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万俟醜奴가 侵擾關中이어늘 魏爾朱榮이 遣賀拔岳討之한대
岳私謂其兄勝曰 醜奴는 勍敵也라 攻之不勝이면 固有罪요 勝之면 讒嫉이 將生이니 願得爾朱氏一人하여 爲帥而佐之하노라
勝
이 言於榮
한대 榮
이 以爾朱天光爲都督
하고 以岳及侯莫陳悅爲左右都督
하여 配軍士千人
注+① 侯莫陳, 虜三字姓, 本後魏別部之號, 因氏焉.하니
岳
이 擊赤水蜀賊
하여 得馬二千匹
하여 簡其壯健以充軍
注+② 水經注 “赤水在鄭縣北, 卽山海經之灌水也, 北注于渭.” 蜀賊, 本蜀人之遷關中者, 乘亂相聚爲賊.하다
三月
에 醜奴
가 自將圍岐州
하고 遣尉遲菩薩
하여 攻圍趣栅
注+③ 尉, 音鬱. 尉遲, 代北複姓, 本後魏別部之號, 因氏焉. 菩薩, 其名.이어늘 賀拔岳救之
하다 菩薩等
이 已拔栅還
이라 岳
이 故殺掠其吏民
하여 以挑之
하니
菩薩이 帥歩騎二萬至渭北이어늘 岳이 以輕騎數十隔水與語하고 明日에 復引百餘騎與語러니 稍引而東하여 至水淺可渉處하여 岳이 卽馳馬東出한대
賊이 以爲走라하여 棄歩卒하고 輕騎渡渭追之하다 岳이 依橫岡設伏待之러니 賊이 半度岡東에 岳이 還撃之하니 賊이 敗走라
岳이 令賊下馬者勿殺하니 賊悉投馬어늘 俄獲三千人하고 馬亦無遺라 遂擒菩薩하다
仍度渭北하여 降歩卒萬餘하고 收其輜重하니 醜奴가 聞之하고 棄岐州하고 北走安定하다
四月
에 天光
이 至汧渭之間
하여 停軍牧馬
하고 宣言俟秋更進
이라하고 獲覘者縱之
注+④ 汧水, 出汧縣西北而入于渭.하다 醜奴
가 信之
하여 散衆歸耕
하고 據險立栅
이어늘
天光知其勢分하고 密嚴夜發하여 黎明에 圍其大栅拔之하고 所得俘囚를 皆縱遣之하니 諸栅이 皆降이라
天光이 徑抵安定하니 醜奴가 走어늘 追及於平涼하여 侯莫陳崇이 單騎入賊하여 生擒醜奴하니 衆皆披靡러라 後騎益集하여 遂大破之하다
天光
이 進克髙平
하여 執蕭寳寅皆送洛陽
하니 賜寳寅死
하고 斬醜奴於市
注+⑤ 九域志 “鎭戎軍, 古高平地也.”하다
目
世隆이 欲還北이어늘 司馬子如가 曰 當此之際에 不可以弱示人이니 若亟北走면 恐變生肘腋이라
不如分兵守河橋하고 還軍向京師하여 出其不意면 或可成功이요 假使不得所欲이나 亦足示有餘力하여 使天下畏我之彊하여 不敢叛散이니이다
世隆이 從之하여 攻河橋하여 殺奚毅하고 據北中城하니 魏朝가 大懼러라
高敖曹가 從榮至洛이러니 榮死에 魏主가 引見勞勉之하다 其兄乾이 亦自冀州로 馳赴洛陽이라 魏主가 以乾爲河北大使하고 敖曹爲直閤將軍하여 使歸集鄕曲爲形援할새
送之河橋
注+① 敖曹兄弟歸鄕里, 路當東出, 河橋在洛城北, 魏主不應送之於此. 河橋二字, 意必有誤.하여 擧酒指水曰 卿兄弟
는 冀部豪傑
이라 能令士卒致死
니 京城
이 儻有變
이면 可爲朕
하여 河上一揚塵
이니라
乾이 垂涕受詔하고 敖曹가 援劒起舞하여 誓以必死러라
目
十月에 世隆이 遣爾朱拂律歸하여 將胡騎一千하여 皆白服하고
來郭下
注+① 考異曰 “魏書無拂律歸名, 伽藍記有之. 按爾朱度律時在世隆所, 或者拂律歸, 卽度律也.”어늘 魏主
가 遣謂之曰 太原王
이 立功不終
하여 陰圖釁逆
하니 罪止榮身
이요 餘皆不問
이라 若降
이면 官爵
이 如故
리라
拂律歸가 曰 願得太原王尸면 生死無恨이니이다 因涕泣하니 群胡가 皆慟哭하여 聲振城邑이라
魏主가 募敢死士討世隆하니 一日에 得萬人이라 與拂律歸等戰於郭外不克하니 魏主가 集群臣博議하니 皆恇懼不知所出이라
