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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苑(1)

설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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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20. 吳以伍子胥之謀하야 西破彊楚하고 北威齊晉하며 南伐越하다
越王句踐迎擊之하야 敗吳於하고 하니 軍却하다
闔廬謂太子曰 爾忘句踐殺而父乎
夫差對曰 不敢이로소이다
是夕 闔廬死하다
夫差旣立爲王하야爲太宰하야 習戰射하다
三年 伐越하야 敗於하다
越王句踐 乃以兵五千人으로 棲於하다
使으로 厚幣遺吳太宰嚭以請和하고 委國爲臣妾하다
吳王將許之러니 伍子胥諫曰
越王爲人 能辛苦하니 今王不滅이면 後必悔之하리이다
吳王不聽하고 用太宰嚭計하야 與越平하다
其後五年 吳王聞齊景公死하고 而大臣爭寵하며 新君弱하고 乃興師北伐齊하다
子胥諫曰 不可하니이다
句踐食不重味하고 弔死問疾하며 且能用人하니
此人不死 必爲吳患하리이다
今越 腹心之疾이요 猶疥癬耳이어늘
而王不先越하시고 乃務伐齊하시니 不亦謬乎잇가
吳王不聽하고 伐齊하야 大敗齊師於하고 遂與鄒魯之君會以歸하야 益疏子胥之言하다
其後四年 吳將復北伐齊하니
越王句踐用子貢之謀하야 乃率其衆以助吳하고 而重寶以獻遺太宰嚭하다
太宰嚭旣數受越賂하고 其愛信越殊甚하야 日夜爲言於吳王하니 王信用嚭之計러라
伍子胥諫曰 夫越 腹心之疾이어늘 今信其游辭僞詐而貪齊하시니 譬猶石田하야 無所用之니이다
是商所以興也 願王釋齊而先越하소서
不然이면 將悔之無及也已리이다
吳王不聽하고 使子胥於齊하다
子胥謂其子曰 吾諫王호되 王不我用하니 吾今見吳之滅矣
女與吳俱亡 無爲也라하고
乃屬其子於齊하고 而歸報吳王하다
太宰嚭旣與子胥有隙이러니 因讒曰
子胥爲人 剛暴少恩하니 其怨望猜賊이면 爲禍也深하리이다
前日王欲伐齊 子胥以爲不可호되 王卒伐之하사 而有大功이어늘 子胥計謀不用하니 乃反怨望하니이다
今王又復伐齊어시늘 子胥專愎强諫하고 沮毁用事하야 徼幸吳之敗하야 以自勝其計謀耳니이다
今王自行하사 悉國中武力以伐齊어시늘 而子胥諫不用하야 因輟佯病不行하니
王不可不備 此起禍不難이니이다
且臣使人微伺之러니 其使齊也 乃屬其子於鮑氏하니이다
夫人臣內不得意라하야 外交諸侯하고 自以先王謀臣으로 今不用이라하야 常怏怏하니 願王早圖之하소서
吳王曰 微子言之이라도 吾亦疑之로라
乃使使賜子胥之劍하야 曰 子以此死하라
子胥曰 嗟乎 讒臣宰嚭爲亂이어늘 王顧反誅我로다
我令若父霸하고 又若立時 諸弟子爭立이어늘 我以死爭之於先王하니 幾不得立이러니라
若旣立하야 欲分吳國與我호되 我顧不敢當이라
然若之何聽讒臣하고 殺長者
乃告曰 必樹吾墓上以梓하야 令可以爲器어든 而抉吾眼하야 著之吳東門하야 以觀越寇之滅吳也하라 乃自刺殺하다
吳王聞之하고 大怒하야 乃取子胥屍하야 盛以하야 浮之江中하다
吳人憐之하야 乃爲立祠於江上하고 因名曰胥山이라하다
後十餘年 越襲吳하니 吳王還與戰이라가 不勝하니 使大夫行成於越호되 不許하다
吳王將死 曰 吾以不用子胥之言하야 至於此로다
令死者無知則已어니와 死者有知인댄 吾何面目으로 以見子胥也리오하고
遂蒙絮覆面而自刎하다


나라가 오자서伍子胥손무孫武의 계책을 써서 서쪽으로는 강력한 나라를 격파하고, 북쪽으로는 나라와 나라를 위협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나라를 토벌하였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나라를 맞아 싸워 고소姑蘇에서 오나라 군대를 패배시키고 합려闔閭의 엄지발가락에 부상을 입히자, 오나라 군대는 퇴각하였다.
