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庚子年(220)
二十五年이라
魏文帝曹丕黃初元年注+魏受漢禪, 推五德之運, 以土繼火, 土色黃, 故紀元曰黃初.이라 ◑是歲 僭國一이라
操知人善察하여 難眩以僞注+眩者, 目無常主. 難眩以僞, 謂人不能亂其明也.하고 識拔奇才하여 不拘微賤하고 隨能任使하여 皆獲其用하다
與敵對陳 意思安閑하여 如不欲戰이라가 及決機乘勝 氣勢盈溢注+陳, 讀陣.하다
勳勞宜賞 不吝千金하고 無功望施 分毫不與注+施, 去聲.하며
用法峻急하여 有犯必戮하여 或對之流涕로되 然終無所赦하고 雅性節儉하여 不好華麗注+雅, 素也.
能芟刈群雄하여 幾平海內러니 至是薨하다
太子丕在鄴이라 鄢陵侯彰 自長安來赴하여 問璽綬所在注+操自漢中還師而東, 彰定代而西迎操, 因留彰長安.어늘
諫議大夫賈逵 正色曰 國有儲副하니 先王璽綬 非君侯所宜問也니라 凶問 至鄴하니 群臣 聚哭하여 無復行列注+謂班行序列, 不按舊儀.이어늘
太子中庶子司馬孚 厲聲於朝曰注+續漢志 “太子中庶子, 秩六百石, 職如侍中.” 君王 晏駕 天下震動하니 當早拜嗣君하여 以鎭萬國이어늘 而但哭邪아하고
乃罷群臣하고 備禁衛하여 治喪事하니 懿之弟也
群臣 以爲太子卽位 當俟詔命注+謂須待漢帝詔命也.이라한대 尙書陳矯曰 王薨于外 愛子在側하니 彼此生變이면 則社稷危注+愛子, 謂彰也. 一說 “愛子, 謂植也, 操嘗欲立植爲嗣, 故曰愛子.”라하고
乃具官備禮하여 一夕而辦하고 明旦 以王后令으로 策太子하여 卽王位하고 大赦러라
帝尋遣御史大夫華歆하여 奉策詔하여 授丞相印綬, 魏王璽綬하고 領冀州牧하니 尊王后曰 王太后라하고 葬武王于高陵注+魏王操謚曰武. 高陵, 在鄴城西.하다
二月朔 日食하다
◑魏以賈詡爲太尉하고 華歆爲相國하고 王朗爲御史大夫하다
丕遣其弟皆就國하니 臨菑監國謁者 希指하여 奏臨菑侯植 醉酒悖慢하고 劫脅使者注+監國謁者, 官名. 時禁切藩侯, 使謁者監其國.라한대 丕貶植爲安鄕侯하고 誅其黨丁儀, 丁廙하고 幷其男口注+幷男口誅之, 絶其世也.하다
注+謂左右中尙方‧中黃‧左右藏‧左校‧甄官‧奚官‧黃門‧掖庭‧永巷‧御府‧鉤盾‧中藏府‧內者等署也.하다
作金策하여 藏之石室하다
魏立九品法하고 置州郡中正하다
尙書陳群 以天朝選用 不盡人才注+天朝, 謂漢朝也.라하여 乃立九品官人之法하고 州郡 皆置中正하고 擇有識鑑者爲之하여 區別人物하여 第其高下注+九品中正, 自此始. 九品, 上上‧上中‧上下‧中上‧中中‧中下‧下上‧下中‧下下也. 定爲九等, 或以五升四, 以六升五, 或自五退六, 自六退七. 中正, 官名.하다
丕至譙하여 大饗六軍及譙父老하고 設伎樂百戲하니 吏民 上壽하여 日夕而罷하다
孫盛曰 三年之喪 自天子達于庶人하니 雖三季之末, 七雄之敝라도 未之有廢也注+三季, 謂夏‧商‧周之季也. 七雄, 謂戰國時秦‧韓‧魏‧趙‧燕‧齊‧楚七國也.러니
逮于漢文하여 變易古制하여 人道之紀 一旦而廢하니 固已道薄當年하고 風頹百代矣
魏王 處哀而設宴樂하고 居始而墮化基注+墮, 讀曰隳.하고 及至受禪 顯納二女 是以 知王齡之不遐 世之期促也注+齡, 音靈, 年也.하니라
漢中將孟達 以上庸降魏하다
益州將軍孟達 屯上庸이러니 與副軍中郞將劉封으로 不協하여 率部曲降魏하니
有容止才觀注+觀, 音貫. 才觀, 謂才性俊爽, 有可觀者.이라 曹丕愛之하여 引與同輦하고 合房陵, 上庸, 西城하여 爲新城郡하고 以達爲太守注+西城縣, 屬漢中郡, 劉備分爲郡.하다
劉曄曰 達 有苟得之心而恃才好術하니 必不能感恩懷義 新城 與孫, 劉接連注+蜀之漢中, 吳之宜都, 皆與新城接連.하니 若有變態 爲國生患注+爲, 去聲.이리이다
丕不聽하고 遣將軍夏侯尙, 徐晃하여 與達襲封하니 敗走하여 還成都注+尙, 淵從子也.하다
本寇氏之子 漢中王備 至荊州하여 以未有嗣 養以爲子러니
諸葛亮 慮其剛猛하여 易世之後 終難制御라하여 勸備因此除之한대 遂賜死하다
天下初定하여 刺史多不能攝郡注+攝, 摠錄也.이라 逵曰 州本以六條詔書 察二千石以下注+擧漢制也.
