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說苑(1)

설원(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설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悼惠王二十三年 平卒하고 二十歲 秦滅韓하니 良年少하야 未宦事韓하다
韓破 良家僮三百人이어늘 弟死不葬하고 良悉以家財 求刺客刺秦王하야 爲韓報仇하니
以大父父 五世相韓故러라
遂學禮하고 東見하야 得力士하고 爲鐵椎하니 重百二十斤이러라
秦皇帝東遊어늘 良與客狙擊秦皇帝於라가 誤中副車하니
秦皇帝大怒하야 大索天下하고 求購甚急이라
良更易姓名하고 深亡匿이라가 後卒隨漢報秦하다


유후留侯 장량張良의 할아버지 개지開地나라 소후昭侯선혜왕宣惠王양애왕襄哀王의 재상이 되었고, 아버지 장평張平이왕釐王도혜왕悼惠王의 재상이 되었다.
도혜왕 23년에 장평이 죽고, 장평이 죽은 뒤 20년에 나라가 나라를 멸망시키니 장량은 나이가 어려서 벼슬하여 나라를 섬기지 못했다.
나라가 파멸했을 때 장량의 집에는 3백 명의 노복奴僕이 있었는데 아우가 죽었는데도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장량은 집안의 재물을 모두 털어 자객刺客을 구해 진왕秦王을 죽여 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이는 자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 5대 동안 나라의 재상을 지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회양淮陽에서 를 배우고 동쪽에 가서 창해군滄海君을 만나 역사力士를 얻고 무게가 120근이나 되는 쇠망치를 만들었다.
진시황秦始皇동방東方순유巡遊하였는데, 장량이 자객과 함께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을 저격했다가 잘못하여 여벌로 따라가는 수레[부거副車]를 맞히고 말았다.
진시황이 크게 노하여 온 천하에 크게 수색을 벌이고, 현상금을 걸어 매우 급하게 자객을 잡으러 나섰다.
장량은 성명을 바꾸고 깊은 곳으로 도망쳐 숨었다가 후일 마침내 나라를 따라 나라를 멸망시켜 보복하였다.


역주
역주1 留侯張良之大父開地 : 留侯는 漢나라 사람 張良의 封號이다. 장량은 漢 高祖 劉邦의 謀臣으로 字는 子房, 시호는 文成이다. 원래 韓나라의 여러 대 재상을 지낸 가문으로, 韓나라가 秦나라에 멸망당하자 원수를 갚으려고 力士를 구해 博浪沙에서 秦始皇을 저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뒤에 黃石公에게 병법을 전수받고 한 고조를 도와 楚나라를 평정하여 蕭何‧韓信과 함께 三傑로 일컬어진다. 大父는 祖父, 開地는 張良의 조부 이름이다. 《史記 留侯世家》‧《漢書 張良傳》
역주2 韓昭侯宣惠王襄哀王 : 전국시대 韓나라의 三代 군주이다.
역주3 父平 : 張良의 아버지 張平을 이른다.
역주4 釐(희)王悼惠王 : 전국시대 韓나라의 二代 군주이다. 悼惠王은 桓惠王이라고도 한다.
역주5 淮陽 : 漢나라 때의 땅 이름이다. 지금의 河南省 淮陽縣 남서쪽에 있었다. 隋代에는 郡을 두었다. 《讀史方輿紀要 河南 開封府 陳州》
역주6 滄海君 : 秦代에 살았다는 한 賢人의 號이다. 일설에는 가탁한 이름이라고 한다. 滄은 倉으로도 쓴다. 《史記 留侯世家》‧《漢書 張良傳》
역주7 博浪沙 : 옛 땅 이름이다. 지금의 河南省 原陽縣 東關에 있었다. 浪은 狼으로도 쓴다. 《史記 留侯世家》

설원(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