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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6)

자치통감강목(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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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丑年(A.D.5)
을축년(A.D.5)
五年이라 春正月 祫祭明堂注+祫, 音洽. 禮 “五年而再殷祭, 壹禘壹祫.” 祫祭者, 毁廟與未毁廟之主, 皆合食於太祖.하다
[] 나라 효평황제孝平皇帝 원시元始 5년이다. 봄 정월에 명당明堂에서 협제祫祭(협제)하였다.注+은 음이 이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종백宗伯〉의 정현鄭玄 에 “5년에 두 번 성대한 제사를 지내서 한 번은 체제禘祭, 한 번은 협제祫祭를 지낸다.” 하였다. 협제祫祭는 훼철한 사당과 훼철하지 않은 사당의 신주를 모두 태조太祖의 사당에서 합제合祭하는 것이다.
◑復南北郊하다
[] 남교南郊북교北郊를 회복하였다.
三十餘年間 天地之祠 凡五徙注+成帝建始元年, 罷甘泉泰畤‧汾陰后土祠, 作長安南北郊, 永始三年, 復甘泉‧汾陰, 成帝崩, 皇太后詔復長安南北郊, 哀帝建平三年, 復甘泉‧汾陰, 今又復南北郊, 是五徙也.하다
[] 30여 년 사이에 천지天地의 제사를 모두 다섯 번 바꾸었다.注+성제成帝 건시建始 원년(B.C.32)에 감천甘泉태치泰畤분음汾陰후토사后土祠를 파하고 장안長安남교南郊북교北郊를 만들었다가 영시永始 3년(B.C.14)에 감천(태치)과 분음(후토사)을 회복하였다. 성제成帝하자 황태후가 조령詔令을 내려 장안의 남교와 북교를 회복하였고, 애제哀帝 건평建平 3년(B.C.4)에 감천과 분음을 회복하였는데, 지금 다시 남교와 북교를 회복하니, 이것이 다섯 번 바꾼 것이다.
置宗師하다
[] 종사宗師를 설치하였다.
詔曰
[] 조령詔令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宗室子自漢元至今 十有餘萬人注+漢元, 漢初也.이라
종실宗室의 자제는 나라 초기부터 지금까지 10여만 명이다.注+한원漢元나라 초기이다.
其令郡國으로 各置宗師以糾之하여 致敎訓焉注+糾, 謂禁察也.하라
군국郡國으로 하여금 각각 종사宗師(종친宗親을 가르치는 스승)를 설치하여 이들을 규찰해서 교훈을 다하게 하라.”注+는 금하고 살핌을 이른다.
夏四月 太師光커늘 以馬宮爲太師하다
[] 여름 4월에 태사太師 공광孔光하자, 마궁馬宮태사太師로 삼았다.
◑五月 하다
[] 5월에 안한공安漢公 왕망王莽에게 구석九錫을 더하였다.
吏民 以莽不受新野田이라하여 而上書者 前后四十八萬七千五百七十二人이요
[] 관리와 백성들 중에, 왕망王莽신야新野전지田地를 받지 않았다 하여 글을 올려 〈찬양한 자가〉 전후로 48만 7,572명이었고,
及諸侯王公列侯宗室見者 皆叩頭言호되 宜亟加賞於安漢公注+見, 賢遍切.이라한대
제후諸侯, 열후列侯종실宗室로서 태후太后를 뵙는 자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마땅히 빨리 안한공安漢公에게 상을 더해야 합니다.” 하였다.注+(알현하다)은 현편賢遍이다.
乃策命安漢公莽以九錫注+九錫, 一曰車馬, 二曰衣服, 三曰樂器, 四曰朱戶, 五曰納陛, 六曰虎賁, 七曰鈇鉞, 八曰弓矢, 九曰秬鬯.하니
이 에 책서策書를 내려 안한공 왕망에게 구석九錫을 명하니注+구석九錫은 첫째는 거마車馬, 둘째는 의복衣服, 셋째는 악기樂器, 넷째는 주호朱戶, 다섯째는 납폐納陛, 여섯째는 호분虎賁, 일곱째는 부월鈇鉞, 여덟째는 궁시弓矢, 아홉째는 거창秬鬯이다.,
稽首再拜하고 受綠韍, 衮冕, 衣裳, 瑒琫, 瑒珌, 句履, 鸞輅, 乘馬, 龍旂, 九旒, 皮弁, 素積, 戎路, 乘馬, 彤弓矢, 盧弓矢하고
왕망이 머리를 조아려 재배再拜하고 녹색의 슬갑[녹불綠韍]과 곤면衮冕(곤면), 의상衣裳탕봉瑒琫(탕봉), 탕필瑒珌(탕필)과 구리句履(신코를 장식한 네모진 신), 난로鸞輅(난로)와 승마乘馬, 용기龍旂구류九旒(아홉 개의 솔이 달린 것), 피변皮弁소적素積, 융로戎路승마乘馬, 동궁시彤弓矢(붉은 활과 화살)과 노궁시盧弓矢(검은 활과 화살)을 받았다.
