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元嘉二十三年이요 魏太平眞君七年이라
魏主軍至東雍州하여 臨薛永宗壘注+隋志 “絳郡後魏置東雍州, 後周改曰絳州.”하니 崔浩曰 永宗未知陛下自來하여 衆心縱弛하니 今北風迅疾하여 宜急擊之하소서하니 魏主從之하다
永宗出戰大敗하여 赴水死하고 其族人安都先據弘農이러니 棄城奔宋하다
魏主聞蓋吳在長安北하고 以渭北地無穀草 欲渡渭南하여 循渭而西어늘
崔浩曰 夫擊蛇者 先擊其首하니 首破則尾不能掉注+掉, 搖也.하나니 今吳營去此六十里 輕騎趨之 一日可到 破之必矣
破吳南向長安 亦不過一日이니 一日之乏 未至有傷이어니와 若從南道 則吳入北山하리니 猝未可平也리이다하니 魏主不從하다
吳衆聞之하고 悉散入北(地)山하니 軍無所獲注+地字衍.이라 魏主悔之러라
遂如長安하여 所過 誅民夷與吳通謀者하고 諸軍大破吳於杏城하니 吳復遣使求援於宋한대 宋以吳爲北地公하고 發雍梁兵屯境上하여 爲吳聲援하다
宋伐林邑하다
林邑王范陽邁 雖貢奉於宋이나 而寇盜不絶이어늘 宋主遣交州刺史檀和之하여 討之하다
南陽宗慤 家世儒素로되 慤獨好武事하여 常言願乘長風破萬里浪注+慤叔父少文, 高尙不仕, 諸子群從, 皆愛好墳典.이라하더니 至是하여 自請從軍이어늘
和之進圍區粟城하고 遣慤爲前鋒하여 擊林邑別將破之注+水經註 “盧容水, 出日南盧容縣區栗城南高山, 東經區栗城北, 林邑兵器戰具悉在城中.”하다
魏主與崔浩 皆信重寇謙之하여 奉其道하고 浩素不喜佛法하여 每言於魏主호되 以爲佛法虛誕하여 爲世費害하니 宜悉除之니이다
及魏主至長安入佛寺하니 沙門飮從官酒할새 入其室하여 見大有兵器하고 出以白魏主注+飮․從, 竝去聲.한대
魏主怒曰 此非沙門所用이니 必與蓋吳通謀하여 欲爲亂耳로다하고 命有司案誅闔寺沙門하고 閱其財産하여 大得釀具及窟室婦女注+釀具, 造酒器也. 窟室婦女, 穴地爲室, 以匿婦女.하다
浩因說魏主하여 悉誅境內沙門하고 焚毀經像한대 魏主從之하다
詔曰 昔後漢荒君 信惑邪僞하여 以亂天常하여 使政敎不行하고 禮義大壞하여 九服之內 鞠爲丘墟注+迷禮曰荒. 佛法自漢明帝時入中國, 楚王英最先好之, 至桓帝始事浮屠. 鞠, 窮也.하니 朕欲除僞定眞하여 滅其蹤跡하노니
有司其宣告征鎭하여 諸有佛像胡書 皆擊破焚燒하고 沙門無少長悉坑之注+諸郡太守皆令征鎭. 或曰 “太守守土而已. 征鎭者, 主征伐鎭守者也.”하고 自今以後 有事胡神及造泥人銅人者어든 門誅하라
太子晃素好佛法이라 屢諫不聽하니 乃緩宣詔書하여 使遠近豫聞之하여 得各爲計하니 沙門多亡匿獲免하고 或收藏書像한대 唯塔廟無復孑遺注+佛弟子收奉舍利, 建宮宇號爲塔, 亦胡言, 猶宗廟也, 故世稱塔廟.러라
魏移書於宋하여 以南國僑立諸州하여 多濫北境名號라하고 又欲遊獵具區注+周官職方氏, 揚州藪曰具區. 師古曰 “具區在吳.”어늘
宋人答曰 必若因土立州 則彼立徐揚인들 豈有其地 如欲觀化南國하면 則呼韓入漢 厥儀未泯하니 館邸饋餼 每存豐厚注+周禮, 市有館, 館有積, 以待朝聘之客. 邸, 諸侯來朝所舍也. 饋, 餉也. 饋餼, 餉客以生食及芻米也.라하다
至是하여 魏人侵宋北邊한대 宋主以爲憂하여 咨謀群臣할새 御史中丞何承天言호되
凡備匈奴之策 不過二科 武夫盡征伐之謀하고 儒生講和親之約이니 今若欲追蹤衞霍인댄 自非大田淮泗하고 內實靑徐하여 使民有贏儲하고 野有積穀하여 然後發卒十萬하여 一擧蕩夷 則不足爲也注+衛․霍, 謂衛靑․霍去病也.
若但欲遣軍追討하여 報其侵暴하면 則彼輕騎奔走하여 不肯會戰하니 徒興巨費 不損於彼 報復之役 遂將無已 斯策之最末者也 唯安邊固守 於計爲長耳
夫曹孫之霸 才均智敵이로되 江淮之間 不居各數百里注+曹․孫, 謂曹操․孫權也. 何者 斥侯之郊 非耕牧之地 故堅壁淸野以候其來하고 整甲繕兵以乘其弊하니 保民全境 不出此塗
要而歸之컨대 其策有四하니 一曰移遠就近이니 今靑兗舊民及冀州新附 在首界者三萬餘家 可悉徙置大峴之南하여 以實內地
二曰多築城邑하여 以居新徙之家하여 假其經用하여 春夏佃牧하고 秋冬入保 寇至之時 一城千家 戰士不下二千이요 其餘羸弱 猶能登陴鼓譟하면 足抗群虜三萬矣注+陴, 城上女墻也.
