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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苑(1)

설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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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7. 田子方渡西河하야 造翟黃하니 翟黃乘하야 華蓋하고 黃金之勒 하니 如此者 其駟八十乘이러라
子方望之하고 以爲人君也하야 道狹이어늘 下抵車而待之하다
翟黃至而睹하니 其子方也
下車而趨하야 自投下風曰 觸이니이다
田子方曰 子與 吾嚮者望子하고 疑以爲人君也러니 子至而人臣也로다 將何以至此乎
翟黃對曰 此皆君之所以賜臣也 積三十歲 故至於此니이다
時以閒暇하야 라가 正逢先生이로소이다
子方曰 何子賜車轝之厚也
翟黃對曰 昔者 西河無守어늘 臣進하야 而西河之外寧하고 鄴無令이어늘 臣進하야 而魏無趙患하고 無令이어늘 臣進하야 而魏無齊憂하고
魏欲攻中山이어늘 臣進樂羊하야 而中山拔하고 魏無使治之臣이어늘 臣進李克하야
是以 進此五大夫者 爵祿倍하니 以故至於此니이다
子方曰 可하다 子勉之矣어다 魏國之相 不去子而之他矣리라
翟黃對曰 君母弟有公孫季成者하니 進子夏而君師之하시고 進段干木而君友之하시고 進先生而君敬之하시니이다
彼其所進 師也 友也 所敬者也 臣之所進者 皆守職守祿之臣也 何以至魏國相乎잇가
子方曰 吾聞身賢者賢也 能進賢者亦賢也라하니 子之五擧者盡賢이니 子勉之矣어다 子終其次也리라


전자방田子方서하西河를 건너 책황翟黃을 방문하니, 책황이 헌거軒車에 타고서 화려한 수레 뚜껑을 덮고 황금으로 장식한 말굴레에 옥을 끈으로 묶어 대자리를 눌렀는데, 네 마리 말이 끄는 이와 같은 수레가 80채였다.
전자방이 바라보고 임금이라 여겨 길이 좁기에 내려서 수레를 밀어놓고 기다렸다.
책황이 당도하여 보니 전자방이었다.
수레에 내려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스스로 전자방의 아래에 몸을 낮추면서 말했다. “책촉翟觸(책황翟黃)입니다.”
전자방이 말했다. “그대인가! 나는 조금 전에 그대를 바라보고 임금의 행차인가 하고 의심했었는데, 그대가 당도하고 보니 신하로구나. 도대체 어떻게 이런 대단한 지경에 이르렀는가?”
책황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모두 임금이 저에게 하사한 것인데, 30년 동안 모아 쌓았기 때문에 이처럼 되었습니다.
때마침 한가한 틈을 타 광야에 가다가 바로 선생을 만난 것입니다.”
전자방이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대에게 이 많은 수레를 하사하였는가?”
책황이 대답하였다. “전에 서하군西河郡를 다스릴 태수太守가 없기에 제가 오기吳起를 추천하여 서하西河 이외 지역이 편안하였고, 업현鄴縣현령縣令이 없기에 제가 서문표西門豹를 추천하여 나라에 나라가 침입하는 우환이 없어졌고, 산조현酸棗縣현령縣令이 없기에 제가 북문가北門可를 추천하여 위나라에 나라가 침입하는 우환이 없어졌고,
위나라가 중산국中山國을 공격하려 하기에 제가 악양樂羊을 추천하여 중산국을 정복하였으며, 중산국을 이미 정복한 뒤에 위나라에 그곳을 다스리게 할 신하가 없기에 제가 이극李克을 추천하여 위나라가 잘 다스려졌습니다.
이 다섯 대부大夫를 추천한 일 때문에 벼슬과 녹봉이 배로 증가하니, 이 때문에 이렇게 많은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전자방이 말했다. “좋다. 그대는 노력하게! 위나라의 재상은 그대에게 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네.”
책황이 대답하였다. “임금의 동복아우에 공손계성자公孫季成子가 있는데, 자하子夏를 추천하자 임금께서 스승으로 섬기셨고, 단간목段干木을 추천하자 임금께서 벗으로 사귀셨으며, 선생을 추천하자 임금께서 존경하셨습니다.
저 사람이 추천한 사람은 임금의 스승이고 벗이며 존경하는 사람이고, 제가 추천한 사람은 모두 벼슬살이하며 녹봉을 받는 신하이니 어떻게 위나라의 재상에까지 오르겠습니까?”
전자방이 말했다. “나는 들으니 ‘자신이 현명賢明한 사람은 현명한 사람에 속하고,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는 사람도 현명한 사람이다.’라고 하니, 그대가 추천한 다섯 사람은 모두 현명한 사람이니 그대는 노력할지어다. 그대는 결국 그 다음에 될 것이다.”


