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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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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年(251)
十四年이라
魏嘉平三年이요 吳太元元年이라
凌遣將軍楊弘하여 以廢立事 告兗州刺史黃華한대 華弘連名以白司馬懿하니
懿將中軍하여 乘水道討凌할새 先下赦하여 赦凌罪하고 又爲書諭凌하며 已而大軍掩至百尺注+不意其至而至曰掩至. 掩者, 掩其不備也. 水經註 “沙水東南過陳縣, 又東南流注于潁, 謂之交口. 水次有大堰, 卽古百尺堰.”하니
凌勢窮하여 面縛水次어늘 懿解其縛하고 送詣京師하니 道飮藥死하다
懿至洛陽하여 窮治其事하여 諸相連者 悉夷三族하다 發凌愚冢하여 剖棺暴尸하고 賜楚王彪死하다
盡錄諸王公置鄴하여 使有司察之하고 不得與人交關注+慮復如楚王彪爲變也.하다
愚爲白衣時 常有高志 衆謂必興令狐氏라한대 族父卲獨以爲愚性倜儻이나 不修德而願大하니 必滅我宗이리라 愚甚不平注+倜儻, 卓異也.이러니
及愚仕進有名稱注+稱, 昌孕切. 凡名號謂之稱. 從容謂卲曰 先時聞大人 謂愚爲不繼러니 今竟云何邪
卲熟視而不答하고 私謂妻子曰 公治性度 猶如故也 不知我當坐之不邪어니와 必逮汝曹矣注+公治, 令狐愚字. 不邪之不, 讀曰否.리라하다 卲沒十餘年而愚滅族하다
愚以別駕單固治中楊康爲腹心注+單, 音善, 姓也.이러니 及愚卒 康露其陰事하니 愚由是敗하다
懿至壽春하여 以問固한대 固曰 無有라하다 遂收繫獄하고 使康詰之하니
固辭窮한대 乃罵曰 老傭旣負使君하고 又滅我族하니 顧汝當活邪注+傭, 雇也. 奴僕受雇者曰傭. 老傭, 猶言老奴也. 使君, 謂令狐愚也.아하다
康初自冀封侯러니 後以辭頗參錯으로 亦幷斬之注+辭頗參錯. 言獄辭與單固參雜也.하니 固又罵之曰 若死者有知 汝何面目行地下乎오하더라
秋八月 魏太傅司馬懿卒하니 以其子師爲撫軍大將軍錄尙書事注+魏晉之制, 驃騎‧車騎‧衛將軍, 伏波‧撫軍‧都護‧鎭軍‧中軍‧四征‧四鎭‧龍驤‧典軍‧上軍‧輔國等大將軍, 位皆從公, 至錄尙書事, 則專制朝政矣.하다
◑魏分匈奴左部爲二國하다
南匈奴自謂其先 本漢室之甥이라하여 因冒姓劉氏러니
魏太祖留單于呼廚泉於鄴하고 分其衆爲五部하여 居幷州境內하니 左賢王豹爲左部帥하여 部族最彊이라
城陽太守鄧艾上言注+前漢置城陽國, 後漢省入琅邪國, 魏武帝平靑州, 復置城陽郡.호되 單于在內 羌夷失統하여 合散無主하니
今單于之尊日疏하고 而外土之威日重하니 不可不深備也注+南單于留鄴, 雖有尊名, 日與部落疏, 而左賢王豹居外, 部族最彊, 其威日重也.
