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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苑(1)

설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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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春秋之時 天子微弱하니 諸侯力하야 皆叛不朝
衆暴寡하고 彊劫弱하며 南夷與北狄交侵하야 中國之不絶若線이러라
桓公於是 用管仲鮑叔隰朋甯戚하야 하고 하며 救中國하고 攘戎狄하며 卒脅荊蠻하야 以尊周室하고 霸諸侯하다
晉文公用咎犯하야 彊中國하고 敗彊楚하야 合諸侯하고 朝天子하야 以顯周室하다
楚莊王用하야 征陳從鄭하고 敗彊晉하야 無敵於天下하다
秦穆公用하야 據有雍州하고 攘敗西戎하다
吳用하야 幷冀州하고 揚威于雞父하다
富有千乘之國하고 貴爲諸侯호되 不順人心하야 而取弑於臣者하니 不先得賢也
至簡公하야 用子産裨諶世叔行人子羽하야 賊臣除하고 正臣進하며 去彊楚하고 合中國하니 國家安寧하야 二十餘年 無彊楚之患이라
故虞有 晉獻公爲之終夜不寐하고 楚有 文公爲之側席而坐하니
遠乎 賢者之厭難折衝也
夫宋襄公 하야 大辱於楚하고 이라
國家之任賢而吉하고 任不肖而凶하나니 案往世而視已事 其必然也 如合符하니
此爲人君者不可以不愼也
國家惛亂而良臣見하나니 魯國大亂 이라
僖公卽位而任季子한대 魯國安寧하야 外內無憂하야 行政二十一年이러니
季子之卒後 擊其南하고 齊伐其北하니 魯不勝其患하야 將乞師於楚以取全耳
故傳曰 라하니라
하고 하야 內侵於臣下하고 外困於兵亂하니 弱之患也
僖公之性 非前二十一年常賢이라가 而後乃漸變爲不肖也
此季子存之所益이요 亡之所損也
夫得賢失賢 其損益之驗如此어늘 而人主忽於所用하니 甚可疾痛也로다
夫智不足以見賢이면 無可奈何矣어니와
若智能見之로되 而彊不能決하야 猶豫不用이면 而大者死亡하고 小者亂傾이니 此甚可悲哀也
安知孔父死 己必死하야 趨而救之리오
趨而救之者 是知其賢也
不知季子之賢乎
安知疾將死 召季子而授之國政이리오
授之國政者 是知其賢也
此二君 知能見賢而皆不能用이라
故宋殤公以殺死하고 魯莊公以賊嗣하니
使宋殤蚤任孔父하고 魯莊素用季子런들 乃將靖隣國이어든 而況自存乎


춘추시대에 천자天子의 권력이 미약하니 제후諸侯들이 무력으로 서로 정벌하여 모두 주왕周王을 배반하고 조현朝見하지 않았다.
군사가 많은 자는 적은 자를 능욕하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겁박하며, 남이南夷북적北狄이 서로 번갈아 침략하여 중국의 운명이 겨우 한 올의 실처럼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다.
제 환공齊 桓公이 이때 관중管仲포숙鮑叔습붕隰朋빈서무賓胥無영척甯戚 등을 등용하여 망해가는 세 나라를 존속시켜 주고 한 차례 끊어지는 세대를 이어주었으며, 중원中原제후국諸侯國을 구원하고 융적戎狄을 물리쳤으며, 마침내 형만荊蠻을 압박하여 나라 왕실을 높이 받들게 하고 제후諸侯 중에 패자霸者가 되었다.
진 문공晉 文公구범咎犯선진先軫양처보陽處父 등을 등용하여 중원中原제후국諸侯國을 강력하게 하고 강대한 나라를 패퇴시켜 제후諸侯와 연합하고 천자에게 조근朝覲하여 나라 왕실을 높이 드러나게 하였다.
초 장왕楚 莊王손숙오孫叔敖사마자반司馬子反과 장군 자중子重 등을 등용하여 나라를 토벌하고 나라를 복종시켰으며, 강성한 나라를 패배시켜 천하에 상대할 적수가 없었다.
진 목공秦 穆公백리자百里子건숙자蹇叔子왕자료王子廖유여由余 등을 등용하여 옹주雍州를 차지하고 서융西戎을 물리쳤다.
나라는 연주래계자延州來季子를 등용하여 기주冀州를 겸병하고 계보雞父에서 위세를 떨쳤다.