三曰纂偶車牛하여 以載糧械 計千家之資 不下五百耦牛 爲車五百兩하여 參合鉤連하여 以衞其衆注+纂偶, 纂集而比偶也.이니 設使城不可固라도 平行趨險이면 賊不能干이요 有急徵發이면 信宿可聚
四曰計丁課仗이니 凡戰士二千 隨所便能하여 各自有仗이니 素所服習하고 銘刻由己하여 還保 輸之於庫라가 出行 請以自新注+請器仗, 各自磨礪使精新.이요 弓簳利鐵民不得者 官以漸充之하면 數年之內 軍用粗備矣注+弓簳, 弓與簳也. 簳, 箭簳也, 字與苛竿通, 竝音稈.리이다
近郡之師 遠屯淸濟하여 功費旣重하고 嗟怨亦深하니 以臣料之컨대 未若卽用彼衆之易也注+近郡, 謂南徐州所領諸僑郡及三吳, 近在邦域之中者. 淸․濟, 二水名.
今因民所利하여 導而帥之 兵强而敵不戒하고 國富而民不勞 比於優復隊伍하고 坐食糧廩者 不可同年而校矣니이다
魏上邽東城反이어늘 州兵討平之하다
魏金城邊固 天水梁會 與秦益雜民萬餘戶 據上邽東城反하여 攻逼西城이어늘 秦益刺史封敕文 拒却之하니
氐羌及休官屠各數萬人 皆起兵應固會注+休, 如字. 屠, 音除. 休官․屠各二種夷也. 休官, 雜夷部落之名. 晉孝武時, 休官權千成據天水顯親縣, 自稱秦州牧. 晉時北狄入居塞內者十九種, 屠各最豪貴, 統理諸種.어늘 敕文擊固斬之하니 餘衆推會爲主하다
魏主遣兵討之어늘 未至 會棄城走러라 敕文先掘重塹於外하여 嚴兵守之하고 格鬪從夜至旦이러니
敕文曰 賊知無生路하고 致死於我하여 多殺士卒하니 未易克也라하고 乃以白虎幡으로 宣告降者赦之하니 會衆遂潰어늘 追討平之하다
宋師克林邑하다
檀和之等拔區粟하여 斬其將하고 乘勝入象浦注+象浦, 即盧容浦. 盧容縣, 即秦象郡象林縣地, 故亦謂之象浦.하니
林邑王陽邁 傾國來戰하여 以具裝被象하니 前後無際注+馬甲, 謂之具裝.
宗慤曰 吾聞外國有獅子하여 威服百獸注+獅子似虎, 正黃有髭耏, 尾端茸毛大如斗.라하고 乃製其形하여 與象相拒하니 象果驚走
和之 遂克林邑하니 陽邁父子 挺身走하다 所獲未名之寶 不可勝計어늘 慤一無所取하고 還家之日 衣櫛蕭然이러라
夏六月朔 日食하다
◑魏築塞圍하다
魏發司幽定冀十萬人하여 築畿上塞圍한대 起上谷하여 西至河하니 廣縱千里注+魏都平城, 置司州於代都. 縱音蹤, 直也.러라
注+以其地在臺城之後, 故名玄武湖.하다
◯秋七月 宋以杜坦으로 爲靑州刺史하다
杜預之子耽 避晉亂居河西하여 仕張氏러니 秦克涼州 子孫始還關中하다 高祖滅後秦 坦兄弟從過江注+坦, 驥之兄也.하니
江東王謝諸族 方盛이라 北人晚渡者 朝廷悉以傖荒遇之하니 雖復人才可施라도 皆不得踐淸塗注+傖, 助耕切. 南人呼北人爲傖. 荒, 言其自荒外來也.
宋主嘗與坦論金日磾曰 恨今無復此輩人이로다 坦曰 日磾假生今世라도 養馬不暇 豈辦見知리잇고하니
宋主變色曰 卿何量朝廷之薄也 坦曰 請以臣言之호리이다 臣本中華高族으로 世業相承이어늘 直以南渡不早 便以傖荒賜隔하니
況日磾胡人으로 身爲牧圉乎아하니 宋主默然하다
蓋吳屯杏城하여 聲勢復振이어늘 魏遣高涼王那等討破之하고 獲其二叔注+那, 禮之子也.하니 諸將欲送詣平城한대 長安鎭將陸俟曰
長安險固하고 風俗豪忮하니 今不斬吳 變未已也注+忮, 狼也. 吳一身潛竄하니 非其親信이면 誰能獲之
然停十萬之衆하여 以追一人하면 又非長策이니 不如私許吳叔免其妻子하고 使自追吳하니 禽之必矣
諸將咸曰 得賊不殺而更遣之하여 若其不返이면 將何以任其罪오하니 俟曰 此罪 我爲諸君任之하리라하니
高涼王那亦以爲然하여 遂與刻期而遣之러니 及期不至하니 諸將皆咎俟어늘 俟曰 彼伺之未得其便耳 必不負也리라하다
後數日 果以吳首來어늘 傳詣平城하고 討其餘黨悉平之하니 以俟爲內都大官注+傳, 知戀切.하다
會安定盧水胡劉超復反이어늘 魏主以俟威恩著於關中이라하여 復遣鎭長安한대 俟單馬之鎭하니 超等聞之大喜하여 以俟爲無能爲也러니
俟旣至 喩以成敗하고 誘納其女以招之하니 超無降意러라 俟乃帥帳下往見之한대 超設備甚嚴이어늘 俟縱酒盡醉而還이러라
頃之復選敢死士五百人出獵하여 因詣超營하여 約曰 發機當以醉爲限이리라하고 旣飮 俟陽醉上馬하여 大呼手斬超首하니 士卒應聲縱擊하니 殺傷千數
遂平之하니 魏主復徵俟하여 爲外都大官하다
吐谷渾復還故土注+去年, 吐谷渾西奔.하다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23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太平眞君 7년이다.