散騎常侍李苗
가 奮衣起曰 今朝廷
이 有不測之危
하니 正是忠臣烈士效節之日
이라 臣雖不武
나 請以一旅之衆
으로 爲陛下徑斷河橋
注+② 五百人爲一旅.리이다 魏主
가 許之
하니
苗가 募人從馬渚上流하여 乘船夜下하여 縱火船焚橋하니 爾朱氏兵在南岸者가 望之하고 爭橋北度러니 俄而橋絶하여 溺死者가 甚衆이러라
苗
가 泊小渚
러니 南援不至
注+③ 泊, 止也. 通鑑 “苗將百許人, 泊於小渚, 以待南援, 官軍不至.”라 爾朱氏就擊之
한대 苗
가 赴水死
하다 世隆
이 亦收兵北遁
하니
詔行臺源子恭
하여 鎭太行丹谷
하고 築壘防之
注+④ 水經注 “丹水出上黨高都縣故城東北阜下, 東南流注于丹谷.”하다 汾州刺史爾朱兆
가 聞榮死
하고 自汾州
로 騎據晉陽
이러니
世隆이 至長子에 兆가 來會之하다 共推太原太守長廣王曄卽位하니 曄는 英之弟子也라 世隆兄仲遠이 亦起兵徐州向洛陽하다
魏主가 以城陽王徽로 摠統内外하니 徽가 憂怖하여 不知所出하고 性多忌嫉하여 群臣이 有獻策者면 輒勸勿納하고
又靳財貨하여 賞賜薄少하고 或多而中減하고 或與而復追라 故徒有靡費而恩不感物이러라
十一月
에 仲遠
이 陷西兗州
하니 賀拔勝
이 與戰不勝
하여 降之
注+⑤ 魏太和中置西兗州於滑臺.하다
目
居無何
에 又使劉貴
로 請兆
호되 以并肆
가 頻歲霜旱
하니 請令降戶
로 就食山東
이라한대 兆
가 從之
注+① 幷․肆․冀․定․瀛․相․殷以太行․常山爲限, 幷․肆在山西, 餘州皆在山東. 歡欲引衆就食山東, 正欲遠兆, 得以從容收衆心, 因之以起兵也.어늘
慕容紹宗이 諫曰 髙公이 雄才蓋世어늘 復使握大兵於外하니 譬如借蛟龍以雲雨라 將不可制矣리라
兆曰 有香火重誓
하니 何慮邪
注+② 重誓, 謂與歡誓爲兄弟.아 紹宗曰 親兄弟
도 尙不可信
이어든 何論香火
注+③ 時爾朱兆與其群從已構嫌隙, 故紹宗以此言諷之.리오
時兆左右
가 已受歡金
이니라 因稱紹宗
이 與歡有隙
이라한대 兆
가 怒
하여 囚紹宗
하고 趣歡發
注+④ 趣, 讀曰促.하니
歡
이 道逢爾朱榮妻北鄕長公主
가 自洛陽來
하니 有馬三百匹
이어늘 盡奪之
注+⑤ 北鄕, 郡名, 榮妻非元氏也. 以榮功封北鄕長公主.한대 兆
가 聞之
하고 乃釋紹宗而問之
하니 紹宗曰 此猶是掌握中物也
니라
兆乃自追歡至襄垣
하니 會漳水暴漲
注+⑥ 襄垣縣, 漢屬上黨 後魏屬鄕郡, 至敬宗建義元年, 分置襄垣郡. 水經 “漳自屯留縣東北流, 逕襄垣縣故城南.”이라 歡
이 隔水拜曰 借馬
는 非他
라 備山東盗耳
어늘 王
이 信讒來追
하니 今不辭度水而死
로되 恐此衆
이 便叛
일까하노이다
兆가 因輕馬度水謝歡하고 引頸授刀하여 使歡斫之한대
歡
이 大哭曰 自天柱之薨
으로 賀六渾
이 更何所仰
고 但願大家千萬歲
에 得伸力用耳
니 大家
가 何忍出此言
注+⑦ 天子之親近侍從, 稱天子曰大家. 此乃高歡過呼, 爾朱兆以驕之耳.고
兆가 乃投刀하고 復斬白馬하여 與歡爲誓하고 因留宿夜飲하니
尉景이 伏壯士欲執兆어늘 歡이 止之曰 今殺之면 其黨이 必奔歸聚結이니 兵飢馬瘦하여 不可與敵이라
若英雄이 乘之而起면 則爲害滋甚하니 兆雖驍勇兇悍이나 無謀不足圖也니라
旦日에 兆가 歸營하여 復召歡한대 歡이 將詣之어늘 長史孫騰이 牽歡衣하니 乃止하다
目
【目】 万俟醜奴가 關中을 침략하여 소란하게 하자, 北魏 爾朱榮이 賀拔岳을 보내서 만사추노를 토벌하게 하였다.