합려가 태자太子 부차夫差에게 말했다. “너는 구천이 네 아비를 죽인 일을 잊겠느냐?”
부차는 대답하였다. “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날 밤에 합려는 죽고 말았다.
부차는 즉위하여 왕이 되고 나서, 백비伯嚭태재太宰로 삼아 전쟁과 사격훈련을 하였다.
3년 뒤에 오나라는 월나라를 토벌하여 부추夫湫에서 나라 군대를 패배시켰다.
월왕 구천은 곧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 위에서 머물렀다.
그러고는 대부大夫 문종文種을 보내어 오나라 태재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강화講和하기를 요청하고, 나라의 통치권을 바치며 자신은 신하가 되고 아내는 시첩侍妾이 되기를 원하였다.
오왕 부차가 허락하려고 하자 오자서는 하였다.
“월왕 구천은 사람됨이 어렵고 괴로움을 잘 참아내니, 지금 왕께서 없애지 않으면 후일 반드시 뉘우칠 것입니다.”
오왕吳王은 이 말을 따르지 않고 태재 백비의 계책을 채용하여 월나라와 화평和平하였다.
그 뒤 5년에 오왕은, 제 경공齊 景公이 죽고 대신大臣들은 총애받기를 다투며 새로 즉위한 임금은 어리다는 소문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북쪽을 향하여 나라를 토벌하려고 하였다.
오자서는 다시 간하였다. “안 됩니다.
구천이 두 가지 이상의 반찬을 먹지 않고 죽은 이를 조문弔問하며 병든 이를 문병問病하고, 또 인재人才를 잘 임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오나라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월나라는 뱃속의 병이고, 제나라는 옴 같은 피부병과 같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월나라를 먼저 토벌하지 않으시고, 제나라 토벌하는 일에 힘쓰시니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왕은 오자서의 간언諫言을 따르지 않고 제나라를 토벌하여 애릉艾陵에서 제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키고, 마침내 의 임금과 회맹會盟을 하고 돌아와 더욱 오자서의 말을 멀리하였다.
그 뒤 4년에 오나라는 다시 북쪽으로 제나라를 토벌하려고 하였다.
월왕 구천은 자공子貢의 계책을 채용하여, 마침내 그의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돕고 많은 보물을 태재 백비에게 바쳤다.
태재 백비는 이미 여러 차례 월나라의 뇌물을 받고는 월나라를 사랑하고 신임하는 마음이 매우 심하여 밤낮으로 월나라를 위해 오왕에게 좋게 말하니, 오왕은 백비의 계책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오자서는 간했다. “저 월나라는 뱃속의 병인데 지금 근거 없는 들뜬 말과 거짓된 계책을 믿고 제나라에 대한 이익을 추구하시니, 비유하면 돌밭과 같아서 쓸모가 없습니다.
서경書經》 〈반경盤庚〉에 ‘교훈을 실추失墜하여 공손히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코를 베거나 죽여서 남겨두어 기름이 없게 하여 그 종자를 이 도읍에 옮겨 살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나라가 흥성興盛하게 된 원인이니, 왕께서는 제나라는 버려두고 월나라를 먼저 공격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차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오왕은 이 말도 따르지 않고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보냈다.
오자서는 그의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왕에게 간하였으나 왕이 나의 말을 채용치 않으니, 나는 이제 오나라가 멸망할 것을 보았다.
네가 오나라와 함께 멸망하는 것은 아무 의의가 없다.”
그러고는 마침내 그의 아들을 제나라의 포씨鮑氏에게 맡기고 돌아와서 오왕에게 사신으로 갔다온 일을 보고하였다.
태재 백비는 이미 오자서와 서로 꺼리는 틈이 있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오자서를 참소하였다.