[綱] 봄 정월에 魏主가 蓋吳를 토벌하니, 宋나라가 군대를 출동시켜 구원해주었다.
[目] 魏主의 군대가 東雍州에注+① ≪隋書≫ 〈地理志〉에 “絳郡은 後魏(北魏) 때에 東雍州를 두었는데, 後周(北周) 때에는 고쳐서 絳州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르러서 薛永宗의 보루에 다다랐다. 崔浩가 말하기를 “설영종이 폐하께서 친히 오신 것을 몰라 무리들의 마음이 해이해져 있으니, 지금 北風처럼 신속히 그들을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설영종이 출전하였다가 크게 패하여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앞서 그의 종족 薛安都가 弘農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宋나라로 달아났다.
魏主는 蓋吳가 長安의 북쪽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渭北 지역은 곡식과 풀이 없다고 하여 渭水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渭水를 따라 서쪽으로 가려고 하였다.
최호가 말하기를 “뱀을 공격하는 자는 먼저 그 머리를 치니, 머리가 깨지면 꼬리는 움직일注+② 掉는 흔든다는 뜻이다.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합오의 군영이 여기에서 60리 떨어져 있습니다. 경무장한 기병이 달려가면 하루 만에 도달할 수 있으니, 분명히 그들을 격파할 것입니다.
합오를 격파하고 난 뒤 長安으로 향해 남쪽으로 가면 역시 하루의 거리에 지나지 않으니, 하루가 모자란다고 해서 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남쪽의 길을 따라가면 합오가 北山으로注+③ 地字는 衍文이다. 들어갈 것이니, 〈그렇게 되면〉 단숨에 평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魏主가 따르지 않았다.
합오의 무리가 그 소식을 듣고 모두 흩어져서 北山으로 들어가자, 군대가 획득한 것이 없어서 魏主가 후회하였다.
마침내 장안으로 가서 지나가는 곳마다 합오와 내통하여 모의한 백성과 夷族들을 죽이고, 여러 군대가 杏城에서 합오를 크게 격파하니, 합오가 다시 使者를 보내어 宋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는데, 宋나라가 합오를 北地公으로 삼고 雍州와 梁州의 군대를 출동시켜 국경 지역에 주둔하게 하여 합오를 위해 성원하도록 하였다.
[綱] 宋나라가 林邑을 정벌하였다.
[目] 예전에 林邑王 范陽邁가 비록 宋나라에 공물을 바쳤지만 침입을 그치지 않자, 宋主가 交州刺史 檀和之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南陽 사람 宗慤이 집안 대대로 儒學에 소양이 있었으나, 종각은 유독 무예를 좋아하여 늘 말하기를 “長風을 타고 萬里의 풍랑을 깨트리고 싶다.”라고 하였는데注+① 宗慤의 叔父인 宗少文은 고상하여 벼슬하지 않았는데, 여러 아들과 종형제가 모두 을 애호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종각이 스스로 從軍하기를 요청하였다.
단화지가 진격하여 區粟城을注+② ≪水經註≫에 “盧容水는 日南 盧容縣의 區栗城 남쪽 높은 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區栗城의 북쪽을 지나는데, 林邑의 兵器와 전투 장비가 모두 성안에 있다.”라고 하였다. 포위하고 宗慤을 보내어 先鋒으로 삼아 林邑의 別將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目] 魏主는 崔浩와 함께 寇謙之를 믿고 중하게 생각하여 그의 道를 받들었고, 崔浩는 평소부터 佛法을 좋아하지 않아 늘 魏主에게 말하기를 “佛法은 虛誕하여 세상에 재물을 낭비하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니, 모두 없애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長安에 이르러 佛寺에 들어가니, 沙門이 시종하는 관리에게 술을 대접할 적에注+① 飮(마시게 하다)과 從(따르다)은 모두 去聲이다. 시종하는 관리가 그들의 방에 들어가 많은 병장기가 있는 것을 보고 나와서 魏主에게 아뢰었다.
魏主가 성을 내어 말하기를 “이는 沙門이 쓰는 물건이 아니니, 반드시 蓋吳와 내통하여 모반을 꾀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有司에게 명을 내려 사찰 안의 모든 沙門들을 찾아서 죽이게 하고, 그들의 재산을 조사하게 하여 술을 주조하는 도구와 숨겨놓은 부녀자들을 많이 찾아내었다.注+② 釀具는 술을 제조하는 도구이다. “窟室婦女”는 땅을 파고 공간을 만들어 부녀자를 은닉한 것이다.
최호가 이로 인해 魏主를 설득하여 境內의 沙門을 모두 죽이고 佛經을 태우고 佛像을 헐어버리라고 하니, 魏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조서를 내리기를 “옛날 後漢의 荒亡한 군주가 사악하고 거짓된 것을 믿고 현혹되어 하늘의 떳떳한 이치를 어지럽혀서 정치와 교화가 시행되지 못하고 예의가 크게 무너지도록 하여 九服(全國)의 안이 모두 폐허가 되게 하였으니注+③ 禮에 어두운 것을 荒이라 한다. 佛法은 漢나라 明帝 때부터 중국에 들어왔는데, 楚王 劉英이 가장 먼저 좋아하였고, 桓帝 때에 이르러 비로소 浮屠를 섬겼다. 鞠은 궁하다는 뜻이다., 짐은 거짓을 제거하고 진실을 바로잡아 그 종적을 없애고자 한다.
