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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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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辰年(308)
二年이라
漢永鳳元年이라
春正月朔 日食하다
◑漢劉聰 據太行하고 石勒 下趙, 魏어늘 王浚 擊勒破之하다
◑二月 하다
◑夏五月 漢王彌寇洛陽이어늘 하다
王彌收集亡散하여 兵復大振하니 分遣諸將하여 攻陷郡縣하고 遂入許昌이어늘
張軌遣督護北宮純하여 將兵衛京師注+北宮, 複姓也,러니 彌入自轘轅하여 敗官軍於伊北하고 遂至洛陽注+伊北, 伊水之北也.하다
王衍 督軍出戰이러니 北宮純 募勇士百餘人하여 突陳하니 彌兵 大敗하여 燒建春門而東이어늘
遣左衛將軍王秉追之하여 戰于七里澗하여 又敗之한대
彌走平陽注+平陽, 郡名, 屬司州.하니 漢王淵 遣侍中郊迎하고 令曰 孤親行將軍之館하여 拂席洗爵하여 敬待將軍注+行, 下孟切, 臨幸也.호리라
及至 拜司隷校尉하다 詔封張軌西平郡公하니 軌辭不受하다 州郡之使 莫有至者로되 軌獨貢獻不絶이러라
秋七月 徙都蒲子注+蒲子縣, 漢屬河東郡, 晉屬平陽郡.하다
◑冬十月 漢王淵 稱皇帝하다
◑十二月 漢石勒, 劉靈 寇魏, 汲, 頓丘하다
勒, 靈 帥衆三萬하고 寇三郡하니 百姓 望風降附者 五十餘壘
皆假壘主將軍, 都尉印綬하다 簡其彊壯五萬하여 爲軍士하니 老弱 安堵如故러라
褒好直言이러니 成主雄 初得蜀 用度不足이라 諸將 有以獻金銀得官者어늘
褒諫曰 陛下設官爵하니 當網羅天下英豪어늘 何有以官買金邪잇가 謝之하다


戊辰年(308)
[] 나라 孝懷皇帝 永嘉 2년이다.
[] 나라(前趙) 高祖 劉淵 永鳳 원년이다.
[] 봄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나라(前趙) 劉聰太行山을 점거하고 石勒 지역을 함락시키자, 王浚이 석륵을 격파하였다.
[] 2월에 太傅 司馬越淸河王 司馬覃을 살해하였다.
[] 여름 5월에 나라(前趙) 王彌洛陽을 침략하자, 張軌督護北宮純을 보내 도성으로 들어가 호위하게 하고, 왕미를 격파하여 패주시켰다.
[] 王彌가 도망하고 흩어진 병졸들을 거두어 모아 군대의 기세가 다시 크게 진작되니,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어 郡縣을 공격해서 함락하고 마침내 許昌으로 쳐들어갔다.
張軌督護北宮純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京師를 호위하게 하였는데,注+北宮複姓이다. 왕미가 轘轅으로 쳐들어와서 伊水 북쪽에서 官軍을 패퇴시키고 마침내 洛陽에 이르렀다.注+伊北伊水의 북쪽이다.
王衍이 군대를 감독하여 출전하였는데, 북궁순이 용사 백여 명을 모집하여 적진을 돌격하니, 왕미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建春門을 불태우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왕연이 左衛將軍 王秉을 보내어 추격하게 해서 七里澗에서 싸워 또다시 왕미를 패퇴시켰다.
왕미가 平陽郡으로 달아나니,注+平陽의 이름이니, 司州에 속하였다. 漢王 劉淵侍中을 보내어 교외에서 왕미를 맞이하게 하고 명령하기를 “내가 친히 장군의 관사에 행차하여 자리를 청소하고 술잔을 씻어서 공경히 장군을 기다리겠다.”注+(행차하다)은 下孟이니, 〈“親行”은〉 親臨한다는 뜻이다. 하였다.
왕미가 도착하자, 유연은 그를 司隷校尉로 제수하였다. 황제가 詔令을 내려 장궤를 西平郡公으로 봉하니, 장궤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때 각 州郡使者들 중에 京師에 오는 자가 없었는데, 장궤만이 홀로 계속하여 공물을 바쳤다.
[] 가을 7월에 나라(前趙)가 도읍을 蒲子로 옮겼다.注+蒲子縣나라 때에는 河東郡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平陽郡에 속하였다.
[] 겨울 10월에 漢王 劉淵이 황제를 칭하였다.