하발악이 사사로이 그의 형 賀拔勝에게 말하기를 “만사추노는 강적입니다. 그를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면 진실로 죄를 얻게 되고, 이기면 참소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장차 생겨날 것입니다. 爾朱氏 한 사람을 얻어 統帥로 삼아서 그를 보좌하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하발승이 이주영에게 말하자 이주영이 爾朱天光을 都督으로 삼고 하발악과 侯莫陳悅을 左都督과 右都督으로 삼아서 軍士 천 명을 배속시켜 주었다.
注+① 侯莫陳은 오랑캐의 세 글자 姓이며, 본래 北魏의 別部의 호칭이었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氏가 되었다.
하발악이 赤水의 蜀賊을 공격하여 말 2천 필을 획득하여 賊軍 중에 장건한 사람을 뽑아서 북위의 군대에 충당하였다.
注+② ≪水經注≫에 “赤水는 鄭縣의 북쪽에 있으니, 곧 ≪山海經≫의 灌水이다. 북쪽으로 渭水로 흘러간다.” 하였다. 蜀賊은 본래 蜀人으로 關中에 옮겨온 자인데 난리를 틈타 서로 모여 賊이 되었다.
3월에 만사추노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岐州를 포위하고
하발악이 구원하였다. 울지보살 등이 이미 목책을 함락하고 나서 돌아가니, 하발악이 고의로 만사추노의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며 노략질하여 적군을 도발하였다.
울지보살이 歩兵과 騎兵 2만 명을 거느리고 渭水 북쪽에 이르렀는데 하발악의 輕騎 수십이 渭水를 사이에 두고 울지보살과 말을 하였다. 명일에 다시 백여 騎를 이끌고 적군과 말을 하였다. 점차 적군을 이끌어 동쪽으로 가다가 위수가 얕아 건널 수 있는 곳에 이르자 하발악이 바로 말을 달려 동쪽으로 나갔다.
적군들은 하발악이 달아난다고 생각하여 歩卒을 버리고 輕騎로 위수를 건너 추격하였다. 하발악은 가로지른 언덕에 의지하여 매복을 배치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적군이 절반쯤 언덕 동쪽을 지나갈 적에 하발악이 군대를 돌려 공격하니 적군이 패주하였다.
하발악이 명령하여 적군 중에 말에서 내린 자는 죽이지 말라고 하니 적군들이 다 말을 버려서 잠깐 사이에 3천 명을 잡았고 말 또한 버려진 것이 없었다. 마침내 울지보살을 사로잡았다.
이어서 북위가 위수 북쪽으로 건너가서 적군의 보졸 만여 명을 항복받고 적군의 輜重을 거두어 들였다. 만사추노는 소식을 듣고 기주를 버리고 북쪽 安定으로 달아났다.
4월에 이주천광이 汧水와 渭水 사이에 이르러 군대를 정지하고 말을 방목하게 하고 宣言하기를 “가을을 기다려 다시 전진할 것이다.”라고 하고, 사로잡은 만사추노의 정찰병을 풀어주었다.
注+④ 汧水는 汧縣 서북쪽에서 나와서 渭水로 들어간다. 만사추노가 그들의 말을 믿어서 무리를 해산하고 돌아가 농사짓게 하고 험한 곳을 점거하여 營栅을 세웠다.
이주천광은 적군의 세력이 분산된 것을 알고 몰래 삼엄하게 밤중에 출동하여 새벽에 그들의 大栅을 포위하여 함락하고 사로잡은 포로를 모두 풀어 보내주니 여러 영책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주천광이 곧바로 安定에 이르니 만사추노가 달아났는데 추격하여 平涼에서 따라붙었다. 후막진숭이 單騎로 적군에 들어가서 만사추노를 생포하니 적병 무리들이 쓰러졌다. 그 뒤에 북위의 기병들이 더 모여들어 마침내 적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주천광이 진격하여 髙平을 함락시키고 蕭寳寅을 잡아서 모두 洛陽으로 보냈다. 소보인에게 죽음을 내리고, 만사추노를 시장에서 목을 베었다.
注+⑤ ≪九域志≫에 “鎭戎軍은 옛날의 高平 땅이다.” 하였다.
