〈謝安傳〉과 ≪世說新語≫ 〈雅量〉편에 의하면, 前秦의 苻堅이 백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침공해 왔을 때 사안은 별장에서 형의 아들 謝玄과 바둑을 두었고 들판을 노닐다가 밤에 돌아와 부견의 군대와 싸울 將帥를 임명하고 각기 그 직임을 정해주었는데 결국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였다고 한다.
역주6 劉應登 : ?∼? 자는 堯咨, 호는 耘廬이며 廬陵 安福(지금의 江西 안복) 사람이다. 景定 3년(1262)에 進士가 되었으나 당시는 송나라 말의 혼란한 시기였으므로 벼슬하지 않았다. 經史에 박식하여 당대 巨儒들의 존경을 받았고 당대의 이름난 학자인 劉辰翁․趙文 등과 교유하였다. 가장 이른 시기에 ≪世說新語≫의 批注本을 간행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世說音釋≫)
역주7 : ≪世說箋本≫과 日本 安永 8년본 ≪李卓吾批點世說新語補≫(이하 ‘安永本’으로 약칭)에는 이 글자가 ‘索’으로 되어 있다.
역주8 載記 : 舊史에서 正統이 아닌 자를 위해 지은 傳記를 本紀나 列傳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後漢書≫ 〈班固傳 上〉에 班固가 “列傳과 載記 28편을 지어 황제에게 아뢰었다.”라 하여 한나라 때에 열전과 재기를 구별하였음을 알 수 있고, 淸나라 趙翼은 자신의 저술인 ≪廿二史劄記≫ 卷1에서 ≪晉書≫는 僭僞한 나라들의 군주에 대한 일을 世家라고 하지 않고 재기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실제로 ≪진서≫에는 〈慕容皝載記〉․〈劉聰載記〉 등 재기가 붙은 명칭이 많다.
역주9 高似孫 : 1158∼1231. 字는 續古, 號는 蔬寮이며, 明州 鄞縣(지금의 浙江 寧波) 사람이다. 方志學家이며 目錄學家이다. 동시대의 陳振孫은 ≪疎寮集≫의 解題에서 高似孫에 대해 惡評을 하였으나, 실제로는 鄭樵 이후의 目録學에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평가받았다. 저술에 ≪子略≫ 4권, ≪史略≫ 6권, ≪緯略≫ 1권, ≪騷略≫ 3권, ≪蟹略≫ 4권, ≪剡錄≫ 10권 등 다수가 있다.(≪宋史≫ 〈藝文志〉)
역주10 放翁 : 陸游(1125∼1210)를 말한다. 字는 務觀, 號는 放翁이며, 越州 山陰(지금의 紹興) 사람이다. 南宋의 文學家, 史學家, 愛國詩人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北宋이 멸망하던 시기였는데, 그는 金나라에 抗戰할 것을 주장하여 主和派에게 배척을 받았다. 황제의 명으로 孝宗․光宗의 ≪實錄≫과 ≪三朝史≫의 편수를 맡았으며, 詩詞에 뛰어났고 史才 또한 있어 그의 ≪南唐書≫는 핵심을 살피고 원칙이 있으며[簡核有法] 史評의 색채가 선명하여 사료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劍南集≫이 있다.(≪世說音釋≫)
역주11 竹林의 무리 : 竹林七賢을 가리키는 말이다. 魏나라 正始 연간에 阮籍ㆍ嵇康ㆍ山濤ㆍ向秀(상수)ㆍ阮咸ㆍ王戎ㆍ劉伶 등 7인이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모두 禮俗에 얽매이지 않고 老莊의 학설을 말하기 좋아하며 술을 즐겨 마시면서 항상 竹林 사이에 모여 놀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죽림칠현이라고 일컬었다.
역주12 沂水의 즐거움 : ≪論語≫ 〈先進〉에서 孔子가 제자들에게 “너희들을 알아준다면 어찌하겠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어른 대여섯 명과 어린이 예닐곱 명과 함께 沂水에서 목욕하고 舞雩에서 바람 쐬고서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는 자연과 산수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말한다.