其狀 皆言嚴能鷹揚하여 有督察之才하고 不言安靜寬仁하여 有愷悌之德也하니이다
今長吏慢法하고 盜賊公行하니 州知而不糾 天下復何取正乎잇가하고
其二千石以下阿縱不如法者 皆奏免之하고 外修軍旅하고 內治民事하여 興陂田하고 通運渠하니 吏民 稱之
曹丕曰 眞刺史矣라하고 布告天下하고 賜爵關內侯하다
左中郞將李伏 太史丞許芝 言魏當代漢 見於圖緯注+據獻帝傳, 李伏引孔子玉板, 許芝引春秋漢含孶‧玉板讖‧佐助期‧孝經中黃讖‧易運期讖.라하니 魏之群臣 因表勸丕簒位注+時勸進者, 辛毗‧劉曄‧傅巽‧衛臻‧桓階‧陳矯‧陳群‧蘇林‧董巴. 繼之者, 司馬懿‧鄭渾‧(李)[羊]秘‧鮑勛.하다
至是하여 帝乃告祠高廟하고 遣使持節奉璽綬하여 詔策禪位于魏하니
魏王丕上書三讓하고 乃爲壇於繁陽注+時南巡至潁川潁陰縣, 築壇於曲蠡之繁陽亭.하여 升受璽綬하여 卽皇帝位하고 燎祭天地하고 改元黃初하고 奉漢帝爲山陽公하여 用天子禮樂注+山陽縣, 屬河內郡.하다
追尊武王曰 武皇帝라하고 廟號太祖하고 尊王太后曰 皇太后라하다 改相國爲司徒하고 御史大夫爲司空注+漢獻帝建安十三年, 罷三公官, 今復舊.하다
山陽公 奉二女하여 以嬪于魏하다 魏主丕欲改正朔이어늘 辛毗曰 孔子曰 行夏之時라하시고
左氏曰 夏數得天이라하니 何必期於相反이니잇고 丕從之하다
○魏主丕欲追封太后父母어늘 陳群曰 創業革制 當爲後式이니 按禮典 婦因夫爵이요 無分土命爵之制注+禮記 “婦人無爵, 從夫之爵.”
秦違古法이어늘 漢氏因之하니 非先王令典也니이다 丕曰 尙書議是라하고 其著定制하여 藏之臺閣注+臺閣, 尙書中藏故事之處.하다
○魏主丕謂侍中蘇則曰 西域 前獻徑寸大珠하니 可復求市得不注+不, 讀曰否.
對曰 若化洽中國하고 德流沙漠이면 卽不求自至리니 求而得之 不足貴也니이다 丕嘿然이러라
○魏主丕召蔣濟하여 爲散騎常侍注+散騎常侍, 秦官也. 秦置散騎, 又置中常侍. 散騎, 騎從乘輿車後, 中常侍, 得入禁中, 皆以爲加官. 漢東京初, 省散騎, 而中常侍用宦者. 至是, 初置散騎, 合之於中常侍, 爲一官, 曰散騎常侍. 掌規諫, 不典事, 貂璫揷右, 騎而散從, 後遂爲顯職. 散騎侍郞, 自魏至晉, 與散騎常侍‧侍中‧黃門侍郞, 共平尙書奏事, 江左乃罷.러니 有詔하여 賜征南將軍夏侯尙曰 卿 腹心重將이라 特當任使 作威作福하여 殺人活人하라
以示濟러니 濟至 丕問以所聞見한대 對曰 未有他善이요 但見亡國之語耳로이다
丕忿然問其故어늘 濟具以答하고 因曰 作威作福 書之明誡 天子 無戲言하니 惟陛下 察之하소서 丕卽遣追取前詔하다
十二月 魏主丕如洛陽하여 營宮室하다
◑魏徙冀州士卒家하여 實河南하다
魏主丕欲徙冀州士卒家十萬戶하여 實河南注+時營洛陽, 故欲徙冀州士卒家以實之.하다 旱蝗民饑 群司以爲不可로되 而丕意甚盛이러니
侍中辛毗求見注+見, 賢遍切.한대 丕作色待之曰 卿 謂徙民非邪 毗曰 誠以爲非로이다
丕曰 吾不與卿議호리라 毗曰 陛下置臣謀議之官하시니 安得不與臣議注+侍中在天子左右, 備切問近對, 拾遺補闕.니잇고 臣所言 非私 乃社稷之慮也 安得怒臣이니잇고
丕不答하고 入內어늘 毗隨引其裾하니 丕奮衣而去러니 良久 乃出하여 曰 佐治 持我何太急邪注+佐治, 毗字.
毗曰 今徙 旣失民心이요 又無以食하여 必將爲寇故 臣不敢不力爭注+食, 音嗣.이로이다 丕乃徙其半하다
丕嘗出射雉하고 顧群臣하고 曰 樂哉로다 毗曰 於陛下 甚樂이나 於群臣 甚苦라한대 丕默然이러니 後爲之稀出注+爲, 去聲.이러라


庚子年(220)
나라 孝獻皇帝 建安 25년이다.
나라 文帝 曹丕 黃初 원년이다.注+나라가 나라의 禪讓을 받으니, 이해에 僭國(혼란한 시기에 帝位를 찬탈하거나 지역에 웅거한 나라)이 하나이다.
】 봄 정월에 丞相 冀州牧 魏王 曹操洛陽에 돌아와 하니, 太子 曹丕가 즉위하고 스스로 승상 기주목이 되었다.
曹操는 사람을 잘 알아보고 잘 살펴서 거짓으로 현혹시키기가 어려웠고,注+은 눈에 일정한 초점이 없는 것이니, “難眩以僞”는 사람들이 그의 눈 밝음을 어지럽히지 못함을 이른다. 기이한 재주가 있는 사람을 알아보고 발탁하여 신분의 미천함을 구애하지 않았으며, 재능에 따라 맡기고 부려서 모두 그 쓰임을 얻었다.
과 대진할 적에는 意思가 편안하고 한가하여 마치 싸우지 않을 것처럼 하다가도 기회를 얻어 의사를 결정하고 勝機를 잡음에 미쳐서는 氣勢가 가득히 넘쳤다.注+(진형)은 으로 읽는다.