有司는 征鎭에注+④ 여러 郡의 太守는 모두 을 거느렸다. 혹자가 말하기를 “太守는 지역을 방비할 따름이니, 征鎭은 征伐과 鎭守를 주로 맡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널리 알려서 佛像과 胡書(佛書)가 있는 곳은 모두 부수거나 불태우고 沙門은 나이에 관계없이 파묻어 죽이고, 지금 이후로 오랑캐 신을 섬기거나 진흙이나 구리로 사람의 형상을 만드는 자가 있으면 일족을 멸하라.”라고 하였다.
太子 拓跋晃이 평소에 佛法을 좋아하여 여러 차례 간언을 올렸으나 〈魏主가〉 따르지 않으니, 이에 조서를 늦게 반포하여 원근에서 미리 그 소식을 듣고 각자 대책을 세울 수 있도록 하자, 沙門이 대부분 도망쳐서 죽음을 면하였고, 어떤 사람은 佛經과 佛像을 수습하여 감추어두었는데, 오직 塔은注+⑤ 佛弟子가 舍利를 거두어 봉안하여 宮宇를 세우는 것을 塔이라고 하니, 역시 오랑캐 말인데, 宗廟와 같기 때문에 세상에서 塔廟라고 하였다. 다시 남은 것이 없었다.
[綱] 北魏 사람이 宋나라를 침범하였다.
[目] 예전에 南國(宋나라)이 여러 僑州를 설치하여 북쪽(北魏) 경내의 州名을 함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고, 또 具區에서注+① ≪周禮≫ 〈職方氏〉에 揚州의 湖澤을 具區라 하였고, 顏師古는 “具區가 吳에 있다.”고 하였다. 사냥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宋나라 사람이 답장을 보내기를 “반드시 지역에 따라 州를 세워야 한다면 그대들도 徐州와 揚州를 세웠으니, 어찌 그 땅을 소유해서 그렇게 한 것인가. 만일 南國의 교화를 살펴보길 원한다면 의 儀式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니, 〈그 의식에 따라 귀순하여 온다면 그대들이〉 머물 여관과 대접할 음식이 늘 풍부하다.”注+② ≪周禮≫에 저자에는 館이 있고, 館에는 저장된 물건을 두었다고 하였으니, 〈“館邸”는〉 朝聘하는 객을 대접하기 위한 것이다. 邸는 諸侯가 와서 조회할 때 머무는 장소이다. 饋는 대접하는 것이다. “饋餼”는 손님을 生食과 芻米로 대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北魏 사람들이 宋나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는데, 宋主가 걱정을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자문을 구하자 御史中丞 何承天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匈奴를 방비하는 책략은 두 가지에 불과하니, 武人들은 출정하여 토벌하는 계책에 온 힘을 쏟는 것이고, 儒生은 화친하는 맹약을 강구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衛靑과 霍去病의注+③ “衛霍”은 〈漢나라 장군〉 衛靑과 霍去病을 말한다. 뒤를 따르려 한다면 淮水와 泗水에서 田地를 크게 경작하고 안으로 靑州와 徐州를 알차게 하여 백성들에게는 여분의 비축이 있게 하고, 들판에는 곡식을 쌓아두고 난 뒤에 군사 10만 명을 출동시켜 한 번에 쓸어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일부의 군대를 파견하여 추격하여 쳐서 그들의 침략과 포학한 행위에 보복을 한다면, 저들은 경무장한 기병으로 달아나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니, 다만 쓸데없이 많은 비용을 들이고도 그들에게 손해를 주지 못하게 되어 보복하려는 전쟁은 앞으로도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최하의 계책입니다. 오직 변경을 안정시켜서 수비를 굳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입니다.
曹操와 孫權이注+④ “曹孫”은 曹操와 孫權을 말한다. 각기 霸王을 칭할 적에 재주와 지혜는 대등하였는데 長江과 淮水 사이에 각각 수백 리에 걸쳐 사람들이 거처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斥侯 활동을 하는 교외는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방목하는 땅이 아니므로 성을 견고하게 만들고 성 밖의 들판에는 식량을 없애고서 상대가 오기를 기다리며, 갑옷을 정비하고 병장기를 수선하면서 쳐들어온 상대의 피폐한 약점을 찾았으니, 백성들을 보호하고 경내를 보전하는 것은 이런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目] 요약하여 결론을 내리면 그 계책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먼 곳에 있는 백성들을 이주시켜 가까운 곳으로 오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靑州와 兗州에 이전부터 살고 있던 백성들과 冀州에 있는 새로 귀의한 백성들 중에 경계 지역의 끝에 살고 있는 자들이 3만여 호인데, 이들을 모두 大峴의 남쪽으로 이주시켜 內地를 충실히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성읍을 많이 쌓아서 새로 이주해온 가호를 거주하도록 하고 그들에게 쓸 비용을 빌려주어 봄과 여름에는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사육하도록 하며, 가을과 겨울에는 들어와서 성읍을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적들이 침입할 때에 하나의 성중에 1천 가구가 있어서 군사가 2천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며, 그 나머지 병들거나 약한 자들은 오히려 성 위로注+① 陴는 성 위의 성가퀴이다. 올라가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게 한다면 오랑캐의 무리 3만을 대항하기에 충분합니다.