聞劉豹部有叛胡하니 可因此割爲二國하여 以分其勢
去卑功顯前朝하니 宜加其子顯號하여 使居鴈門이니 離國弱寇하고 追錄舊勳 御邊長計也注+去卑, 右賢王名. 功顯前朝, 謂去卑侍衛漢獻帝東還也. 離國者, 離匈奴劉豹之國爲二也.라하고
又陳호되 羌胡與民同處하니 宜以漸出之하여 使居民表하여 以崇廉恥之敎하고 塞姦宄之路注+表, 外也, 謂使居編民之外也.라한대 司馬師皆從之하다
冬十一月 吳以諸葛恪爲太子太傅하여 總統國事하다
吳立節中郞將陸抗 自柴桑屯所 詣建業治病이러니 病差當還
吳主權涕泣與別하고 謂曰 吾前聽用䜛言하고 與汝父大義不篤하니 以此負汝 前後所問 一切焚之하여 莫令人見也하노라
權頗寤太子和之無罪러니 十一月 祀南郊還 得風疾하여 欲召和還이러니
全公主及侍中孫峻中書令孫弘 固爭之한대 乃止注+爭者, 恐和復立, 爲己患也.하다
權以太子亮幼 議所付託이어늘 峻薦恪可付大事라한대
權嫌其剛狼自用이어늘 峻曰 朝臣才無及恪者니이다 乃召之하니
恪將行 呂岱戒之曰 世方多難하니 子每事 必十思하라하니
恪曰 昔 季文子三思而後行이어늘 夫子曰 再思可矣라하시니 今君令恪十思하니 明恪之劣也로다
岱無以答하니 時咸謂之失言이러니 恪至建業하여 見吳主於臥內하고 受詔牀下하니
以大將軍領太子太傅하고 孫弘領少傅하다 有司諸務 一統於恪하고 惟殺生大事 乃以聞케하다
虞喜曰注+喜, 晉會稽餘姚人, 爲志林三十篇. 夫託以天下 至重也 以人臣行主威 至難也
兼二至管萬機 能勝之者鮮矣 元遜若因十思之義하여 廣諮當世之務하여
聞善速於雷動하고 從諫急於風移 豈得隕首殿堂하여 死於凶豎之刃注+謂恪後爲孫峻所殺也.리오
世人奇其英辯可觀하고 而哂呂侯無對爲陋하니 是樂春藻之繁華而忘秋實之甘口也
來敏與費禕對棊 意無厭倦하여 必能辦賊이라하나 然況長寧 以爲君子臨事而懼하여 好謀而成이라
蜀爲蕞爾之國하여 方向大敵하니 何可矜己有餘하여 晏然無戚이리오 斯禕性寛簡하여 不防細微하여 卒爲降人所害하니
豈非兆見於彼而禍成於此哉 二事體同하니 皆足爲世鑑也注+況姓, 長寧名, 蜀人也.니라
費禕北屯漢壽하고 以陳祗守尙書令注+葭萌縣, 漢屬廣漢郡, 昭烈改曰漢壽縣, 屬梓潼郡. 通鑑費禕還成都, 望氣者云 “都邑無宰相位.” 乃復北屯漢壽.하다


辛未年(251)
[] 나라(蜀漢) 後主 延熙 14년이다.
[] 魏主 曹芳 嘉平 3년이고, 나라 大帝 孫權 太元 원년이다.
[] 여름 4월에 나라 司馬懿王凌楚王 曹彪를 죽이고, 마침내 여러 왕공들을 鄴城에 안치하였다.
[] 王凌將軍 楊弘을 파견하여 魏主를 폐위시키고 曹彪를 옹립하려는 일을 兗州刺史 黃華에게 말하자 황화와 양홍이 연명하여 司馬懿에게 보고하였다.
사마의가 中軍을 거느리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 왕릉을 토벌할 적에 먼저 사면령을 내려 왕릉의 죄를 사면하고, 또다시 편지를 보내어 왕릉을 타일렀는데, 얼마 뒤에 大軍이 갑자기 百尺堰에 이르렀다.注+도착하리라 생각지 못했는데 도착하는 것을 “掩至”라고 하니, 은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습격하는 것이다. ≪水經註≫에 “沙水는 동남쪽으로 陳縣을 지나가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潁水로 들어가는 곳을 交口라고 한다. 물가에 큰 제방이 있는데, 바로 옛날의 百尺堰이다.” 하였다.
왕릉은 형세가 곤궁해지자 물가에서 손을 뒤로 묶고 얼굴을 든 채 항복하였는데 사마의가 그의 결박을 풀어주고 호송하여 경사로 나아가게 하니, 도중에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사마의가 洛陽에 이르러 그 일을 끝까지 추궁하여 관련된 자들은 모두 삼족을 멸하였다. 왕릉과 令狐愚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부수어 시체를 꺼내고 楚王 曹彪賜死하였다.
여러 왕공들을 다 체포하여 鄴城에 안치하고는 有司에게 살피게 하여 그들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게 하였다.注+〈“盡錄諸王公置鄴……不得與人交關”은〉 다시 楚王 曹彪와 같은 변고를 일으킬까 염려한 것이다.
[] 예전에 令狐愚가 평민 신분일 때에 늘 높은 뜻을 갖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令狐氏를 흥성시킬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族父 令狐卲가 홀로 말하기를 “영호우의 성품이 뛰어나고 남다르지만 덕을 닦지 않고 원대한 것만을 바라니, 반드시 우리 종족을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하니, 영호우가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注+倜儻”은 우뚝하고 남다른 것이다.
