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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苑(2)

설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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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秦始皇旣兼天下하고 大侈靡하야 卽位三十五年 猶不息하야 하야 塹山堙谷하야 直通之하다 厭先王宮室之小하야 乃於之間 文武之處 하고
作前殿阿房하니 東西五百步 南北五十丈이니 上可坐萬人이요 下可建五丈旗 周爲하야 自殿直抵南山之嶺以爲하고하야 自阿房度渭水하야 屬咸陽하야 以象 하다
하다 關中離宮三百所 關外四百所 皆有鐘磬帷帳婦女倡優하다 하야 以爲秦東門하다
於是有方士 相與謀曰 當今時不可以居 上樂以刑殺爲威하고 下畏罪하야 持祿莫敢盡忠이라 上不聞過而日驕하고 下懾伏以慢欺而取容하니 諫者不用而失道滋甚이라 吾黨久居 且爲所害하리라하고 乃相與亡去하다
始皇聞之하고 大怒하야 曰 吾異日厚盧生하야 尊爵而事之어늘 今乃誹謗我로다 吾聞諸生 多爲妖言以亂黔首라호라 乃使御史하다
諸生傳相告하야 犯法者四百六十餘人이라 皆坑之하다 盧生不得하고 而侯生後得하니 始皇聞之하고 召而見之하다 升阿東之臺하야 臨四通之街하야 將數而車裂之하다
始皇望見侯生하고 大怒하야 曰 老虜不良하야 誹謗而主하고 迺敢復見我
侯生至하야 仰臺而言曰 臣聞知死必勇이라하니 陛下肯聽臣一言乎잇가
始皇曰 若欲何言 言之하라
侯生曰 臣聞禹立 欲以知過也어늘 今陛下奢侈失本하고 淫佚趨末하며 宮室臺閣 連屬增累하고 珠玉重寶 積襲成山하며 錦繡文綵 滿府有餘하고 婦女倡優 數巨萬人이요 鍾鼓之樂 流漫無窮하고 酒食珍味 盤錯無前하며 衣服輕暖하고 輿馬文飾하야 所以自奉 麗靡爛漫 不可勝極이니이다
黔首匱竭하고 民力이어늘 尙不自知하고 又急誹謗하야 嚴威克下하니 下喑上聾일새 臣等故去로소이다 臣等不惜臣之身이요 惜陛下國之亡耳니이다 聞古之明王 食足以飽하고 衣足以煖하며 宮室足以處하고 輿馬足以行이라
故上不見棄於天하고 下不見棄於黔首하니이다 堯茅茨不剪하고 采椽不斲하며 土階三等호되 而樂終身者 以其文采之少하고 而質素之多也니이다 傲虐好慢淫하야 不修理化하야 遂以不升하니이다
今陛下之淫 萬丹朱而千桀紂 臣恐陛下之十亡也어늘 而曾不一存이니이다
始皇默然久之 曰 汝何不早言
侯生曰 陛下之意 方乘靑雲하야 飄搖於文章之觀하고 自賢自健하야 上侮하고 下凌하며 棄素樸하고 就末技하니 陛下亡徵見久矣니이다
臣等恐言之無益也 而自取死 故逃而不敢言이러니 今臣必死 故爲陛下陳之하노니 雖不能使陛下不亡이나 欲使陛下自知也하노이다
始皇曰 吾可以變乎
侯生曰 形已成矣 陛下坐而待亡耳니이다 若陛下欲更之인댄 能若堯與禹乎잇가 不然이면니이다 陛下之佐又非也 臣恐變之不能存也하노이다
始皇喟然而歎하고 遂釋不誅하다 後三年 始皇崩하고 二世卽位 三年而秦亡하다


진 시황秦 始皇이 이미 천하를 겸병하고 나서 크게 사치하였다. 즉위한 지 35년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사치를 그치지 않아 크게 치도馳道를 닦아서 구원九原에서부터 운양雲陽에 이르기까지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곧장 통하게 하였다. 선왕先王의 협소한 궁실宮室을 혐오하여 호경鎬京 사이 주 문왕周 文王무왕武王이 거처하던 곳인 위수渭水남산南山임원林苑왕궁王宮을 지었다.
