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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苑(1)

설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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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5. 禹以夏王하고 桀以夏亡하며 湯以殷王하고 紂以殷亡이라
以吳戰勝하야 無敵於天下호되以見禽於越하고
文公以晉國霸호되이라
威王以齊彊於天下호되하고
穆公以秦顯名尊號호되하니
其所以君王者同이로되 而功迹不等者 所任異也
是故 成王處襁褓而朝諸侯 周公用事也 任李兌故也
桓公得管仲하야 九合諸侯하야 一匡天下러니 失管仲하고하야 身死不葬하야 爲天下笑하니
一人之身 榮辱俱施焉 在所任也
故魏有하야 削地復得하고 趙任한대 秦兵不敢出하고 한대 國獨特立이라
由此觀之컨대 國無賢佐俊士어늘 而能以成功立名하고 安危繼絶者 未嘗有也
故國不務大 而務得民心하고 佐不務多 而務得賢俊이니
得民心者 民往之하고 有賢佐者 士歸之
하신대 而殷民從하고 하신대 而夏民從하고 한대 而吳人服하니 以其所爲之順於民心也
賢者立於本朝 則天下之豪 相率而趨之矣
何以知其然也
曰 管仲 桓公之賊也어늘 鮑叔以爲賢於己라하야 而進之爲相하니 七十言而說乃聽하야 遂使桓公除報讐之心하고 而委國政焉하니
桓公垂拱無事어늘 而朝諸侯 鮑叔之力也
管仲之所以能하야 無自危之心者 同聲於鮑叔也
紂殺王子比干한대 箕子被髮而佯狂하며 한대하니
自是之後 殷兼於周하고 陳亡於楚하니 以其殺比干泄冶하야 而失箕子與鄧元也
燕昭王得郭隗한대 而鄒衍樂毅以齊趙至하고 蘇子屈景以周楚至
於是擧兵而攻齊하야 하니 燕校地計衆하면 非與齊均也
然所以能至於此者 由得士也
故無常安之國하고 無恒治之民하니
得賢者則安昌하고 失之者則危亡 自古及今 未有不然者也
明鏡 所以照形也 往古 所以知今也
夫知惡往古之所以危亡하고 而不務襲迹於其所以安昌이면 則未有異乎却走而求逮前人也
太公知之 故擧微子之後하고 而封比干之墓하니
夫聖人之於死 尙如是其厚也어든 況當世而生存者乎
則其弗失 可識矣


우왕禹王나라에 의지하여 왕 노릇하였고 나라를 가지고도 멸망하였으며, 탕왕湯王나라에 의지하여 왕 노릇하였고 나라를 가지고도 멸망하였다.
합려闔廬(합려闔閭)는 나라를 가지고 전쟁에 승리하여 천하에 겨룰 자가 없었으나 부차夫差나라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진 문공晉 文公나라에 의지해 패자霸者가 되었으나 진 여공晉 厲公장려씨匠麗氏의 집에서 시해당하였고,
제 위왕齊 威王나라에 의지하여 천하에 강한 나라가 되었으나 제 민왕齊 湣王종묘宗廟의 들보에 매달려 심줄이 뽑혀 시해당하였다.
진 목공秦 穆公나라에 의지하여 이름을 드날려 존귀해졌으나 이세二世망이궁望夷宮에서 겁박을 받고 살해되었다.
그들은 똑같은 군왕君王이었지만 공적功跡이 같지 않은 까닭은 임용한 신하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 성왕周 成王이 포대기 안에 있으면서 제후의 조현朝見을 받은 것은 주공周公이 정사를 맡아 처리했기 때문이고, 조 무령왕趙 武靈王이 나이 50세에 사구沙丘에서 굶어 죽은 것은 이태李兌를 임용했기 때문이다.
제 환공齊 桓公관중管仲을 얻어서 제후를 규합하여 한 번에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았는데, 관중을 잃고 수조豎刁역아易牙를 임용하여 자기가 죽은 뒤에는 제때에 장례를 치르지 못해 천하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그러니 같은 한 사람의 몸에 영광榮光치욕恥辱이 함께 더해지는 것은 임용하는 사람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나라는 공자 무기公子 無忌가 있어서 잃었던 땅을 다시 찾았고, 나라가 인상여藺相如를 임용하자 나라 군대가 감히 조나라로 나오지 못했으며, 언릉鄢陵당저唐雎를 임용하자 나라가 우뚝 서게 되었다.
