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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5)

자치통감강목(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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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年(B.C. 63)
무오년(B.C. 63)
三年이라
[綱] 나라 중종中宗 효선황제孝宣皇帝 원강元康 3년이다.
봄 정월에 예전의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봉하여 해혼후海昏侯로 삼았다.
心忌故昌邑王賀하여 賜山陽太守張敞璽書하여 令謹備盜賊하고 毋下所賜書注+昌邑王, 廢歸昌邑, 國除爲山陽郡, 故令太守謹察之. 毋下所賜書, 密令警察, 不欲宣露也.하다
[目] 은 내심 예전의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꺼려서 산양태수山陽太守 장창張敞에게 새서璽書(친서)를 하사하여 삼가 을 대비하게 하고, 하사한 친서를 내려보내지 말게 하였다.注+창읍왕昌邑王이 폐위되어 창읍昌邑으로 돌아가자, 나라가 없어져 산양군山陽郡이 되었다. 그러므로 산양태수山陽太守로 하여금 삼가 그를 살펴보게 한 것이다. “무하소사서毋下所賜書(하사한 친서를 내려 보내지 말게 하다.)”는 은밀히 경계하고 살펴서 이 사실을 드러내어 말하고자 하지 않은 것이다.
於是 條奏賀居處, 衣服, 言語, 跪起, 淸狂不惠하여 以著其廢亡之效注+凡狂者, 陰陽脈盡濁, 今此人不狂, 似狂者, 故言淸狂也. 或曰 “色理淸徐而心不慧曰淸狂, 如云白癡也.”하니 乃知賀不足忌하고 封爲海昏侯注+海昏縣, 屬豫章郡, 後漢分立建昌縣.하다
장창은 이에 유하의 거처와 의복과 언어, 앉고 일어나는 것과 청광淸狂하여 은혜롭지 못한 내용을 조목조목 아뢰어서 그가 폐인廢人이 되어 망하게 된 결말을 드러내어 아뢰니,注+무릇 미친 자는 음맥陰脈양맥陽脈이 모두 탁한데, 지금 이 사람은 미치지 않았으면서도 미친 자와 같으므로 청광淸狂이라 한 것이다. 혹자는 “피부 색깔이 깨끗하고 맥이 느리면서 마음이 지혜롭지 못한 것을 청광淸狂이라 하니, 백치白癡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은 마침내 유하를 굳이 꺼릴 것이 없음을 알고는 해혼후海昏侯로 봉하였다.注+해혼현海昏縣예장군豫章郡에 속하였으니, 후한後漢 때에 나누어 건창현建昌縣을 만들었다.
[綱] 병길丙吉 등을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고, 옛날에 황제를 도와준 고인故人아보阿保(보호)한 공이 있는 자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하사하였다.
丙吉 爲人 深厚하여 不伐善하여 自曾孫遭遇 絶口不道前恩注+遭遇, 謂升大位也. 一說 “當指掖庭養視, 屬籍宗正以後事.”이러니 掖庭宮婢 自陳嘗有阿保之功이라호되 辭引使者丙吉知狀注+謂吉知此情狀.이어늘
[目] 병길丙吉은 인품이 깊고 후덕하여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아서 증손曾孫(선제宣帝)이 조우遭遇(황제로 즉위)한 이후로 입을 닫고 예전의 은혜를 말하지 않았는데,注+조우遭遇”는 황제가 대위大位에 오름을 이른다. 일설에 “마땅히 액정掖庭에서 길러 보살피고 종정宗正속적屬籍하게 한 이후의 일을 가리켜야 한다.” 하였다. 마침 액정掖庭궁비宮婢로 있던 자가 자신이 일찍이 황제를 아보阿保한 공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그의 말 중에 당시 사자使者로 있던 병길이 이 내용을 안다고 인용하였다.注+〈“병길지장丙吉知狀”은〉 병길丙吉이 이 정황을 알고 있음을 이른다.
親見問然後 知吉有舊恩而終不言하고 大賢之하니라
은 직접 그녀를 만나보고 물은 뒤에야 병길이 옛날 은혜가 있었으나 끝내 말하지 않았음을 알고는 크게 어질게 여겼다.