셋째는 수레와 소를 모아놓고서注+② 纂偶는 모집하여 짝을 지우는 것이다. 식량과 병기를 적재하도록 해야 합니다. 1천 가호의 재산을 계산하면 밭 가는 소가 500두를 밑돌지 않아서 수레 500량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수레를 나란히 모아서 이를 갈고리로 연결하면 그 무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설령 성이 공고하게 될 수 없더라도 험한 곳으로 간다면 적들이 침범할 수 없을 것이며, 급한 일이 있어서 징발할 일이 발생하면 이틀 밤이면 모이게 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장정들을 헤아려서 병장기를 준비하도록 부과하는 것입니다. 병사 2천 명이 그 민첩하고 숙달한 것에 따라서 스스로 병장기를 지니게 하니, 평소 스스로 연습하고 자기의 이름을 새깁니다. 성에 돌아와서는 그것을 창고에 넣어두고 밖으로 나갈 때에는 병장기를 요청하여 자신이 갈아서 새롭게 만듭니다.注+③ 〈“請以自新”은〉 병장기를 요청하여 각자 스스로 연마하여 새롭게 하는 것이다. 백성들이 얻을 수 없는 활과 화살注+④ 弓簳은 활과 화살대이다. 簳은 화살대이니, 글자는 苛․竿과 통한다. 모두 음은 稈이다. 그리고 날카로운 쇠붙이를 관청에서 점차 그들에게 채워주면 수년 안에 군용품은 대략 갖추어질 것입니다.
가까운 郡의 군대가 멀리 있는 淸水와 濟水에 주둔하게 되어注+⑤ 近郡은 南徐州가 관할하는 여러 僑郡과 三吳(吳興, 吳郡, 會稽)를 말하니, 邦域의 중간에 가까이 있다. 淸․濟는 두 강의 이름이다. 공력과 비용이 이미 무거워서 한숨과 원망이 역시 깊으니, 臣이 그것을 헤아려보건대 백성들을 쉽게 동원하는 것만 못합니다.
지금 백성들이 이롭게 여기는 것을 따라서 그들을 인도하고 거느린다면 병력이 강해지는데도 적들이 대비하지 못하고, 나라가 부유해지는데도 백성들이 수고롭지 않을 것입니다. 군대에 있으면서 세금을 면제 받고 우대를 받으며 앉아서 국가의 양식을 먹는 경우에 견주어 같은 수준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綱] 北魏 上邽의 東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州의 군대가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白虎幡白虎幡
[目] 北魏 金城 사람 邊固와 天水 사람 梁會가 秦州와 益州의 雜民 만여 戶와 함께 上邽의 東城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켜 공격하여 西城을 압박하였는데, 秦州益州刺史 封敕文이 그들을 물리치니,
氐族․羌族․休官․屠各注+① 休는 본음대로 읽는다. 屠는 음이 除이다. 休官과 屠各은 두 종족의 오랑캐이다. 休官은 잡종 오랑캐 부락의 명칭이다. 晉나라 孝武帝 때에 休官 사람 權千成이 天水郡 顯親縣을 점거하고 스스로 秦州牧이라 일컬었다. 晉나라 때에 변방의 안으로 들어와 살던 北狄이 19종족인데, 屠各이 가장 강성하고 존귀하여 여러 종족을 다스렸다. 수만 명이 모두 일어나 변고와 양회에게 호응하였다. 봉칙문이 변고를 공격하여 목을 베니 나머지 무리가 양회를 추대하여 군주로 삼았다.
魏主가 병력을 파견하여 토벌하였는데, 도착하기 전에 양회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봉칙문이 앞서 바깥에 겹겹이 해자를 파서 병사들을 엄히 단속하여 지키게 하고 밤부터 아침까지 전투를 하였는데,
봉칙문이 말하기를 “적들이 살길이 없음을 알고 죽기로 우리에게 덤벼들어 士卒이 많이 죽으니, 쉽게 승리할 수 없다.”라고 하고 을 사용하여 항복하는 자는 용서해주겠다고 하니, 양회의 무리가 드디어 무너졌는데, 뒤를 쫓아 토벌하여 그들을 평정하였다.
[綱] 宋나라 군대가 林邑에서 승리하였다.
製獅御象(사자를 만들어 코끼리를 몰다)製獅御象(사자를 만들어 코끼리를 몰다)
[目] 檀和之 등이 區粟을 함락하여 장수의 목을 베고 승세를 타고 象浦로注+① 象浦는 바로 盧容浦이다. 盧容縣은 바로 秦나라의 象郡 象林縣 지역이므로, 역시 象浦라고 한 것이다. 들어갔다.
林邑王 陽邁가 나라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와서 싸웠는데 코끼리에게 갑주를注+② 말의 갑옷을 具裝이라 한다. 입혔기 때문에 앞뒤로 공격할 틈이 없었다.
宗慤이 말하기를 “제가 듣기로 외국에는 獅子가注+③ 獅子는 호랑이와 비슷한데 황색에다 갈기가 있고, 꼬리 끝에 털이 뭉친 부분이 있는데 크기가 말[斗]만 하다. 있어 위세로 모든 짐승들을 굴복시킨다고 합니다.”라고 하고 이에 그 형상을 만들어 코끼리와 대항하니, 코끼리가 과연 놀라 달아났다.
단화지가 드디어 林邑을 이기니, 陽邁 父子는 몸만 빼내어 달아났다. 획득한 물건 중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보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나 종각은 하나도 취하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에 의관이 간소하였다.
[綱] 여름 6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綱] 北魏가 京畿 주위에 요새를 축조하였다.
[目] 北魏가 司州․幽州․定州․冀州에서 10만 명을 징발하여 京畿 주변에 요새를 쌓았는데, 上谷郡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黃河에 이르니 너비와 길이가 천 리였다.注+① 北魏는 平城에 도읍하여 代都에 司州를 두었다. 縱은 음이 蹤이니, 길이라는 뜻이다.
[綱] 宋나라가 〈建康의〉 북쪽에 제방을 쌓아 玄武湖를注+① 그 땅이 臺城(京城)의 뒤에 있으므로, 玄武湖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만들고 華林園에 景陽山을 쌓아 올렸다.
[綱] 가을 7월에 宋나라가 杜坦을 靑州刺史로 삼았다.