정전正殿(전전前殿)인 아방궁阿房宮을 지었는데, 동서東西의 길이는 500요, 남북의 넓이는 50으로, 그 위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에는 5 길이의 기치旗幟를 세울 수 있었다. 사방 둘레에 각도閣道를 만들어 궁전 아래에서 곧장 남산南山의 정상에 도달하여 문궐門闕을 만들고, 복도複道를 만들어 아방궁에서 위수渭水를 건너 함양咸陽에 닿게 하여 천극성天極星각도성閣道星이 은하수를 가로질러 영실성營室星에 닿아 있는 천체天體를 상징하였다.
여산驪山능묘陵墓 공사를 일으켜 삼천三泉의 밑바닥에 구리를 녹여 부어 막았다. 함곡관函谷關 서쪽[관중關中]에 있는 별궁[이궁離宮] 300곳과 함곡관 동쪽[관외關外]에 있는 별궁 400곳에 모두 종경鐘磬과 장막을 설치하고 미녀와 광대를 배치하였다. 동해東海 가의 구산朐山 경계에 석궐石闕을 세워 진나라의 동문東門으로 삼았다.
이때에 방사方士나라 사람인 후생侯生나라 사람인 노생盧生이 서로 상의하여 말했다. “현재 여기에 그대로 살 수가 없다. 황상皇上은 사형에 처하는 형벌로 위엄을 보이기를 즐거워하고 신하들은 죄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녹봉만을 유지하면서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 황상은 자신의 잘못을 듣지 못하여 날마다 더욱 교만해지고, 신하들은 두려워 복종하면서 태만과 속임수로 아첨을 떨어 용납되기를 구한다. 하는 사람을 중용重用하지 않아 도의道義를 위배하는 일이 더욱 심하다. 우리들이 이곳에 오래 머물면 장차 살해를 당할 것이다.”그러고는 즉시 함께 도망쳐버렸다.
진 시황이 이 사실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내가 지난날 노생을 후하게 대우하여 벼슬을 높여주고 섬겼는데, 지금 나를 비방하는구나. 나는 들으니, 제생諸生들이 요상한 말을 많이 만들어 백성들을 혼란시킨다고 한다.”그러고는 곧 어사御使를 파견하여 제생들을 모두 조사하여 심문하게 하였다.
제생들이 서로 고인告引하여 법을 범한 사람이 460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노생은 잡지 못하였고, 후생은 뒤에 잡으니, 시황이 이를 듣고 후생을 불러 직접 만나고자 하였다. 아동대阿東臺에 올라 사통팔달의 거리를 마주하여 후생의 죄를 열거한 뒤에 거열형車裂刑에 처하려고 하였다.
시황이 후생을 멀리 바라보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이 늙은 도적놈이 불량不良하여 네 임금을 비방하고서 감히 나를 다시 볼 수 있단 말이냐!”
후생이 당도하여 누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은 들으니, 죽을 줄을 알면 반드시 용감해진다고 합니다. 폐하陛下께서는 신의 한마디 말씀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시황이 말했다. “너는 무슨 말을 하려느냐? 말해보거라.”