정 희공鄭 僖公천승千乘 나라의 부유함을 소유하고 제후諸侯의 존귀한 신분이 되었으나 정도正道로 다스리지 않고 백성의 마음을 따르지 않아 신하에게 시해를 당하였으니, 어진 이 얻는 것을 우선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공簡公 때에 이르러 자산子産비심裨諶세숙世叔행인行人 자우子羽를 등용하여 적신賊臣을 제거하고 정신正臣을 임용하여 강한 초나라를 물리치고 중원中原의 제후국과 연합하니, 국가가 평안하여 20여 년 동안 강한 나라가 침범하는 근심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라에 궁지기宮之奇가 있을 적에 진 헌공晉 獻公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초나라에 자옥득신子玉得臣이 있을 적에 진 문공晉 文公은 불안하여 자리를 바로하고 앉지 못하였다.
심원深遠하구나. 어진 이가 환난을 극복하고 적을 제압하여 승리를 취함이여!
송 양공宋 襄公공자 목이公子 目夷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나라에 큰 치욕을 당했고, 나라는 희부기僖負羈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않아 에게 패배하여 죽고 말았다.
그래서 오시五始의 요체와 혼란을 다스리는 근본을 공손히 생각해야 되니, 자신을 자세히 살피고 어진 이를 임용하는 데 달려 있다.
국가가 어진 이를 임용하면 하고 불초不肖한 사람을 임용하면 하니, 지난 시대를 고찰하고 지나간 일을 살펴보면 부절符節을 맞춘 것처럼 틀림없다.
이것이 임금 된 사람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국가가 혼란할 때에 양신良臣이 나타나는 것이니, 나라가 크게 혼란했을 때 계우季友 같은 어진 이가 나타났다.
희공僖公이 즉위하면서 계우를 등용하자 노나라가 평안해져서 내외에 근심이 없어 21년 동안 정치를 맡아 행하였다.
계우가 죽은 뒤에 나라는 노나라의 남쪽을 공격하고 나라는 북쪽을 공격하니, 노나라는 그 우환憂患을 견디지 못하여 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여 보전하려고 하였다.
그 때문에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환난이 반드시 여기서부터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공자매公子買나라를 지키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공자수公子遂는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 마음대로 나라에 가서 안으로는 신하에게 능멸을 당하고 밖으로는 전쟁에 시달렸으니 국력이 약화되어 초래한 환난이다.
희공僖公의 본성이 이전의 21년은 항상 현명하다가 그 뒤에 차츰 변하여 불초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는 계자季子가 살아 있을 적에는 유익하였고, 죽고 나서는 손실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어진 이를 얻고 잃는 데 따라 그 손익損益의 결과가 이와 같은데 임금이 사람을 등용하는 일에 소홀하니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지혜가 어진 이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알아볼 수 있는 지혜가 있는데도 강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등용하지 못하면, 크게는 자신은 죽고 나라는 멸망하며 작게는 혼란하여 나라가 기울어지니 이는 매우 슬퍼할 만한 일이다.
宋 殤公공보孔父가 현명한 줄을 몰랐겠는가?
〈몰랐다면〉 어찌 공보가 죽으면 자기도 반드시 죽을 것임을 알아서 달려가 구했겠는가?
달려가 그를 구한 것은 바로 그가 현명한 줄을 알았다는 증거이다.
노 장공魯 莊公계자季子가 현명한 줄을 몰랐겠는가?
〈몰랐다면〉 어찌 병이 들어 죽으려 할 적에 계자季子를 불러 국정國政을 맡겨줄 줄을 알았겠는가?
국정國政을 맡겨준 것은 바로 그가 현명한 줄을 알았다는 증거이다.
이 두 임금은 어진 이를 알아보는 지혜는 있으나 모두 어진 이를 중용重用하지 못했다.
그래서 송 상공宋 殤公은 죽임을 당하였고, 노 장공魯 莊公후사後嗣를 죽게 하였다.
만일 송 상공이 일찍 공보孔父를 임용하고 노 장공이 평상시에 계자季子를 중용했더라면 이웃 나라까지도 안정시켰을 것이니, 하물며 자신을 보존하는 일쯤이랴!


역주
역주1 : 征과 통용한다. 《說苑纂注》에 澀井孝德의 說을 인용하여 “‘政’은 ‘征’이 되어야 마땅하다.” 하였고, 《說苑校證》에 “《淮南子》 〈要略〉에 ‘征’으로 썼다.” 하였으므로 ‘정벌하다’로 번역하였다.
역주2 賓胥無 : 춘추시대 齊 桓公 때의 賢臣이다. 無辜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죄 없는 사람을 誣陷하지 않았다 한다. 賓須無로도 쓴다. 《管子 小匡》‧《春秋左氏傳 昭公 13년》
역주3 三存亡國 : 망해가는 세 나라를 존속시켜 주다. 세 나라는 魯‧衛‧邢나라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19년》
역주4 一繼絶世 : 《說苑纂注》에 “襄王의 天子位를 안정시킨 일이다.” 하였다.