영호우가 벼슬에 나가 명성이 있자,注+昌孕이다. 무릇 名號(명성)를 이라 한다. 조용히 영호소에게 말하기를 “이전에 대인께서 제가 〈선조의 업적을〉 계승하지 못할 것이다 한 말을 들었는데, 지금 끝내 어떠합니까?”라고 하니,
영호소가 자세히 보기만 하고서 대답을 하지 않고 사적인 자리에서 처자에게 말하기를 “公治(영호우)의 성품과 도량이 여전히 옛날과 같구나. 내가 그의 일에 연루될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너희들에게는 재앙이 미칠 것이다.”注+公治令狐愚이다. 不邪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영호소가 죽고 나서 십여 년 후에 영호우는 멸족되었다.
[] 예전에 令狐愚別駕 單固(선고)와 治中 楊康을 심복으로 삼았는데,注+은 음이 으로, 이다. 영호우가 하자 양강이 영호우가 음모를 꾸민 사실을 누설하니, 영호우는 이로 인해 패망하였다.
司馬懿壽春에 도착하여 그 사건을 선고에게 묻자, 선고가 말하기를 “그런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옥에 가두고 양강에게 따져 묻게 하였다.
선고가 할 말이 궁해지자 마침내 욕하기를 “늙은 종놈이 이미 使君(영호우)을 배반하고, 또 우리 종족을 멸망시키니, 오히려 너는 응당 살 수 있을 것 같으냐.”注+은 품을 판다는 뜻이다. 노복이 품삯을 받는 것을 이라고 한다. “老傭”은 老奴(늙은 종)라는 말과 같다. “使君”은 令狐愚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양강이 처음에는 자신이 諸侯에 봉해지기를 바랐는데, 뒤에 獄辭의 내용이 자기 말과 자못 맞지 않아 역시 아울러 참수를 당하니,注+辭頗參錯”은 獄辭單固의 말과 어긋난 것을 말한다. 선고가 또다시 양강을 욕하기를 “만약 죽은 이가 지각이 있다면 네가 무슨 낯으로 지하에 갈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 가을 8월에 나라 太傅 司馬懿하니, 그의 아들 司馬師撫軍大將軍 錄尙書事로 삼았다.注+나라와 나라의 제도에 驃騎車騎衛將軍이 있고, 伏波撫軍都護鎭軍中軍四征四鎭龍驤典軍上軍輔國 등의 大將軍은 지위가 모두 의 반열과 같으며, 錄尙書事의 경우에는 조정의 정사를 단독으로 처리하였다.
[] 나라가 匈奴 左部를 나누어 두 나라로 만들었다.
나라 太祖(曹操)가 單于 呼廚泉鄴城에 머물게 하고 그의 무리들을 나누어 5를 만들어 幷州의 지역 안에 살게 하였다. 左賢王 劉豹左部帥가 되어 部族이 매우 강성해졌다.
城陽太守 鄧艾가 상언하였다.注+前漢 때에 城陽國을 설치하고, 後漢 때에 없애서 琅邪國에 편입시켰고, 나라 武帝(曹操) 때에 靑州를 평정하고 나서 다시 城陽郡을 설치하였다. “선우가 안에 있기 때문에 羌人夷人이 통제를 잃어서 이합집산에 주관함이 없습니다.
지금 선우의 존엄이 날마다 실추되고 외지(좌현왕 유표)의 위세가 날마다 중해지고 있으니, 신중히 대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注+南單于鄴城에 머물러 비록 명성이 높았지만 날로 部落과 소원해졌고, 左賢王 劉豹가 외부에 있었으나 부족이 매우 강성해지자 그의 위엄이 날로 중해졌다.
듣건대 유표의 부족 중에 배반한 胡族이 있다고 하니, 이를 이용해 두 나라로 나누어 그들의 세력을 분리시켜야 합니다.
去卑가 이전 나라 조정에 현격한 공이 있으니, 마땅히 그의 아들에게 빛나는 칭호를 더해주어 鴈門에 살게 해야 합니다. 나라를 분리시키고 적을 약화시키고 옛날 공훈을 추후에 표창하는 것은 변방을 제어하는 장구한 계책입니다.”注+去卑右賢王의 이름이다. “功顯前朝”는 離國”은 匈奴 劉豹의 나라를 분할하여 두 나라로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다시 진술하였다. “羌人胡人漢人들과 같이 살고 있으니, 마땅히 점차 강인과 호인을 내보내어 漢人의 주거지 밖에 살게 하여 廉恥의 가르침을 숭상하고 간악한 짓을 하는 길을 막아야 합니다.”注+는 밖이니, 編戶漢人의 바깥쪽에 살게 한 것을 말한다. 司馬師가 모두 그 말대로 하였다.