張賀嘗爲弟安世하여 稱皇曾孫之材美及徵怪注+爲, 去聲. 徵, 始有形象而微也. 怪, 通作恠, 異也, 奇也. 本紀 “身足下有毛, 臥居, 數有光耀.”어늘 安世輒絶止하여 以爲少主在上하니 不宜稱述曾孫이라하더니
처음에 장하張賀가 일찍이 아우 장안세張安世에게 황증손皇曾孫(지금의 황제)의 재질이 뛰어남과 기이한 징조를 말하였는데,注+(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은 처음으로 형상이 있으나 은미한 것이다. 와 통하니, 괴이함이요 기이함이다. 《한서漢書》 〈선제본기宣帝本紀〉에 “황제의 몸과 발 아래에 깃털이 있어서 누울 적에 자주 광채가 있었다.” 하였다. 장안세가 그때마다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소주少主(소제昭帝)가 위에 계시니, 황증손皇曾孫을 칭찬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及帝卽位 而賀已死
황제가 즉위하였을 적에, 장하는 이미 죽은 뒤였다.
謂安世曰 掖庭令 平生稱我어늘 將軍止之 是也라하다
은 장안세에게 이르기를 “액정령掖庭令(장하張賀)이 평소 나를 칭찬할 적에 장군이 저지하였으니, 이것이 옳다.” 하였다.
詔曰
[目] 조령詔令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朕微眇時 丙吉, 史曾, 許舜 皆有舊恩注+曾, 高之弟也.하고 張賀 輔導朕躬하여 修文學經術하여 恩惠卓異하고 厥功茂焉이라
이 미천할 때에 병길丙吉사증史曾, 허순許舜이 모두 옛 은혜가 있고,注+사증史曾사고史高의 아우이다.장하張賀는 짐의 몸을 보도輔導하여 문학文學경학經學을 배우게 해서 은혜가 매우 높고 공로가 크다.
詩不云乎
시경詩經》에 말하지 않았는가.
라하니 封賀子彭祖, 及吉, 曾, 舜하여 皆爲列侯注+賀有子蚤死, 子安世小男彭祖, 彭祖爲陽都侯, 吉爲博陽侯, 曾爲將陵侯, 舜爲博望侯. 하고
故人下至郡邸獄復作 嘗有阿保之功者 皆受官祿, 田宅, 財物하여 各以恩深淺報之注+復, 音服, 謂弛刑徒也. 有詔赦, 去其鉗鐵赭衣. 更犯事, 不從徒加, 與民爲例. 故當復爲官作, 滿其本罪年月日, 律名爲復作也.하라
고인故人(예전부터 친한 사람) 이하로 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아보阿保의 공이 있었던 자에게 모두 관직과 녹봉, 전택田宅과 재물을 내려주어 각각 은혜의 깊고 얕음에 따라 갚게 하라.”注+은 음이 이니, 형도刑徒(노역하는 죄수)를 풀어줌을 이른다. 조령詔令으로 사면령을 내려서 항쇄와 죄수복[자의赭衣]을 제거하였다가 다시 죄를 범하면 도형徒刑을 시키되, 평민과 똑같이 할 수 없으므로 다시 관청에서 노역을 시켜 그 본죄의 연월일을 채우게 하였으니, 법률에서 이것을 이름하여 ‘복작復作’이라 하였다.
臨當封하여이어늘 憂其不起한대
[目] 병길丙吉에 봉해지게 되었는데 병이 위독하니, 은 그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까 우려하였다.
夏侯勝曰 有陰德者 必饗其樂하나니
하후승夏侯勝이 아뢰기를 “음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그 즐거움(복)을 누리는 법입니다.
今吉 未獲報하니 非死疾也니이다하더니 果瘉注+瘉, 與愈同.하니라
지금 병길은 아직 보답을 받지 못했으니, 병에 죽을 자가 아닙니다.” 하였는데, 과연 병이 나았다.注+(병이 낫다)는 와 같다.
張安世自以父子封侯하고 在位太盛이라하여 乃辭祿하다
[目] 장안세張安世는 스스로 부자父子에 봉해지고 지위에 있는 것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녹봉을 사양하였다.