左建朱鉞하고 右建金戚하며
또 왼쪽에는 붉은 도끼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금도끼를 세우며,
甲冑一具, 秬鬯二卣, 圭瓉二, 九命靑玉珪二, 朱戶, 納陛하고
한 벌과 검은 기장으로 빚은 울창주[거창秬鬯] 두 통과 규찬圭瓉(규찬) 2개, 구명九命청옥규靑玉珪 2개, 주호朱戶(붉은 문)와 를 받았으며,
署宗官, 祝官, 卜官, 史官하고 虎賁三百人注+韍, 音弗, 謂蔽膝也. 或謂韍韠, 韠, 音畢, 在冕服, 謂之韍, 他服則謂之韠. 瑒, 音蕩, 玉名也. 琫, 布孔切, 珌, 音必, 佩刀之飾, 上曰琫, 下曰珌. 句, 巨俱切, 履舃頭飾也. 出履三寸, 其形岐頭. 旒, 旂之末垂也. 皮弁, 以鹿子皮爲之, 長七寸, 高四寸. 制如覆盆, 前高廣, 後卑銳. 積, 子昔切, 謂襞積也. 素積者, 素裳也, 朱衣而素裳. 彤, 赤色也. 盧, 黑色也. 鉞‧戚, 竝斧屬. 朱鉞, 謂以丹朱飾鉞之柄. 金戚, 謂以黃金飾戚也. 禮大宗伯 “以九儀之命, 正邦國之位, 一命受職, 再命受服, 三命受位, 四命受器, 五命賜則, 六命賜官, 七命賜國, 八命作牧, 九命作伯.” 又典命曰 “上公九命爲伯, 其國家宮室車旗衣服禮儀, 皆以九爲節.” 六器圖云 “以靑圭禮東方, 東, 生物之方也, 故圭銳以象春. 九命然後, 賜之朱戶, 謂所居之室, 朱其戶也.” 納, 內也, 謂鑿殿基際爲陛, 不使露也. 尊者不欲露而升陛, 故納之於霤下也. 署宗官‧祝官‧卜官‧史官, 放周公也. 成王之命周公, 太祝‧宗人‧太卜‧太史凡四官. 虎賁, 主宿衛, 無常員, 多至千人, 卽武帝時期門也.하다
종관宗官축관祝官, 복관卜官사관史官을 임명하고 호분虎賁 300명을 두었다.注+은 음이 이니, 슬갑[폐슬蔽膝]을 이른다. 혹은 불필韍韠(불필)이라 하는바, 은 음이 이니, 면복冕服에 있는 것을 이라 하고 다른 의복에서는 이라 한다. 은 음이 이니, 옥의 이름이다. 포공布孔이고, 은 음이 패도佩刀의 장식이니, 위를 이라 하고 아래를 이라 한다. (신코의 꾸밈)는 거구巨俱이니, 신의 꾸밈이다. 신에서 3이 나왔는데, 모양은 머리가 둘로 갈려져 있다. 는 깃발의 끝이 드리워진 것이다. 피변皮弁은 새끼 사슴의 가죽으로 만드니, 길이가 7이고 높이가 4이다. 제도는 덮어놓은 동이와 같으니, 앞은 높고 넓으며 뒤는 낮고 뾰족하다. 자석子昔이니, 주름[벽적襞積]을 이른다. 소적素積은 흰 치마이니, 붉은색의 웃옷에 흰색의 주름치마이다. 은 붉은색이고, 는 검은색이다. 은 모두 도끼이니, 주월朱鉞은 도끼의 자루를 붉은 주사紬絲(명주실)로 꾸민 것을 이르고, 금척金戚은 도끼를 황금으로 꾸민 것을 이른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대종백大宗伯〉에 “구의九儀으로 방국邦國의 지위를 바로잡아서, 일명一命에는 직책을 받고 이명二命에는 의복을 받고 삼명三命에는 지위를 받고 사명四命에는 기물을 받고 오명五命에는 법칙을 하사받고 육명六命에는 관직을 하사받고 칠명七命에는 나라를 하사받고 팔명八命에는 이 되고 구명九命에는 이 된다.” 하였다. 또 《주례周禮》 〈춘관春官 전명典命〉에 이르기를 “상공上公구명九命이 되니, 국가國家궁실宮室과 수레와 깃발, 의복衣服예의禮儀는 모두 아홉을 절도로 삼는다.” 하였다. 에 “청규靑圭로써 동방東方하니, 동쪽은 물건을 낳는 방위이므로 가 뾰족하여 봄을 형상한 것이다. 구명九命이 된 뒤에야 주호朱戶를 하사하니 거처하는 방에 문을 붉게 칠함을 이른다.” 하였다. 은 들어감이니, 궁전의 터 밑을 파서 섬돌을 만들어 〈높은 사람이 전대殿臺에 오를 적에 신분이〉 노출되지 않게 함을 이른다. 신분이 높은 자는 몸을 노출시켜 계단 위로 올라가려 하지 않으므로 처마 아래로 들이는 것이다. 종관宗官축관祝官, 복관卜官사관史官을 임명함은 주공周公을 모방한 것이다. 성왕成王이 주공에게 명할 적에 태축太祝종인宗人, 태복太卜태사太史 모두 네 관원이 있었다. 호분虎賁숙위宿衛를 주관하니, 일정한 인원이 없어서 많으면 천 명에 이르렀으니, 바로 한 무제漢 武帝 때의 이다.
