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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苑(1)

설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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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問於曰 寡人地狹人寡하야 齊人八城하고 匈奴驅馳之下
以孤之不肖 得承宗廟하야 恐危社稷하노니 存之有道乎
郭隗曰 有 然恐王之不能用也일까하노이다
昭王避席 願請聞之하노라
郭隗曰 帝者之臣 其名 臣也 其實 師也 王者之臣 其名 臣也 其實 友也 霸者之臣 其名 臣也 其實 賓也 危國之臣 其名 臣也 其實 虜也니이다
今王將東面目指氣使以求臣이면 則廝役之材至矣 南面聽朝하야 不失揖讓之禮以求臣이면 則人臣之材至矣
西面等禮相亢하고 下之以色하야 不乘勢以求臣이면 則朋友之材至矣 北面拘指하고 逡巡而退以求臣이면 則師傅之材至矣리이다
如此 則上可以王이요 下可以霸리니 唯王擇焉하소서
燕王曰 寡人願學而無師하노라
郭隗曰 王誠欲興道인댄 隗請爲天下之士開路호리이다
於是 燕王常置郭隗上坐하야 南面하다
居三年 聞之하고 從周歸燕하며 聞之하고 從齊歸燕하며 聞之하고 從趙歸燕하며 聞之하고 從楚歸燕하니 四子畢至하야 果以弱燕幷强齊하다
夫燕齊 非均權敵戰之國也어늘 所以然者 四子之力也
이라하니 此之謂也니라


연 소왕燕 昭王곽외郭隗에게 물었다. “과인의 나라는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어, 나라는 우리의 여덟 을 탈취하고 흉노는 누번樓煩 아래 지역을 유린하였소.
그러니 나같이 불초한 사람으로서 선대先代종묘宗廟를 계승하여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할까 봐 걱정되니 국가를 보존하는 데 좋은 방법이 있겠소?”
곽외가 말했다. “방법이야 있지만 왕께서 사용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소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어떤 방법인지 듣기를 원합니다.”
곽외가 말했다. “의 신하는 이름은 신하지만 실제는 스승이고, 의 신하는 이름은 신하지만 실제는 친구이고, 패자霸者의 신하는 이름은 신하지만 실제는 손님이고, 위태로운 나라의 신하는 이름은 신하지만 실제는 포로입니다.
만일 왕께서 서쪽에 앉아 동쪽을 향하여 눈짓으로 지시하고 기색氣色으로 사람을 부리면서 신하를 구하면 노예奴隷 같은 재목이 올 것이고,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하여 정사를 처리하여 읍양揖讓의 예를 잃지 않으면서 신하를 구하면 인신人臣의 재목이 올 것이고,
동쪽에 앉아 서쪽을 향하여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기쁜 안색을 지어 권세를 부리지 않으면서 신하를 구하면 친구親舊 같은 재목이 올 것이고, 남쪽에 앉아 북쪽을 향하여 공손히 복종하고 머뭇거리며 겸양하는 태도로 신하를 구하면 스승 같은 재목이 올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위로는 왕 노릇할 수가 있고 아래로는 패자霸者가 될 수 있을 것이니, 오직 왕께서 선택하십시오.”
연왕燕王이 말했다. “과인은 배우기를 원하지만 스승이 없소.”
곽외가 말했다. “왕이 진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방법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저 는 천하의 인재가 몰려올 길을 열어주는 존재가 되겠습니다.”
이리하여 연왕이 항상 곽외를 윗자리에 앉게 하여 남쪽을 향하게 하였다.
3년이 지나자 소진蘇秦은 이 일을 듣고 동주東周로부터 연나라에 귀의하고, 추연鄒衍은 이 일을 듣고 제나라로부터 연나라에 귀의하고, 악의樂毅는 이 일을 듣고 나라로부터 연나라에 귀의하고, 굴경屈景은 이 일을 듣고 나라로부터 연나라에 귀의하니, 이 네 사람이 모두 연나라에 와서 결국 약소한 연나라를 가지고 강대한 제나라를 겸병兼倂하였다.
연나라와 제나라는 세력이 같고 전력이 대등한 나라가 아닌데 그렇게 된 원인은 이 네 사람의 역량이다.
시경詩經》에 “많은 인재들이여, 문왕文王을 편안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런 일을 이른 말이다.