[目] 예전에 杜預의 아들 杜耽이 晉나라의 혼란을 피하여 河西에 거주하면서 에게 벼슬을 하였는데, 前秦이 涼州를 함락하자 그 자손들이 비로소 關中으로 돌아왔다. 宋 高祖(劉裕)가 後秦을 멸망시키자, 杜坦注+① 杜坦은 杜驥의 형이다. 형제는 고조를 따라서 장강을 건넜다.
당시에 江東에는 王氏와 謝氏의 여러 종족들이 한창 강성했던 터라 뒤늦게 건너온 北人들을 조정에서는 모두 傖荒(北人을 경시하는 말)으로注+② 傖(천하다)은 助耕의 切이다. 南人이 北人을 傖이라고 불렀다. 荒은 변방에서 왔음을 말한 것이다. 대하였고, 비록 쓸 만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도 모두 淸職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宋主가 일찍이 두탄과 더불어 를 논평하여 말하기를 “지금 다시 이런 사람들이 없는 것이 한탄스럽다.”라고 하였다. 두탄이 말하기를 “김일제가 설령 지금 세상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말을 기르느라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그의 견식과 지혜를 판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宋主가 안색을 변하여 말하기를 “卿은 어찌 조정을 경시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두탄이 말하기를 “臣의 처지에서 말씀드리기를 청합니다. 臣은 본래 中華의 명문 귀족으로 선대의 공업을 대대로 이어왔는데, 다만 일찍 남쪽으로 건너오지 않은 탓에 곧바로 傖荒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하물며 오랑캐 종족으로 몸소 말을 기른 김일제와 같은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宋主가 말을 하지 못하였다.
[綱] 8월에 北魏의 長安鎭將 陸俟가 蓋吳를 토벌하여 목을 베었고, 安定의 盧水胡 劉超가 반란을 일으키자 육사가 또 목을 베었다.
[目] 蓋吳가 杏城에 주둔하여 다시 위세를 떨치자, 北魏에서 高涼王 拓跋那注+① 拓跋那는 拓跋禮의 아들이다. 등을 보내어 토벌하여 격파하고 그의 숙부 두 명을 사로잡았다. 諸將들이 平城으로 그들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長安鎭將 陸俟가 말하였다.
“長安은 험하고 견고하며 풍속이 굳세고 강하니注+② 忮는 사납다는 뜻이다., 지금 합오의 목을 베지 않으면 변고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합오가 제 한 몸만 몰래 도주하였으니, 그가 친하게 지내고 믿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를 사로잡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10만의 군대를 머물게 하여 한 사람을 추적하게 한다면 역시 좋은 계책이 아니다. 사사로이 합오의 숙부들에게 그의 처자식의 죄를 면하게 해주겠다고 허락하고 스스로 합오를 뒤쫓아가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반드시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諸將들이 모두 말하기를 “잡았던 적을 죽이지 않고 다시 보내주었다가 만약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누가 그 죄를 책임질 것인가?”라고 하니, 육사가 말하기를 “이 죄는 제가 여러분들을 대신해 책임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량왕 척발나 역시 육사의 계책이 옳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그들과 기일을 약속하고 보내주었다. 기일이 되어도 합오의 숙부들이 도착하지 않자 諸將들이 모두 육사를 허물하였는데, 육사가 말하기를 “저들은 합오를 죽일 틈을 엿보고 있으나 아직 좋은 기회를 잡지 못했을 뿐이니, 필시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며칠 후에 과연 합오의 首級을 가지고 오자 역말로注+③ 傳(역말)은 知戀의 切이다. 平城에 보내고 합오의 잔당들을 토벌하여 모두 평정하니, 육사를 으로 삼았다.
[目] 때마침 安定의 盧水胡 劉超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니, 魏主가 陸俟의 위엄과 은혜가 關中에 널리 알려져 있다고 여겨 다시 長安으로 보내 鎭守하게 하였다. 육사가 말 한 필을 타고서 진수할 곳으로 가니, 유초 등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유사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육사가 도착하고 나서 〈유초에게〉 성공과 실패를 깨우쳐주고 유초의 딸을 유혹하여 아내로 삼고 그를 초대하였는데, 유초는 항복할 뜻이 없었다. 육사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친히 가서 유초를 만나보았는데, 유초가 아주 엄히 방비를 하자 육사가 술을 실컷 마시고 취하여 돌아왔다.
얼마 뒤 다시 결사대 500명을 뽑아서 사냥을 나가서 이를 빌미로 유초의 군영으로 가서 부하들과 약속하기를 “마땅히 내가 술에 취한 때를 신호로 삼아서 행동을 개시하라.”라고 하였다. 술에 취한 뒤에 육사가 겉으로 취한 척하면서 말에 올라타서 크게 소리치며 직접 유초의 목을 베자, 사졸들이 호응하여 마구 공격하니 〈유초의 부하 중에〉 죽거나 부상을 당한 자가 1천 명을 헤아렸다.
마침내 그들을 평정하니 魏主가 다시 육사를 불러 으로 삼았다.
[綱] 吐谷渾이 다시 故土로 돌아왔다.注+① 지난해에 吐谷渾이 서쪽으로 달아났다.