封王惲等八人하여 爲列侯하다
[] 왕운王惲 등 여덟 사람을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
王惲等 還言 天下風俗齊同이라하고
[] 왕운王惲 등이 돌아와 말하기를 “천하의 풍속이 모두 똑같다.” 하고,
詐造歌謠하여 頌功德 凡三萬言이라
거짓으로 가요歌謠를 만들어서 왕망王莽의 공덕을 칭송한 것이 모두 3만 에 이르렀다.
詔以惲等 宣明德化하여 萬國齊同하니 皆封爲列侯注+王惲常鄕侯, 閻遷望鄕侯, 陳崇南鄕侯, 李翕邑鄕侯, 郝黨亭鄕侯, 謝殷章鄕侯, 逯普蒙鄕侯, 陳鳳盧鄕侯.하라하다
태후太后가〉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왕운 등이 덕화德化를 선양하여 밝혀서 만국萬國의 풍속이 모두 똑같으니, 모두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아라.” 하였다.注+왕운王惲상향후常鄕侯, 염천閻遷(염천)은 망향후望鄕侯, 진숭陳崇남향후南鄕侯, 이흡李翕(이흡)은 李翕邑鄕侯, 학당郝黨(학당)은 정향후亭鄕侯, 사은謝殷장향후章鄕侯, 녹보逯普(녹보)는 몽향후蒙鄕侯, 진봉陳鳳노향후盧鄕侯에 봉하였다.
廣平相班穉 獨不上嘉瑞及歌謠하고
이 때 광평국廣平國의 정승인 반치班穉만이 아름다운 상서와 칭송하는 가요를 올리지 않았고,
琅邪太守公孫閎 言災害於公府
낭사태수琅邪太守 공손굉公孫閎(공손굉)이 공부公府에서 재해가 있음을 말하였다.
甄豐 劾閎造不祥하고 穉絶嘉應하여 嫉害聖政하니 皆不道라하니
견풍甄豐이 “공손굉은 상서롭지 못한 말을 날조하고, 반치는 아름다운 응험을 끊어서 성인聖人의 정사를 미워하고 방해하니, 모두 무도無道하다.”라고 탄핵하였으니,
班倢伃弟也
반치는 반첩여班倢伃(반첩여)의 친정 아우였다.
太后曰 班穉 後宮賢家 我所哀也注+班倢伃有賢德, 故哀閔其家也.라하니
태후太后가 말하기를 “반치는 후궁의 어진 집안이니, 내 가엾이 여기는 바이다.”注+② 〈“반치班穉……아소애야我所哀也”는〉 반첩여班倢伃가 어진 덕이 있었으므로 그 집안을 가엾게 여긴 것이다. 하니,
閎獨下獄誅하다
공손굉만 홀로 하옥되어 주살誅殺을 당하였다.
穉懼하여 上書陳謝하고 願歸相印하여 入補延陵園郞注+陳謝, 陳恩謝罪也. 延陵, 成帝陵也. 園郞, 掌守園寢門戶.하다
반치는 두려워하고 글을 올려 사죄하고는 국상國相인수印綬를 돌려주기를 원하여, 연릉원延陵園낭관郞官에 보임되었다.注+③ “진사陳謝”는 은혜를 아뢰고 사죄하는 것이다. 연릉延陵성제成帝이다. 낭관郞官원침園寢문호門戶를 지키는 일을 주관한다.
