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世說新語補(1)

세설신어보(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세설신어보(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趙孝 以父田禾將軍注+① 後漢書註曰 “王莽時, 置田禾將軍, 屯田北邊.”으로 任爲郎한대 每告歸 常白衣歩擔이라 嘗從長安還 欲止郵亭하니 亭長 先時聞孝當過하고 掃灑待之 孝既至하니 長不肯內하고 因問曰
田禾將軍子 當從長安來라한대 何時 至乎
孝曰
尋到矣라하고
於是 遂去注+② 范曄後漢書曰 “趙孝字長平, 沛國蘄人. 州郡辟召, 進退必以禮. 顯宗聞其行, 詔拜諫議大夫, 遷衛尉. 弟禮爲御史中丞, 禮恭謙行已, 類於孝. 帝嘉其兄弟篤行, 詔禮十日一就衛尉府, 大官送供具, 令相對盡歡.”하다
【頭註】
白一作自.


1-2【조효趙孝
부친(조보趙普)이 전화장군田禾將軍이어서注+① ≪후한서後漢書≫ 〈조효전趙孝傳에 “왕망王莽전화장군田禾將軍을 배치하여 북쪽 변방에서 둔전屯田하게 했다.” 하였다. 낭관郎官에 임명되었는데
휴가를 받아 돌아갈 때마다 항상 를 입고 짐을 멘 채 걸어서 갔다. 한번은 장안長安에서 돌아갈 적에 우정郵亭(역관驛館)에 묵으려고 하였는데, 정장亭長이 조효가 지나갈 것이라는 소식을 미리 듣고 청소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조효가 도착하여 이름을 밝히지 않자 정장이 그를 〈우정에〉 들이려 하지 않고 물었다.
조보趙普조보趙普
“전화장군의 아들이 장안에서 올 것이라 들었는데 어느 때나 도착하겠는가?”
조효가 말하였다.
“곧 도착할 것이오.”
그리고는 마침내 가버렸다.注+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조효전趙孝傳〉에 말하였다. “조효趙孝는 자가 장평長平이고 패국沛國 기현蘄縣 사람이다. 주군州郡이 그를 초빙하니 나아가고 물러남이 반드시 예에 맞았다. 이 그의 행실을 듣고 조서를 내려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수하였다. 〈조효가〉 위위衛尉로 옮겼을 때 아우 조예趙禮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는데 조례의 공경하고 겸손한 행실이 조효와 같았다. 황제가 그들 형제의 독실한 행실을 가상하게 여겨 조서를 내려 조례를 10일에 한 번씩 위위부衛尉府에 보내고 에게 술과 음식을 보내게 하여 〈형제가〉 서로 만나 한껏 즐기게 하였다.”
두주頭註
◦ 〈부백명不白名의〉 ‘’이 어떤 본에 ‘’로 되어 있다.


역주
역주1 부친(趙普)이……임명되었는데 : 漢나라 때 ‘任子令法’이 있었는데, 이는 二千石 이상의 관리가 3년의 근무기간을 채우면 아들 한 명을 郎官에 임명해주는 법이다.(≪世說音釋≫) 趙孝의 부친 趙普가 田禾將軍에 임명되어 그 아들인 조효가 이 법의 적용을 받아 낭관에 제수되었음을 의미한다.
역주2 白衣 : 漢나라 때의 관례에 官吏는 검정색 옷을 입었고, 官府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은 흰색 옷을 입었다.(≪世說音釋≫) 趙孝가 흰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亭長이 심부름꾼으로 알고 조효의 소식을 물은 것이다.
역주3 顯宗 : 東晉의 제3대 황제인 晉成帝 司馬衍의 廟號이다. 부친인 明帝가 서거하자 5살의 나이로 즉위하니 모친인 皇太后 庾文君이 대리청정하였고 司徒 王導와 中書令 庾亮이 輔政하였다. ≪後漢書≫ 〈趙孝傳〉에는 ‘明帝’로 되어 있다.(≪後漢書≫ 〈趙孝傳〉, ≪晉書≫ 〈帝紀〉)
역주4 大官 : 太官이라고도 한다. ≪漢書≫ 〈百官公卿表〉에 少府의 屬官에 大官이 있다고 하였고, 그 註에 대관은 膳食을 담당한다고 하였으니, 궁중의 음식을 담당한 요리 전담 관원을 말한다.(≪世說音釋≫)
역주5 : ≪後漢書≫ 〈趙孝傳〉에는 ‘自’로 되어 있고,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不稱名也]”라는 주가 있다.
역주6 [聞] : 저본에는 ‘聞’이 없으나, ≪後漢書≫ 〈趙孝傳〉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세설신어보(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