역주
역주1 魏主討蓋吳 宋發兵援之 : “‘討’라고 기록하고서 ‘援’이라고 기록한 것은 구원해준 일을 죄로 여긴 것이다.[書討而援 罪援者也]” ≪書法≫“앞에서 ‘魏蓋吳反(北魏 蓋吳가 반란을 일으키다.)’이라고 기록하고 여기서 ‘魏討蓋吳(北魏가 蓋吳를 토벌하다.)’라고 기록하였으니 ‘反’이라고 하고 ‘討’라고 한 것은 그 의리가 분명하다. 宋나라가 마침내 군대를 출동시켜 구원해준 것은 과연 무슨 도리인가. 천하에 악한 자를 미워하는 마음은 똑같은 것인데 어찌 군사를 보내 반란을 일으킨 오랑캐를 도우면서 적에게 위엄을 보이고 남을 굴복시킬 수 있겠는가. 書法이 이와 같으니, 宋나라 사람에게 죄를 준 뜻이 어떠한가. 애석하다.[前書魏蓋吳反 此書魏討蓋吳 曰反曰討 其義明矣 宋乃發兵援之 果何理也 天下之惡一也 烏有遣兵助反虜而可威敵服人者哉 書法若此 其罪宋人之意爲如何邪 吁]” ≪發明≫
역주2 墳典 : 三墳五典의 약칭으로 三墳은 三皇의 글이고, 五典은 五帝의 글이다. 모두 전설상의 책이니, 고대의 전적을 통칭하는 말이다.
역주3 北魏가……훼손하였다 : 이는 魏武의 法難이라고 불리는 廢佛로 국가 권력에 의한 불교 탄압을 말한다. 중국의 불교 탄압을 보통 三武一宗 法難이라 하는데, 北魏 太武帝(魏武의 법난), 北周 武帝(周武의 법난), 唐 武宗(會昌의 법난), 後周 世宗(後周의 법난)에 의해 이루어졌기 三武一宗이라 한다. 이는 주로 도교에 의해 획책된 경우가 많았으나, 後周의 법난은 국가 재정의 궁핍에서 나온 것이었다.
역주4 魏誅沙門 毁佛書佛像 : “‘誅’는 무슨 의미인가. 죄주는 말이다. 죄가 있는 것은 長安의 佛者들뿐이니, 境内의 沙門들이 어찌 모두 이런 죄가 있겠는가. 그러나 夷狄의 종교(佛敎)를 따르고 人倫을 말살하여 四民(士․農․工․商)의 해가 되었으니, 그 죄가 크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沙門에 ‘誅’라고 기록한 것은 세 번이고(이해(466), 宋나라의 戊戌年(458), 齊나라의 辛酉年(481)), 佛教에 ‘廢’라고 기록한 것은 세 번이다(이해, 陳나라 甲午年(574)에 後周가 佛敎와 道教를 폐한 것, 唐나라 會昌 5년(845)에 天下의 佛寺를 폐하고 僧尼를 모두 강제로 환속시킨 것). 그러나 모두 몇 년이 안 되어 회복하였으니, 北魏는 7년, 北周는 6년, 唐나라는 1년도 가지 못했다. 비록 僧道들을 내쫓기는 하였으나 또한 1, 2개월 만에 중지하였다. 異端을 없애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으니, 탄식할 만한 일이다.[誅者何 罪辭也 罪者長安佛者耳 境内沙門 豈皆有是罪乎 從夷教 滅人倫 以爲四民之蠧 其爲罪也大矣 終綱目 沙門書誅三(是年 宋戊戌年 齊辛酉年) 佛教書廢三(是年 陳甲午年 周廢佛道教 唐會昌五年 毁天下佛寺 僧尼竝勒歸俗) 然皆不數年而復 魏七年 周六年 唐不一年 雖至沙汰僧道 亦不一二月而罷 異端撲滅之難如此 可勝嘆哉]” ≪書法≫“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이후로 사람마다 佛法을 경건하게 받들어 복과 이익을 구하여 감히 헐뜯는 이가 없었는데 魏主 拓跋燾에 이르러 강력하게 제거하였으니, 또한 강건하고 정당하여 미혹되지 않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의논하는 이들은 혹 魏主가 온당한 죽음을 맞지 못한 것은 불교를 훼손한 것에 대한 인과응보라고 하는데, 도리어 梁主 蕭衍이 더욱 돈독히 불교를 숭상하다가 더욱 참혹하게 재앙을 받은 것을 모르는 것이다. 어찌 불교가 北魏에만 신령하고 梁나라에는 신령하지 않단 말인가. 요컨대 사람의 화복은 본래 善惡의 축적에 달려 있는 것이지 불교의 숭상 여부와는 애초에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겠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죄가 있으면 ‘誅’라고 기록하고 죄가 없으면 ‘殺’이라고 기록하였다. 지금 沙門들은 불법을 높이 믿어 그들이 말하는 善을 修行하여 애초에 명명할 만한 죄가 없는데, ≪자치통감강목≫에서 ‘誅’로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中國에 살면서 夷狄을 따르고 王道를 버려 異端을 숭상하며, 君臣 관계를 버리고 父子 관계를 끊으며, 인륜을 말살하고 몸을 훼손하며 무위도식하여 일반 백성의 재물을 좀먹는다. 심지어 간사함을 숨기고 악덕을 쌓으며 음탕하고 잡스러운 짓을 하여 더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이것이 과연 죄가 있는가, 죄가 없는가. 기록하기를 ‘誅’라고 한 것은 이른바 그 실정을 따져서 그 실제 잘못을 확정했을 뿐이니, 어찌 잘못이겠는가. 