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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說新語補(2)

세설신어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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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庾臨終 自表하여 以子園客으로 爲代注+① 園客, 爰之小字也. 庾氏譜曰 “爰之, 字仲眞, 翼第二子.” 中興書曰 “爰之有父翼風, 桓溫徙于豫章, 年三十六而卒.”한대 朝廷慮其不從命하여 未知所遣이라가 乃共議하여 用桓溫하니 劉尹曰
使伊去 必能克定西楚어니와 然恐不可復制注+② 陶侃別傳曰 “庾翼薨, 表其子爰之代爲荊州. 何充曰 ‘陶公, 重勳也, 臨終高讓, 丞相未薨, 敬豫爲四品將軍, 于今不改. 親則道恩, 優游散騎, 未有超卓若此之授.’ 乃以徐州刺史桓溫, 爲安西將軍ㆍ荊州刺史.” 宋明帝文章志曰 “翼表其子代任, 朝廷畏憚之. 議者欲以授桓溫, 時簡文輔政, 然之. 劉惔曰 ‘溫去, 必能定西楚. 然恐不能復制. 願大王自鎭上流, 惔請爲從軍司馬.’ 簡文不許. 溫後果如惔所算也.”라하다


14-25 소유小庾(유익庾翼)가 임종 무렵에 스스로 표문을 올려 아들 원객園客(유원지庾爰之)을 〈형주자사의〉 후임으로 삼아 달라고 하였다.注+원객園客유원지庾爰之의 어릴 적 이름이다.
유씨보庾氏譜≫에 말하였다. “유원지는 중진仲眞이고 유익庾翼의 둘째 아들이다.”
중흥서中興書≫에 말하였다. “유원지는 부친 유익庾翼의 기풍을 지녀 환온桓溫이 그를 예장豫章에 옮겼는데 36세에 죽었다.”
조정에서는 〈소유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그가 명을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누구를 보내야 할지 모르다가 마침내 함께 논의하여 환온桓溫을 임용하였다. 그러자 유윤劉尹(유담劉惔)이 말하였다.
“그를 보내면 반드시 를 평정할 수는 있겠지만 다시는 그를 통제할 수 없을까 염려된다.”注+② 〈도간별전陶侃別傳〉에 말하였다. “유익庾翼이 임종할 때 표문表文을 올려 자기 아들 유원지庾爰之를 형주자사의 후임으로 삼아줄 것을 청하였다. 하충何充이 말하기를, 승상(왕도王導)이 죽기 전에 〈그의 아들인〉 왕실의 친족인 도은道恩(유희庾羲)이 산기散騎(정3품)에 머물러 있으니, 이와 같이 파격적으로 제수한 적이 없었다.’ 하여 마침내 서주자사徐州刺史 환온桓溫안서장군安西將軍형주자사荊州刺史로 삼았다.”
명제明帝의 ≪진강좌문장지晉江左文章志≫에 말하였다. “유익이 표문을 올려 자기 아들을 후임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조정에서 그것을 꺼려 논의하는 자들이 환온을 그 자리에 제수하려고 하였다. 그때 가 정사를 돕고 있었는데 그에 찬성하였다. 유담劉惔이 말하기를, ‘환온이 가면 반드시 서초西楚를 평정할 수 있겠지만, 다시는 통제할 수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부디 대왕大王(사마욱)이 직접 상류上流를 진압하소서. 제가 종군사마從軍司馬가 되겠습니다.’ 하였는데 간문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환온은 나중에 과연 유담이 예상했던 대로 되었다.”


역주
역주1 西楚 : 長江 동쪽에서 보면 荊州가 西楚가 된다.(≪世說音釋≫)
역주2 陶公은……사양하였고 : 陶侃(259~334)은 東晉의 名將으로, 苏峻의 乱을 평정하는 등 동진을 안정시키는데 큰 공훈을 세운 인물이다. 武昌太守ㆍ荆州刺史ㆍ侍中ㆍ太尉ㆍ都督八州诸军事 등을 역임하였고 长沙郡公에 봉해졌다. 그는 76세에 병으로 임종할 때 조정에 표문을 올려 자신의 지위를 사양하고 사람을 보내 假节의 麾, 侍中의 貂蝉, 太尉의 인장, 荆․江州刺史의 印 등을 반납하였다.(≪晉書≫ 〈陶侃傳〉)
역주3 敬豫(王恬)가……않았으며 : 敬豫는 승상 王導의 次子인 王恬이다. 부친이 생존했을 때 後將軍이었는데, 부친이 죽자 관직을 떠났다가 다시 기용될 때 전처럼 후장군에 임명되었다. 후장군은 4품이다.
역주4 簡文帝 : 성명은 司馬昱(320~372)이고 字는 道萬이며 東晉의 開國 황제인 元帝의 막내아들이다. 會稽王으로서 황제를 보좌하다가 桓溫에 의해 廢帝(司馬奕)를 이어 제8대 皇帝가 되었다.

세설신어보(2)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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