蘇長公이 卜居陽羡하여 以五百緡으로 買一宅하다 將入居할새 偶夜行이라가 聞老婦人哭極哀라 公問嫗
問其居所在
한대 正五百緡買者
하니 卽取屋券焚之
하고 不索其值
하다 遂還毘陵
하고 不復買地
注+① 東都事略曰 “蘇軾, 字子瞻, 眉州眉山人. 生十歲而父洵宦學四方, 母程氏授以書, 比冠, 學通經史, 屬文日數千言. 中進土乙科, 英宗朝直史館, 熙寧中謫黃州團練. 哲宗召爲翰林學士. 紹聖初, 御史論軾譏斥先朝, 落職惠州安置.”하다
2-23【
보補】
소장공蘇長公(
소식蘇軾)이
양이陽羡에 자리 잡고 살려고 500
민緡으로 집 한 채를 샀다. 막 들어가 살려 할 때 밤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노부인이 매우 슬프게 우는 소리를 들었다. 공이 노파에게 물었다.
소식蘇軾
“대대로 100년간 전해오던 고택故宅을 하루아침에 결별하게 되었기에 웁니다.”
그 집의 위치를 물으니 바로 그가 500민에 산 집이었다. 즉시 집문서를 가져다 불태우고 그 값을 요구하지 않았다. 마침내
비릉毘陵으로 돌아가 다시는 땅을 사지 않았다.
注+① 에 말하였다. “소식蘇軾은 자字가 자첨子瞻이고 미주眉州 미산眉山 사람이다. 태어나 10세가 되도록 부친 소순蘇洵은 사방으로 다니며 벼슬살이하면서 공부하였고 모친 정씨程氏가 글을 가르쳤다. 관례冠禮를 치를 때쯤 되자 학문이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문장을 하루에 수천 언言을 지을 수 있었다. 진토進土에 을과乙科로 합격하여 영종英宗 때 사관史館에 근무하였고, 희령熙寧(1068∼1077) 연간에 황주단련부사黃州團練副使로 좌천되었는데, 철종哲宗이 불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았다. 소성紹聖(1094∼1098) 초에, 소식이 선왕先王을 비난했다는 어사御史의 논핵으로 인하여 파직되어 혜주惠州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