又奏爲市無二賈하고 官無獄訟하고 邑無盜賊하고 野無饑民하고 道不拾遺하고 男女異路之制하여 犯者 象刑注+賈, 讀曰價, 市無二賈, 言純質也. 象刑者, 其衣服象五刑也, 犯墨者蒙巾, 犯劓者以赭著其衣, 犯髕者以墨蒙其髕, 象而畫之, 犯宮者扉, 犯大辟者布衣無領, 皆別異衣服, 以愧辱之, 而不至於用刑. 髕, 頻忍切, 去其膝蓋骨也. 扉, 扶味切, 草屨也.하다
[] 왕망王莽이 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시장에는 물건값이 통일되어 두 가지가 없고 관청에는 옥사獄事송사訟事가 없으며 에는 도적이 없고 들에는 굶주린 백성이 없으며 길에는 남이 유실한 물건을 주워 가지 않고 남녀가 길을 달리하는 제도를 만들어서, 이것을 범하는 자를 상형象刑으로 처리해야 합니다.”注+로 읽으니, “시무이가市無二賈”는 사람들이 순수하고 질박함을 말한 것이다. 상형象刑은 그가 입은 의복에 다섯 가지 형벌을 형상한 것이니, 묵형墨刑을 범한 자는 수건을 뒤집어씌우고, 의형劓刑(코 베는 형벌)을 범한 자는 붉은색 옷을 입히고, 빈형髕刑(무릎뼈를 자르는 형벌)을 범한 자는 먹물로 무릎뼈를 덮어서 그대로 그리고, 궁형宮刑을 범한 자는 짚신을 신기고, 대벽大辟을 범한 자는 삼베옷에 동정이 없게 하는 등, 모두 의복을 달리해서 부끄럽고 치욕스럽게 할 뿐, 형벌을 사용함에는 이르지 않은 것이다. 빈인頻忍이니, 무릎뼈를 제거하는 것이다. 부미扶味이니 짚신이다.
發定陶恭王母及丁姬冢하여 取其璽綬하다
[] 정도공왕定陶恭王의 어머니와 정희丁姬의 무덤을 발굴하여 옥새와 인끈을 꺼내었다.
秋八月 太師大司徒宮하다
가을 8월에 태사太師 대사도大司徒 마궁馬宮이 파직되었다.
奏恭王母, 丁姬 懷帝太后皇太太后璽綬注+懷, 謂挾之以自隨也.以葬하니 請發冢하여 取其璽綬하노이다
[] 왕망王莽이 아뢰기를 “공왕恭王의 어머니(부태후傅太后)와 정희丁姬제태후帝太后황태태후皇太太后의 옥새와 인수를 안고注+는 품어서 몸에 휴대함을 이른다. 묻혔으니, 무덤을 발굴하여 옥새와 인끈을 취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太后不許러니 固爭之한대 太后詔因故棺改葬之하다
태후太后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왕망이 굳이 간쟁하므로, 태후가 조령詔令을 내려서 옛 을 그대로 두고 개장改葬하라고 하였다.
奏恭王母, 丁姬棺 皆名梓宮하고 珠玉之衣 非藩妾服이니 請更之하노이다
왕망이 아뢰기를 “공왕의 어머니와 정희의 을 모두 참람하게 재궁梓宮이라 하였고, 주옥珠玉의 옷은 번첩藩妾이 입을 옷이 아니니 바꿀 것을 청합니다.” 하니,
奏可注+謂之梓宮者, 以香梓爲之, 言猶生時所居宮室也. 珠玉之衣, 珠襦玉匣也.하다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注+재궁梓宮이라 이른 것은 향기 나는 가래나무로 관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니, 생시에 거처하던 궁실과 똑같이 함을 말한 것이다. “주옥지의珠玉之衣”는 주유옥합珠襦玉柙(제왕이나 제후를 장례할 적에 입히던 구슬과 옥으로 장식한 염복斂服)이다.
公卿在位 皆阿莽指하여 入錢帛, 遣子弟及諸生四夷凡十餘萬人하여
[] 지위에 있는 공경公卿들이 모두 왕망王莽의 뜻에 아첨하여 돈과 비단을 바치고 자제들을 보냈으며, 또 여러 생도와 사방 오랑캐에서 보낸 역도役徒가 모두 십여만 명이었는데,
操持作具하여 助將作掘平之注+作具, 畚鍤之類. 將作, 官名. 掘, 穿也.하다
일하는 도구를 가지고 와서 장작관將作官을 도와 무덤을 발굴하여 평평하게 하였다.注+① “작구作具(일하는 도구)”는 삼태기와 삽 따위이다. 장작將作관명官名이다. 를 파는 것이다.
