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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苑(1)

설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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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0. 曰 取士有道乎
對曰 有하니 窮者達之하고 亡者存之하며 廢者起之하시면 四方之士 則四面而至矣리이다
窮者不達하고 亡者不存하며 廢者不起하시면 四方之士 則四面而畔矣리이다
夫城固不能自守하고 兵利不能自保하며 得士而失之 必有其閒이니
夫士存則君尊하고 士亡則君卑니이다
周威公曰 士壹至如此乎
對曰 君不聞夫楚잇가
王有士하니이라
王將殺之어늘 出亡之晉한대 晉人用之하니 是爲이니이다
又有士하니이라
王將殺之어늘 出亡走晉한대 晉人用之 是爲이니이다
又有士하니
王將殺之어늘 出亡走晉한대 晉人用之하니 是爲이니이다
又有士하니 曰伍子胥
王殺其父兄어어늘 出亡走吳한대 闔閭用之하니 於是興師而襲郢이라
故楚之大得罪於梁鄭宋衛之君호되 猶未遽至於此也어늘 此四得罪於其士하야 三暴其民骨하고 一亡其國하니이다
由是觀之컨대 士存則國存하고 士亡則國亡이니이다
子胥怒而亡之하고 申包胥怒而存之하니 士胡可無貴乎잇가


주 위공周 威公영자甯子에게 물었다. “어진 인재를 뽑는 데 방법이 있소?”
영자甯子는 대답했다. “있습니다. 곤궁한 사람을 현달하게 하고 망하게 된 사람을 생존하게 하며 폐기된 사람을 기용하시면, 사방의 인재들이 사면에서 올 것입니다.
곤궁한 사람을 현달하게 하지 않고 망하게 된 사람을 생존하게 하지 않으며 폐기된 사람을 기용하지 않으면, 사방의 인재들이 사면에서 배반하고 떠날 것입니다.
성은 견고한데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무기는 날카로운데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며, 인재를 얻었으나 다시 잃는 것은 반드시 빈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재가 있으면 임금이 존중尊重받게 되고, 인재를 잃으면 임금이 비천卑賤하게 됩니다.”
주 위공이 다시 물었다. “인재는 이처럼 한결같이 귀중한 것입니까?”
영자는 다시 대답하였다. “임금께서는 나라의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초왕楚王에게 혜서傒胥구부객丘負客이라는 인재가 있었습니다.
초왕楚王이 이들을 죽이려고 하기에 망명하여 나라로 가자, 진 문공晉 文公이 이들을 등용하여 〈초나라를 격파하였으니〉 이것이 성복城濮의 전쟁입니다.
묘분황苗賁皇이라는 인재가 있었습니다.
초왕이 죽이려 하기에 망명하여 나라로 가자, 진 여공晉 厲公이 등용하여 〈초나라를 격파하였으니〉 이것이 언릉鄢陵의 전쟁입니다.
상해우上解于라는 인재가 있었습니다.
초왕이 죽이려 하기에 망명하여 나라로 가자, 진군晉君이 등용하여 〈초나라를 격파하였으니〉 이것이 양당兩堂의 전쟁입니다.
오자서伍子胥라는 인재가 있었습니다.
초왕이 그의 아버지와 형을 죽였는데 망명하여 나라로 가자,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등용하여 이에 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의 수도 을 습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나라가 나라 군주에게 큰 죄를 지었으나 대번에 이런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는데, 이 네 차례의 패배는 인재에게 죄를 얻어 세 번이나 그들 백성의 해골이 들판에 나뒹굴고 한 차례 국도國都를 잃었던 것입니다.
이를 따라 살펴보면 인재가 있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인재를 잃으면 나라가 망하는 법입니다.
오자서伍子胥는 노하여 나라 국도國都를 잃게 하였고 신포서申包胥는 노하여 초나라를 보존하였으니, 인재가 어찌 귀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역주
역주1 周威公問於甯子 : 본서 권3 〈建本〉의 20 참조.
역주2 (平)[乎] : 저본에는 ‘平’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宋本에 이미 ‘平’자로 잘못 써 아래와 연결하여 ‘平王’이라 하였다.” 하였고, 《困學紀聞》 〈諸子〉에 “城濮의 전쟁은 楚 成王 때의 일이니 平王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라고 한 《說苑校證》에 의거하여 ‘乎’로 고쳤다.
역주3 楚傒胥丘負客 : 楚 傒胥와 丘負客은 사람 이름인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역주4 城濮之戰 : 춘추시대 晉 文公이 齊‧宋‧秦의 연합군과 楚나라 군대가 城濮(지금의 山東省 鄄城縣 서남쪽 臨濮集)에서 전쟁하여 晉나라가 크게 승리한 전쟁이다. 晉 文公은 이 전쟁의 승리로 霸者가 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28년》
역주5 苗賁皇 : 춘추시대 楚나라 사람으로, 若敖氏의 종족이며, 令尹 鬪椒의 아들이다. 투초가 亂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楚 莊王이 약오씨의 종족을 멸하자 賁皇이 晉나라로 달아났다. 晉나라는 苗邑(지금의 河南省 濟垣縣 서쪽)에 封했기 때문에 苗씨가 되었다. 《春秋左氏傳 宣公 17년‧成公 16년‧襄公 26년‧昭公 5년》
역주6 鄢陵之戰 : 楚 共王 16년(B.C. 575)에 鄢陵(지금의 河南省 鄢陵縣 서북쪽)에서 晉나라의 연합군과 싸워 크게 패배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苗賁皇이 晉 厲公에게 계책을 제공하여 승리하였다. 《春秋左氏傳 成公 16년》
역주7 上解于 : 사람 이름인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역주8 兩堂之戰 : ‘堂’은 ‘棠’과 통용한다. 兩棠은 곧 邲인데, 춘추시대 지금의 河南省 鄭州市 서북쪽에 있던 鄭나라의 지명이라는 설과 楚나라의 지명이라는 설이 있다. 《春秋左氏傳》 宣公 12년에 “晉나라와 楚나라가 邲에서 전쟁하여 楚나라가 晉나라에 승리하였다.”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晉나라가 승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說苑校證》에는 “혹시 晉나라와 楚나라가 邲에서 두 차례 전쟁을 한 것인가 보다.” 하였다.

설원(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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