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

자치통감강목(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壬戌年(B.C. 299)
十六年이라
趙君 廢其太子章而傳國於少子何하고 自號主父하다
武靈王 以長子章으로 爲太子러니 後納吳廣之女孟姚注+姚, 音遙.하야 有寵하야 生子何하니
愛之하야 欲及其生而立之하야 乃廢章而傳國焉하고
使肥義 爲相國傳王하고 而自號主父注+主父, 言爲國之主之父也.라하고 將士大夫하야 西北略胡地하고 將自雲中九原으로 南襲咸陽할새
於是 詐爲使者入秦하야 欲以觀秦地形及秦王之爲人하니
秦王 不知러니 已而 怪其状甚偉非人臣之度注+偉, 奇也, 大也.하야 使人逐之하니 主父行已脫關矣
秦人大驚注+脫關, 謂脫身出關也.하더라
齊魏會于韓하다
◑秦伐楚하야 取八城하고 遂誘楚君槐于武關하야 執之以歸하니 楚人 立太子橫하다
伐楚하야 取八城하고
秦王 乃遺楚王書曰 始寡人 與王約爲弟兄하야 盟于黃棘하고 太子入質하니 至驩也러니
太子陵殺寡人之重臣하고 不謝而亡去하니 寡人 誠不勝怒하야 使兵侵君王之邊注+謂戰重丘, 取襄城.호니
今聞君王 乃令太子 質於齊하야 以求平이라하니
寡人 與楚接境하고 婚姻相親이라 而今不驩이면 則無以令諸侯注+自赧王四年至是年, 秦楚未嘗嫁娶也. 至十九年, 懷王死於秦. 二十三年, 襄王逆婦於秦. 蓋先已約親, 其後終喪, 始逆婦, 成婚姻.일새
寡人 願與君王으로 會武關하야 面相約結盟而去寡人之願也로라
楚王 欲往호대 恐見欺하고 欲不往호대 恐秦怒러니
昭睢屈平注+昭睢‧屈平, 二人姓名. 毋行이요 而發兵自守耳
虎狼也 有幷諸侯之心하니 不可信也니이다
王稚子子蘭 勸王行注+子蘭, 稚子之名.한대 乃入秦하니 秦王 令一將軍으로 詐爲王하야 伏兵武關劫之與西하야
至咸陽朝章臺 如藩臣禮하고 要以割巫黔中郡注+章臺宮, 在渭南. 要, 音邀, 約也.한대
楚王 怒不許어늘 遂留之하다
楚太子橫 方質於齊러니
楚大臣 相與謀曰 吾王 不得還而太子在齊하니 齊秦 合謀則楚無國矣라하고 欲立王子之在國者어늘
昭睢曰 王與太子俱困於諸侯어늘 今又倍王命而立其庶子不宜라하고 乃詐赴於齊注+赴, 與訃同. 告死曰訃하니
齊人 或欲留太子하야 以求楚之淮北注+楚滅陳‧蔡, 封畛於汝, 滅越, 取吳故地, 幷有古徐夷之地, 皆在淮北, 卽楚所謂下東國.한대 其相 曰 不可하다
郢中 立王하면 是吾抱空質而行不義於天下也注+郢, 楚都. 班志 “南郡江陵縣, 故楚郢都.”
其人 曰 郢中 立王이어든 吾因與其新王市曰注+市, 謂相要以利, 如市道也. 予我下東國이면 吾爲王殺太子
不然이면 將與三國共立之注+三國, 謂齊‧韓‧魏.호리라
齊王 卒用其相計하야 歸楚太子하니 楚人 立之하다
屈平 爲懷王左徒注+左徒, 官名. 正義 “猶今左右拾遺.”하야 志潔行廉하고 明於治體하니 甚任之러니
以讒見疏하니 而睠顧不忘注+睠, 古倦切, 視而回首.하야 作離騷之辭以自怨하야 尙冀王之一寤로대 而王 終不寤也注+離, 遭也. 擾動曰騷.러라
其後子蘭 又譖之於頃襄王注+頃, 音傾.하니하야 遷之於江南하니
遂懷石自投汨羅以死注+原, 平字. 汨, 音覓. 汨水在羅縣, 故曰汨羅, 卽長沙汨羅淵也.하니라
以齊田文으로 爲丞相하다
秦王 聞文賢하고 使請於齊하야 以爲相하다