후생이 말했다. “신은 들으니, 하우夏禹비방誹謗하는 말을 쓰는 나무를 세운 것은 자기의 잘못을 알려고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사치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잃고, 음란하고 방종하여 향락을 추구하며, 궁실과 대각臺閣이 중첩되어 서로 이어지고, 주옥珠玉진보珍寶가 쌓여 산을 이루며, 화려한 색채로 수놓은 비단이 창고에 가득 차 넘치고, 미녀와 광대의 수가 만 명이나 되며, 종고鐘鼓의 연주 소리가 끝없이 울려 퍼지고, 맛있는 술과 음식이 앞에 널려 있으며, 의복은 가볍고 따뜻하며, 수레와 말은 아름답게 장식하여, 자신을 봉양하는 물품이 화려하고 찬란한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민력民力은 모두 고갈되었는데 아직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 비방하는 말에 조바심을 내어 엄혹한 형벌로 아랫사람들을 제압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신민臣民들은 벙어리가 되고, 위의 황상은 귀머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신 등이 떠난 것입니다. 신 등은 자신의 몸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폐하의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애석하게 여길 뿐입니다. 듣건대 고대의 현명한 임금은 음식은 배가 부르면 그만이고, 옷은 몸이 따뜻하면 그만이며, 궁실은 거처할 만하면 그만이고, 수레와 말은 길을 가기만 하면 그만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하늘에게 버림을 받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제요帝堯는 띠로 이은 추녀의 끝을 가지런하게 자르지 않고, 떡갈나무 서까래를 깎아 다듬지 않으며, 세 층의 흙 계단을 쌓은 집에서 살았으나 일생 동안 즐겁게 지낸 것은 화려하게 꾸민 것이 적고 소박한 본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단주丹朱는 오만하고 포학하며 음란함을 좋아하여 정사政事교화敎化수행修行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제위帝位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현재 폐하의 방종한 생활은 단주보다 만 배나 더하고, 곤오昆吾걸주桀紂보다 천 배나 더하니, 신은 폐하께서 멸망할 행위는 열 가지나 하면서 보존할 행위는 한 가지도 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시황이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 “너는 어찌 일찌감치 말하지 않았느냐?”
후생이 말했다. “폐하의 의기意氣가 한창 청운靑雲을 타고 하늘에 올라 화려하게 꾸민 궁관宮觀에 맴돌고, 스스로 현명하고 스스로 굳세다고 여기어, 위로는 오제五帝를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삼왕三王을 능멸하며, 소박한 생활의 원칙을 버리고 말단의 방종한 생활을 추구하니 폐하의 멸망할 징조가 나타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신 등은 말씀드려 봤자 유익함은 없고, 스스로 죽음만을 얻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도망치고 감히 말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신은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 때문에 폐하를 위해 말씀드리는 것이니, 폐하를 멸망하지 않게 할 수는 없지만 폐하께서 스스로 이를 아시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시황이 말했다. “내가 바르게 변할 수 있겠느냐?”
후생이 말했다. “망할 형세가 벌써 정해졌으니, 폐하께서는 그대로 앉아서 멸망하기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르게 고치려고 하신다면 능히 제요帝堯하우夏禹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폐하의 보필하는 신하들 또한 옳지 않으니, 신은 폐하가 변하여도 나라를 보존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시황이 한숨을 쉬며 탄식하고는 마침내 후생을 주살誅殺하지 않고 석방하였다. 그 뒤 3년 만에 시황이 죽고, 이세二世가 즉위했으나, 또 3년이 지나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역주
역주1 治大馳道 : 車馬가 달릴 수 있는 큰 길을 닦았다는 말이다. 여기서의 馳道는 특히 天子가 달리는 길을 이른다. 《史記》 〈秦始皇本紀〉에는 ‘大’자가 없다.
역주2 從九原抵雲陽 : 九原은 秦代에 둔 郡 이름으로, 治所는 지금의 內蒙古 烏拉特前旗 동남쪽의 堡子灣 古城에 있었다. 《史記 秦本紀》‧《漢書 匈奴傳》 雲陽은 진대의 邑 이름인데, 漢代에는 縣을 두었다. 지금의 陝西省 淳化縣 서북쪽에 있었다. 《史記 秦始皇本紀》‧《漢書 地理志 上》
역주3 豐鎬 : ‘豐’은 ‘酆’으로도 쓴다. 본서 권17 〈雜言〉 15의 주4)‧5) 참고.
역주4 營作朝宮渭南山林苑中 : 제왕의 궁전[朝宮]을 渭水 가의 남산 林苑 중에 지었다는 말이다. 《史記》 〈秦始皇本紀〉에는 ‘乃營作朝宮渭南上林苑中’으로 되어 있다.
