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4 【보補】 중장자광仲長子光이注+① 왕적王績의 〈중장선생전仲長先生傳〉에 말하였다. “선생은 휘諱가 자광子光이고, 자字가 부요不曜로, 스스로 낙양洛陽 사람이라고 하였다. 하동河東 지역을 왕래하면서 품팔이로 자급자족했는데, 집도 없고 처자식과도 인연을 끊었다. 〈수隋문제文帝〉 개황開皇 연간(581~600) 말기에 비로소 하저河渚 사이에 오두막을 지어 거처하면서 약을 팔아서 먹고살았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분음汾陰의 학생(왕적)이 하저를 유람하다가 〈그를〉 보자마자 단번에 엎드려 ‘
에서 은거했는데, 왕무공王無功(왕적王績)이 그의 맑은 절조를 매우 좋아하여 〈북저로〉 이사하여 〈그와〉 가까이하였다.注+② ≪구당서舊唐書≫ 〈왕적열전王績列傳〉에 말하였다. “왕적王績은 자字가 무공無功으로, 강주絳州용문현龍門縣 사람이다. 〈수隋양제煬帝〉 대업大業 연간(605~618)에 양주揚州육합현六合縣의 현승縣丞에 임명되었는데, 관직을 버리고 하저河渚에 오두막을 짓고는 금琴과 술로 스스로 즐겼다. 일찍이 동고東皐에서 몸소 경작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동고자東皐子라고 불렀다. 간혹 주막을 지나가게 되면 번번이 〈주막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종종 벽에 시를 썼는데, 대부분 호사가들에 의해 읊어졌다. 임종할 때에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고 유언하고, 미리 스스로 묘지명을 지어 놓았다.”
역주
역주1東方朔 :
B.C. 154~B.C. 93. 前漢 武帝 때의 문신으로 字는 曼倩(만천)이다. 해학․변설․직간으로 무제의 총애를 받아 수십 년간 측근으로 있으면서 관직이 太中大夫給事中에 이르렀다.
역주2管輅 :
209~256. 三國 魏의 術士로, ≪周易≫에 정통하고 觀相述에 뛰어나 후세에 卜卦와 관상의 祖師로 추앙받았다.
역주4懸解人 :
번거로운 세상을 벗어나 본성대로 자유롭게 지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老聃이 죽었을 때 그의 벗인 秦佚이 “마침 태어난 것은 그가 때맞춰 온 것이요, 마침 가는 것은 그가 조화에 순응하여 가는 것이다. 때에 편안하고 조화에 순응하여 슬픔과 즐거움이 그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으니, 옛날에 이것을 일러 상제가 매인 것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했다.[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古者謂是帝之懸解]”라고 하였다.(≪莊子≫ 〈養生主〉)
역주5王通 :
584~617. 隋 絳州 龍門縣 사람으로, 字는 仲淹이고, 私諡는 文中子이다. 蜀郡司戶書佐․蜀王侍讀 등을 역임했다. 六經의 효용을 중시했으며, 그 체제를 본떠 여러 저술을 남겼으나 모두 전해지지 않고, ≪論語≫를 모방하여 지은 ≪中說≫만 남아 있다.
역주6薛收 :
591~624. 唐 蒲州 汾陰縣 사람으로, 字는 伯褒이다. 房玄齡의 추천으로 秦王(李世民)의 主簿와 金部郎中이 되어 진왕부 소속 18학사의 한 명이 되었다. 高祖 武德 4년(621)에 이세민을 따라 王世充을 토벌할 때 여러 견해를 힘써 물리치고 군대를 나누어 한편으로는 洛陽을 포위하고 한편으로는 竇建德을 공격하자고 건의했다. 이 전략으로 결국 왕세충과 두건덕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두건덕의 잔당 劉黑闥을 평정하는 데 공적을 세워 汾陰縣男에 봉해졌다.
역주7미세하게……때문이다 :
≪莊子≫ 〈德充符〉에 보이는 구절인데, 원문의 曠은 ‘謷’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