[] 12월에 나라(前趙) 石勒劉靈魏郡汲郡, 頓丘를 침략하였다.
[] 石勒劉靈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3개의 (, , 頓丘)을 침략하니, 이곳의 백성들 중에 소문만 듣고도 항복하여 따르는 자가 50여 보루였다.
석륵과 유령은 보루의 우두머리들에게 將軍都尉印綬를 임시로 수여하였다. 그리고 항복한 자들 중에 강하고 건장한 자 5만 명을 선발하여 병사로 삼으니, 노약자들은 예전처럼 안도하고 살았다.
[] 나라의 尙書令 楊褒하였다.
[] 楊褒는 직언하기를 좋아하였다. 成主 李雄이 처음 지역을 얻었을 적에 재정이 부족하여 여러 장수들 중에 금과 은을 바치고 관직을 얻은 자가 있었다.
양포가 하기를 “폐하께서는 官爵을 설치하였으니, 마땅히 천하의 영웅호걸을 망라하여야 하는데, 어찌하여 관직을 팔아 금을 살 수 있습니까.” 하니, 이웅이 사과하였다.


역주
역주1 太傅越 殺淸河王覃 : “淸河王 司馬覃은 前 太子인데, ‘前 太子’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태자를 세우고 폐위하는 것이 惠帝의 뜻이 아니었으므로 평소에 쓰던 일반적인 칭호를 따른 것이다.[淸河王覃 故太子也 不書故太子 何 太子之立之廢 非惠帝意也 故從其恒稱]” ≪書法≫
역주2 張軌遣督護北宮純入衛 擊破走之 : “‘入衛(도성으로 들어가 호위했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北宮純의 의리를 인정한 것이다. 이때 王衍이 군대를 감독하였는데, 북궁순이 용사를 모집하여 적진을 충돌해서 王彌가 대패하였다. 왕연이 다시 王秉을 보내어 왕미를 추격하여 패퇴시켰는데, 이 일은 쓰지 않고 북궁순을 쓴 것은 북궁순의 의리를 인정한 것이니, ‘入衛’라고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入衛’라고 쓴 것이 3번인데(北宮純, 何倫, 謝尙), 오직 북궁순에게만 功勳으로 썼다. ‘兵入衛(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호위했다.)’라고 쓴 것이 12번이며(晉 愍帝 建興 4년(316)에 자세히 보인다.), ‘赴難(難에 달려왔다.)’이라고 쓴 것이 3번이며(晉 成帝 咸和 4년(329)에 자세히 보인다.), ‘아무 곳으로 나아갔다.’라고 쓴 것이 3번이다.(永嘉 4년(310)에 자세히 보인다.)[書入衛 何 予義也 於是王衍督師 純募勇士突陳 王彌大敗 衍復遣王秉追敗之 不書 書純 予義也 書入衛始此 終綱目 書入衛三(北宮純 何倫 謝尙) 惟北宮純以功書 書兵入援十二(詳愍帝建興四年)赴難三(詳成帝咸和四年) 書詣某所三(詳永嘉四年)]” ≪書法≫
역주3 成尙書令楊褒卒 : “僭國의 신하인데도 그의 죽음에 ‘卒’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그의 어짊을 기록한 것이다. 진실로 어질면 참국이라도 반드시 기록하였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참국의 신하에게 ‘卒’이라고 쓴 것이 22번인데, 이중에 晉나라가 9번을 차지하였고(成나라의 楊褒와 范長生, 漢나라의 劉殷, 後趙의 張賓, 前秦 苻雄과 王猛, 前燕 李績과 慕容恪, 前涼 宋混) 五代가 13번을 차지하였다.(唐나라의 張承業, 前蜀 王宗儔, 吳나라의 陳彦謙과 徐溫, 南漢 楊洞潛과 趙光裔, 閩나라의 劉贊, 後漢 劉承訓, 南唐 李建勳, 後周 馮道와 鄭仁誨와 王朴, 南唐 柴克宏)[僭國臣爾 其卒之 何 錄賢也 苟賢矣 雖僭國 必錄之 終綱目 卒僭國臣二十有二 晉世居九(成楊褒 范長生 漢劉殷 後趙張賓 秦苻雄王猛 燕李績慕容恪 涼宋混) 五代居十三焉(唐張承業 蜀王宗儔 吳陳彦謙徐溫 漢楊洞潛趙光裔 閩劉贊 漢劉承訓 唐李建勳 周馮道鄭仁誨王朴 唐柴克宏)]” ≪書法≫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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