임술년(B.C. 299)
[綱]나라 난왕赧王 16년이다.
나라 임금이 태자太子 을 폐하고, 작은 아들 에게 나라를 전하고 스스로 주보主父라고 이름하였다.
[目] 처음에 무령왕武靈王장자長子 으로 태자太子를 삼았는데, 뒤에 오광吳廣의 딸 맹요孟姚를 들이고注+는 음이 이다. 총애하여 아들 를 낳았다.
를 사랑하여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즉위시키려고 하여 마침내 을 폐하고 나라를 전하였다.
비의肥義로 하여금 상국相國이 되어 왕위王位을 전하게 하였는데, 스스로 주보主父注+주보主父는 나라 주인의 아버지라는 말이다.라 이름하고 사대부士大夫를 거느리고 서북쪽으로 호지胡地를 순행하고, 장차 운중雲中구원九原에서 남쪽으로 함양咸陽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거짓으로 사자使者가 되어 나라에 들어가 나라의 지형地形나라 의 사람됨을 보려고 하였다.
나라 왕이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 그의 모습이 매우 훌륭하여 인신人臣의 풍도가 아님을 이상하게 여기고注+는 기이하고 큼이다., 사람을 시켜 그를 쫓게 하니 주부의 일행은 이미 관문을 벗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注+탈관脫關은 몸을 빼어내 관문을 나간 것을 말한다.
[綱]나라와 나라가 나라에서 만났다.
[綱]나라가 나라를 정벌하여 여덟 개를 빼앗고, 드디어 나라 임금 무관武關에 유인하여 잡아서 돌아가니 나라 사람이 태자太子 을 세웠다.
[目]나라가 나라를 정벌하고 여덟 개를 빼앗았다.
나라 이 마침내 나라 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처음에 과인寡人이 왕과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여 황극黃棘에서 맹약하고 태자太子가 인질로 들어와서 매우 화락하였습니다.
태자가 과인의 중신重臣을 죽이고 사과도 없이 도망을 갔으므로, 과인이 참으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군왕君王의 변경을 침범하게 하였습니다.注+중구重丘에서 싸운 것과 양성襄城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
이제 들으니 군왕이 마침내 태자로 하여금 나라에 인질로 보내 화평을 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과인은 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혼인婚姻을 하여 서로 친한데, 이제 두 나라가 화락하지 않으면 제후諸侯들을 호령할 수 없습니다.注+난왕赧王 4년부터 이해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나라는 혼인하지 않았다. 19년에 이르러 회왕懷王나라에서 죽고, 23년에 양왕襄王신부新婦나라에서 맞이하였다. 대개 먼저 이미 혼인을 약속하고 나중에 상례를 마치고 비로소 신부를 맞이하여 혼인婚姻을 이루었다.
과인이 바라건대 군왕과 더불어 무관武關에서 만나 얼굴을 맞대고 서로 약속하며 맹약을 맺고 돌아가는 것이 과인의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라 왕이 가려고 하니 속임을 당할까 두렵고, 가지 않으려고 하니 나라가 노할까 두려웠다.
소수昭睢굴평屈平 두 사람이 말하기를注+소수昭睢굴평屈平은 두 사람의 성명이다. “가지 말고 군사를 동원하여 스스로 지킬 뿐입니다.
나라는 호랑이로 제후諸侯들을 병합하려는 마음이 있으니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의 어린 아들 자란子蘭이 왕에게 갈 것을 권유하여注+자란子蘭은 어린 아들의 이름이다. 왕이 마침내 나라에 들어가니, 나라 왕이 장군將軍 한 명을 거짓으로 왕으로 꾸미게 하고 무관武關에 병사를 매복하였다가 왕을 협박하여 함께 서쪽으로 갔다.
함양咸陽에 이르러 장대章臺에서 조회하기를 번신藩臣로 하고 검중군黔中郡을 떼어 달라고 요구하였다.注+장대궁章臺宮위남渭南에 있다. 는 음이 이니 약속이다.
나라 왕이 노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마침내 억류하였다.
[目] 당시에 나라 태자太子 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나라 대신大臣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왕이 돌아올 수 없고 태자는 나라에 있으니, 나라와 나라가 함께 모의하면 나라는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왕자王子 중에 나라에 있는 자를 세우려고 하였다.
소수昭睢가 말하기를 “왕과 태자가 모두 제후들에게 곤욕을 당하고 있는데, 이제 다시 왕명을 배반하고 그 서자庶子를 세우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거짓으로 나라에 부고訃告를 전하였다.注+와 같다. 죽음을 알리는 것을 라고 한다.
나라 사람이 혹 태자를 억류하면서 나라의 회북淮北 땅을 요구하니注+나라가 나라와 나라를 멸망시키고 에 국경을 만들고,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라의 고지故地를 빼앗았으며, 아울러 옛 서이徐夷의 땅을 가졌는데 모두 회북淮北에 있다. 이것이 바로 나라의 이른바 하동국下東國이다., 나라 정승이 말하기를 “불가하다.
영중郢中에서 왕을 세우면, 이는 우리가 쓸모없는 인질을 붙잡고 천하에 불의不義를 행하는 것입니다.”注+나라 도읍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남군南郡 강릉현江陵縣이 옛날 나라 영도郢都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영중郢中에서 왕을 세우게 되면 우리는 인하여 새 왕과 더불어 거래를 하면서 이르기를注+는 서로 이익으로 요구하는 것이 시장에서 매매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우리에게 하동국下東國을 주면 우리는 왕을 위하여 태자를 죽이겠소.
그렇지 않으면 장차 세 나라와 더불어 태자를 왕으로 세울 것이오.’注+삼국三國나라, 나라, 나라를 이른다.라고 하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나라 이 마침내 그 정승의 계획을 채용하여 나라 태자를 돌려보내니, 나라 사람이 왕으로 세웠다.
[目] 처음에 굴평屈平회왕懷王좌도左徒가 되어注+좌도左徒관명官名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지금의 좌우습유左右拾遺와 같다.”고 하였다. 뜻이 개결하고 행위가 청렴하며 다스리는 도리에 밝아서 이 매우 신임하였다.
나중에 참소로 인하여 소외당하니 돌아보며 잊지 못하고注+고권古倦이니 머리를 돌려 보는 것이다.이소경離騷經〉을 지어 스스로 원망하여 오히려 의 깨달음을 기대하였으나 이 끝내 깨닫지 못하였다.注+는 만남이다. 시끄럽고 어수선한 것을 라고 한다.
그 뒤에 자란子蘭이 또 경양왕頃襄王에게 참소하니注+은 음이 이다.하야 강남江南으로 귀양을 보냈다.
굴원屈原이 드디어 돌을 안고 스스로 멱라汨羅에 뛰어들어 죽었다.注+굴평屈平이다. 은 음이 이다. 골수汨水나현羅縣에 있으므로 멱라汨羅라고 하였는데 바로 장사長沙 멱라연汨羅淵이다.
[綱]나라가 나라의 전문田文(孟嘗君)으로 승상丞相을 삼았다.
[目]나라 전문田文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나라에 청하여 승상으로 삼았다.



자치통감강목(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