安世謹愼周密하여 每定大政已決 輒移病出이라가 聞有詔令하면 乃驚하여 使吏之丞相府問焉하니 自朝廷大臣으로 莫知其與議也注+與, 讀曰預.러라
장안세는 성품이 근신謹愼하고 주밀周密해서 매번 큰 정사를 의논하여 이미 결정이 되면 번번이 병을 칭탁하고 외출하였다가 조령詔令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비로소 놀라고 부하 관리로 하여금 승상부丞相府에 가서 일을 묻게 하니, 조정 대신 이하가 모두 그가 의논에 참여한 줄을 알지 못하였다.注+(참여하다)는 로 읽는다.
嘗有所薦이러니 其人 來謝어늘 安世大恨하여 以爲擧賢達能 豈有私謝邪아하고 絶弗復爲通注+爲, 去聲. 絶不復爲通者, 安世勅其閽人之辭也.하고
일찍이 어떤 사람을 천거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와서 사례하자, 장안세는 크게 서운하여 이르기를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영달하게 함에 어찌 사사로운 사례가 있단 말인가.” 하고는 문지기에게 그 사람을 끊어 다시는 통래通來하지 못하게 하였다.注+(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절불복위통絶弗復爲通(끊고 다시는 통래하지 못하게 하다.)”은 장안세張安世가 문지기에게 당부한 말이다.
有郞功高不調하여 自言注+調, 選也.이어늘 安世曰 君之功高 明主所知
어떤 낭관郎官이 공이 높은데도 승진되지 못하고는 스스로 말하자,注+調는 선발함이다. 장안세는 말하기를 “그대의 공이 높음은 현명하신 군주께서 아시는 바이다.
人臣執事 何短長而自言乎아하고 絶不許러니 已而 郞果遷注+安世外陽距之而實令其遷.하니라
신하가 일을 받들어 시행함에 어찌 장단長短을 따져 자신의 공을 스스로 말한단 말인가.” 하고는 끊고 허락하지 않았는데, 얼마 후 낭관이 과연 승진하였다.注+장안세張安世가 겉으로는 막았으나 실제로는 그를 승진시킨 것이다.
夏六月 하다
[綱] 여름 6월에 아들 유흠劉欽을 세워 회양왕淮陽王으로 삼았다.
[綱] 소광疏廣소수疏受치사致仕를 청하므로 황금을 하사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皇太子年十二 通論語, 孝經이라
[目] 황태자皇太子가 나이 열두 살에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달통하였다.
太傅疏廣 謂少傅受曰 吾聞知足不辱이요 知止不殆注+此, 引老子之語.라하니
태부太傅 소광疏廣소부少傅소수疏受에게 이르기를 “내 들으니, 만족함을 알면 치욕을 받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다.注+이것은 《노자老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今宦成名立이어늘 如此不去 懼有後悔라하고
지금 벼슬이 높게 이루어지고 명예가 확립되었는데, 이와 같은데도 떠나가지 않으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다.” 하고는
卽日 俱稱病하고 上疏乞骸骨하니 皆許之하고 加賜黃金二十斤하고 皇太子 贈以五十斤하다
당일에 함께 병을 칭탁하고 상소하여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니, 은 다 허락하고 황금 20을 더 하사하였으며, 황태자皇太子는 50을 주었다.
公卿故人 設祖道供帳東都門外하니 送者車數百兩注+供, 居共切. 帳, 通作張, 竹亮切. 謂供具張設也.이라
공경公卿고인故人조도祖道(전별연)를 설치하여 동도문東都門 밖에 음식을 장만하니, 전송하는 자의 수레가 수백 대였다.注+(공급하다)은 거공居共이고, (펼치다)은 과 통하는데 죽량竹亮이니, 〈“공장供帳”은〉 음식을 장만하여 진설함을 이른다.
道路觀者 皆曰賢哉
도로에서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감탄하기를 “어질다.
二大夫여하고 或歎息爲之下泣이러라
대부大夫여!” 하였으며, 혹은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廣, 受歸鄕里注+廣ㆍ受, 東海蘭陵人. 하여 日令其家 賣金共具하여 請族人, 故舊, 賓客하여 與相娛樂注+共, 讀曰供, 下以共同.하다
[目] 소광疏廣소수疏受는 향리로 돌아와서注+소광疏廣소수疏受동해東海 난릉蘭陵 사람이다. 날마다 집안 식구들로 하여금 황금을 팔아 음식을 장만하여 집안사람과 옛 친구와 빈객들을 초청해서 서로 즐겼다.注+(주다)은 으로 읽으니, 아래의 “이공以共”도 같다.
