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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苑(2)

설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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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26. 子路問於孔子曰 管仲 何如人也잇고
子曰 大人也니라
子路曰 昔者 管子說 襄公不說하니 是不辯也 欲立而不能하니 是無能也 家殘於齊而無憂色하니 是不慈也 호되 無慙色하니 是無愧也 하니 是不貞也 死之어늘 管仲不死하니 是無仁也어늘 夫子何以大之니잇고
子曰 管仲說襄公 襄公不說 管仲非不辯也 襄公不知說也 欲立子糾而不能 非無能也 不遇時也 家殘於齊而無憂色 非不慈也 知命也 桎梏居檻車而無慙色 非無愧也 自裁也 事所射之君 非不貞也 知權也 召忽死之어늘 管仲不死 非無仁也 召忽者 人臣之材也 不死則三軍之虜也 死之則名聞天下어늘 夫何爲不死哉리오
管子者 天子之佐 諸侯之相也 死之則不免爲溝中之이요 不死則功復用於天下 夫何爲死之哉 汝不知也니라


자로子路공자孔子께 여쭈었다. “관중管仲은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대인大人이다.”
자로가 다시 말했다. “옛날 관자管子양공襄公에게 유세했을 때 양공이 즐거워하지 않았으니 이는 말재주가 없는 것이고, 공자 규公子 糾를 임금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으니 이는 능력이 없는 것이며, 집안사람이 나라에서 해를 입었는데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자애롭지 않은 것이고, 차꼬와 수갑을 차고 함거檻車에 갇혔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며, 자기가 활을 쏘아 죽이려던 임금을 섬겼으니 이는 충정忠貞하지 않은 것이고, 소홀召忽은 따라 죽었는데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이는 인덕仁德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어찌 대인이라고 하십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관중管仲이 양공에게 유세했을 때 양공이 즐거워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말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라 양공이 밝지 못하여 그 말이 즐거운지를 몰랐기 때문이고, 공자 규를 세우려다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집안사람이 나라에서 해를 입었는데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던 것은 자애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천명天命이 이와 같음을 알았기 때문이고, 차꼬와 수갑을 차고 함거檻車에 갇혔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던 것은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제했기 때문이고, 자기가 활을 쏘아 죽이려던 임금을 섬긴 것은 충정忠貞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권변權變을 알았기 때문이고, 소홀은 따라 죽었는데 관중이 죽지 않은 것은 인덕仁德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홀은 남의 신하가 될 재목에 불과하니 따라 죽지 않으면 삼군三軍의 포로가 되고 죽으면 천하에 이름이 날 것이니, 어찌 죽지 않겠느냐.
관중은 천자天子를 보필할 재목이고, 제후諸侯의 재상이 될 인물이다. 죽으면 구렁텅이에서 썩는 해골 신세를 면치 못하고, 죽지 않으면 천하에 공업功業을 다시 세울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죽겠느냐. 중유仲由(자로)야, 너는 그 도리를 알지 못한다.”


역주
역주1 襄公 : 춘추시대 齊나라 군주이다. 이름은 諸兒로 莊公의 손자이다. 魯 文公의 부인이 된 누이 文姜과 간음하였다. 大夫 連稱과 管至父에게 葵丘를 지키게 하고 기한이 지나도 교체해주지 않자, 이들이 난리를 일으켜 양공을 시해하였다. 《春秋左氏傳 桓公 15‧18년, 莊公 2‧7‧8년》‧《史記 齊太公世家》
역주2 公子糾 : 춘추시대 齊 襄公의 아우이다. 양공이 亂政을 행하자, 魯나라로 망명하였다가 양공이 시해당한 뒤 齊나라에 들어와 齊侯가 되려 하였다. 그러나 먼저 들어와 즉위한 小白(桓公)이 노나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소백이 노나라에 명하여 죽이게 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 8‧9년》‧《史記 齊太公世家》
역주3 桎梏而居檻車中 : 齊 襄公이 시해당하자 管仲과 召忽이 公子 糾를 받들고 魯나라로 달아났다. 한편 鮑叔은 小白과 莒로 달아났다가 먼저 齊나라에 들어간 소백이 공자 규를 들여보내려는 노나라의 군대와 싸워 이기자, 桓公이 노나라에 관중을 보내라고 요청하니, 관중에게 차꼬와 수갑을 채워 檻車에 실어 보낸 일을 이른다. 《春秋左氏傳 莊公 8‧9년》
역주4 事所射之君 : 管仲이 小伯(桓公)을 죽이려고 활을 쏘았으나 화살이 소백의 띠쇠[帶鉤]를 맞히는 바람에 소백이 죽지 않았는데, 관중은 뒤에 환공을 섬겨 재상이 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24년》‧《抱朴子 君道》
역주5 召忽 : 춘추시대 齊나라 대부이다. 管仲과 함께 公子 糾를 섬겼다. 양공이 죽은 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공자 규를 따라 魯나라로 망명하였다. 뒤에 공자 규를 보호하여 제나라로 돌아와 君位를 다투려 하였으나 먼저 들어온 소백이 즉위하여 노나라에게 공자 규를 죽이게 하자 召忽도 따라 죽었다. 《春秋左氏傳 莊公 8‧9년》‧《管子 中匡》
역주6 : ‘胔’와 통용으로, 아직 완전히 썩지 않은 시체를 이른다.

설원(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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