공로가 있어 마땅히 상을 주어야 할 경우에는 천금을 아끼지 않았고 공이 없으면서 상을 바라는 경우에는 털끝만큼도 주지 않았다.注+(베풀다)는 去聲이다.
법을 적용함이 준엄하고 급하여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여서 혹은 그를 마주하고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으나 끝내 사면하는 바가 없었고, 평소 성품이 절약하고 검소하여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았다.注+는 평소이다.
그러므로 능히 群雄들을 제거하여 거의 海內를 평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였다.
太子 曹丕鄴城에 있었는데, 鄢陵侯 曹彰長安에서 달려와 옥새와 인끈이 있는 곳을 물었다.注+曹操漢中에서 회군하여 동쪽으로 오자 曹彰代郡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가서 조조를 맞이하니, 조조는 인하여 조창을 長安에 남겨두었다.
諫議大夫 賈逵正色하며 말하기를 “나라에 태자가 있으니, 先王의 옥새와 인끈은 君侯가 물어야 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부음이 업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들이 모여 하여 다시는 행렬을 이루지 못하였다.注+〈“無復行列”은〉 반열과 행렬이 옛 의식을 따르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太子中庶子司馬孚가 조정에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注+에 “太子中庶子六百石으로, 직책이 侍中과 같다.” 하였다.君王逝去함에 天下가 진동하니, 마땅히 일찍 嗣君을 세워서 萬國을 진정시켜야 하는데, 곡만 하고 있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신하들을 해산시키고 禁衛를 갖추어 初喪을 치르게 하였다. 사마부는 司馬懿의 아우이다.
】 여러 신하들은 太子가 즉위할 적에 마땅히 황제의 詔命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는데,注+〈“當俟詔命”은〉 나라 황제의 詔命을 기다려야 함을 이른다. 尙書 陳矯가 말하기를 “왕이 外地에서 별세하였는데 사랑하는 아들이 옆에 있으니, 피차에 변란이 생기면 社稷이 위태롭게 된다.”注+愛子”는 曹彰을 이른다. 일설에 “‘愛子’는 曹植을 이르니, 曹操가 일찍이 조식을 後嗣로 세우고자 하였으므로 그를 ‘愛子’라 했다.” 하였다. 하고,
마침내 관원을 구비하고 를 갖추어서 하룻저녁에 즉위식 준비를 마치고, 다음 날 아침 왕후의 명령으로 태자를 책봉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고 大赦를 행하였다.
얼마 후 황제가 御史大夫 華歆을 보내어 책서와 詔令을 받들어 丞相印綬魏王의 옥새와 인끈을 曹丕에게 주고 冀州牧을 겸하게 하니, 王后를 높여 王太后라 하고 武王(曹操)을 高陵에 장례하였다.注+魏王 曹操라고 시호하였다. 高陵鄴城 서쪽에 있다.
】 2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나라는 賈詡太尉로 삼고 華歆相國으로 삼고 王朗御史大夫로 삼았다.
魏王 曹丕가 그 아우 鄢陵侯 曹彰 등을 내보내어 모두 封國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曹丕가 그의 아우들을 내보내어 모두 封國으로 나아가게 하니, 臨菑 監國謁者가 왕의 뜻에 영합해서 臨菑侯 曹植이 술에 취하여 무례하고 거만하며 使者를 협박했다고 아뢰었다.注+監國謁者官名이다. 이때 藩國의 제후들을 통제하여 謁者로 하여금 그들의 나라를 감독하게 하였다. 조비는 조식을 폄하하여 安鄕侯로 삼고 그의 丁儀丁廙(정이)를 주살하고 이들의 남자 식구까지 아울러 죽였다.注+남자 식구까지 아울러 죽인 것은 그 대를 끊으려는 것이다.
나라에서 법을 세워 지금부터 宦官들은 관직이 여러 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注+〈“諸署”는〉 左尙方, 右尙方, 中尙方, 中黃, 左藏, 右藏, 左校, 甄官, 奚官, 黃門, 掖庭, 永巷, 御府, 鉤盾, 中藏府, 內者 등의 관서를 이른다.
金策을 만들어서 石室에 보관하였다.
尙書 陳群天朝(나라 조정)에서 人才를 선발하여 등용한 것이 인재를 발굴함에 미진했다 하여注+天朝나라 조정을 이른다. 마침내 九品으로 任官하는 법(九品官人法)을 세우고 州郡에 모두 中正官을 설치하고는 지식과 안목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중정관으로 삼아서 인물을 구별하여 그 高下를 차등하게 하였다.注+九品中正制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九品上上, 上中, 上下中上, 中中, 中下下上, 下中, 下下이다. 이것을 정하여 아홉 등급으로 만들고는 혹 5품에서 4품으로 승진하고 6품에서 5품으로 승진하였으며, 혹은 5품에서 6품으로 물러나고 6품에서 7품으로 물러났다. 中正官名이다.
】 여름 6월에 魏王 曹丕가 남쪽으로 순행하다가 譙縣(초현)에 이르러 軍士父老들에게 크게 연향을 베풀었다.
曹丕譙縣에 이르러 六軍과 초현의 父老들에게 크게 연향을 베풀고 伎樂(妓女들이 연주하는 歌舞)과 온갖 놀이를 베푸니, 관리와 백성들이 上壽하여 날이 저물어서야 파하였다.
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부모의 삼년상은 天子로부터 庶人에 공통되니, 비록 三季의 말엽과 七雄의 쇠망한 즈음에도 이것을 폐한 적이 있지 않았다.注+三季”는 , , 의 말세를 이른다. “七雄”은 戰國時代, , , , , , 의 일곱 나라를 이른다.