勸以爲子孫立産業者어늘
혹자가 자손을 위하여 재산을 장만하라고 권하였다.
廣曰
이에 소광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吾豈老誖하여 不念子孫哉注+誖, 布內切, 惑也.리오
“내 어찌 늙고 혼미하여 자손을 생각하지 않겠는가.注+포내布內이니, 미혹됨이다.
顧自有舊田廬하니 令子孫 勤力其中이면 足以共衣食하여 與凡人齊하리니
다만 옛날의 전지田地와 집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만일 자손이 이 가운데에 부지런히 힘쓴다면 충분히 옷과 음식을 마련하여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할 것이다.
今復增益之하여 以爲贏餘 但敎子孫怠惰耳注+贏, 音盈, 有餘也.니라
이제 다시 재산을 더 보태주어서 쓰고도 남게 한다면 다만 자손들에게 나태함을 가르칠 뿐이다.注+은 음이 이니, 남음이 있는 것이다.
賢而多財則損其志하고 愚而多財則益其過하나니라
어질면서 재물이 많으면 뜻을 해치고, 어리석으면서 재물이 많으면 허물을 더한다.
且夫富者 衆之怨也
또 부자는 사람들이 원망하는 대상이다.
吾旣無以敎化子孫이라 不欲益其過而生怨하노라
내 이미 자손들을 제대로 교화시키지 못하였으니, 그 허물을 더하고 원망을 만들어내고자 하지 않는다.
又此金者 聖主所以惠養老臣也
또 이 황금은 성주聖主께서 늙은 신하를 은혜롭게 길러주신 것이다.
樂與鄕黨宗族으로 共饗其賜하여 以盡吾餘日 不亦可乎
그러므로 향당鄕黨 사람과 종족들과 함께 임금께서 하사하신 것을 함께 누려 나의 여생을 다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於是 族人 悅服하니라
이에 집안사람들이 기뻐하고 복종하였다.
胡氏曰
[目]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以宦成名立爲榮하여 而求免於危辱 此非君子之高致어늘
“벼슬이 높게 이루어지고 명예가 확립된 것을 영화로 여겨서 위태로움과 치욕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이는 군자의 높은 운치가 아니다.
而疏廣 甘以自居 何也
그런데 소광疏廣이 스스로 여기에 자처하기를 달게 여김은 어째서인가?
曰 此 廣所以加人數等이어늘 而古今未之知也
이는 소광이 보통 사람보다 몇 등급이 더 높은 것인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
太子年旣十二 其資質志趣 已可槪見이니 觀其親政之時 年二十七이로되 而猶不省召致廷尉爲下獄하여 以至再屈師傅於牢獄而卒殺之하면 則其憒憒有素注+師傅, 謂蕭望之也. 憒, 古對切, 心亂也.
태자太子의 나이가 이미 열두 살이어서 그의 자질과 지취志趣를 대략 볼 수 있었으며, 을 살펴보면, 그 마음의 어지러움이 평소 그러했던 것이다.注+사부師傅소망지蕭望之를 이른다. 고대古對이니, 마음이 혼란한 것이다.
疏廣 瞯之已熟하니 知其不可扶持而敎詔也 審矣注+瞯, 古莧切, 視也.
소광은 이미 이것을 알았으니, 태자太子를 붙들어 가르칠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注+고현古莧이니, 봄이다.
是以 決意去之하니 觀其語曰 不去 懼有後悔라하니 則其微意 可見矣로다
이 때문에 결심하고 떠나간 것이니, 그의 말에 ‘떠나가지 않으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다.’라고 한 것을 살펴보면 그의 깊은 뜻을 알 수 있다.