又隳壞恭皇廟하고 泠褒, 段猶等 皆徙合浦注+上帝太后‧皇太后尊號及立恭皇廟, 皆褒‧猶等發也.하다
공황묘恭皇廟를 허물고 영포泠褒단유段猶 등을 모두 합포合浦로 폄적시켰다.注+② 〈부후傅后정희丁姬에게〉 제태후帝太后황태후皇太后존호尊號를 올리고, 공황묘恭皇廟를 세운 것은 모두 영포泠褒단유段猶 등이 발의한 것이다.
徵師丹하여 封義陽侯러니 月餘注+恩澤侯表 “義陽侯, 食邑於南陽新野.”하다
사단師丹을 불러 의양후義陽侯로 봉했는데, 한 달 남짓 뒤에 하였다.注+③ 《한서漢書》 〈외척은택후표外戚恩澤侯表〉에 “의양후義陽侯남양南陽신야현新野縣에 식읍을 두었다.” 하였다.
馬宮 嘗與議傅太后諡러니 至是 爲莽所厚
마궁馬宮이 일찍이 부태후傅太后의 시호를 함께 의논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망과 친하게 지냈다.
追誅前議者로되 而獨不及宮하니
그러므로 예전에 시호를 의논한 자들을 뒤늦게 주벌하였으나, 마궁에게만은 화가 미치지 않았다.
內慙懼하여 上書自言이어늘 詔以侯就第注+宮封扶德侯, 邑於琅邪贛楡.하다
마궁이 속으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여 글을 올려 직접 말하자, 조령詔令을 내려 로 봉하여 집에 나아가게 하였다.注+마궁馬宮부덕후扶德侯에 봉해져 낭야琅邪(낭야)의 공유현贛楡縣(공유현)에 식읍을 두었다.
冬十二月 注+壽十四.하다
[] 겨울 12월에 안한공安漢公 왕망王莽이 황제를 시해하였다.注+① 〈평제平帝는〉 항년이 14세였다.
帝益壯 以衛后故怨으로 不悅이러니
[] 황제가 차츰 장성하자, 위후衛后의 옛 원한 때문에 왕망王莽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因臘日하여 上椒酒할새 置毒酒中하니 帝有疾이라
왕망이 납제臘祭 올리는 날을 이용하여 초주椒酒를 올릴 적에 술에 독약을 넣으니, 황제가 병환에 걸렸다.
作策하여 請命於泰畤하여 願以身代하고
왕망은 책서策書를 지어서 태치泰畤에 명을 청하여 자신이 황제의 죽음을 대신하게 해달라고 하고,
藏策金縢하여 置于前殿하고 勅諸公勿敢言注+詐依周公爲武王請命, 作金縢也.하다
책서策書금등金縢에 보관하여 정전正殿에 두고 여러 들에게 신칙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注+① 〈“장책금등藏策金縢”은〉
帝崩커늘 令吏皆服喪三年하고 斂加하여 葬康陵注+康陵, 在長安北六十里.하다
황제가 하자, 왕망은 관리들로 하여금 모두 삼년복三年服을 입게 하였으며, 하고 관례를 하여 강릉康陵에 장례하였다.注+강릉康陵장안長安의 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班固曰
[] 반고班固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孝平之世 政自莽出이어늘 褒善顯功하여 以自尊盛이라
효평제孝平帝의 세대에는 정권이 왕망王莽에게서 나오니, 〈왕망은 스스로〉 한 사람을 표창하고 공이 있는 사람을 드러내어 스스로 존귀하고 훌륭하다고 여겼다.
觀其文辭하면 方外百蠻 無思不服하고 休徵嘉應하여 頌聲竝作이로되
그의 글을 보면 사방 밖에 있는 여러 오랑캐들이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좋은 징조가 아름답게 응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함께 일어났다 하였으나,
至乎變異見於上하고 民怨於下하여는 莽亦不能文也注+言不可復文飾也.하니라
재변이 위에서 나타나고 백성들이 아래에서 원망함에 이르러는 왕망 더 이상 문식하지 못하였다.”注+① 〈“망역불능문야莽亦不能文也”는〉 다시 문식文飾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 평안平晏대사도大司徒로 삼았다.
[] 태황태후太皇太后조령詔令을 내려 선제宣帝현손玄孫을 불러오게 하고, 또다시 조령詔令을 내려 안한공安漢公 왕망王莽거섭居攝하여 천조踐阼하게 하였다.