역주13 蘭亭의 모임 : 난정은 會稽의 山陰에 있던 정자 이름이다. 晉 穆帝 永和 9년(353) 3월 삼짇날, 즉 上巳日에 王羲之․謝安․孫綽 등 당대의 명사 40여 인이 이곳에 모여서 禊事를 행하고, 이어 曲水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면서 놀았다. 이때의 모습을 왕희지가 〈蘭亭記〉로 남겼다.
역주14 陶荊州(陶侃) : 259~334. 西晉․東晉의 名將이다. 본명은 陶侃이고 字는 士行이며, 鄱陽郡 鄡陽縣 사람이다. 부친 陶丹을 일찍 여의고, 모친 湛氏의 길쌈에 의지하여 생활하며 성장하였다.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는데 張昌의 叛亂을 평정한 후 연이어 戰功을 쌓아 太尉에 이르렀고, 병권을 장악하여 8州의 군사를 지휘하는 都督이 되었으며 江州刺史와 荊州刺史를 지냈다. 그는 동진의 건립과 유지에 군사상 큰 공헌을 하였을 뿐 아니라, 형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晉書≫ 〈陶侃傳〉)
역주15 謝東山(謝安) : 320~385. 본명은 謝安이고 字는 安石이며 河南省 陳郡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는 출사하지 않고 會稽의 東山에 은거하면서 명필로 유명한 王羲之 등과 깊은 교분을 나누며 淸談만 탐구했으나, 40세에 벼슬길에 나와 당시 동진의 최고 권력자 桓溫의 司馬가 되었다. 대사마 桓温이 황위를 찬탈하려 하자 王坦之 등과 함께 이를 저지하고 동진의 실권을 잡았다. 383년 화북을 통일한 前秦이 前燕을 멸망시키고 백만 대군으로 남하하자 征討大都督이 되어 동생 謝石, 조카 謝玄 등과 함께 前秦에 맞서 싸워 승리했다. 이 여세를 몰아 사안은 계속 북벌을 주창했지만 그의 성장을 경계한 황족 司馬道子의 방해로 좌절되었고, 중앙 정계에서 퇴출되어 廣陵歩丘로 좌천되었다가 66세에 病死하였다.(≪晉書≫ 〈謝安傳〉)
역주16 輔嗣(王弼) : 226~249. 보사는 王弼의 字이다. 왕필은 兗州 山陽郡 사람으로, 祖父는 王凱이고, 父는 王業이며, 兄은 王宏이다. 魏(三国)나라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傅嘏・裴徽・何晏에게 높이 평가되었고, 鍾會와 병칭되었다. 그는 요절하였으나 그가 남긴 학술적 영향은 지대하여, 老莊思想을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완비된 玄學哲學을 세웠다. 저술로는 ≪老子注≫, ≪老子指略≫, ≪周易注≫, ≪周易略例≫, ≪論語釋疑≫, ≪周易大衍論≫ 3권, ≪周易究微論≫ 1권, ≪易辯≫ 1권 등이 있다. 24세 때 딸 하나를 남기고 病死하였다.(≪三國志≫ 〈魏志 鍾會傳〉)
역주17 平叔(何晏) : ?~249. 평숙은 何晏의 字이다. 하안은 南陽(지금의 河南省) 宛 사람으로, 魏(三国)나라 때의 大臣이자 玄學家이다. 부친이 일찍 죽어 모친 尹氏가 曹操의 妾이 되었기 때문에 7세 때부터 魏나라 궁궐에서 살았고, 조조의 딸인 金鄕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소년이었을 때부터 재주와 용모로 명망이 높았고 老莊을 좋아하였다. 대장군 曹爽이 집정할 때 侍中, 吏部尚書 등 고위직에 기용되었으므로 나중에 조상과 司馬懿의 권력 다툼이 생겼을 때 사마의에게 피살되고 三族이 멸해졌다. 魏晉 시기 淸談 貴族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論語集解≫, ≪無爲論≫ 등의 저작이 있다.(≪三國志≫ 〈魏志 諸夏侯曹傳〉)
