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보補】
왕숙치王叔治(
왕수王修)가 일곱 살 때 모친을 여의었는데 모친이 돌아가신 날이
이었다. 다음 해에 인근 마을에서
사회社會를 거행하였는데 왕숙치가 별세한 모친을 생각하여
초상初喪 때보다 더 슬퍼하였으므로 인근 마을이 그 때문에
사社를 없앴다.
注+①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왕수전王修傳〉에 말하였다. “왕수王修(조정朝廷)는 자字가 숙치叔治이고, 북해北海 영릉營陵 사람이다. 공융孔融이 북해北海에 있을 때 왕수를 불러 주부主簿로 삼았다. 나중에 으로 천거하려 하였으나 사양하니, 공융이 답하였다. ‘는 처신이 청렴하고 여러 어려움을 두루 거쳤으며, 도모하되 잘못이 적고 가르침을 베풀되 게으르지 않았다. 내가 그대의 공로를 가상히 여기고 그대의 아름다운 덕에 부응하여 왕정王庭(조정朝廷)에 그대를 추천해 올리려 하는데 어찌 사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