目
【目】 北魏 爾朱榮이 비록 外藩에 살고 있었으나 멀리서 조정을 통제하였다. 魏主(元子攸)의 성품이 정사를 다스리는 데에 부지런하여 자주 친히 소송을 살펴보고 寃獄을 심리하였다. 이주영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魏主가 또 吏部尙書 李神儁과 함께 人選 部門을 공평하게 다룰 것을 의론하였다. 이주영이 上曲陽 縣令을 關補한 적이 있었는데
注+① ‘關補’는 먼저 관리를 補任하고 뒤에 吏部에 보고하는 것이다. 曲陽은 바로 上曲陽縣이다. 漢나라와 晉나라 때에는 常山郡에 소속하였고, 北魏 때에는 中山郡에 소속하였다. 이신준은 그 사람의 官階가 현령을 맡기에는 현격히 낮아 上奏하지 않았다.
注+② 〈‘階懸不奏’는〉 階級이 현격하게 멀어서 그 사람이 縣令으로 보임되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주영이 大怒하자 이신준이 두려워 관직을 사직하였다.
이주영이 從弟 僕射 爾朱世隆을 吏部尙書까지 겸임하게 하여 계문을 올려 北人을 河南의 諸州의 刺史로 삼기를 청하자 魏主가 허락하지 않았다.
太宰 并州刺史 元天穆이 말하기를 “天柱大將軍(이주영)이 국가에 큰 공이 있으니 만약 두루 天下 官職을 교체시키기를 청하면 아마 陛下 또한 어기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正色하며 말하기를 “천주대장군이 만약 남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고 하면 朕 또한 반드시 교체할 것이다. 만약 여전히 신하의 절개를 보존한다면 天下 百官을 교체할 리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주영이 이 말을 듣고 크게 성내며 한스러워하였다.
目
【目】 爾朱皇后는 妬忌하는 성격이어서 자주 분노하여
이주황후가 말하기를 “天子는 나의 집안에서 세웠는데 지금 〈큰 소리 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나의 아버지께서 본래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지금도 종종 천하의 일을 결정하신다.”라고 하였다.
注+① 決은 판가름한다는 뜻이니, 天下의 일을 판결함을 말한다.爾朱后娟
魏主는 밖으로 爾朱榮에게 핍박을 받고 안으로는 황후에게 협박을 당하여 항상 우울하여 즐겁지 않았는데, 도적들이 아직 평정하지 못하여 이주영과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魏主는〉 關ㆍ隴 지역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臨淮王 元彧에게 말하기를 “天下에 곧 도적이 없어지겠구나.”라고 하니, 원욱이 말하기를 “臣은 도적들이 평정된 후에 바야흐로 성상의 사려를 괴롭힐까 우려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주영이 사방에 사변이 없음을 보고 누차 아뢰기를 “參軍 許周가 臣에게 九錫을 취하기를 권하였는데 臣이 이미 질책하여 떠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여 조정에 넌지시 자신의 심사를 알렸다. 魏主는 이주영에게 구석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그의 충성스러움을 감탄하는 말로 대답해주었다.
이주영이 사냥을 좋아하여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험준한 곳을 피하지 않으니 士卒들이 고통스러워하였다.
元天穆이 조용히 말하기를 “王께서 勲業이 이미 성대하니 마땅히 四時의 사냥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어찌 반드시 한여름에 사냥하러 말을 몰아 和氣를 상하게 하십니까.”라고 하니,
이주영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하기를
注+② ‘攘袂’는 소매를 걷어 올린다는 뜻이다. “아직 천하를 통일하지 못했으니 어찌 갑자기 勲業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가을에 형과 함께 군사와 군마를 整頓하여 嵩髙에서 校獵(울타리를 쳐서 사냥함)하여 貪汙한 조정의 고관들을 울타리 안으로 들여보내 호랑이를 잡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魯陽으로 나가서 生蠻을 모두 잡고 북쪽으로는 六鎭에 〈戶口를〉 채워 넣겠습니다.
注+③ 生蠻은 여러 蠻戶 중에 아직 북위에 귀부하지 않은 자를 말한다. 塡은 음이 田이며 채우다는 뜻이다. 六鎭에서 叛亂하여 鎭戶가 황폐하였으므로 그들을 채우려고 한 것이다. 명년에 정예 기병을 선발하여 長江ㆍ淮河로 나가서 〈梁나라〉 蕭衍을 포박해 잡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형과 함께〉 天子를 받들어 사방을 순행을 해야 마침내 功勲이라고 일컬을 만할 것입니다.