易曰 君子見幾而作이라하니 疏廣 有焉하니라
주역周易》에 하였으니, 소광이 기미를 보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以潁川太守黃霸 守京兆尹이러니 尋罷歸故官하다
[綱] 영천태수潁川太守 황패黃霸수경조윤守京兆尹으로 삼았는데, 얼마 후에 파직하고 옛 관직(영천태수)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黃霸爲潁川太守하여 使郵亭鄕官으로 皆畜鷄豚하여 以贍鰥寡貧窮者注+郵亭, 傳送文書所止處. 郷官, 郷所治處也. 漢制, 十里爲亭, 亭長主之, 十亭爲郷, 有郷佐ㆍ三老ㆍ有秩ㆍ嗇夫ㆍ游徼各一人.하며 爲條敎하여 行之民間하여 勸以爲善防姦하고 及務耕桑, 節用, 殖財, 種樹, 畜養하니 初若煩碎 然精力 能推行之
[目] 황패黃霸영천태수潁川太守가 되어 우정郵亭향관鄕官에 모두 닭과 돼지를 길러 홀아비와 과부와 빈궁한 자들에게 공급해서 재정을 넉넉하게 하고,注+우정郵亭은 문서를 전달할 적에 머무는 곳이고, 향관郷官에서 사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나라 제도는 10리에 만구정을 만들어 정장亭長이 이를 주관하고, 10만구정이라 하여 향좌郷佐삼로三老, 유질有秩색부嗇夫, 유요游徼가 각각 한 명씩 있었다.조교條敎을 만들어 민간에 시행해서 을 행하고 간사함을 막을 것을 권면하고, 농사짓고 누에 치며 비용을 줄이고 재물을 증식하며 나무를 심고 가축을 기르는 일을 힘쓰니, 처음에는 번거로움을 괴롭게 여겼으나 그의 정력이 충분히 이것을 미루어 행할 수 있었다.
吏民見者 語次尋繹하여 問他陰伏하여 以相參考注+繹, 謂抽引而出也. 因語話之次, 搜尋紬繹, 雖其他陰伏之事, 亦問而知之.하고 聰明識事하니 吏民 不敢有所欺하고 姦人 去入他郡하여 盜賊 日少注+識, 式二切, 記也.러라
관리와 백성들을 만나게 되면 말하는 가운데 실정을 찾아내어서 다른 숨겨진 일을 물어 서로 참고하고注+은 뽑아서 끌어냄을 이른다. 말하는 가운데 단서를 찾아내어서, 비록 달리 숨겨져 있는 은밀한 일이라도 물어 안 것이다. 총명하여 일을 잘 기억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고 간사한 사람들이 다른 으로 떠나가서 도적이 날로 적어졌다.注+식이式二이니, 기억함이다.
霸力行敎化而後誅罰注+後, 戶遘切. 言先以德敎化於下, 若有不從, 然後用刑罰也.하여 務在成就全安長吏注+不欲易代及損傷之也.하여
[目] 황패黃霸는 교화를 힘써 행하고 주벌을 뒤에 하여,注+(뒤)는 호구戶遘이니, 〈“역행교화이후주벌力行敎化而後誅罰”은〉 먼저 덕으로 아랫사람을 교화하고, 만약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은 뒤에야 형벌을 사용함을 말한 것이다. 되도록 장리長吏(현령縣令)들을 성취시키고 안전하게 하였다.注+장리長吏를 자주 바꾸거나 손상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數易長吏하면 送故迎新之費 及奸吏因緣하여 絶簿書하고 盜財物注+緣, 因也. 因交代之際, 而棄匿簿書, 以盜官物也.하여
“자주 장리長吏(현령)를 바꾸면, 옛사람을 전송하고 새 사람을 맞이하느라 비용이 많이 들며, 간사한 관리가 이를 악용하여 장부를 없애고 재물을 도둑질한다.注+은 인연함이다. 〈신구新舊현령縣令이〉 교대하는 즈음을 틈타서 아전들이 장부를 없애고 감추어 관청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公私費耗 甚多어늘 皆當出於民이요
그리하여 공사간의 재물이 매우 소비되는데, 이 비용은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所易新吏 又未必賢하여 或不如其故 徒相益爲亂이라
게다가 바꾸어 새로 부임해온 관리가 또 반드시 어질지는 못하여 혹 옛사람만 못하면, 한갓 서로 더욱 혼란하게 할 뿐이다.
凡治道 去其泰甚者耳니라
무릇 다스리는 방도는 너무 심함을 제거할 뿐이다.”