太后與群臣議立嗣할새
[] 태후太后가 여러 신하들과 후사後嗣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는데,
元帝世絶하고 而宣帝曾孫 有見王五人, 列侯四十八人注+王之見在者五人, 淮陽王縯‧中山王成都‧楚王紆‧信都王景‧東平王開明也. 列侯, 廣戚侯顯等凡五十人, 而廣戚侯顯, 孺子之父, 栗鄕侯玄成, 先已免侯, 止四十八人耳.이라
이때 원제元帝의 후손은 끊겼고, 선제宣帝증손曾孫 중에는 현재 왕으로 있는 자가 다섯 명이고 열후列侯로 있는 자가 48명이었다.注+① 현재 왕으로 있는 5명은, 회양왕淮陽王 유연劉縯중산왕中山王 성도成都, 초왕楚王 유우劉紆, 신도왕信都王 유경劉景, 동평왕東平王 유개명劉開明이다. 열후列侯광척후廣戚侯 유현劉顯 등 모두 50명이었는데, 유자孺子(유영劉嬰)의 아버지인 광척후劉顯 유현劉顯율향후栗鄕侯 유현성劉玄成은 앞서 이미 에서 제외되어 다만 48명이었다.
惡其長大하여 曰 兄弟不得相爲後라하고
왕망王莽은 이들이 장성한 것을 싫어하여 “형제의 항렬은 후사後嗣가 될 수 없다.”라 하고는,
乃悉徵宣帝玄孫하여 選立之하다
마침내 선제宣帝현손玄孫을 모두 불러서 선발하여 〈후사로〉 세우게 하였다.
泉陵侯劉慶 上書言注+地理志 “泉陵縣, 屬零陵郡.” 慶, 長沙定王之後.호되
[] 처음에 천릉후泉陵侯 유경劉慶상서上書하기를注+①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천릉현泉陵縣영릉군零陵郡에 속했다.” 하였다. 유경劉慶장사정왕長沙定王의 후손이다.
皇帝富於春秋하시니 宜令安漢公攝行天子事 如成王周公故事니이다
“황제는 춘추春秋가 젊으시니, 마땅히 성왕成王주공周公고사故事와 같이 안한공安漢公으로 하여금 천자天子의 일을 대행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群臣 皆以爲宜라하더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것을 마땅하다고 하였다.
至是하여 前煇光謝囂奏호되 浚井得白石하니 有丹書文曰 告安漢公莽爲皇帝라하여늘
이 때에 전휘광前煇光 사람 사효謝囂가 아뢰기를 “우물을 치우다가 흰 돌을 얻었는데, 붉은 글씨로 ‘안한공安漢公 왕망王莽황제皇帝가 될 것을 고한다.’라 쓰여 있습니다.”라고 하자,
太后曰 此誣罔天下 不可施行이니라
태후太后가 말하기를 “이것은 천하를 기망하는 짓이니, 시행할 수 없다.” 하였다.
太保舜 謂太后호되
[] 태보太保 왕순王舜태후太后에게 아뢰기를,
事已如此하니 無可奈何
“일이 이미 이와 같이 되었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非敢有他 但欲稱攝以重其權하여 塡服天下耳니이다
왕망王莽이 감히 딴마음을 품은 것이 아니고, 다만 섭정攝政을 칭하여 자신의 권력을 무겁게 해서 천하를 진정시키고 복종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니,
太后力不能制하여 乃下詔曰
태후는 자신의 힘으로 제재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다음과 같은 조령詔令을 내렸다.
已徵孝宣皇帝玄孫二十三人하여 差度宜者하여 以嗣孝平皇帝之後注+度, 大各切, 差度, 謂擇也.로되
“이미 효선황제孝宣皇帝현손玄孫 23명을 불러 마땅한 자를 간택해서 효평황제孝平皇帝의 뒤를 잇게 하였으나注+(헤아리다)은 대각大各이니, “차도差度”은 간택함을 이른다.,
玄孫 年在襁褓하니 不得至德君子 孰能安之리오
현손玄孫의 나이가 어려 포대기 안에 있으니, 지극한 덕이 있는 군자를 얻지 못하면 누가 능히 그를 편안하게 하겠는가.
其令安漢公居攝踐阼 如周公故事리니 具禮儀奏注+踐, 履也. 阼, 王階也. 履王階行事, 故云踐阼.하라
주공周公고사故事와 같이 안한공安漢公으로 하여금 거섭居攝하고 천조踐阼하게 할 것이니, 예절과 의식을 갖추어 아뢰어라.”注+은 밟음이고, 는 왕(황제)이 오르내리는 계단이니, 왕의 계단을 밟고 일을 행하므로 천조踐阼라 한 것이다.