“오자서의 사람됨은 강퍅하고 사나우며 은정恩情이 적으니, 그가 원망하고 음험陰險적의敵意를 품으면 깊은 화란禍亂이 될 것입니다.
지난날 왕께서 제나라를 토벌하려 하실 때 오자서가 안 된다고 하였으나 왕께서 끝내 제나라를 토벌하여 큰 공을 거두셨는데, 오자서는 자기의 계책이 채용되지 않으니 도리어 원망하였습니다.
지금 왕께서 또다시 제나라를 토벌하려 하시는데 오자서는 제멋대로 강퍅하게 간하며, 왕께서 하시는 일을 저지하고 훼방하면서 오나라가 실패하여 스스로 자기의 계책이 우월했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왕께서 직접 출정하시어 나라 안의 모든 무력을 징발하여 제나라를 토벌하려 하시는데, 오자서는 자기의 간언이 채용되지 않자 그대로 나오지 않고 거짓으로 병을 핑계대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왕께서는 이를 대비하지 않으시면 안 되니, 이 사람은 왕에게 화란禍亂을 일으키는 일을 어렵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 사람을 보내 몰래 엿보게 했더니, 그가 제나라에 사신 갔을 때 마침내 그의 아들을 포씨鮑氏에게 맡겼습니다.
신하가 되어 국내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여 밖에서 제후와 교제하고, 자신은 선왕先王모신謀臣으로서 지금 자기의 건의가 채용되지 않는다 하여 언제나 야속하게 여기고 있으니, 왕께서는 일찌감치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오왕은 말하였다. “그대가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나 역시 의심하고 있었소.”
그러고는 사람을 보내 오자서에게 촉루검屬鏤劍을 주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이 으로 자결하시오.”
그러자 오자서는 말했다. “아, 참소하는 신하 태재 백비가 화란禍亂을 조장하고 있는데 왕은 도리어 나를 주살誅殺하는구나.
나는 너의 아버지를 패자霸者가 되게 하였고, 또 네가 태자太子가 될 때 여러 자제子弟들이 태자가 되려고 다투었는데 나는 선왕께 죽음을 무릅쓰고 너를 위해 간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너는 하마터면 태자가 되지 못할 뻔했었다.
네가 이미 태자가 되어 오나라를 나누어 나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나는 도리어 감히 받지 않았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참소하는 신하의 말을 듣고 이 어른을 죽이는가?”
마침내 사인舍人에게 당부하였다. “나의 무덤가에는 반드시 가래나무[]를 심어 그 나무가 커서 기물을 만들 만하게 되거든, 나의 눈알을 파내 오나라 도성都城 동문東門에 걸어두어 월나라의 침략군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해다오.” 그러고는 마침내 스스로 찔러 죽었다.
오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바로 오자서의 시체를 가져다가 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담아 강물에 띄워버렸다.
오나라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바로 강가에 사당을 세우고 이름을 서산胥山이라 하였다.
그 뒤 10여 년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습격하니 오왕은 〈북방北方에 가서 제후들과 회맹하던 중에〉 군대를 돌이켜 돌아와서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자, 대부大夫를 월나라에 보내 강화講和를 요구하였으나 월나라는 허락하지 않았다.
오왕은 자살하려고 하면서 말했다. “내가 오자서의 말을 채용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죽은 자가 지각이 없다면 그뿐이지만, 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오자서를 만나랴!”