그런데 진실로 이미 는 당시에 박해지고 풍속은 百代에 무너졌다.
魏王喪中에 있으면서 宴樂(연락)을 베풀고 처음 즉위하여 교화의 기틀을 무너뜨렸으며,注+(무너지다)는 로 읽는다. 禪讓을 받자 공공연히 황제의 두 딸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왕의 수명이 길지 못하고 國運이 짧을 것임을 알 수 있다.”注+은 음이 이니, 해(나이)이다.
漢中의 장수 孟達上庸을 가지고 나라에 항복하였다.
益州將軍 孟達上庸에 주둔해 있었는데, 副軍 中郞將 劉封不和하여 을 거느리고 나라에 항복하였다.
맹달은 행동거지와 볼만한 재주가 있으니,注+은 음이 이니, “才觀”은 재주가 준걸스러워 볼만한 점이 있음을 이른다. 曹丕가 그를 사랑하여 함께 (연)을 탔으며 房陵上庸, 西城을 합쳐서 新城郡을 만들고는 맹달을 新城太守로 삼았다.注+西城縣漢中郡에 속하였으니, 劉備가 나누어 을 만들었다.
劉曄이 말하기를 “맹달은 구차히 벼슬을 얻으려는 마음이 있으며 재주를 믿고 술수를 좋아하니, 반드시 은혜에 감사하고 의리를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성군은 孫權劉備의 나라와 연접해 있으니,注+蜀漢漢中나라의 宜都가 모두 新城과 연접해 있다. 만약 변란의 사태가 있게 되면 국가에 환란이 될 것입니다.”注+(위하다, 향하다)는 去聲이다. 하였으나,
조비는 듣지 않고 장군 夏侯尙徐晃을 보내어 맹달과 함께 劉封을 기습하게 하니, 유봉이 敗走하여 成都로 돌아갔다.注+夏侯尙夏侯淵從子이다.
劉封은 본래 寇氏의 아들인데, 漢中王 劉備荊州에 이르러 아직 後嗣가 있지 않았으므로 양자로 맞아들였다.
諸葛亮이 그의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 바뀐 뒤에 끝내 제어하기가 어려울 것을 염려해서 유비에게 이 기회에 제거할 것을 권하자, 마침내 그를 賜死하였다.
賈逵豫州刺史로 삼았다.
】 이때 천하가 막 평정되어서 刺史들이 대부분 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注+은 총괄하여 통솔함이다. 이에 賈逵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는 본래 二千石(太守國相) 이하의 관리를 규찰하였습니다.注+〈“州本以六條詔書 察二千石以下”는〉 나라 제도를 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글에 모두 ‘엄하고 현능하고 매처럼 용맹하여 督察하는 재주가 있다.’라고 말하고, ‘안정되고 너그럽고 인자하여 愷悌하는 덕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長吏들이 법을 태만히 하고 도적들이 공공연히 통행하는데, 에서 이것을 알면서도 규찰하지 않는다면 천하가 다시 어느 곳에서 바름을 취하겠습니까.”
가규는 이천석 이하로서 아부하고 방종하여 법대로 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아뢰어 면직시키고, 밖으로 軍政을 닦고 안으로 백성들의 일을 다스려서 저수지와 못을 만들고 漕運하는 물길을 개통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曹丕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자사이다.” 하고는 천하에 布告하고 關內侯의 관작을 하사하였다.
】 겨울 10월에 魏王 曹丕皇帝를 칭하고, 獻帝를 폐하여 山陽公으로 삼았다.
獻帝를 폐위하고 曹丕가 漢나라를 찬탈하다獻帝를 폐위하고 曹丕가 漢나라를 찬탈하다
左中郞將 李伏太史丞 許芝가, 나라가 마땅히 나라를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圖讖緯書에 보인다고 말하니,注+을 인용하고, 許芝는 ≪春秋≫의 緯書인 ≪漢含孶≫, ≪玉板讖≫, ≪佐助期≫와 ≪孝經≫의 위서인 ≪中黃讖≫과 ≪易經≫의 위서인 ≪運期讖≫을 인용하였다. 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인하여 표문을 올려서 曹丕에게 황제의 지위를 찬탈할 것을 권하였다.注+이때 魏主 曹丕에게 황제의 지위에 오르라고 권한 자는 辛毗, 劉曄, 傅巽, 衛臻, 桓階, 陳矯, 陳群, 蘇林, 董巴이고, 뒤를 이은 자는 司馬懿, 鄭渾, , 鮑勛이다.
이때에 이르러 황제가 마침내 高皇帝(劉邦)의 사당에 고하여 제사하고는 使者를 보내어 符節을 가지고 가서 자신의 옥새와 인끈을 魏王에게 주고서 詔策을 내려 나라에 황제의 지위를 禪讓하였다.
위왕 조비가 글을 올려 세 번 사양하고 마침내 繁陽을 만들고서注+이때 曹丕가 남쪽으로 순행하여 潁川潁陰縣에 이르러 曲蠡繁陽亭을 쌓았다. 단에 올라가 황제의 옥새와 인끈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불을 피워 하늘과 땅에 제사하고 黃初라고 改元하였으며, 나라 황제를 받들어 山陽公이라 하여 천자의 禮樂을 사용하게 하였다.注+山陽縣河內郡에 속하였다.
魏 文帝魏 文帝
武王(曹操)을 追尊하여 武皇帝라 하고 廟號太祖라 하였으며 王太后를 높여 皇太后라 하였다. 相國을 고쳐 司徒라 하고, 御史大夫司空이라 하였다.注+〈“改相國爲司徒 御史大夫爲司空”은〉 나라 獻帝 建安 13년(208)에 三公의 관직을 혁파하였는데, 이제 옛 제도를 회복한 것이다.