역주
역주1 燕昭王 : 전국시대 燕나라 王으로, 이름은 平이다. 燕나라가 齊나라에 의해 거의 멸망지경에 이르렀을 때 즉위하여, 후한 禮遇로 賢才를 초빙하고 樂毅를 上將軍에 임명하여 齊나라를 토벌, 수도 臨淄에 진입하고 莒와 卽墨을 제외한 齊나라의 70여 城을 점령하여 燕나라의 가장 강성한 시기를 이루었다. 《史記 燕昭公世家》
역주2 郭隗 : 전국시대 燕나라 사람으로, 昭王이 賢士를 초빙하여 燕나라를 강성하게 하고 齊나라에 보복하려고 하자, 賢士를 초빙하는 방법을 알려주어 昭王이 원하던 일을 이루게 하였다. 《史記 燕昭公世家》
역주3 (削取)[取薊] : 저본에는 ‘削取’로 되어 있으나, 《說苑校證》에 “舊本에 ‘削取’로 되어 있는데, 盧文弨는 ‘《史記》 〈樂毅傳〉의 〈正義〉에서 인용한 것을 따른다.’고 하였다.” 한 것에 따라 ‘取薊’로 바로잡았다. 薊는 지금의 北京城 서남쪽의 옛 地名으로, 周 武王이 商나라를 멸하고 舜의 후예를 봉한 곳인데, 燕나라가 이곳에 있었으므로 燕을 이르는 말로 썼다.
역주4 樓煩 : 고대 중국 북방에 있던 부족 이름으로, 騎射에 뛰어났다. 《史記 樊酈滕灌列傳》
역주5 〈曰〉 : 저본에는 없으나, 《說苑校證》에 “曰자가 탈락된 듯하다.” 한 것에 따라 보충하였다.
역주6 蘇子 : 전국시대 縱橫家의 한 사람인 蘇秦이다. 일설에는 소진의 아우 蘇代라고 한다. 소진은 洛陽 사람으로, 鬼穀子에게 縱橫術을 배우고 당시 山東의 여섯 제후에게 合從으로 秦에 항거해야 된다고 설득하여 여섯 제후국의 재상을 겸하고 從約長이 되자, 15년 동안 秦軍이 函谷關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뒤에 齊나라에 客으로 있다가 제나라 大夫의 사주를 받은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史記 蘇秦列傳》
역주7 鄒衍 : 전국시대 齊나라의 陰陽家이다. 陰陽五行說로 梁‧趙‧燕 등의 나라에 遊說하여 제후들의 존중을 받았다. 저서에 《鄒子》가 있는데, 그의 학설이 漢代 讖緯家의 중요한 근원이 되었다. 《列子 湯問》‧《韓非子 飾邪》
역주8 樂毅 : 전국시대 燕나라의 上將軍이다. 본래 中山國 사람이었으나 中山이 趙나라에 망한 뒤 조나라 사람이 되었다가 燕 昭王에게 중용되어 상장군이 되었다. 여러 제후국과 연합하고 齊나라를 토벌하여 제나라의 70여 城을 항복받고 昌國君에 봉해졌다. 惠王이 즉위한 뒤 제나라의 離間計에 걸려 교체되자 조나라로 달아나 그곳에서 죽었다. 《史記 樂毅列傳》
역주9 屈景 : 전국시대 楚나라 사람이다.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현대 趙逵夫의 연구에 의하면, 屈原과 동시대의 楚나라 大夫로 楚 懷王 19년 이후에 燕나라에 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屈原與他的時代》
역주10 詩曰……文王以寧 : 《詩經》 〈大雅 文王〉에 보인다.

설원(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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