역주
역주1 軒車 : 휘장으로 둘러친 수레이다. 고대에 大夫 이상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탔다. 수레를 일반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쓴다. 《莊子 讓王》‧《後漢書 劉盆子傳》
역주2 : ‘戴’와 통용한다.
역주3 約鎭簟席 : 노끈으로 玉石을 연결하여 수레에 깐 대자리를 누른다는 뜻이다. ‘約’은 노끈으로 묶는다는 뜻이다. ‘鎭’은 玉鎭으로, 자리를 누르는 용구이다. 《楚辭》 〈九歌 湘夫人〉의 “白玉으로 鎭을 삼고[白玉兮爲鎭]”라 한 구절의 朱熹 集注에 “鎭은 자리를 누르는 것이다.[鎭 壓坐席者也]”라 하였다.
역주4 祖之曠野 : 광야에 간다는 뜻이다. 《說苑校證》의 “‘祖’는 ‘徂’로 읽고, ‘之’는 ‘於’와 같다.”는 설에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5 吳起 : 전국 초기의 유명한 兵法家로 衛나라 사람이다. 처음 魯나라에서 장군이 되어 齊나라 군대를 大敗시켜 이름이 났으나 참소를 당하여 魏나라로 갔다. 魏 文侯에게 重用되어 西河郡守가 되고 명성을 드날렸으나 다시 참소를 당하여 楚나라로 달아났다. 楚 悼王이 재상에 임명하였는데, 뒤에 귀족들의 미움을 받아 피살되었다. 《史記 孫子吳起列傳》
역주6 西門豹 : 西門은 複姓이고, 豹는 이름이다. 전국 초기 魏나라 사람이다. 魏 文侯의 개혁정치에 적극 참여하였고, 鄴의 令이 되어 河伯에게 해마다 처녀를 바치는 미신 행위를 폐지시키고 관개시설을 만들어 治績이 높았다. 《史記 滑稽列傳》‧《戰國策 魏策 1》
역주7 酸棗 : 옛 縣 이름이다. 춘추시대 鄭나라의 酸棗邑으로, 漢代에 縣을 두었다. 古城은 지금의 河南省 延津縣 서남쪽에 있는데, 酸棗山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春秋左氏傳 襄公 30년》‧《漢書 地理志 上》
역주8 北門可 : 北門은 複姓이고, 可는 이름이다. 일생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역주9 〈中山已拔〉 : 저본에는 ‘中山已拔’이 없으나, 《太平御覽》 권632에 의거하여 보충한 《說苑校證》을 따라 보충하였다.
역주10 魏國大治 : 《韓非子》 〈外儲說 下〉에는 “中山國을 얻고는 〈중산국을〉 다스릴 신하를 구하려고 걱정하시기에 제가 李克을 추천하자 중산국이 잘 다스려졌습니다.[得中山 憂欲治之臣 臣薦李克而中山治]”라 하여 중산국이 잘 다스려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극이 다스린 곳은 중산국이지, 魏나라가 아니다.

설원(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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