山陽公이 두 딸을 받들어 나라에 시집보냈다. 魏主 曹丕正朔을 고치고자 하였는데, 辛毗가 말하기를 “
어찌 굳이 서로 반대되는 것을 기약하십니까.” 하니, 조비가 그의 말을 따랐다.
魏主 曹丕太后의 부모를 追封하고자 하자, 陳群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창업하여 제도를 고칠 적에는 마땅히 후일의 법식이 되어야 합니다. 禮典을 살펴보면 부인은 남편의 작위를 따르고 땅을 나누고 작위를 명하는 제도가 없습니다.注+禮記≫ 〈郊特牲〉에 “부인은 작위가 없어서 남편의 작위를 따른다.” 하였다.
나라가 옛법을 어겼는데 나라가 이것을 인습하였으니, 先王의 훌륭한 법이 아닙니다.” 조비가 말하기를 “尙書의 의논이 옳다.”고 하고, 이에 일정한 제도를 만들어서 臺閣에 보관하였다.注+臺閣尙書臺 가운데 옛 전고를 보관하는 곳이다.
魏主 曹丕侍中 蘇則(소칙)에게 이르기를 “西域이 지난번에 지름이 한 치가 되는 큰 진주를 바쳤으니, 다시 구하여 얻을 수 있겠는가?”注+로 읽는다. 하자,
소칙이 대답하기를 “만약 교화가 中國에 흡족하고 沙漠에까지 미친다면 구하지 않아도 절로 이를 것이니, 구하여 얻는 것은 귀하게 여길 것이 못 됩니다.” 하니, 조비는 묵묵히 말을 하지 않았다.
魏主 曹丕蔣濟를 불러 散騎常侍로 삼았는데,注+散騎常侍나라의 관직이니, 나라는 散騎를 두고 또 中常侍를 두었는바, 산기는 乘輿車의 뒤에서 말을 타고 황제를 수행하였으며 중상시는 궁중을 출입하였는데, 모두 加官(겸직)으로 삼았다. 나라는 東京(東漢) 초기에 산기를 없애고 중상시를 宦官으로 등용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처음으로 산기를 설치하여 중상시와 합쳐서 한 관직을 만들고 散騎常侍라 칭하였는데, 산기상시는 規諫을 관장하고 일반적인 사무는 맡지 않았다. 貂璫(담비 꼬리와 金銀으로 만든 의 장식)을 오른쪽에 꽂고 말을 타고 흩어져 수행하였는데, 뒤에는 마침내 현달한 관직이 되었다. 散騎侍郞나라로부터 나라에 이르기까지 散騎常侍, 侍中, 黃門侍郞과 함께 尙書에서 아뢰는 일을 함께 처리하였는데, 江左(東晉)에서는 마침내 혁파하였다. 이때에 詔令을 내어 征南將軍 夏侯尙에게 글을 하사하기를 “心腹의 중요한 장수이다. 내가 특별히 맡기고 부려야 하니, 위엄을 만들고 복을 만들어서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살리라.” 하니,
하후상이 이것을 장제에게 보였다. 장제가 도성에 이르자 조비가 그에게 듣고 본 바가 무엇인지를 물으니, 장제가 대답하기를 “다른 좋은 일은 있지 않고, 다만 나라를 망칠 말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조비가 분노하여 그 이유를 묻자, 장제가 자세히 답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 천자는 희롱하는 말이 없으니, 바라건대 陛下는 살피소서.” 하였다. 조비는 즉시 사람을 하후상에게 보내어 예전에 내린 詔令을 거둬오게 하였다.
】 12월에 魏主 曹丕洛陽에 가서 宮室을 경영하였다.
나라가 冀州士卒家屬을 옮겨 河南을 채웠다.
魏主 曹丕冀州士卒의 가속 10만 를 옮겨 河南(洛陽)을 채우고자 하였다.注+이때 洛陽을 경영하였으므로 冀州士卒의 가속을 옮겨 〈河南에〉 채우고자 한 것이다. 이때 旱害蟲害로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百官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조비의 뜻이 매우 완강하였다.
侍中 辛毗가 뵙기를 청하자,注+(뵙다)은 賢遍이다. 조비가 얼굴빛을 바꾸고 그를 대하여 말하기를 “은 백성을 옮기는 것이 잘못이라고 여기는가?” 하니, 신비가 말하기를 “진실로 잘못이라고 여깁니다.” 하였다.
조비가 말하기를 “내 과 상의하지 않겠다.” 하니, 신비가 말하기를 “陛下께서 신을 謀議하는 관직에 두셨는데, 어찌 신과 상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注+侍中은 천자의 좌우에 있으면서 간절히 묻고 가까운 곳에서 대답하여 황제의 잘못을 바로잡고 보좌하는 일에 충임되었다. 신이 말하는 것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고 바로 社稷을 염려하는 것인데, 어찌 신을 노여워하실 수 있습니까.” 하였다.
조비가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자 신비가 뒤따라가서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니, 조비는 옷을 떨치고 떠나갔다가 한참 뒤에야 비로소 나와서 말하기를 “佐治야, 은 나를 어쩌면 이리도 급하게 압박하는가.”注+佐治辛毗의 자이다. 하였다.
신비가 말하기를 “지금 백성들을 옮긴다면 民心을 잃게 되고 또 백성들을 제대로 먹일 수 없어서 굶주린 백성들이 반드시 도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감히 강력히 간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注+(먹이다)는 음이 이다. 하니, 조비는 마침내 그중의 절반만을 하남으로 옮겼다.
曹丕가 일찍이 사냥하러 나가서 꿩을 쏘아 잡고는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즐겁다.” 하니, 辛毗가 말하기를 “陛下에게는 매우 즐거운 일이나, 여러 신하들에게는 매우 괴롭습니다.” 하였다. 조비는 묵묵히 있었는데, 뒤에는 이 때문에 사냥을 나가는 것이 드물었다.注+(때문에)는 去聲이다.