역주5 先軫陽處父(보) : 先軫은 춘추시대 晉나라 大夫이다. 城濮의 싸움에서 楚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原軫으로도 쓴다. 《春秋左氏傳 僖公 27‧28‧33년, 文公 16년》 陽處父는 춘추시대 晉나라 太傅이다. 蔡나라를 정벌하고 楚나라에 포위당한 江나라를 구원하였다. 襄公이 죽은 뒤 中軍師 賈季(狐射姑)에게 살해되었다. 《春秋左氏傳 文公 6년》‧《國語 晉語 5》
역주6 孫叔敖司馬子反將軍子重 : 孫叔敖는 춘추시대 楚나라 名臣이다. 蒍氏, 이름은 敖, 字는 孙叔이다. 令尹으로 세 번 등용되고 세 번 파면되었으나 기뻐하지도 근심하지도 않았으며,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 한다. 《孟子 告子 下》‧《史記 循吏列傳》‧《淮南子 人間訓》 司馬子反은 楚나라 장군이다. 성은 羋(미), 熊氏, 이름은 侧, 字는 子反이다. 莊王을 따라 晉나라 군대를 邲에서 패배시켰고, 共王 때 中軍將이 되어 장군 子重과 鄭나라를 구원하였다. 뒤에 鄢陵에서 晉나라 군대에 패배하여 자살하였다. 《春秋公羊傳 宣公 15년》‧《春秋左氏傳 成公 9년》 將軍 子重은 춘추시대 楚나라 令尹이다. 성은 羋, 熊氏, 이름은 嬰齊, 字는 子重이다. 楚 莊王의 아우이다. 처음에 左尹이 되었다가 共王 때 令尹이 되었다. 또한 楚나라 名將으로서 宋나라를 토벌하였고, 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春秋左氏傳 宣公 11‧12년, 成公 2‧7‧9‧11‧16년, 襄公 2‧3년》
역주7 百里子蹇叔子王子廖及由余 : 百里子는 곧 百里奚이다. 蹇叔은 춘추시대 秦나라 大夫이다. 백리해의 추천으로 穆公을 보좌하여 霸者가 되게 하였다. 목공이 鄭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패하게 되는 이유를 들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아 秦軍이 전멸하는 패배를 당했다. 王子廖는 춘추시대 晉 穆公의 內史이다. 西戎에서 使臣 온 由余를 항복하게 하는 꾀를 내어 진 목공을 도왔다. 由余는 춘추시대 진 목공을 도와 西戎에서 霸者를 일컫게 한 賢臣이다. 원래는 晉나라 사람이었으나, 秦나라에 使臣으로 갔다가 진 목공의 현명함을 보고 신하가 되어 西戎을 攻伐하는 책략을 내어 도왔다. 《春秋左氏傳 僖公 32‧33년》‧《史記 秦本紀》
역주8 延州來季子 : 춘추시대 吳나라 公子 季札로, 吳王 壽夢의 넷째 아들이다. 延陵에 封해졌기 때문에 延陵季子라고 하며, 또 吳나라가 楚나라의 州來를 빼앗아 季札을 封했으므로 延陵來季子, 또는 延州來季子라고 하는데 줄여서 季子라고도 한다. 인품이 훌륭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칭송되었다. 《春秋左氏傳 襄公 14‧31년, 昭公 27년》‧《史記 吳泰伯世家》
역주9 鄭僖公 : 춘추시대 鄭나라 군주로 이름은 惲, 또는 髡頑이다. 太子가 되어 晉‧楚나라에 갈 때 함께 간 大夫를 예우하지 않았고, 즉위한 뒤에 晉나라가 諸侯들과 鄭나라에서 회합할 때 子駟가 보좌하였는데 또 예우하지 않자 자사가 사람을 시켜 시해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 7년》
역주10 治義 : 正道로 다스리지 않다. 王引之의 《經義述聞》 〈尙書 下〉에서 인용한 王念孫의 〈立政〉에 나오는 “三宅無義民”의 ‘義’는 ‘俄’와 통용되며, ‘奸邪’의 뜻이라는 설과 兪樾의 《群經平議》 〈春秋左傳 1〉에서 인용한 “掩義與隱賊一律”의 ‘義’는 ‘不善’이라는 설을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11 宮之奇 : 춘추시대 虞나라 大夫이다. 晉 獻公이 虞君에게 虢을 치러 갈 길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우군에게 허락하지 말라고 諫하였으나 듣지 않자 가족을 데리고 曹나라로 달아났다. 석 달 뒤 虞와 虢은 晉나라에 멸망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2‧5년》
역주12 子玉得臣 : 춘추시대 楚나라 令尹으로, 성은 成, 字는 子玉이다. 成王 때 陳나라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晉나라와의 城濮 전투에서 패배하자 자살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23‧26‧27‧28년, 文公 10년, 宣公 12년》‧《史記 楚世家》
역주13 不用公子目夷之言 : 目夷는 곧 公子 子魚이다. 본서 권4 〈立節〉의 08 참조.