나라는 신포서申包胥가 있어서 소왕昭王복위復位하였고, 나라는 전단田單이 있어서 양왕襄王이 나라를 되찾았다.
이를 따라 살펴보면 나라에 현명한 보좌와 뛰어난 인재가 없는데 공업功業을 이루고 명예名譽를 세우며 위태로운 나라를 안정시키고 끊어지는 세대世代를 잇게 한 경우는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를 크게 하는 데 힘쓸 것이 아니라 민심을 얻는 데 힘써야 하고, 보좌하는 신하를 많이 두는 데 힘쓸 것이 아니라 현명하고 뛰어난 인재를 얻는 데 힘써야 한다.
민심을 얻은 사람은 백성들이 스스로 그에게로 가고, 현명한 보좌를 둔 사람은 인재들이 그에게 귀의한다.
문왕文王포락형炮烙刑을 없애자고 요청하자 나라 백성들이 따랐고, 탕왕湯王이 사방의 그물 중 삼면三面에 쳤던 그물을 제거하자 나라 백성들이 따랐으며, 월왕越王 구천句踐나라 조상의 묘를 훼손하지 않자 나라 백성들이 복종하였으니, 그들의 행위가 민심에 순응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소리가 서로 같으면 있는 곳이 달라도 서로 호응하고, 도덕道德이 서로 일치하면 얼굴을 보지 않고서도 서로 친하게 마련이다.
어진 이가 그 나라 조정에 있으면 천하의 호걸들이 서로 연이어 달려오게 된다.
무엇으로 그렇게 됨을 아는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관중管仲환공桓公의 원수였지만 포숙鮑叔이 자기보다 현명하다고 하여 추천하여 재상으로 삼게 하였는데, 70마디의 말에 기뻐하면서 즉시 그 말을 따라서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복수하려는 마음을 없애고 국정國政을 맡기게 하였다.
환공이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두 손을 맞잡은 채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도 제후들이 조현朝見한 것은 포숙의 공이다.
관중이 실패한 뒤에 환공에게 달려가서 자기를 위험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포숙과 지향하는 것이 같았기 때문이다.
왕자王子 비간比干을 죽이자 기자箕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 미친 체하였으며, 진 영공陳 靈公설야泄冶를 죽이자 등원鄧元나라를 떠났다.
이 이후로 나라는 나라에 겸병되었고, 나라는 나라에 멸망당했으니, 비간과 설야를 죽여 기자와 등원을 잃었기 때문이다.
연 소왕燕 昭王곽외郭隗를 얻자 추연鄒衍악의樂毅나라와 나라에서 왔고, 소진蘇秦굴경屈景나라와 나라에서 왔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공격해 제 민왕齊 閔王에 머물게 하였으니, 나라는 땅과 백성을 따져보면 나라와 대등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의 뜻을 이와 같이 편 것은 인재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안정된 나라는 없고, 언제나 잘 다스려지는 백성은 없다.
어진 이를 얻으면 안정되고 번창하며, 어진 이를 잃으면 위태로워지고 망하는 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밝은 거울은 사물의 형체를 비추는 것이고, 지난 옛 일은 오늘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옛날의 위태롭고 망한 원인을 알기 싫어하고, 안정되고 번창한 원인을 따라 행하는 데에 힘쓰지 않으면, 뒷걸음질치면서 앞에 가는 사람을 따라잡기를 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강태공姜太公은 이런 이치를 알았다. 그래서 미자微子의 후손을 추천하였고, 비간比干 묘의 봉분을 높이 쌓았다.
성인聖人이 죽은 사람에 있어서도 이렇게 후하게 대하였는데, 하물며 당세에 살아 있는 어진 이에게 있어서랴!