[] 겨울 11월에 나라가 諸葛恪太子太傅로 삼아 국가의 일을 총괄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 나라의 立節中郞將 陸抗柴桑의 주둔지에서 建業으로 와서 병을 치료하였다. 병이 차도가 있어 임지로 돌아갈 적에
吳主 孫權이 눈물을 흘리면서 송별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전에 참소하는 말을 듣고서 네 아버지와 군신간의 大義를 돈독히 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으로 그대를 저버렸다. 전후로 〈네 아버지를〉 문책한 조서를 모두 불태워 없애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 이때에 孫權 太子 孫和가 죄가 없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11월에 南郊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다가 中風을 앓게 되어 孫和를 불러 돌아오게 하려고 하였다.
全公主侍中 孫峻, 中書令 孫弘이 손화를 불러서는 안 된다고 쟁론하자, 마침내 중지하였다.注+쟁론한 것은 손화를 다시 세워서 자신의 근심이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손권은 태자 孫亮이 어리다고 여겨서 의탁할 사람을 논의하게 하였는데, 손준은 諸葛恪이 큰일을 맡길 만하다고 추천하였다.
손권이 제갈각이 강퍅하고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손준이 말하기를 “조정의 신하 중에 재주가 제갈각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제갈각을 불렀다.
제갈각이 가려고 할 적에 呂岱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세상에 지금 환난이 많으니, 그대는 매사에 반드시 열 번을 생각하라.”라고 하니,
제갈각이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지금 그대가 나에게 열 번을 생각하라 하니, 내 재능이 변변치 못함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대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때에 모두 〈여대가〉 실언을 했다고 여겼다. 제갈각이 建業에 도착하여 吳主臥內(內室)에서 배알하고 침상 아래에서 조서를 받았는데,
〈손권이 제갈각에게〉 大將軍으로 太子太傅를 겸임하게 하고, 손홍에게 太子少傅를 겸임하게 하였다. 그리고 有司의 여러 가지 일을 제갈각에게 모두 총괄하게 하고 오직 죽이고 살리는 큰 일만을 자기에게 아뢰게 하였다.
[] 虞喜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注+虞喜나라 會稽 餘姚 사람인데, ≪志林≫ 30편을 지었다. “천하를 부탁하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고, 신하가 군주의 권위를 대행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두 가지 지극한 일을 겸하고 모든 정무를 살피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元遜(諸葛恪)이 만약 열 번 생각하라는 뜻을 따라서 당세의 일을 널리 자문하여
천둥이 치는 것보다 빨리 선행을 듣고, 바람이 부는 것보다 급하게 諫言을 따랐다면 어찌 注+諸葛恪이 뒤에 孫峻에게 죽임을 당한 일을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제갈각의 뛰어난 말재주가 볼만한 것을 기이하게 여기고, 呂侯(呂岱)가 대답하지 못한 것을 비루하다고 비웃었다. 이것은 봄철에 초목이 무성한 것은 즐기면서도 가을철에 열매가 입에 단 것은 잊은 것이다.
蜀漢이 작은 나라로 한창 큰 적을 상대하고 있는데, 어찌 자기 자랑에 여유를 부리면서 편안히 걱정이 없을 수 있는가. 이는
어찌 징조가 저기에서 나타나서 재앙이 여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비위와 제갈각의〉 두 가지 일은 大體가 같으니, 모두 세상에서 귀감으로 삼기에 충분하다.”注+
[] 〈나라(蜀漢)〉 費禕가 북쪽으로 漢壽縣에 주둔하였고 陳祗守尙書令으로 삼았다.注+葭萌縣나라 때에 廣漢郡에 속하였는데, 昭烈皇帝가 고쳐서 漢壽縣이라 하고, 梓潼郡에 소속시켰다. ≪資治通鑑≫에 費禕成都에 돌아왔는데, 기운을 보는 자가 이르기를 “都邑宰相의 자리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다시 북쪽으로 가서 漢壽縣에 주둔하였다.