於是 群臣 奏言호되
[] 이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請安漢公踐阼하여 服天子韍冕하고 背斧依于戶牖之間하여 南面朝群臣하여 聽政事하니
안한공安漢公천조踐阼하여 천자天子의 슬갑과 면류관을 착용하고 와 북쪽 창문 사이에서 부의斧依를 등 뒤에 두고서 남면南面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조회를 받고 정사를 들어야 하니,
車服警蹕 民臣稱臣妾 皆如天子之制注+背亦作倍, 斧亦作黼, 依亦作扆. 扆之狀, 從廣八尺, 畫爲斧形, 今之屛風, 是其遺象也.하며
수레와 의복과 경필警蹕(경필)을 행함과 백성과 신하들이 신첩臣妾이라 칭하기를 모두 천자天子의 제도와 같이 해야 합니다.注+로도 쓰고 로도 쓰고 로도 쓴다. 의 모습은 세로와 가로가 8으로 도끼 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병풍이 바로 남은 모습이다.
贊曰假皇帝라하고 民臣謂之攝皇帝라하고 自稱曰予라하고
제사에 하기를 ‘가황제假皇帝’라 하고 백성과 신하들이 ‘섭황제攝皇帝’라 칭하고, 자칭自稱하기를 ‘’라 칭하고,
平決朝事 常以皇帝之詔稱制注+贊, 謂祭祝之辭.호되
조정의 일을 결정할 적에 항상 황제皇帝조령詔令으로 ‘’를 칭하게 하되注+제축祭祝축사祝辭를 이른다.,
其朝見太皇太后, 皇帝皇后 皆復臣節注+皇帝皇后, 謂平帝后也. 復, 如字, 反也, 還也.하고
태황태후太皇太后황제皇帝황후皇后를 조회해서 뵐 적에는 모두 신하의 절도를 다시 갖추고注+황제皇帝황후皇后평제平帝를 이른다. 본음本音대로 읽으니 돌아옴이고, 되돌아온다(회복하다)는 뜻이다.,
自施政敎於其宮家國采 如諸侯禮儀故事注+宮者, 謂以安漢公第爲宮也. 家者, 謂其家也. 國者, 謂其所封新都國也. 采, 謂以武功縣爲采地. 采, 官也, 以官受地, 故謂之采. 一說 “采者, 采取賦稅也.”니이다
스스로 자기 , 채지采地(식읍食邑)에서 정사와 가르침을 베풀 적에는 제후왕의 예의禮儀 고사故事와 같이 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注+안한공安漢公의 집을 으로 삼음을 이르고, 는 자신의 집안을 이르고, 은 그를 봉한 신도국新都國을 이르고, 무공현武功縣채지采地로 삼음을 이른다. 는 관직이니 관직으로 땅을 받았으므로 라 한 것이다. 일설에 “는 그곳의 부세를 취하는 것이다.” 하였다.,
詔曰可라하다
조령을 내려 “하다.” 하였다.
역주
역주1 加安漢公莽九錫 : “‘加’라고 쓴 것은 명령이 오히려 위에서 나온 것이다. 王莽의 권력으로도 오히려 위에서 命이 나온 것은 어째서인가. 이때에 平帝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太后가 마음대로 명하였으니, ‘加’를 쓴 것은 태후를 나쁘게 여긴 것이다. 九錫을 加함을 쓴 것이 이때에 처음 시작되었다.[書曰加 命猶自上出也 以莽之權 而猶自上出 何 於是平帝尙幼 太后專之 書加 所以病太后也 書九錫始此]” 《書法》
역주2 納陛 : 궁전의 터를 파서 섬돌[陛]을 만들어 높은 사람이 신분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殿臺에 오르게 하는 것이나 제도는 자세하지 않다. 《爾雅》 〈釋名 釋宮室〉에는 “陛는 낮다는 뜻이니,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다. 天子의 궁전을 納陛라 하니,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는 階梯임을 말한 것이다.[陛 卑也 有尊卑也 天子之殿 謂之納陛 言所以納人言之階陛也]” 하였고, 《白虎通義》 〈考黜〉에는 “옛날 임금이 賢者에게 낮추어 계단 한 등급을 내려가서 예우하였으므로 현자를 등용할 적에 納陛를 하사하여 우대한 것이다.[古者人君下賢 降階一等以禮之 古進賢 賜之納陛以優之也]” 하였다.
역주3 六器圖 : 《周禮》의 六器를 그린 도식으로 보이나 책명은 분명치 않다. 六器는 여섯 가지 玉으로 하늘과 땅, 四方에 禮하는 기물인바, 蒼璧으로 하늘에 禮하고 黃琮으로 땅에 禮하고 靑圭로 東方에 禮하고 赤璋으로 南方에 禮하고 白琥로 西方에 禮하고 玄璜으로 北方에 禮한다. 《周禮 天官 大宗伯》
역주4 期門 : 漢 武帝 때 설치된 황제의 친위병이다. 무제가 微行할 적에 용맹하고 힘이 있는 장사들과 대궐문에서 만나기로 기약했기 때문에 期門이라 하였다. 이들은 光祿勳에 속하였다.