역주
역주1 五德의……것이다 : 오덕은 五行의 德으로, 옛날에는 나라마다 오행 가운데 숭상하는 덕이 있어서, 이를 火德이니 土德이니 하였는바, 漢나라는 화덕으로 왕 노릇 하고 赤色을 숭상하였다. 이는 오행에 있어 木은 靑色, 火는 赤色, 金은 白色, 水는 黑色, 土는 黃色이며, 五行相生에 火가 土를 낳으므로 魏나라가 漢나라의 뒤를 이었다 하여 황색을 사용하고 연호를 黃初라 한 것이다.
역주2 丞相……冀州牧 : 賀善의 贊에 말하였다. “曹操가 군대를 일으킨 이래로 ≪資治通鑑綱目≫에서 쓴 것이 무려 8, 90가지 일인데, 일찍이 한 마디 말도 조조를 인정한 적이 있지 않다. 그가 처음 여러 장수들과 동맹할 적에는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여 돌아왔다.’고 썼고, 관직을 올렸을 적에는 兗州牧 이외에는 ‘自稱’, ‘自爲’, ‘自領’이라고 쓴 것이 모두 6번이고, 지위를 올리고 작위를 올렸을 적에도 모두 ‘自進’이라고 글을 썼으며, 또 ‘贊拜할 적에 이름을 부르지 않고 入朝할 적에 종종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劍과 가죽신을 착용하고 殿上에 오르게 하였다.’고 썼고, 또 ‘천자의 수레와 의복을 사용하고 나가고 들어올 적에 警蹕했다.’고 썼으니, 이는 모두 조조를 罪責한 것이다. 그가 군대를 가하여 공격한 대상이 비록 황제를 참칭한 袁術이고 ‘배반했다[叛]’라고 쓴 張繡와 高幹이고 ‘반란했다[反]’라고 쓴 馬超와 韓遂였지만 또한 조조가 ‘공격했다[擊]’라고 썼을 뿐이었는데, 劉備와 耿紀에 이르러서는 ‘조조를 토벌했다.’고 썼으며, 또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고 4번 썼고 ‘황제를 옮겼다.’고 1번 썼으며 ‘皇后를 시해하였다.’고 1번 썼으니, 조조를 미워함이 심하다. 이때 조조가 卒함에 관직을 쓰고 작위를 쓰고 姓을 쓰기를 鄧禹와 똑같게 하였으니, 이는 그를 인정한 것이 아니고 그의 죽음을 요행으로 여긴 것이다. 만일 조조가 죽지 않았으면 반드시 장차 크게 신하 노릇 하지 않았다고 끝마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兩漢의 여러 신하가 卒하였을 적에 관직과 작위와 姓을 구비한 자가 16명이니(蕭何, 曹參, 陳平, 霍去病, 衛靑, 金日磾, 霍光, 張安世, 魏相, 丙吉, 卓茂, 祭遵, 馮異, 吳漢, 鄧禹, 楊賜) 모두 찬미한 것인데, 조조는 여기에 포함되지 못한 것이다.[賀善贊曰 操自兵興以來 綱目所書 無慮八九十事 未嘗有一語予之 其始與諸將同盟也 書戰不克還 其遷官也 自兗州牧外 書自稱自爲自領者凡六 進位進爵 亦皆以自進爲文 又書贊拜不名 入朝不趨 劍履上殿 又書用天子車服 出入警蹕 皆罪之也 其所加兵 雖袁術僭帝 張繡高幹書叛 馬超韓遂書反 亦止書擊 至劉備耿紀 則以討操書 而又四書殺無罪 一書遷帝 一書弑皇后 其惡操也甚矣 於是而卒 書官書爵書姓 如鄧禹 非予之也 幸之也 使操不死 必將大以不臣終矣 故兩漢諸臣卒 官爵姓具者 十有六(蕭何 曹參 陳平 霍去病 衛靑 金日磾 霍光 張安世 魏相 丙吉 卓茂 祭遵 馮異 吳漢 鄧禹 楊賜)皆美也 操不與焉]” ≪書法≫
역주3 (口)[曰] : 저본에는 ‘口’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曰’로 바로잡았다.
역주4 續漢志 : 晉나라 때의 司馬彪가 지은 ≪續漢書≫의 八志 중에 하나이다. 南朝 宋나라 때에 范曄이 지은 ≪後漢書≫가 세상에 유통되자 사람들은 이미 나와 있던 ≪속한서≫를 점차 읽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후한서≫는 범엽이 彭城王의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처형되면서 志 부분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 후 北宋 때에 이르러 ≪속한서≫의 八志, 즉 〈律曆志〉, 〈禮儀志〉, 〈祭祀志〉, 〈天文志〉, 〈五行志〉, 〈郡國志〉, 〈百官志〉, 〈輿服志〉를 ≪후한서≫에 합하여 간행함으로써 ≪후한서≫에 없었던 志를 보충하였는바, 이것이 바로 현전하는 ≪후한서≫가 되었다.