역주
역주1 魏司馬懿……於鄴 : “王凌이 曹彪를 魏主로 세우려고 모의한 것은 반역인데 이를 기록하지 않고 ‘殺’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司馬懿를 미워한 것이다. 이어서 여러 王公들을 鄴城에 안치한 것은 심한 짓이므로 ‘遂’라고 기록하였다. 조표를 쓸 적에 〈‘彪’만 써도 되는데〉 굳이 ‘曹彪’라고 쓴 것은 蜀漢 종실과 차이를 둔 것이다.[凌謀立彪 逆也 不書 書殺 何 惡懿也 而因置諸王公於鄴 甚矣 故以遂書之 彪必書曹 殊之於漢宗也]” ≪書法≫
“王凌은 임금이 강성한 신하의 손에 억압을 받는다고 하여 비록 거사를 행하여 그 명분이 바른 것 같지만, ≪資治通鑑綱目≫에서 그 관직을 쓰지 않았고 또 왕릉이 司馬懿를 토벌한 것을 인정해주지 않은 것은 임금을 도외시하고 曹彪를 魏主로 세우려고 한데다 또 손을 뒤로 묶고 얼굴을 든 채 항복하였기 때문이다. 사마의는 曹爽을 죽인 이후로 魏나라가 이미 그의 손아귀에 있었는데, 지금 또 조표를 죽이고 여러 曹氏들을 모두 鄴城에 안치하였으니, 억압한 위세는 또다시 曹操가 했던 짓보다 심하다. 曹丕가 漢나라를 찬탈함으로부터 지금까지 겨우 30년인데, 天道가 이처럼 보응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어찌 분명하지 않은가.[王凌以其君制於強臣之手 雖擧大事 其名似正 然綱目不書其官 又不予其討懿者 外其君而欲立彪 且又面縛出降故也 懿自殺爽之後 魏國已在其掌握 今又殺彪 而盡置諸曹於鄴 其脇制之威 又甚於操之所爲矣 自丕簒漢至是 纔三十載 天道好還如此 豈不昭昭也哉]” ≪發明≫
역주2 예전에……가탁하였다 : 匈奴가 劉氏 성을 쓰게 된 일은 ≪晉書≫ 〈載記 劉元海〉에 “劉元海는 新興匈奴 사람으로 冒頓의 후손이다.……예전에 漢 高祖(劉邦)가 宗室의 딸로 公主를 삼아서 匈奴 冒頓에게 시집보내고 兄弟가 되기로 약속하였으므로, 흉노의 자손들이 마침내 劉氏 姓을 사용하게 되었다.[劉元海 新興匈奴人 冒頓之後也……初 漢高祖以宗女爲公主 以妻冒頓約爲兄弟 故其子孫遂冒姓劉氏]”라고 하였다.
역주3 거비가……말한다 : 後漢 獻帝 興平 2년에 李傕과 郭汜가 獻帝를 끼고 長安에 있었는데, 헌제가 탈출하여 洛陽으로 갔다. 헌제는 도중에 李樂, 韓暹, 胡才, 南匈奴의 右賢王 去卑를 불러 자신을 호종하게 하였다.
역주4 옛날에……괜찮다 : 이는 ≪論語≫ 〈公冶長〉에 보인다.
역주5 殿堂에서……죽었겠는가 : 孫峻이 諸葛恪을 주연에 초청하여 죽인 일을 가리킨 것으로 본서 103쪽에 보인다.
역주6 옛날에……여겼다 : 본서 31, 32쪽에 보인다.
역주7 君子가……성공한다 :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論語≫ 〈述而〉에 三軍을 인솔하고 전쟁터에 나간다면 누구와 함께 가겠냐는 子路의 물음에, 孔子가 “범을 맨손으로 잡으려 하고 하수를 맨몸으로 건너려다가 죽어도 뉘우침이 없는 자를 나는 함께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일을 당하면 두려워하고 계책을 내기를 좋아하여 성공하는 자라야 할 것이다.[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라고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역주8 비위가……것이니 : 郭循은 郭修로도 표기되었는데 魏나라의 中郞將으로 蜀漢의 장수 姜維에게 패하여 투항하고 촉한의 左將軍에 임명되었으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後主 劉禪을 암살하려 하였다. 그러던 중 後主 延熙 6년(253) 정월에 費禕가 장병들과 회식하고 크게 취하자, 그를 칼로 찔러 죽였다. 비위가 새로 귀순한 자들을 지나치게 우대하였는데, 張嶷이 자객을 경계하라 하였으나 듣지 않은 것이다. 본서 96쪽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9 況은……사람이다 : 況長寧에 대하여 ≪資治通鑑≫ 胡三省 注에는 “언급한 長寧은 누구인지 모르겠다.[所謂長寧者 未知其爲誰也]”라고 하였으나, ≪四庫全書總目≫ 권45 〈史部總敍〉 ‘三國志補註六卷附諸史然疑一卷’에 ≪困學紀聞≫을 인용하여 “況長寧은 蜀人이다.”라고 하였다.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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