霸以外寬內明으로 得吏民心하여 戶口歲增하니 治爲天下第一이라
황패는 밖은 너그럽고 안은 밝아서 관리와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호구가 해마다 증가하니, 치적治績이 천하의 제일이 되었다.
徵守京兆尹이러니 坐法貶秩注+黃霸傳 “坐發民治馳道不先, 以聞, 又發騎士詣北軍, 馬不適士, 劾乏軍興, 連貶秩.”이어늘 詔復歸潁川爲太守하고 以八百石居注+太守, 秩二千石, 連貶, 故以八百石居.하니라
불러 수경조윤守京兆尹을 삼았는데, 죄에 걸려 질록秩祿이 깎이자注+한서漢書》 〈황패전黃霸傳〉에 “황패黃霸는 백성을 징발하여 치도馳道를 다스리기를 남보다 먼저 하지 않은 죄에 걸려 상부에 보고되었고, 또 기사騎士를 징발하여 북군北軍에 보낼 적에 말이 병사들에게 적합하지 못하여 군수 물자를 궁핍하게 한 일로 탄핵을 받아 연달아 질록秩祿이 깎였다.” 하였다. 명하여 다시 영천潁川으로 돌려보내 태수가 되게 하고, 연봉 팔백석八百石으로 있게 하였다.注+태수는 이천석二千石인데, 연달아 깎였기 때문에 팔백석八百石으로 강등된 것이다.
역주
역주1 封故昌邑王賀 爲海昏侯 : “이때에 宣帝가 즉위한 지 11년이 되었는데, 昌邑王 劉賀가 아직도 생존하고 있었으니(황제가 劉賀를 죽이지 않았으니), 漢나라의 풍속이 여전히 厚하다. 그러므로 이것을 써서 宣帝의 아름다움을 인정한 것이다.[於是帝卽位十一年矣 而賀尙存 漢之俗猶厚也 故書予之]” 《書法》
역주2 盜賊 : 반란하는 자를 폄하하여 부르는 말로, 여기서는 昌邑王을 비하하여 말한 것이다.
역주3 封丙吉等……賜物有差 : “阿保에게 은혜를 미룬 것이 이때 시작되었으나 물건을 하사했을 뿐 땅을 봉해주지는 않았는데, 이로부터 이후로는 君에 봉한 자가 있고 그 아들을 봉한 경우가 있고 그가 卒하였을 적에 심지어 ‘皇太后’라고 칭하기까지 하였으니, 너무 심하다.[推恩阿保始此 然賜物而已 未封也 自是而後 有封君者 有封其子者 其卒也 至號爲皇太后 甚哉]” 《書法》
역주4 郡邸獄의……女徒 : 宣帝가 皇曾孫으로 불렸을 때 郡邸獄에서 길러졌는데 당시 廷尉監인 丙吉이 女徒인 胡組와 郭徵卿을 뽑아서 황증손을 양육하게 하였다. 이는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5권 중 漢 宣帝 元平 원년조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5 無德不報 : 《詩經》 〈大雅 抑〉에 “말은 갚지 않음이 없고 德은 보답하지 않음이 없다.[無言不讐 無德不報]”라고 보인다.