뒤에 沙門을 공경하고 예우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를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自佛入中國 人皆敬奉其法 以求福利 未有敢訾之者 至魏主燾 乃毅然去之 亦可謂剛正不惑者矣 然世之議者 或以魏主不得其終 爲毁佛之報 抑不知梁主衍奉佛尤篤 得禍尤慘 豈佛獨靈於魏而不靈於梁耶 要知人之禍福 自繫乎善惡之積 而奉佛與否 初無預也 夫綱目有罪則書誅 無罪則書殺 今沙門者 崇信其法 以修行其所謂善 初非有可名之罪 而綱目乃以誅書之 何哉 居中國而從夷狄 捨王道而尙異端 棄君臣 絶父子 滅人倫 毁形體 遊手遊食 以耗蠧平民 至於藏姦蓄穢 淫汚雜揉 又有不可勝言者 是果有罪耶無罪耶 書之曰誅 所謂原其情而定其實耳 夫豈過哉 後之欲敬禮沙門者 要當以是爲的]” ≪發明≫“邱濬이 말하였다. ‘아! 임금이 백성 중에 현명한 자와 지혜로운 자에게는 진실로 사랑으로 대하고 어리석은 자와 못난 자에게는 또한 가련하게 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백성 중에 교화에 어긋나고 예법을 어기며 법을 저촉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우선 그 마음에 따져보고 그 심정을 살펴서 원인을 궁구한다. 만일 윗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고 또한 명백하게 禁令을 내리고서 백성들이 저촉하고 어기고 어긋난 뒤에 죄를 주고 주벌을 하면 저들은 진실로 마음을 미루어 받아들이게 된다. 윗사람이 분명하게 잘못된 행동을 하고 또 禁令이 없는데 갑자기 彼此를 가리지 않고 일률적인 형벌을 시행하면 저들은 진실로 할 말이 있게 된다. 元魏(北魏)가 沙門을 주벌한 것은 사람 마음에 통쾌한 듯하지만 미리 금지하기로 약속한 명령과 한계를 지어 엄단한 기약을 한 적이 없는데, 곧바로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사형을 내려서 그들에게 잘못을 고치게 하고자 해도 방법이 없게 하였으니, 또한 참혹하다. 더구나 그 마음이 치우쳐 향하는 곳이 있어 正敎(儒敎)를 부지하고 사악한 말을 막는 데 한결같이 하지 않았으니, 어찌 그들의 마음을 승복시킬 수 있겠는가.’[◯邱濬曰 嗚呼 人君之於民 其賢者智者 固當愛之 其愚者不肖者 亦當憐之 故民有悖於教違於禮犯於法者 必先原其心察其情 而推究其所自 苟上之所不爲 而又明有禁令 而民犯之違之悖之 然後罪之誅之 彼固茸心而受也 上之人分明爲之 而又無禁令 一旦不分彼此 施之以一切之刑 則彼固有辭矣 元魏之誅沙門 雖若痛快人心 然未嘗先有禁約之令限斷之期 而即加之以不可復生之刑 使之欲改過而無由 亦云慘矣 況其心偏有所向 非一於扶正教以闢邪說也 安能服其心哉]” ≪發明≫
역주5 征鎭 : 魏晉時期 이후 장군의 칭호로 征東․征西․鎭東․鎭西와 같은 것이다. 군대를 감독하고 지방을 수비하는 무관직을 총칭한 것이다.
역주6 魏人侵宋 : “南北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부터 彼此 사이에 서로 침략하여 군대를 낼 적에 명분이 있던 적이 없었다. 지금 宋나라 사람들은 가까이 蓋吳를 원조한 잘못은 죄를 물을 수 있지만 北魏의 경우는 그렇게 할 수 없다. 〈北魏가〉 군사를 잠복시켜 국경에 쳐들어간 것은 과연 무슨 짓인가. ‘人’이라 기록하고 ‘侵’이라 기록한 것은 비루하게 여긴 것이다.[自南北分統 彼此交侵 師出未嘗有名 今宋人近有蓋吳之援 若可問罪 而魏則未能也 潜師入境 果何爲哉 書人書侵 蓋陋之也]” ≪發明≫
역주7 北魏에서……보내어 : ≪資治通鑑≫에 의하면, 이 내용은 北魏의 安南․平南將軍府에서 宋나라 兗州에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宋나라 兗州가 바로 僑置한 州이기 때문이다. 僑置에 대한 해설은 본서 145쪽 역주 28) 참조.
역주8 呼韓邪單于가……때 : 匈奴의 呼韓耶單于 가운데 한 사람으로, 漢 宣帝 때 郅支單于와의 알력으로 인해 漢나라에 귀의하였는데, 그때의 일을 말한다.
역주9 안전하게 행진하여 : ≪資治通鑑新注≫에서는 “平行은 안전하게 행진하는 것이다.[平行 安全行進]”라고 풀이하였다.
역주10 白虎幡 : 白虎의 도상이 있는 軍旗로 조정의 명령이나 군령을 나타내는 符信으로 쓰였다.
역주11 宋築北隄……起景陽山於華林園 : “民力을 중시함을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隄’를 만든 것이 네 번이고. ‘湖’를 만든 것이 한 번이고, ‘山’을 만든 것이 두 번이다(蜀漢 後主 建興 15년(237)과 이해(446)이다. 나머지는 漢 明帝 永平 12년(69)에 자세하다.).[書重民力也 終綱目書作隄四 立湖一 起山二(漢後主建興十五年 是年 餘詳漢明帝永平十二年)]” ≪書法≫
역주12 張氏 : 5胡16國의 하나인 前涼을 가리킨 것으로, 전량은 漢族 명가 출신인 張軌가 세웠다.
역주13 金日磾 : 匈奴 休屠王의 태자로, 漢 武帝 때에 漢나라에 들어와 車騎將軍이 되고, 霍光과 함께 무제의 遺詔를 받들어 정사를 보필하였다.(≪漢書≫ 〈金日磾傳〉)
역주14 魏長安鎭將陸俟討蓋吳斬之……俟又斬之 : “‘又斬之’라고 기록한 것은 陸俟를 거듭 가상히 여긴 것이다.[書又斬之 重嘉俟也]” ≪書法≫
역주15 內都大官 : 본서 52쪽 역주 45) 참조.
역주16 外都大官 : 본서 52쪽 역주 45) 참조.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9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