역주5 魏王丕遣其弟鄢陵侯彰等 皆就國 : “鄢陵侯는 누구인가. 漢나라에서 봉한 것이다. 漢나라에서 봉했으면 漢나라에서 보내어 封國으로 나아가게 하면 되는데, ‘魏王 曹丕가 보냈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사사롭게(제멋대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형제간에 우애하는 의리가 박한 것이 조비보다 더 심한 자가 없으므로 곧바로 ‘魏王 曹丕가 그 아우를 내보냈다.’라고 쓴 것이다.[鄢陵侯 何 漢所封也 漢所封 則漢遣就國爾 書魏王丕遣 何 私也 友于義薄 莫甚於曹丕者矣 故直書曰魏王丕遣其弟]” ≪書法≫
역주6 魏立法 自今宦者官不得過諸署令 : “≪資治通鑑綱目≫에서 魏나라를 미워함이 심하였다. 그런데 ‘법을 세웠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비난한 것이다. 어찌하여 비난하였는가. 天子가 아니면 制度를 만들지 못하는데, 曹丕는 왕을 세습했을 뿐인데도 제 마음대로 법을 세웠으므로 ‘법을 세웠다.’고 써서 비난한 것이다. 그러나 비난은 하였지만 이것은 좋은 법이다. ≪자치통감강목≫에서는 宦官의 화를 징계하여, 좋은 법이 있으면 반드시 삼가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中書官을 파하고 尙書의 인원을 5명을 增置하였을 때에 썼고(成帝 建始 4년(B.C.29)), 公卿의 子弟들이 宦官에 보임되는 것을 제거했을 때에 썼고(靈帝 中平 6년(189)), 환관들이 여러 署의 令을 넘지 못하게 했을 때에 썼고(이해), 환관에게 명하여 紗縠과 綾羅를 입지 못하게 했을 때에 썼다.(唐 文宗 太和 3년(829))[綱目 惡魏甚矣 書立法 何 譏也 何譏焉 非天子 不制度 丕襲王耳 而專立法 故書譏之 雖然 是良法也 綱目懲閹竪之禍 有良法 必謹錄之 故罷中書官 置尙書員五人 書(成帝建始四年) 除公卿子弟補宦官 書(靈帝中平六年) 宦者不得過諸署令 書(是年) 命宦官毋得衣紗縠綾羅 書(唐文宗太和三年)]” ≪書法≫
역주7 魏나라에서……설치하였다 : 이는 九品官人法 또는 九品中正制라 불리는 관리 등용제도이다. 漢나라의 秩石制에 의한 관직의 등급을 1品에서 9품까지의 官品으로 재편성하고서 郡國에 中正官을 설치하고 이들에게 현 관료들과 仕官 대상자들의 자질을 심사하게 하였다. 이 제도는 처음에 漢나라 관료를 평가하여 魏나라 관료로 재편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현임자들에 대한 평가가 아닌 신임관을 주 대상으로 하였다. 중정관이 관내 인물들을 1품에서 9품까지 등급을 매겼는데, 이를 鄕品이라고 한다. 초임관을 起家官이라 하는데, 기가관은 향품보다 4등급 낮추어 그에 해당하는 관품의 관직을 부여받았다. 魏나라 말기 司馬懿의 건의에 따라 州에 中正을 두게 되어 향품의 결정권이 점차 중앙으로 집중되었다.(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岩波書店)
역주8 魏王丕南巡至譙……大饗軍士父老 : “천자가 제후국에 가는 것을 巡狩라 한다. 曹丕는 왕을 세습했을 뿐인데, ‘남쪽으로 순행했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魏나라는 曹操로부터 천자의 수레와 의복을 사용하고 출입할 때 警蹕을 하여 스스로 황제 노릇을 한 것이 오래되었으니, 인하여 이것을 기록한 것은 그의 悖惡을 드러낸 것이다. 더구나 온갖 놀이와 伎樂을 베풀어서 죽은 부친(曹操)에게 1년 동안의 사랑도 없었음에랴. ‘大饗’이라고 쓴 것은 심히 비난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大饗軍士’라고 쓴 것이 3번이다.(光武帝 建武 13년(37)에 장병들에게 크게 연향을 베풀었고, 이해와 晉나라 成帝 咸和 7년(332)에 趙나라가 여러 신하들에게 크게 연향을 베풀었다.)[天子適諸侯曰巡狩 丕襲王耳 其書南巡 何 魏自曹操 而用天子車服 出入警蹕 其自帝久矣 因而錄之 所以著其悖也 況設百戲伎樂 無一年之愛於其父乎 書大饗 甚譏之 終綱目 書大饗軍士三(光武建武十三年 大饗將士 是年 晉成帝咸和七年 趙大饗群臣)]” ≪書法≫
역주9 孫盛 : ?~? 晉나라의 史學家로 자는 安國이며, 山西省 太原 사람이다. 浙江省 會稽의 淸談界에서 이름이 알려져 佐著作郞을 거쳐 秘書監까지 승진하였다. ≪魏氏春秋≫, ≪晉陽秋≫ 외에 詩賦와 논문 수십 편을 저술하였는데, 晉나라의 역사서인 ≪진양추≫ 31권은 당시 良史라 불렸으나, 산일되어 전하지 않는다.
역주10 漢나라……황폐해지니 : 漢 文帝가 喪期를 단축한 일을 가리킨 것이다.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3권 하 漢 文帝 後7년(B.C.157) 綱에 “여름 6월에 황제가 붕하였는데, 遺詔를 내려 喪期를 단축하게 하였다.”라고 보이며, 目에 “천하의 관리와 백성들로 하여금 臨哭한 지 3일에 모두 상복을 벗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제사 지내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지 말며, 궁중 가운데에 마땅히 임곡해야 할 자는 아침저녁으로 모두 15번만 슬피 곡하고, 下棺한 뒤에는 大功服은 15일, 小功服은 14일, 가는 삼베옷을 입는 緦痲服은 7일을 입고서 服을 벗도록 하라.”라는 詔令이 보인다.