그러고는 마침내 솜을 얼굴에 덮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역주
역주1 孫武 : 춘추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뛰어난 兵法家이다. 吳王 闔閭에게 등용되어 楚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제나라와 晉나라를 위협하여 吳나라의 霸業을 이루게 하였다. 저서에 兵法 13편이 있는데, 현재 《孫子兵法》으로 전한다. 《史記 孫子吳起列傳》
역주2 姑蘇 : 江蘇省 吳縣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산 위에 吳王 夫差가 쌓았다는 姑蘇臺가 있다. 《讀史方輿紀要 江南 6 吳縣》
역주3 傷闔閭指 : 吳王 闔閭가 越王 句踐과 전쟁하다가 엄지발가락에 부상을 입은 일이다. 합려는 춘추 말기 吳나라 임금으로, 이름은 光이다. 專諸를 시켜 吳王 僚를 죽이고 自立하였다. 檇李(지금의 浙江省 嘉興縣 서남쪽)에서 월왕 구천에게 패배하여 重傷을 입고 죽었다. 《史記 吳太伯世家》
역주4 夫差 : 춘추시대 吳나라 王으로, 闔閭의 아들이다. 越王 句踐과의 전쟁에서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會稽에서 구천을 격파하여 갚았으나, 뒤에 구천의 離間에 빠져 越나라에 敗亡하자 자살하였다. 《史記 吳泰伯世家》
역주5 伯嚭 : 춘추시대 楚나라 사람이다. 吳나라로 망명하여 太宰가 된 뒤 越王 句踐의 뇌물을 받고 和議를 받아들이게 하여, 越나라가 吳나라를 멸망시키는 빌미를 제공하였으나 월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 越世家‧伍子胥列傳》
역주6 夫湫 : 산 이름으로, 곧 夫椒이다. 지금의 浙江省 紹興市 북쪽에 있다. 夫山과 椒山의 두 산이라는 설이 있고, 지금의 江蘇省 吳縣 서남쪽 太湖 안의 椒山이라는 등의 설이 있다.
역주7 會稽山 : 浙江省 紹興市 동남쪽에 있는 산이다. 禹王이 이곳에서 제후들을 크게 모아놓고 功을 매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명 防山, 또는 茅山이다. 《春秋左氏傳 哀公 元年》
역주8 大夫種 : 춘추시대 越나라 大夫 文種으로, 楚나라 鄒邑 사람이다. 越王 句踐에게 정사를 위임받아 吳王 夫差에게 설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으나, 뒤에 참소를 믿은 구천이 劍을 내리자 자결하였다. 《史記 越世家》‧《越絶書》
역주9 艾陵 : 옛 지명으로, 춘추시대 齊나라 땅이다. 지금의 山東省 萊蕪市 동북쪽에 있었다. 일설에는 지금의 山東省 泰安市 동남쪽에 있었다 한다. 《春秋左氏傳 哀公 11년》
역주10 盤庚曰 : 盤庚은 《書經》 〈商書〉의 篇名이다. ‘盤庚曰’이 《史記》 〈伍子胥列傳〉에는 ‘盤庚之誥曰’로 되어 있고, 《春秋左氏傳》 哀公 11년에도 같다.
역주11 古人有顚越不恭 〈劓殄滅之 俾無遺育 無使易種於玆邑〉 : 《說苑校證》에는 “‘古人’ 두 글자를 《群書拾補》에는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其’자로 고쳤는데, 《史記》 〈伍子胥列傳〉에는 ‘古人’ 두 글자가 없고, ‘其’자도 없으며, 《尙書》에는 ‘有’자까지도 없다.” 하였다. 또 “이 글은 전적으로 《史記》 〈伍子胥列傳〉을 인용하였지, 《春秋左氏傳》을 따른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劓殄滅之 俾無遺育 無使易種於玆邑’의 15자를 보충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보충하고 번역하였다.
역주12 鮑氏 : 《史記》 〈伍子胥列傳〉에는 鮑牧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의 기록에 의하면 이 일은 哀公 11년에 일어났고, 포목은 哀公 8년에 죽었다. 여기의 鮑氏는 아마 그 종친인 듯하다.
역주13 {恨} : 《說苑校證》에 의거하여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史記》 〈伍子胥列傳〉에도 “恐爲深禍也”로 되어 있다.
역주14 屬(촉)鏤 : 劍 이름으로, 屬盧로도 쓴다. 《淮南子 氾論訓》‧《吳越春秋 句踐伐吳外傳》
역주15 舍人 : 王公이나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의 집에 두었던 벼슬로, 그 집안의 사무를 담당하였다. 전국시대에서 漢나라 초기까지 있었다. 《戰國策 楚策 4》‧《史記 廉頗藺相如列傳》
역주16 鴟夷革 : 가죽으로 만든 자루이다. 鴟夷는 ‘자루’라는 뜻이다. 《戰國策 燕策 2》

설원(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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