역주5 安漢公莽 弑帝 : “平帝의 죽음을 예전 역사책에 비록 ‘술 가운데에 毒을 넣었다.’라고 분명히 말하였으나 모두 ‘황제가 崩하였다.[帝崩]’라고 썼었는데, 《資治通鑑綱目》에 이르러 비로소 名稱을 바로잡고 죄를 정하여 곧바로 ‘弑逆’이라고 쓴 것은 亂臣賊子를 주벌하여 萬世의 경계로 삼은 것이다. 무릇 王莽이 紛紛하게 제작하고 褒賞하고 살육함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으니, 《資治通鑑綱目》에 이러한 사실을 비록 다 삭제하지는 않았으나 요컨대 大逆과 大惡의 죄인은 그 간사하고 거짓된 자취를 애당초 깊이 의논할 것이 못 되기 때문에 또한 생략한 것이다.[平帝之終 前史雖明言置毒酒中 然皆以帝崩爲文 至綱目 始正名定罪 直書弑逆者 所以誅亂臣賊子 爲萬世戒爾 凡莽紛紛制作 褒賞殺戮 不可勝紀 綱目雖不盡削 要之大逆大惡之人 其姦僞之迹 初無足深論者 故亦得略之]” 《發明》
역주6 元服 : 冠을 이른다. 《漢書》 〈昭帝紀〉에 “4년 봄 정월 丁亥日에 황제가 관례를 치렀다.[四年春正月丁亥 帝加元服]”라고 보이는데, 顔師古의 注에 “元은 머리이다. 冠은 머리에 쓰는 것이어서 元服이라고 한다.” 하였다.
역주7 周公이……것이다 : 金縢은 글을 봉함한 상자를 쇠사슬로 단단히 묶어 보관한 것이다. 武王이 殷나라를 정벌하고 천하를 통일한 2년 뒤에 큰 병에 걸리자, 周公은 무왕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땅을 깨끗이 청소하여 세 개의 제단을 똑같이 만들고, 남쪽에 단을 다시 만들어 북향하게 한 다음, 이 단에 서서 璧玉을 세워놓고 珪를 잡고서 太王과 王季, 文王에 고유하여 무왕 대신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리고 거북점을 쳐보니, 무왕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라는 좋은 점괘가 나왔다. 주공은 돌아와서 이 고유한 策을 금등에 넣어 보관하였는데, 다음날 무왕의 병환이 쾌차하였다. 주공은 이 사실을 여러 執事들에게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 내용을 적은 글이 바로 《書經》의 〈金縢〉이다. 王莽은 平帝를 독살하고는 거짓으로 주공처럼 황제를 위해 泰畤에 기도하고, 자신을 대신 죽게 해달라고 고유한 策書를 금등에 보관하였다.
역주8 以平晏爲大司徒 : “皇帝가 弑害되었으니, 平晏이 司徒가 됨은 누가 그를 시켰는가. 시킨 자는 王莽이다. 무릇 위에서는 일을 쓰고 아래에서는 官職을 除授함을 썼으니, 그 일에 관직을 준 것이다. 위에서는 ‘황제를 시해했다.’라고 쓰고 아래에서는 ‘평안을 사도로 삼았다.’라고 썼으니, 평안이 시해에 참여하여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왕망이 평안을 侯로 봉하고 관직을 제수했음을 쓰지 않았다. ‘그의 黨與[其黨與]’라고 쓴 것을 합하여 보면 당시의 獄事가 자세하다.[帝弑矣 晏之爲司徒 孰以之 以之者 莽也 凡上書事 下書拜官 官其事也 上書弑帝 下書以晏爲司徒 晏蓋與聞乎弑者 故莽封拜平晏不書 書曰其黨與 合而觀之 當時之獄具矣]” 《書法》 ‘其黨與’는 본서 277쪽 綱에 보인다.
역주9 太皇……居攝踐阼 : “‘또다시 詔令을 내렸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太后를 나쁘게 여긴 것이다. 이미 조령을 내려 宣帝의 玄孫을 불렀고, 그가 이르기 전에 또다시 조령을 내려 王莽에게 居攝하고 踐祚하게 하였으니, 그렇다면 왕망의 簒奪은 태후가 그 잘못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書又詔 何 病太后也 旣詔徵宣帝玄孫矣 未至而又詔莽居攝踐祚 然則王莽之簒 太后不得辭其咎矣]” 《書法》

자치통감강목(6)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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