지금 자주 사냥하지 않으면 兵士가 게으르게 될 것이니, 어찌 다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目
【目】 城陽王 元徽와 侍中 李彧이 魏主(元子攸)에게 爾朱榮을 제거하도록 권하니
注+① 元徽의 妃는 魏主의 외삼촌의 딸이며 李彧은 李沖의 손자이고 魏主의 누이의 사위이다. 侍中 楊侃, 僕射 元羅, 膠東侯 李侃晞 또한 그 도모에 참여하였다.
注+② 元羅는 元叉의 동생이다.
마침 이주영이 조정으로 들어오기를 청하자 원휘 등이 魏主에게 이주영의 들어온 때를 이용하여 찔러 죽일 것을 권하였는데, 魏主가 의심이 들어 결정하지 못하고 도모가 상당히 누설되어 사람들이 두려움을 품었다.
武衛將軍 奚毅가
초에 왕래하며 명령을 전달하였기 때문에
注+③ ‘建義初’는 爾朱榮이 예전에 義兵을 일으켰을 때를 말한다. 위주가 그에게 기대함이 매우 많았지만 여전히 이주영의 무리였으므로 감히 그와 함께 실정을 말하지 못하였다.
해의가 말하기를 “만약 반드시 변고가 있게 되면 臣은 차라리 陛下를 위하여 죽을지언정 契胡(이주영)를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注+④ 爾朱氏는 契胡의 종족이다. 魏主가 말하기를 “朕이 天柱大將軍의 반역 의도가 없음을 보장하고, 또한 卿의 충성도 잊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爾朱世隆은 〈魏主가〉 변고를 일으킬 것이라고 의심을 품어 마침내 匿名으로 글을 써서 이르기를 “天子가 천주대장군을 죽이려고 한다.”라고 하고, 그 글을 취하여 이주영에게 고하였다. 이주영은 자신의 강함을 믿고 의심을 하지 않았다.
9월에 〈이주영이〉 洛陽에 이르니 魏主가 바로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元天穆이 并州에 있는 것으로 後患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차마 행동하지 못하고 아울러 원천목을 불렀다.
어떤 사람이 이주영에게 魏主의 도모를 고해주었는데 이주영이 모두 魏主에게 아뢰었다. 魏主가 말하기를 “外人들은 역시 王(이주영)이 나를 해치려고 한다고 말하니 어찌 믿을 수가 있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이주영이 스스로 의심하지 않아서, 조정에 들어와 알현할 때마다 몇 사람만 따르게 하고 兵仗器를 가지지 못하게 하였다.
注+⑤ 從(따르다)은 才用의 切이다.
魏主가 〈이주영을 죽이는 것을〉 중지하려고 하자 성양왕 원휘가 말하기를 “비록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또한 어찌 참을 수 있겠으며 더구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것에 있어서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注+⑥ 耐는 참는다는 뜻이다.
目
【目】 그러나 도모에 참여한 자가 모두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注+① ‘預謀者’는 魏主의 도모에 참여한 자를 말한다. 魏主(元子攸)가 그것을 근심하자 城陽王 元徽가 말하기를 “太子를 낳았다고 말을 하면 爾朱榮이 반드시 들어올 것입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마침내 明光殿 東序(동쪽 행랑)에 병사를 매복시키고 皇子를 낳았다고 선포하고 원휘를 보내 이주영에게 알리자 이주영이 마침내 元天穆과 함께 들어왔다.
溫子昇이 미리 사면하는 문서를 만들어서 가지고 〈궁궐을〉 나갈 적에 이주영을 만났다. 이주영이 그 문서를 물었는데, 온자승이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말하기를 “칙령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주영이 문서를 취해 보지 않고 들어가 앉았는데 李侃晞 등이 칼를 뽑아 들고 동쪽 문에서 들어왔다. 이주영이 바로 일어나 御坐로 향해 나아가자 魏主가 이전에 무릎 아래에 칼을 가로로 놓아두었는데 마침내 직접 이주영을 베고 원천목도 죽었다.
内外가 기뻐 떠들며 백관들이 들어와 축하였는데, 魏主가 國門에 올라가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奚毅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北中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날 밤에 爾朱世隆이 이주영의 部曲을 거느리고 달아나 河陰에 주둔하였다. 예전에 이주영의 도당인 田怡가 事變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宮門을 공격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賀拔勝이 그들을 저지하였다. 이주세륭이 달아날 적에 하발승은 또한 그를 따라가지 않으니, 魏主가 그를 매우 가상히 여겼다.