그 어진 이를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주
역주1 闔廬 : 춘추 말기 吳나라 왕으로 이름은 光이다. 闔廬는 號이다. 闔閭로도 쓴다. 吳王 僚를 죽이고 즉위하고, 楚나라에서 망명한 伍子胥를 등용해 초나라를 토벌하여 수도 郢에까지 들어갔다. 뒤에 檇李에서 越王 句踐에게 패하여 重傷을 입고 죽었다. 《史記 吳太伯世家》‧《文選 吳都賦》
역주2 夫差 : 춘추 말기 吳나라 왕으로 闔閭의 아들이다. 越王 句踐에게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데 뜻을 두어 越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으나, 伍子胥의 諫言을 듣지 않고 구천의 화평을 받아들였다가 끝내 구천에게 패하여 자살하였다. 《國語 越語》‧《史記 吳太伯世家》
역주3 厲公以見弑於匠麗之宮 : 厲公은 춘추시대 晉나라 군주로 이름은 壽曼이다. 匠麗는 여공의 寵臣이다. 여공은 專橫을 일삼고 교만하며 사치하였는데, 장려의 집에서 술 마시며 놀다가 欒書‧中行偃 등에게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春秋左氏傳 成公 17‧18년, 襄公 18년》
역주4 湣王以弑死於廟梁 : 湣王은 전국시대 齊나라 군주로, 田氏이며, 宣王의 아들이다. 燕나라 장군 樂毅에게 수도 臨淄가 함락되어 민왕이 莒로 달아나자, 楚 頃襄王이 淖齒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민왕은 요치를 중용하여 재상으로 삼았는데, 齊나라 정치는 어지럽게 되었고 민왕은 宗廟의 대들보에 매달려 심줄이 뽑혀 죽었다. 《戰國策 楚策》‧《史記 田敬仲完世家‧田單列傳》
역주5 二世以劫於望夷 : 二世는 秦始皇의 둘째 아들 二世皇帝 胡亥이다. 望夷는 지금의 陝西省 涇陽縣 동남쪽에 있었던 二世의 別宮이다. 二世 3년에 趙高가 이 望夷宮에서 胡亥를 겁박하여 살해하였다. 《史記 秦始皇本紀》
역주6 趙武靈王年五十 而餓死於沙丘 : 武靈王은 전국시대 趙나라 군주로 이름은 雍이다. 沙口는 지금의 河北省 廣宗縣 경내에 있던 趙王의 別宮이다.
역주7 豎刁易牙 : 춘추시대 齊 桓公의 두 寵臣이다. 豎刁는 宦官인 寺人 貂이고, 易牙는 요리를 잘한 신하이다. 둘 다 환공을 아첨으로 섬겨 많은 총애를 받았다. 환공이 죽은 뒤 여러 公子들이 서로 즉위하려고 다투니, 이들이 총애를 믿고 권력을 다투어 많은 관리를 죽이고 公子 無虧를 세우자 齊나라는 내란에 빠졌다. 《春秋左氏傳 僖公 17년》‧《戰國策 魏策 2》‧《史記 齊太公世家》
역주8 公子無忌 : 전국시대 四公子의 한 사람이다. 魏나라의 귀족으로 이름은 魏無忌이며, 魏 釐王의 아우이다. 信陵에 封해졌기 때문에 信陵君이라 부른다. 선비를 우대하여 食客이 3천 명이나 되었다 한다. 秦나라가 趙나라의 수도 邯郸을 포위했을 때 대장 晉鄙의 兵符를 훔쳐 그 군대를 거느리고 조나라를 구원하였다. 뒤에 秦나라가 魏나라를 공격했을 때 上將軍이 되어 다섯 나라와 연합해 秦나라 군대를 河外에서 격파하였다. 《史記 魏公子列傳》
역주9 藺相如 : 전국시대 趙나라의 上卿이다. 秦 昭王이 자기의 15城과 趙나라의 和氏璧을 바꾸자고 강요하여 藺相如가 화씨벽을 가지고 갔으나, 소왕이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자 機智로 소왕을 속이고 화씨벽을 도로 찾아왔다. 또 대장 廉頗가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罪를 요청한 일이 있다. 《史記 廉頗藺相如列傳》