역주6 張賀는……삼았다 : 武帝가 衛后에게서 太子 劉據를 낳았는데, 太子는 당시 권력을 전횡하던 江充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마침 무제가 병환이 있자, 강충은 이는 궁녀들이 황제를 저주했기 때문이라 하고 巫蠱의 옥사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征和 2년(B.C. 91) 태자는 무제가 없는 틈을 타 군대를 일으켜 강충을 참형에 처했다가 결국 반역으로 몰려 자살하니, 시호를 ‘戾太子’라 하고 또 어머니가 衛后였으므로 ‘衛太子’라고도 하였다. 이때 태자는 史良娣를 취하여 아들 進을 낳으니, 이름을 ‘皇孫’이라 하였고 皇孫이 王夫人을 취하여 아들 病已를 낳으니, 이름을 ‘皇曾孫’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태자의 妻妾과 아들이 모두 죽었고 오직 皇曾孫이 살았는데, 郡邸獄에 갇혀 있었다. 廷尉監으로 있던 丙吉이 옥사를 다스리면서 衛太子의 사실을 알고 어린 황증손이 아무 죄가 없음을 가엾게 여겨 살려주고 보살펴주었다. 掖庭令 張賀는 일찍이 위태자를 섬겼는데, 옛 은혜를 생각하여 잘 봉양하고 자기 딸을 황증손에게 시집보내려 하였으나 아우 張安世가 大臣으로 있으면서 이를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자신의 재물을 털어 暴室의 嗇夫인 許廣漢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황증손은 이로 인해 허광한 형제와 진외가인 史氏에게 의지하여 生長하고 학문을 익혔다. 무제가 죽은 뒤에 昭帝가 즉위했으나 후사가 없이 죽자, 昌邑王 劉賀가 들어와 大統을 이었으나 無道한 행위로 쫓겨나고 적당한 후사를 구하지 못했는데, 병길이 황증손을 천거하여 즉위하니, 이가 바로 宣帝이다. 이 때문에 이들을 모두 侯로 봉한 것이다. 許舜은 許廣漢의 아우이다.
역주7 立子欽爲淮陽王 : “宣帝가 봉하여 세운 자들을 모두 쓰지 않았는데, ‘劉欽’을 쓴 것은 어째서인가? 宣帝가 사랑하여 일찍이 太子로 세우려고 한 자였기 때문에 삼가 기록한 것이다.[宣帝封立不悉書 書欽 何 帝所愛欲立爲太子者也 故謹志之]” 《書法》
역주8 疏廣……賜金遣歸 : “앞에서는 ‘형의 아들 受[兄子受]’라고 썼었는데, 여기에서는 ‘형의 아들’이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疏廣을 가지고 疏受의 이름을 덮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늙었다며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는 일은 일반적인 일이나, 西漢(前漢)에 있어서는 높은 절개가 되었다. 그러므로 함께 쓴 것이니, ‘황금을 하사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賜金遣歸]’고 쓴 것은 영화롭게 여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늙었다며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했다.[請老]’고 쓴 것이 1번뿐이요 ‘황금을 하사하였다.’고 쓴 것이 3번이니, 모두 훌륭함을 인정한 말이다.[前稱兄子受矣 此其不稱兄子 何 不以廣掩受名也 請老 常也 在西漢爲高節 故竝書之 書賜金遣歸 榮之也 終綱目 書請老一而已 書賜金三 皆予辭也]” 《書法》
“앞에서는 ‘丞相 韋賢이 致仕하였다’고 썼으니, 漢나라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벼슬이 上公에 이르러 늙고 병들어서 떠나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疏廣과 疏受와 같은 경우는 막 태자[儲君]의 師傅가 되었는데, 마침내 또 과감하게 늙었다며 致仕를 청한 것은 어째서인가? 《禮記》에 ‘大夫가 70세가 되면 致仕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떳떳한 도리인데, 漢나라 조정의 여러 신하들은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갈 줄은 알지 못해서 죽임을 당한 자가 서로 이어졌다. 만일 모두 소광과 소수처럼 기미를 보고 떠나갔더라면 어찌 자기 몸을 보존하지 못함에 이르렀겠는가. 황금을 하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함을 특별히 史冊에 썼으니, 이는 두 사람의 어짊을 인정한 것이다.[前書丞相賢致仕 由漢以來 固未嘗有 然猶曰仕至上公老病而去云爾 至疏廣疏受 方傅儲君 乃亦勇於請老 何哉 在禮大夫七十致仕 乃理之常 漢廷諸臣 知進而不知退 戮死相望 儻皆能如二子見幾而作 何至不保其身哉 賜金遣歸 特書于冊 蓋予之也]” 《發明》
역주9 그가……한 것 : 아래 元帝 初元 2년(B.C. 47)에 환관인 弘恭과 石顯이 황제의 사부인 蕭望之를 廷尉로 나오게 할 것을 청하여 정위의 옥에 가두었으나 황제는 이것이 정위의 옥에 가둔 것임을 알지 못하고 홍공 등의 소청을 허락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소망지는 결국 자살하였다.
역주10 군자가……떠나간다 : 《周易》 〈繫辭傳 下〉에 보인다.

자치통감강목(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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