朱瑞가 비록 이주영에게 위임을 받았지만 朝廷과의 사이에서 처신을 잘하니
注+② 朱瑞는 본래 爾朱榮의 行臺郞中이다. 이주영이 魏主를 洛陽에 정착시키고, 주서를 黃門侍郞 兼中書舍人으로 삼았다. 魏主 또한 그를 잘 대우하였다. 그러므로 주서가 이주세륭을 따라 달아나다가 中道에 돌아왔다.
目
【目】 爾朱世隆이 북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司馬子如가 말하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 약함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만약 급히 북쪽으로 달아나면 변고가 신변[肘腋]에 생길까 두렵습니다.
병사를 나누어 河橋를 지키게 하고 군대를 돌려 京師를 향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들이 생각지 못할 때 나가면 혹 功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또한 충분히 여력이 있음을 보여서 天下 사람들에게 우리의 강함을 두려워하도록 하여 감히 반란하거나 흩어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주세륭이 그것을 따라서 河橋를 공격하여 奚毅를 죽이고 北中城을 점거하니, 北魏 조정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高敖曹가 爾朱榮을 따라 洛陽에 이르렀는데 이주영이 죽은 후에 魏主(元子攸)가 그를 引見하고 위로하여 권면하였다. 그의 형 高乾이 또한 冀州에서 말을 달려 洛陽에 이르렀다. 魏主가 고건을 河北大使로 삼고 고오조를 直閤將軍으로 삼아 그들을 귀향하게 하여 鄕里의 군사를 모집하여 밖에서 〈조정에〉 호응하는 형세를 이루게 하였다.
魏主가 河橋에서 고오조 등을 송별하면서
注+① 高敖曹 兄弟가 鄕里로 돌아갈 적에 동쪽 길로 나가야 하는데 河橋는 洛陽城 북쪽에 있어서, 魏主가 당연히 여기에서 송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河橋’ 2字는 반드시 잘못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술을 들고 물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卿의 兄弟는 冀部(冀州)의 豪傑인지라 士卒들을 목숨을 바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니, 만일 京城에 사변이 있게 되면 朕을 위하여 黃河 가에서 군대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니,
고건은 눈물을 흘리며 조서를 받고 고오조가 劒을 빼들고 일어나 춤을 추어 반드시 죽음으로써 맹세하였다.
目
【目】 10월에 爾朱世隆이 爾朱拂律歸를 보내서 胡人 騎兵 1천 명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모두 흰색 孝服(흰 喪服)을 입었다.
낙양성 아래로 이르자
注+① ≪資治通鑑考異≫에 말하기를 “≪魏書≫에 爾朱拂律歸의 이름이 없는데 ≪伽藍記≫에는 이름이 있다. 살펴보면 爾朱度律은 당시에 爾朱世隆의 처소에 있었다. 혹자는 爾朱拂律歸는 바로 이주도률이다.” 하였다. 魏主(元子攸)가 사자를 보내서 그에게 말하기를 “太原王(爾朱榮)이 공을 세우고서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여 은밀하게 반란을 도모하였으니, 죄는 이주영의 몸에서 그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두 묻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항복한다면 官爵이 예전과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주불률귀가 말하기를 “바라오니 태원왕의 시신을 얻는다면 죽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니 여러 胡人들이 慟哭하여 그 곡소리가 城邑에 진동하였다.
魏主가 이주세륭을 토벌하고자 결사대를 모집하니 하루에 1만 명을 얻었다. 이주불률귀 등과 洛陽 城郭 밖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魏主가 신하들을 모아놓고 널리 의론하니 모두 두려워하여 계책을 낼 줄 몰랐다.
散騎常侍 李苗가 옷자락을 떨치고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지금 조정이 헤아릴 수 없는 위태로움이 있으니 바로 忠臣과 烈士가 절개를 다 바쳐야 하는 날입니다. 臣이 비록 武將은 아니지만 청하건대 1旅의 병사를 거느리고 陛下를 위하여 곧바로 가서 河橋를 끊겠습니다.”라고 하니,
注+② 5백 명이 1旅가 된다. 魏主가 허락하였다.
이묘가 사람을 모집하여 馬渚의 上流에서 배를 타고 밤에 내려와 火船을 놓아서 河橋를 불태웠다. 이주세륭의 병사 중에 南岸에 있던 자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다투어 하교의 북쪽으로 건너가니 잠시 후에 하교가 끊어져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묘가 小渚(작은 섬)에 정박하였는데 남쪽의 구원병이 이르지 않았다.
注+③ 泊은 머물다는 뜻이다. ≪資治通鑑≫에 “李苗가 병사 백 명쯤을 거느려서 小渚에 머물고 남쪽의 구원병을 기다렸는데 官軍이 이르지 않았다.” 하였다. 이주세륭의 군대가 나아가 이묘를 공격하자 이묘는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주세륭이 또한 병사를 거두어 북쪽으로 달아났다.
