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目]진秦나라가 초楚나라를 정벌하고 성城 여덟 개를 빼앗았다.
진秦나라 왕王이 마침내 초楚나라 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처음에 과인寡人이 왕과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여 황극黃棘에서 맹약하고 태자太子가 인질로 들어와서 매우 화락하였습니다.
태자가 과인의
중신重臣을 죽이고 사과도 없이 도망을 갔으므로, 과인이 참으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군왕君王의 변경을 침범하게 하였습니다.
注+① 중구重丘에서 싸운 것과 양성襄城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
이제 들으니 군왕이 마침내 태자로 하여금 제齊나라에 인질로 보내 화평을 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과인은
초楚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혼인婚姻을 하여 서로 친한데, 이제 두 나라가 화락하지 않으면
제후諸侯들을 호령할 수 없습니다.
注+② 난왕赧王 4년부터 이해에 이르기까지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는 혼인하지 않았다. 19년에 이르러 회왕懷王이 진秦나라에서 죽고, 23년에 양왕襄王이 신부新婦를 진秦나라에서 맞이하였다. 대개 먼저 이미 혼인을 약속하고 나중에 상례를 마치고 비로소 신부를 맞이하여 혼인婚姻을 이루었다.
과인이 바라건대 군왕과 더불어 무관武關에서 만나 얼굴을 맞대고 서로 약속하며 맹약을 맺고 돌아가는 것이 과인의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초楚나라 왕이 가려고 하니 속임을 당할까 두렵고, 가지 않으려고 하니 진秦나라가 노할까 두려웠다.
소수昭睢와
굴평屈平 두 사람이 말하기를
注+③ 소수昭睢와 굴평屈平은 두 사람의 성명이다. “가지 말고 군사를 동원하여 스스로 지킬 뿐입니다.
진秦나라는 호랑이로 제후諸侯들을 병합하려는 마음이 있으니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의 어린 아들
자란子蘭이 왕에게 갈 것을 권유하여
注+④ 자란子蘭은 어린 아들의 이름이다. 왕이 마침내
진秦나라에 들어가니,
진秦나라 왕이
장군將軍 한 명을 거짓으로 왕으로 꾸미게 하고
무관武關에 병사를 매복하였다가 왕을 협박하여 함께 서쪽으로 갔다.
함양咸陽에 이르러
장대章臺에서 조회하기를
번신藩臣의
예禮로 하고
무巫와
검중군黔中郡을 떼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注+⑤ 장대궁章臺宮은 위남渭南에 있다. 요要는 음이 요邀이니 약속이다.
초楚나라 왕이 노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마침내 억류하였다.
目
[目] 당시에 초楚나라 태자太子 횡橫이 제齊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초楚나라 대신大臣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왕이 돌아올 수 없고 태자는 제齊나라에 있으니, 제齊나라와 진秦나라가 함께 모의하면 초楚나라는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왕자王子 중에 나라에 있는 자를 세우려고 하였다.
소수昭睢가 말하기를 “왕과 태자가 모두 제후들에게 곤욕을 당하고 있는데, 이제 다시 왕명을 배반하고 그
서자庶子를 세우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거짓으로
제齊나라에
부고訃告를 전하였다.
注+① 부赴는 부訃와 같다. 죽음을 알리는 것을 부訃라고 한다.
제齊나라 사람이 혹 태자를 억류하면서
초楚나라의
회북淮北 땅을 요구하니
注+② 초楚나라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를 멸망시키고 여汝에 국경을 만들고, 월越나라를 멸망시키고 오吳나라의 고지故地를 빼앗았으며, 아울러 옛 서이徐夷의 땅을 가졌는데 모두 회북淮北에 있다. 이것이 바로 초楚나라의 이른바 하동국下東國이다.,
제齊나라 정승이 말하기를 “불가하다.
영중郢中에서 왕을 세우면, 이는 우리가 쓸모없는 인질을 붙잡고 천하에
불의不義를 행하는 것입니다.”
注+③ 영郢은 초楚나라 도읍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남군南郡 강릉현江陵縣이 옛날 초楚나라 영도郢都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
영중郢中에서 왕을 세우게 되면 우리는 인하여 새 왕과 더불어 거래를 하면서 이르기를
注+④ 시市는 서로 이익으로 요구하는 것이 시장에서 매매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우리에게
하동국下東國을 주면 우리는 왕을 위하여 태자를 죽이겠소.
그렇지 않으면 장차 세 나라와 더불어 태자를 왕으로 세울 것이오.’
注+⑤ 삼국三國은 제齊나라, 한韓나라, 위魏나라를 이른다.라고 하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제齊나라 왕王이 마침내 그 정승의 계획을 채용하여 초楚나라 태자를 돌려보내니, 초楚나라 사람이 왕으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