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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3)

세설신어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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仲長子光注+① 王績仲長先生傳曰 “先生, 諱子光, 字不曜, 自云洛陽人. 往來河東, 傭力自給, 無室廬, 絶妻子. 開皇末, 始庵河渚間, 以息身焉, 賣藥爲業, 人莫之知也. 汾陰生遊河渚, 一睹而伏曰 ‘東方朔․管輅不如也.’ 由是顯重. 守令至者, 皆親謁先生, 辭以瘖疾, 未嘗交語. 著〈獨遊頌〉․〈河渚先生傳〉, 以自喩. 識者知其懸解人也, 有請道者, 劒書‘老易’二字示之. 彈琴餌藥, 以終其世.”注+王通中說曰 “薛收問仲長子光, 子曰 ‘天人也.’ 收曰 ‘何謂天人?’ 子曰 ‘眇然小乎, 所以屬於人, 曠哉大乎, 獨能成其天.’” 隱居北渚한대 王無功 愛其貞素하여 徙與相近注+② 唐書曰 “王績, 字無功, 絳州龍門人. 大業中, 授揚州六合縣丞, 棄官, 結廬河渚, 以琴酒自樂. 嘗躬耕東皐, 時人號東皐子. 或過酒肆, 動經數日, 往往題壁作時, 多爲好事者諷詠. 臨終, 遺命薄葬, 預自爲墓誌.”하다


26-14 【중장자광仲長子光注+왕적王績의 〈중장선생전仲長先生傳〉에 말하였다. “선생은 자광子光이고, 부요不曜로, 스스로 낙양洛陽 사람이라고 하였다. 하동河東 지역을 왕래하면서 품팔이로 자급자족했는데, 집도 없고 처자식과도 인연을 끊었다. 〈 문제文帝개황開皇 연간(581~600) 말기에 비로소 하저河渚 사이에 오두막을 지어 거처하면서 약을 팔아서 먹고살았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분음汾陰의 학생(왕적)이 하저를 유람하다가 〈그를〉 보자마자 단번에 엎드려 ‘이나 도 〈선생님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이를 계기로 〈명성이〉 높아졌다. 수령으로 부임한 자들이 모두 직접 선생을 알현했으나, 이 있다고 사양하고 한 번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독유송獨遊頌〉과 〈하저선생전河渚先生傳〉을 지어 스스로를 비유하였다. 식자들은 그가 이라는 것을 알고는 를 〈알려달라고〉 요청하는 자가 있었는데, 검으로 ‘노역老易(≪노자≫와 ≪주역≫)’ 두 글자를 써서 보여 주었다. 을 타고 단약丹藥을 먹으면서 한평생을 마쳤다.”注+의 ≪중설中說≫에 말하였다. “중장자광仲長子光에 대해 묻자, 선생님(왕통)이 ‘천인天人이네.’라고 하였다. 설수가 ‘어째서 천인이라고 합니까?’라고 하니, 선생님이 라고 하였다.” 북저北渚에서 은거했는데, 왕무공王無功(왕적王績)이 그의 맑은 절조를 매우 좋아하여 〈북저로〉 이사하여 〈그와〉 가까이하였다.注+② ≪구당서舊唐書≫ 〈왕적열전王績列傳〉에 말하였다. “왕적王績무공無功으로, 강주絳州 용문현龍門縣 사람이다. 〈 양제煬帝대업大業 연간(605~618)에 양주揚州 육합현六合縣현승縣丞에 임명되었는데, 관직을 버리고 하저河渚에 오두막을 짓고는 과 술로 스스로 즐겼다. 일찍이 동고東皐에서 몸소 경작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동고자東皐子라고 불렀다. 간혹 주막을 지나가게 되면 번번이 〈주막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종종 벽에 시를 썼는데, 대부분 호사가들에 의해 읊어졌다. 임종할 때에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고 유언하고, 미리 스스로 묘지명을 지어 놓았다.”


역주
역주1 東方朔 : B.C. 154~B.C. 93. 前漢 武帝 때의 문신으로 字는 曼倩(만천)이다. 해학․변설․직간으로 무제의 총애를 받아 수십 년간 측근으로 있으면서 관직이 太中大夫給事中에 이르렀다.
역주2 管輅 : 209~256. 三國 魏의 術士로, ≪周易≫에 정통하고 觀相述에 뛰어나 후세에 卜卦와 관상의 祖師로 추앙받았다.
역주3 瘖疾 : 중풍 등의 질병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질병이다.
역주4 懸解人 : 번거로운 세상을 벗어나 본성대로 자유롭게 지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老聃이 죽었을 때 그의 벗인 秦佚이 “마침 태어난 것은 그가 때맞춰 온 것이요, 마침 가는 것은 그가 조화에 순응하여 가는 것이다. 때에 편안하고 조화에 순응하여 슬픔과 즐거움이 그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으니, 옛날에 이것을 일러 상제가 매인 것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했다.[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古者謂是帝之懸解]”라고 하였다.(≪莊子≫ 〈養生主〉)
역주5 王通 : 584~617. 隋 絳州 龍門縣 사람으로, 字는 仲淹이고, 私諡는 文中子이다. 蜀郡司戶書佐․蜀王侍讀 등을 역임했다. 六經의 효용을 중시했으며, 그 체제를 본떠 여러 저술을 남겼으나 모두 전해지지 않고, ≪論語≫를 모방하여 지은 ≪中說≫만 남아 있다.
역주6 薛收 : 591~624. 唐 蒲州 汾陰縣 사람으로, 字는 伯褒이다. 房玄齡의 추천으로 秦王(李世民)의 主簿와 金部郎中이 되어 진왕부 소속 18학사의 한 명이 되었다. 高祖 武德 4년(621)에 이세민을 따라 王世充을 토벌할 때 여러 견해를 힘써 물리치고 군대를 나누어 한편으로는 洛陽을 포위하고 한편으로는 竇建德을 공격하자고 건의했다. 이 전략으로 결국 왕세충과 두건덕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두건덕의 잔당 劉黑闥을 평정하는 데 공적을 세워 汾陰縣男에 봉해졌다.
역주7 미세하게……때문이다 : ≪莊子≫ 〈德充符〉에 보이는 구절인데, 원문의 曠은 ‘謷’로 되어 있다.
역주8 河渚 : 浙江省 杭州市에 있는 西溪 湿地 가운데 한 곳의 옛 명칭이다.

세설신어보(3)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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