魏主는 行臺 源子恭에게 조서를 내려 太行山의 丹谷을 수비하게 하고 堡壘를 쌓아 방어하게 하였다.
注+④ ≪水經注≫에 “丹水는 上黨郡 高都縣 옛 성 동북쪽 언덕 아래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丹谷에 흘러들어간다.” 하였다. 汾州刺史 爾朱兆가 이주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汾州에서 기병을 거느리고 晉陽을 점거하였다.
이주세륭이 長子에 이르자 이주조가 와서 이주세륭을 만났다. 그들은 함께 太原太守 長廣王 元曄을 추대하여 황제에 卽位시켰다. 원엽은 元英의 조카이다. 이주세륭의 형 爾朱仲遠이 또한 徐州에서 병사를 일으켜 洛陽으로 향하였다.
魏主가 城陽王 元徽로 内外를 모두 다스리게 하였다. 원휘가 두려워하여 계책을 낼 줄을 모르고 성품은 시기와 질투가 많아서 신하들 중에 책문을 올리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황제에게 채납하지 말라고 권하였다.
또 財貨에 인색하여 포상을 내린 것이 보잘것없었고, 혹은 많은 것도 중간에서 줄였고, 혹은 상을 주었다가 다시 追削하였다. 그러므로 다만 은상을 허비하기만 하고 조정의 은혜가 사람들을 감격시키지 못하였다.
11월에 이주중원이 西兗州를 함락하였는데 賀拔勝이 이주중원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여 그에게 항복하였다.
注+⑤ 北魏 太和 연간에 滑臺에 西兗州를 두었다.
目
【目】 魏主(元子攸)가 雲龍門 밖으로 걸어가다가 城陽王 元徽가 말을 타고 달려가는 것을 보았는데, 여러 번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
이주조가 魏主를 잡아 가두고 皇子를 내팽개쳐 때려죽이고 병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하여 臨淮王 元彧 등을 죽였다.
注+① ‘撲殺’은 내팽개쳐 때려죽임을 말한다. 皇子는 爾朱后의 所生이다. 원휘가 金 100근과 말 50필을 가지고 있었다.
이전에 洛陽令 寇祖仁이 한 집안에 3명의 刺史가 모두 원휘 자신의 추천으로 선발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찾아가서 의탁하였다. 寇祖仁이 사사로이 子弟들에게 말하기를 “금일 富貴가 닥쳐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원휘를 겁주어 말하기를 “〈그대를〉 잡으려는 사람이 장차 올 것이다.”라고 하여, 원휘를 다른 곳으로 도망가게 하였다. 사람을 시켜서 길에서 원휘를 맞이하여 죽여서, 원휘의 머리를 이주조에게 보냈으나 이주조가 구조인에게 상을 주지 않았다.
이윽고 꿈에 원휘가 자신(이주조)에게 말하기를 “나의 金 200근과 말 100필이 구조인의 집에 있으니 경이 갖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주조가 바로 구조인을 잡아 꿈에 의거하여 금과 말을 찾다가 얻지 못하자 구조인을 죽였다.
目
【目】 胡氏(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衰亂한 조정에 宗室의 侯ㆍ王이 強臣에게 세움을 받아서 일생을 잘 마친 자가 없다.
만약 敬宗(元子攸)이, 爾朱榮이 은밀하게 맞이할 때를 당해서 저들과 자신을 잘 살필 수 있었으면 〈황제 자리를〉 받지 않아야 했을 것이고, 받아서 일으킬 만했으면 사양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지마는, 사양하여 용납될 만했으면 이에 일생을 잘 마치는 데 가까웠을 것이다.
이주영이 3대에 걸쳐 養兵하고 斧鉞(권력)을 잡기를 6년이나 하였으니 心腹과 爪牙의 인사들이 많았다. 비록 사람됨이 거칠고 포악하며 가볍고 소홀하여 제거하기를 매우 쉽게 하였으나 그 종족들이 어찌 한 번의 사면으로 수습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는 이주영에게 〈황제에〉 세워진 자가 유약해도 안 될 것이고 강해도 안 될 것이다. 오직 재능을 감추고 말을 공손히 하여 굳건하여 그 뜻이 뽑히지 않아야 될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적당한 사람이 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目
【目】 얼마 있다가 〈高歡은〉 또 劉貴를 보내어 爾朱兆에게 청하기를 “并州와 肆州에 해마다 서리가 내리고 가뭄이 드니, 降戶(항복자)들에게 山東으로 나가 걸식하게 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이주조가 유귀의 말을 따랐다.