역주18 道林(支遁) : 314~366. 본명이 支遁이고 道林은 字이다. 陳留(지금의 河南省 開封) 사람으로, 東晉의 불교학자이자 高僧이다. 25세 때 出家하였고, 후에 建康에서 講經하면서 謝安․王羲之 등과 교유하였으며 玄理에 대해 담론하기를 좋아하였다. ≪莊子≫ 〈逍遥游〉에 注를 내어 독창적인 견해를 보였고, ≪即色游玄論≫을 저술하여 “即色本空”사상을 주장하여 般若學 6大家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밖에 ≪釋即色本無義≫ 등의 저술이 있다.(≪高僧傳≫ 권4)
역주19 法深(竺道潛) : 286~374. 竺道潛 또는 竺潛이 본명이고 字가 法深이다. 東晉의 高僧으로 瑯琊(지금의 山東省) 사람이다. 18세 때 出家하여 劉元眞에게 배웠고, 24세 때 ≪法華經≫․≪放光般若經≫ 등을 설법하였다. 永嘉 初年에 혼란을 피해 江南으로 건너갔고, 晉 元帝, 晉 明帝, 簡文帝의 존경을 받았다. 후에 剡山에 은거하였고, 支遁과 교유하였다. 문하의 僧侣에 竺法友․竺法義․康法識․竺法濟 등이 있다.(≪高僧傳≫ 권4)
역주20 王茂弘(王導) : 276~339. 본명이 王導이고 字는 茂弘이며, 瑯琊(지금의 山東省) 臨沂 사람이다. 東晉 초기의 權臣으로, 晉 元帝․明帝․成帝 3대를 섬겼으며 東晉政權의 기초를 세웠다. 晉元帝를 따라 강남으로 내려와 남방의 사족들을 적극 연결시켜 晉室을 지지하게 하고, 북방에서 내려온 사족들을 단결시켜 東晉을 건립하는 데 힘썼다. 후에 堂兄인 王敦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晉室을 지지하여 난이 평정된 뒤에도 계속 높은 지위를 누렸다.(≪晉書≫ 〈王導傳〉)
역주21 祖士雅(祖逖) : 266~321. 본명은 祖逖이고 字는 士稚이며 范陽郡(지금의 河北省) 逎縣 사람이다. 東晉 초기에 북벌을 추진한 장군이다. 그의 노력으로 黃河 이남의 땅을 한때 수복하였으나, 조정의 내란으로 인해 그의 사후에는 북벌이 실패로 돌아갔다. 평소 백성들의 추앙을 받아, 그가 죽자 豫州의 백성들이 마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고 한다.(≪晉書≫ 〈祖逖傳〉)
역주22 瑯琊王(司馬睿)이……이후에 : 前趙의 劉曜가 침략하여 西晉이 멸망된 후 당시 서진의 종실의 일원인 瑯琊王 司馬睿가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 내려가 建康에서 東晉 元帝에 즉위하여 자리를 잡게 될 즈음을 말한다.
역주23 東京(後漢)의……유풍 : 八廚와 八俊을 가리킨다. 팔주는 東漢 때의 걸출한 인물들인 度尙․張邈․王考․劉儒․胡毋班․秦周․蕃嚮․王章을 가리킨다.(≪後漢書≫ 〈黨錮傳〉) 팔준 역시 동한 때의 재주와 명망이 있던 인물들을 가리키는데, ≪후한서≫ 〈周擧傳〉에는 周擧․杜喬․周栩․馮羨․欒巴․張綱․郭遵․劉班 8인을 거론하였고. ≪후한서≫ 〈당고전〉에는 李膺․荀翌․杜密․王暢․劉祐․魏朗․趙典 등 8인을 지목하였다.
역주24 袁褧 : 1495∼1573. 明의 藏書家․刻書家이다. 字는 尙之이고, 號는 謝湖이며, 别號는 中皋子, 谢湖居士이다. 吳郡(지금의 江蘇 蘇州) 사람이다. 書法은 米芾․文徵明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그의 집에는 백 년 동안의 藏書가 있었으며, 宋․元․明나라 사람들의 저술인 ≪世說新語≫․≪楚辞集注≫․≪大戴禮記注≫․≪夏小正戴氏傳≫․≪奉天刑賞錄≫ 등 수십 종의 책을 간행하였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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