역주14 曹不用僖負羈之諫 敗死於戎 : 僖負羈는 춘추시대 曹나라 大夫이다. 晉의 重耳(文公)가 망명하면서 曹나라에 갔을 때 曹伯이 목욕하는 重耳를 몰래 훔쳐보는 무례를 범하자 희부기가 諫한 일이 있다. 중이가 즉위한 뒤 조나라를 토벌하여 조백을 잡아 宋나라에 주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24‧28년》 敗死於戎은 曹나라의 賢大夫 曹羈의 일인데, 僖負羈의 일로 잘못 기록하였다. 曹羈가 諫한 일은 《春秋公羊傳》 僖公 24‧26년에 보인다.
역주15 共惟五始之要……在乎審己而任賢也 : 《春秋》의 記事는 元年‧春‧王‧正月‧公卽位 등의 다섯 가지 일로 시작하는데, 이를 五始라 한다. 《漢書》 〈王褒傳〉에 “공손히 생각건대 《춘추》에서 다섯 가지 시작의 중요함을 법으로 삼았으니, 자신을 성찰하여 왕통을 바로잡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共惟春秋法五始之要 在乎審己正統而已]”라 하였는데, 顔師古 注에 “元은 氣의 시작, 春은 四時의 시작, 王은 受命의 시작, 正月은 正敎의 시작, 公卽位는 一國의 시작이다.”라 하였다.
역주16 季友之賢見 : 季友는 춘추시대 魯 莊公의 아우이다. 成季라고도 한다. 장공이 죽은 뒤 公子般을 세웠는데 慶父가 般을 죽이자 陳나라로 달아났다. 경보가 장공의 아들 啓方을 세워 閔公이 되었는데, 계우가 魯나라로 돌아오자 경보는 또 민공을 죽였다. 계우는 다시 민공의 형 申을 데리고 도망쳤다가 경보가 백성들에게 용납받지 못하여 莒로 달아나자 돌아와 申을 세워 僖公으로 삼으니 경보는 자살하였다. 뒤에 費에 봉해지고 相이 되었는데, 그의 자손이 季孫氏로 魯나라 국정을 전담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 27‧32년》‧《史記 魯周公世家》
역주17 : 춘추시대 지금의 山東省 鄒城市 지역에 있던 小國이다. 周 武王이 曹俠을 이곳에 봉하여 魯나라의 附庸國이 되었다. 爵位는 子이다.
역주18 患之起必自此始也 : 《春秋公羊傳》 僖公 26년에 보인다.
역주19 公子買不可司戍衛 : 公子買가 衛나라 변경을 지키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공자매는 魯나라의 大夫로, 字는 子叢이다. 당시 晉‧楚는 서로 사이가 나빴고, 楚‧魯‧衛는 우호적인 관계였는데, 魯 僖公이 공자매를 파견하여 衛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晉나라가 衛나라를 공격하자 楚나라가 구원에 나섰으나 패배하니, 晉나라의 미움을 받게 될까 두려워한 희공이 공자매를 죽여서 해명한 일을 이른다. 《春秋左氏傳 僖公 28년》
역주20 公子遂不聽君命而擅之晉 : 公子遂가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晉나라에 갔다는 말이다. 공자수는 魯 莊公의 아들로 僖公‧文公 때 卿이 되어 국정을 맡았다. 《春秋左氏傳》에 보면 僖公 30‧31년에 두 차례 晉나라에 갔고 모두 희공의 명으로 갔는데 여기서 “제 마음대로 갔다.”는 것은 오해가 있는 듯하다.
역주21 宋殤公不知孔父(보)之賢乎 : 宋 殤公은 춘추시대 宋나라 군주로, 이름은 與夷이며, 宣公의 아들이다. 孔父는 宋나라 大司馬로, 이름은 嘉이고, 孔子의 6대조이다. 상공이 전쟁을 좋아하여 10년 동안 11번이나 전쟁을 하자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다. 太宰 華父督이 미모가 뛰어난 공보의 아내를 보고 전쟁의 책임이 공보에게 있다 선언하고 공보를 살해한 다음 그의 아내를 취하였다. 이에 상공이 노하자 화보독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상공마저 시해하였다. 《春秋左氏傳 隱公 3년, 桓公 2년》
역주22 魯莊公 : 춘추시대 魯나라 군주로, 이름은 同이고, 桓公의 아들이다. 즉위 후 9년에 齊 桓公의 요청으로 魯나라에 도망 온 齊 桓公의 형 子糾를 죽이고 管仲을 齊나라로 돌려보냈다. 《春秋左氏傳 莊公 9년》

설원(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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