注+① 幷州ㆍ肆州ㆍ冀州ㆍ定州ㆍ瀛州ㆍ相州ㆍ殷州는 太行(태항)과 常山을 한계로 삼았고, 幷州ㆍ肆州는 山西에 있고 나머지 州는 모두 山東에 있다. 高歡이 병사를 이끌고 山東에 나가 먹이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爾朱兆를 멀리하고 조용히 병사들의 마음을 거두어 이로 인하여 병사를 일으키려는 것이다.
慕容紹宗이 간언하기를 “高公(고환)은 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뒤덮는데 다시 밖에서 大軍을 장악하게 하니 비유하면 蛟龍에게 구름과 비를 빌려주는 것과 같은지라 장차 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이주조가 말하기를 “향불을 피워 형제가 되기로 맹세하였으니 무엇을 염려하겠는가.”라고 하였다.
注+② ‘重誓’는 髙歡과 함께 맹세하여 兄弟가 된 것을 말한다. 모용소종이 말하기를 “親兄弟도 오히려 믿기 어려운데 어찌 향불을 논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注+③ 당시에 爾朱兆는 그의 여러 추종자들과 함께 이미 싫어하는 틈을 조성하였다. 그러므로 慕容紹宗이 이 말로 풍자한 것이다.
당시 이주조의 측근이 이미 고환의 金을 받았는지라 이로 인하여 모용소종이 고환과 틈이 있다고 말하자 이주조가 노하여 모용소종을 감옥에 가두고 재촉하여 고환이 빨리 출발하게 하였다.
注+④ 趣(재촉하다)은 促(촉)으로 읽는다.
고환은 도중에 洛陽에서 오던 爾朱榮의 妻 北鄕長公主를 만났는데, 공주가 가지고 있던 말 3백 필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 빼앗았다.
注+⑤ 北鄕은 郡 이름이다. 爾朱榮의 妻는 元氏가 아니다. 이주영의 공로로 北鄕長公主에 봉해졌다. 이주조가 그 소식을 듣고 마침내 모용소종을 석방하고 물으니 모용소종이 말하기를 “고환은 손아귀 속의 물건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주조가 마침내 스스로 고환을 추격하여 襄垣에 이르니 마침 漳水가 갑자기 불어났으므로
注+⑥ 襄垣縣은 漢나라 때에는 上黨郡에 소속하였고, 北魏 때에는 鄕郡에 소속하였고, 敬宗 建義 원년(528)에 나누어 襄垣郡을 설치하였다. ≪水經≫에 “漳水는 屯留縣에서 東北으로 흘러서 襄垣縣 옛 성 남쪽을 지난다.” 하였다. 고환이 漳水를 사이에 두고 이주조에게 절하며 말하기를 “〈제가 공주의〉 말을 빌린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山東의 도적을 대비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王께서 참소하는 말을 믿고 저를 추격하여 오셨으니 지금 물을 건너가서 죽을 것을 사양하지 않겠으나 저의 무리들이 곧 배반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주조가 이어서 경무장 말을 타고 물을 건너와 고환에게 사죄하고 목을 길게 빼고는 칼을 주며 고환에게 자기를 목를 베라고 하자
고환이 크게 통곡하며 말하기를 “天柱大將軍(爾朱榮)께서 薨한 후부터 賀六渾 제가 다시 누구를 우러러보겠습니까. 다만 제가 원하는 것은 大家께서 만수무강하시는 데에 힘을 펼쳐 쓰이게 되는 것뿐입니다. 大家께서 어찌 차마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하니,
注+⑦ 天子의 親近한 侍從이 天子를 일컬어 ‘大家’라고 한다. 이것은 마침내 高歡이 호칭을 지나치게 하여 爾朱兆를 교만하게 만들었다.
이주조가 마침내 칼을 던지고 다시 白馬의 목을 베어서 고환과 함께 맹세를 하고 이어서 留宿하여 밤에 술을 마셨다.
尉景이 壯士를 매복시켜 이주조를 잡으려고 하였는데 고환이 제지하며 말하기를 “지금 이주조를 죽이면 그의 무리들이 반드시 도망하여 돌아가서 뭉칠 것이니, 우리 병사들이 굶주리고 말이 여위어서 함께 대적하지 못한다.
만약 英雄이 이 틈을 타고 일어난다면 해가 됨이 더욱 심할 것이다. 이주조가 비록 날래고 용감하며 흉악하고 사납지만 계책이 없어서 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하다.”라고 하였다.
아침에 이주조가 군영으로 돌아가서 다시 고환을 불렀는데 고환이 막 가려고 하자 長史 孫騰이 고환의 옷을 잡아끌자 마침내 중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