역주10 鄢陵任唐雎(저) : 鄢陵은 전국시대 魏나라의 附庸國이다. 安陵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河南省 鄢陵縣 서북쪽에 있었다. 여기서는 안릉에 봉해진 魏 襄王의 아우 安陵君을 이른다. 唐雎는 전국시대 魏나라 사람이다. 당시 齊나라와 楚나라가 魏나라를 공격하자 당저가 90세의 나이로 秦王을 설득하여 魏나라를 구원하는 병력을 출동시켰다. 《戰國策 魏策》‧《史記 魏世家》
역주11 楚有申包胥 而昭王反位 : 申包胥는 춘추시대 楚나라 大夫이다. 그의 친구 伍子胥가 父兄의 원수를 갚기 위해 吳나라의 무력을 빌려 초나라의 수도 郢에 쳐들어오자 昭王이 도망쳤다. 신포서가 秦나라에 달려가 밤낮 7일 동안 울면서 구원해주기를 애원하니, 秦 哀公이 가엾게 여겨 전차 5백 대를 파견해 吳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소왕이 다시 돌아왔다. 《春秋左氏傳 哀公 4년》‧《史記 伍子胥列傳》
역주12 齊有田單 襄王得國 : 田單은 전국시대 齊나라 장군이다. 제나라가 燕나라 樂毅의 침공을 받아 72城이 함락되고 莒와 卽墨만 함락되지 않았다. 전단은 종족들을 거느리고 城을 지키며 항전하다가 火牛計를 써서 燕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달아났던 襄王을 맞이해 復位시켰다. 《史記 田敬仲完世家‧田單列傳》
역주13 文王請除炮烙之刑 : 殷의 紂王이 炮烙이라는 酷刑을 쓰니 文王이 洛西의 땅을 바치면서 중지할 것을 요청하자 주왕이 허락한 일을 가리킨다. 炮烙은 기름칠을 한 구리기둥을 세우고 그 아래에 숯불을 피운 다음, 죄인이 구리기둥을 타고 오르다가 숯불 위로 떨어져 타죽게 하는 형벌이라 한다. 《史記 殷本紀》‧《史記 周本紀》‧《列女傳 孼嬖傳 殷紂妲己》
역주14 湯去張網者之三面 : 湯王의 仁德이 禽獸에게 까지 미쳤다는 고사이다. 탕왕은 사냥을 할 때 세 방면에는 그물을 치고 한 방면은 그물을 치지 않고 터놓아 짐승들이 달아날 길을 만들어주었다 한다. 《史記 殷本紀 》‧《大戴禮記 保傅》
역주15 越王不隳舊冢 : 越王 句踐이 吳王 夫差를 격파한 후 吳王 선대의 묘소를 파헤치지 않고 계속하여 제사를 받들게 한 일이다. 《大戴禮記 保傅》‧《新書 胎敎》
역주16 聲同則處異而相應 德合則未見而相親 : 《周易》 乾卦 九五 〈文言傳〉의 “같은 소리끼리 서로 응하며, 같은 기운끼리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와 《莊子》 〈漁父〉의 “같은 종류끼리 서로 따르며, 같은 소리끼리 서로 응한다.[同類相從 同聲相應]”에서 유래하였다.
역주17 {北}走桓公 : 管仲이 子糾를 도와 齊侯로 옹립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魯나라로 도망쳤다가 齊 桓公에게 귀의한 일이다. 賈誼의 《新書》 권10에 ‘北’자가 없어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18 陳靈公殺泄冶 : 본서 권1 〈君道〉의 04 참조.
역주19 鄧元去陳 : 鄧元은 춘추시대 陳 靈公의 신하이다. 자세한 행적은 미상이다. 《韓詩外傳 7》‧《大戴禮記 保傅》
역주20 棲閔王於莒 : 閔王은 곧 齊 湣王이다. 莒는 춘추시대 邑 이름이다. 원래는 옛 莒나라의 領土로 뒤에 魯나라에 속했다가 다시 齊나라에 속했다. 지금의 山東省 莒縣에 있었다. 《春秋左氏傳 昭公 3년》‧《讀史方輿紀要 山東 6 靑州府》
역주21 信意 : ‘자기의 뜻을 펴다’라는 뜻이다. ‘信’은 ‘伸’과 통용이다.

설원(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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