역주5 閣道 : 樓閣과 누각 사이에 통행할 수 있도록 나무로 짜서 공중에 가설한 길이다. 複道라고도 한다. 《史記 秦始皇本紀》
역주6 : 終南山의 봉우리를 門闕로 삼았다는 말이다. 문궐은 古代에 宮殿‧官廳‧祠廟‧陵墓의 앞에 雙闕로 만든 출입구를 이른다. 《周易 說卦傳》
역주7 複道 : 閣道와 같다
역주8 天極閣道 : 둘 다 별 이름이다. 天極은 奎宿에 속한 별로, 紫宮 뒤쪽에 여섯 별로 이루어져 있다. 閣道는 北極星이다. 《史記 天官書》
역주9 絶漢抵營室也 : 銀河를 가로질러 營室星에 닿았다는 말이다. 영실성은 이십팔수의 하나로, 玄武 7宿 중 제6宿이다. 室宿‧定星이라고도 한다. 《周禮 考工記 輈人》
역주10 興驪山之役 錮三泉之底 : 秦始皇이 자기의 지하 陵墓를 조성한 일을 말한다. 驪山은 陝西省 西安市 동쪽 臨潼縣 남쪽에 있다. 三泉은 지하 3층 밑의 泉으로 곧 지하의 아주 깊은 곳을 이른다. 진시황은 이 밑에 구리를 녹여 부어 견고한 槨을 만들었다 한다. 《史記 秦始皇本紀》
역주11 立石闕東海上朐山界中 : 石闕을 동해 가의 朐山 경계에 세웠다는 말이다. 石闕은 주로 사당이나 陵墓 앞에 돌로 높이 쌓은 闕로서, 그 사람의 官爵‧功績을 새기거나 裝飾用으로 세웠다. 구산은 지금의 江蘇省 連雲港市 서쪽에 있는 錦屛山이다.
역주12 韓客侯生 : 전국시대 韓나라 출신의 侯氏 姓을 가진 사람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역주13 齊客盧生 : 전국시대 齊나라 출신의 盧氏 姓을 가진 사람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史記》 〈秦始皇本紀〉에는 ‘燕人盧生’으로 되어 있다.
역주14 {天} : 저본에는 ‘天’자가 있으나, 《說苑校證》에 “‘下’자 아래에 舊本에는 ‘天’자가 있다. 살펴보건대, ‘上’자와 ‘下’자가 상대하여 짝을 이룬 글이니 ‘天’자가 있는 것은 부당하다. 《群書治要》에 의거하여 산삭하였다.”라고 한 것을 따라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15 (悉上)[悉案問] : 저본에는 ‘悉上’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悉上’은 《史記》에 ‘悉案問’으로 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따라 ‘悉案問’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6 〈諸生〉 : 저본에는 없으나, 《說苑校證》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7 〈引〉 : 저본에는 없으나, 《說苑校證》에 “《史記》에는 ‘告’ 아래에 ‘引’자가 있으니, 마땅히 의거하여 보충해야 한다.”라고 한 것을 따라 보충하였다.
역주18 誹謗之木 : 백성들이 정치의 잘못을 써놓게 하려고 세워둔 表木이다. 여기서는 禹王이 세웠다고 했으나 帝舜이 세웠다고 한다. 《呂氏春秋 自知》
역주19 : ‘다하다’의 뜻으로, 殫과 통용이다.
역주20 丹朱 : 본서 권18 〈辨物〉 16의 주10) 참고.
역주21 昆吾 : 夏‧商시대에 있었던 部落 이름이다. 己姓으로 처음에 濮陽(지금의 河南省 濮陽市)에 봉해졌다. 하나라가 衰하자 昆吾가 夏伯이 되어 옛 許(지금의 河南省 許昌市)로 옮겼다가 뒤에 商湯에게 멸망되었다. 그 부락 사람들은 陶器의 제조와 銅器의 주조에 뛰어났다고 한다. 《詩經 商頌 長發》
역주22 五帝 : 본서 권14 〈至公〉 05의 주1) 참고.
역주23 三王 : 여러 설이 있으나, 주로 夏禹‧商湯‧周 文王 또는 武王을 이른다. 《孟子 告子 下》‧《春秋穀梁傳 隱公 8년》
역주24 (異)[冀] : 저본에는 ‘異’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冀’로 고친 것을 따라 ‘冀’로 바로잡았다.

설원(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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