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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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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明帝注+① 宋書曰 “帝, 諱彧, 文帝第十一子.” 賜王景文死한대 敕至之夜 景文 在江州하여 方與客棊 看敕訖 置在局下한대 神色恬然이라 爭劫竟 歛子하여 納奩畢하고 徐言하되
奉勅見賜以死라하다
方以敕示客하고 因擧賜鴆하여 謂客曰
此酒 不可相勸이라하고
遂仰飮而絶注+② 宋書曰 “景文常以盛滿爲憂, 屢辭位, 宋主不許, 詔報曰 ‘人居貴要, 但問心若爲耳. 大明之世, 巢․徐․二戴, 位不過執戟, 而權抗人主. 今袁粲爲令僕領選, 而人往往不知有粲. 以此居貴要, 當有致憂兢否? 夫有心於避禍, 不若無心於任運, 存亡之要, 巨細一揆耳.’ 至是, 慮晏駕後, 皇后臨朝, 景文或有異圖, 遣使齎手勅幷藥, 賜死.”이라


13-22 【】 〈남조南朝 명제明帝(유욱劉彧)가注+① ≪송서宋書≫ 〈명제기明帝紀〉에 말하였다. “명제는 으로, 문제文帝(유의륭劉義隆)의 열한 번째 아들이다.” 왕경문王景文에게 사약을 내렸다. 칙서가 도착한 날 밤에 강주江州에 있던 왕경문은 손님과 함께 한창 바둑을 두고 있었다. 〈왕경문은〉 칙서를 다 읽고 나서, 〈칙서를〉 바둑판 아래에 두었는데 안색이 태연자약했다. 이 끝나자, 〈왕경문은〉 바둑돌을 거두어 상자에 모두 담고는 천천히 말하였다.
“사약을 받아 죽으라는 칙서를 받았습니다.”
바로 칙서를 손님에게 보여주고 뒤이어 하사 받은 를 들고는 손님에게 말하였다.
“이 술은 〈그대에게〉 권할 수 없소.”
마침내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注+② ≪송서宋書≫ 〈왕경문열전王景文列傳〉에 말하였다. “왕경문은 항상 넘치도록 풍성한 것을 근심으로 삼아 여러 번 직위를 사양했으나, 송주宋主(명제明帝 유욱劉彧)는 허락하지 않고 조서詔書로 답하였다. ‘사람이 존귀하고 중요한 지위에 있을 때는 단지 마음이 그의 행위와 같은지를 물을 따름이다. 〈효무제孝武帝대명大明 시대(457~464)에 두 명의 대씨戴氏()는 그 지위가 에 불과했으나, 권세는 군주에 대항할 정도였다. 지금 원찬袁粲이 되어 〈관리의〉 선발을 주관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종종 이 때문에 존귀하고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 근심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당연히 있는 것인가? 재앙을 피하는 데에 마음을 두는 것은 무심히 운명에 내맡기는 것만 못하니, 존망存亡의 요체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 원리가 같다.’ 이때에 이르러 〈명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이후의 사태를 우려했는데, 〈왕경문의 여동생인〉 황후가 조정의 사무를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경문에게 혹시라도 다른 의도가 있을까 염려하여 사신에게 수칙手勅(직접 쓴 조칙)과 약을 가지고 가게 하여 사사賜死하였다.”


역주
역주1 王彧 : 413~472. 瑯琊 臨沂 사람으로, 字는 景文이며, 南朝 宋 明帝(劉彧)의 비(明恭皇后 王貞風)의 오빠이다. 文帝가 매우 중시했고, 명제가 즉위한 이후에 領左衛將軍․丹陽尹이 되었는데,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冠軍將軍으로 기용되고 江州刺史가 되었으며, 江安縣侯에 봉해졌다. 後廢帝 泰豫 원년(472)에 외척의 권력이 막강하다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역주2 爭劫 : 바둑 용어로 패싸움이라 한다. 劫․劫爭․打劫이라고도 한다. 흑백 양쪽 돌이 한 점씩 단수로 몰린 상태로 물려 있어 서로 잡으려는 형태로, 계속 반복되는 패턴을 이르는데, 상대가 패의 돌을 따내면 자신은 바로 그 돌을 다시 따낼 수 없고, 다른 곳에 한 번 이상 둔 후에야 다시 따낼 수 있다.
역주3 鴆酒 : 鴆鳥의 깃털로 담근 술로, 사람을 살해하는 일종의 독약이다.
역주4 巢尙之 : ?~471. 魯郡 사람이다. 한미한 가문 출신이지만, 학식과 재능이 많아 南朝 宋 孝武帝(劉駿)에게 발탁되어 파격적으로 중앙 관료가 되었다. 효무제가 관제 개혁을 추진하면서 점차 中書通事舍人이 국가 중요 사무를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그 논의와 처리에 참여하여 권력이 막강해졌다.
역주5 徐爰 : 394~475. 南瑯琊 開陽 사람으로, 字는 長玉, 본명은 瑗이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南朝 宋 武帝(劉裕)의 북벌에 참여했는데, 생각이 치밀하고 논리가 정연하여 무제의 신임을 얻었고, 文帝(劉義隆) 때에 殿中侍御史․南臺侍御史가 되었다. 孝武帝(劉駿)가 즉위 이전에 太常丞에 임명되어 조정의 제도 전반을 확립하고, 효무제가 중시하여 국가 중요 사무가 그의 의론이 없이는 시행되지 않았다.
역주6 戴法興 : 414~465. 會稽 山陰 사람이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가난하여 시장에서 칡을 팔았으나,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으며 고금의 역사에 정통하였다. 南朝 宋 孝武帝(劉駿)의 護軍記室掾이 되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효무제가 즉위한 이후 南臺侍御史 兼中書通事舍人에 발탁되고, 員外散騎侍郞․給事中․太子旅賁中郎將을 역임하였다. 효무제에게 중시되어 국가 중요 사무의 논의와 처리에 참여하여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역주7 戴明寶 : 南朝 宋 明帝(劉彧) 泰始 3년(467)에 군대의 사무를 주관하고 봉작과 관직을 좌지우지하는 등 권력을 행사했고, 安陸太守․寧朔將軍․驍騎將軍․武陵内史․宣城太守 등을 역임하였다.
역주8 執戟 : 秦漢시대에 궁궐을 侍衛하던 관직명으로, 侍郞과 비슷하며 임무를 수행할 때에 손에 창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역주9 令僕 : 尙書令과 僕射(복야)를 이르는데, 보통 重臣을 뜻한다.
역주10 원찬이……모른다 : 당시에 顔師伯이 白衣僕射(백의복야)로서 尙書省을 좌지우지하여 袁粲은 존재감이 없었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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