역주11 (十)[卜] : 저본에는 ‘十’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卜’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2 部曲 : 원래 군대의 편제를 지칭하는 말로 部 아래 曲을 두고 曲 아래 屯을 두었다. 이것이 군대나 부하를 뜻하는 말로도 쓰이게 되었다. 특히 後漢 末과 삼국시대에 장군이나 호족의 사적 예속성을 띤 무장세력을 지칭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그들의 예속민까지 지칭하게 되었다. 또한 이를 良賤制의 입장에서 南北朝時代를 거쳐 일반 民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賤民의 일종으로 바라보는 견해가 있다.(辛聖坤, 〈魏晉南北朝時期 部曲에 대한 再考察〉, ≪東洋史學硏究≫ 40, 1992)
역주13 以賈逵爲豫州刺史 : “아울러 州牧을 설치한 이래로(靈帝 中平 5년(188)) 刺史를 쓴 것이 17번인데, 직책을 잘 수행했다고 쓴 것은 앞에서는 梁習을 썼고 여기에는 賈逵를 썼고 뒤에서는 徐邈을 썼으니, 세 사람뿐이다.[自兼置州牧以來(靈帝中平五年) 書刺史十有七 以稱職書者 前書梁習 此書賈逵 後書徐邈 三人而已耳]” ≪書法≫
역주14 六條詔書 : 漢 武帝는 ≪書經≫ 〈虞書 禹貢〉과 ≪周禮≫ 〈職方〉에 의거하여 京畿 지역을 제외한 전국을 13州로 나누고 주마다 직접 임명한 刺史 1인을 두었는데, 이때 반포한 여섯 조항의 조서를 이른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①지방의 土豪들이 田宅을 겸병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것, ②二千石이 조서를 받들지 않고 私益을 취하는 것, ③이천석이 獄事를 분명하게 결단하지 않고 무고한 백성을 처형하는 것, ④이천석이 부속 관리의 임명을 공평하게 하지 않는 것, ⑤이천석의 子弟가 부형을 믿고 권세를 부리는 것, ⑥이천석이 公을 저버리고 豪強을 비호하고 뇌물을 주고받는 것인데, 이를 자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 것이다.
역주15 魏王曹丕稱皇帝 廢帝爲山陽公 : “‘稱’이라고 쓰고 ‘廢’라고 써서 傳禪(황제의 자리를 선양함)했다는 말을 한결같이 삭제하였으니, 亂臣賊子가 비로소 스스로 문식할 수 없게 되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마음을 주벌한 법이 엄격하다.[書稱 書廢 一削傳禪之說 亂臣賊子 始無以自文矣 綱目誅心之法 嚴矣哉]” ≪書法≫
“하늘이 뭇 백성을 내고 司牧(백성을 맡아 기르는 군주)을 세우니 천하에 군주가 없을 수 없으며,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王이 없으니 천하에 군주가 둘일 수 없는 것이다. 唐堯와 虞舜이 禪位하여 계승한 뒤로부터 舜과 禹가 뒤를 이었으니, 그 이름(명칭)을 따르면 그 실제를 책망할 수 있는바, 古人이 어찌 진실로 이것을 빌려 천하 사람들을 속였겠는가. 成湯이 桀王을 추방하고도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었고, 武王이 紂王을 정벌하자 義士(伯夷‧叔齊)가 그르다 하였다. 그러나 탕왕과 무왕은 聖人이 됨에 부끄럽지 않았고 商나라와 周나라는 正統이 됨에 부끄럽지 않았으니, 또한 그 실제를 찾을 뿐이다.
후세에는 孤兒(어린 군주)를 속이고 과부를 깔보아 찬탈하고 도둑질함이 서로 이어졌다. 그 실제를 상고해보면 모두 后羿‧寒浞(한착)‧王莽‧董卓의 무리였으나 그 이름(내세운 명분)을 찾아보면 바로 商나라와 周나라의 위로 높이 솟아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전의 史書에서는 그들의 거짓말을 믿고 쇠퇴한 세상에서는 그들이 남긴 자취를 인습하여, 한쪽에서는 禪位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禪位를 받았다고 하니, 漢나라 이후로 어쩌면 이리도 堯, 舜이 많단 말인가.
지금 살펴보건대 ≪資治通鑑綱目≫은 이에 대해서 곧바로 황제를 칭하고 군주를 폐했다고 책에 크게 기록하고, 傳禪하였다(傳位하여 禪讓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절대로 다시 거론하지 않았으니, 이 말이 한 번 나오자 여러 사서가 다 폐지되었다. 어찌 ≪자치통감강목≫이 異論을 세우기를 좋아해서였겠는가. 또한 그 실제를 찾음에 불과할 뿐이다.
아, 亂臣賊子가 남의 집안과 나라를 도둑질할 적에는 항상 탈취함에 명분이 없음을 근심하고 반드시 왜곡하여 曲折을 만들어서 문식을 하였다. 韓‧魏‧趙 三家가 晉나라를 나누고 田氏가 齊나라를 겸병할 때에 周나라의 皇命을 빌려서 스스로 미화하였고, 역적인 王莽이 漢나라를 찬탈할 적에 그 구실을 찾고자 하였으나 찾지 못하자 마침내 周公이 居攝한 것을 칭하였는데, 曹操와 曹丕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帝位를 傳禪한 것으로 문식하였다. 이후로 찬탈과 도둑질이 서로 이어져서 모두 이것을 뒤따라 행하였으니, 그 근원은 曹氏가 作俑(나쁜 前例를 만듦)함에서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이미 그 내용을 설파하였다. 그런 뒤에야 간사하고 거짓된 무리들에게 비로소 천하와 후세를 속일 도구가 없어지게 되었으니, 名敎에 보탬이 됨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자치통감강목≫이 편수됨에 난신적자가 두려워했다.’라고 한 것이다.[天生烝民 立之司牧 天下不可以無君也 天無二日 民無二王 天下不可以二君也 自唐虞禪繼 舜禹承之 循其名 可以責其寔 古人豈固假此以欺天下哉 成湯放桀 惟有慙德 武王伐紂 義士非之 湯武不失爲聖人 商周不失爲正統 亦惟求其實耳 後世欺孤弱寡 簒竊相尋 考其實 皆羿, 浞, 莽, 卓之徒 而求其名 乃欲高出商周之上 前史信其僞辭 衰世襲其遺蹟 一則曰禪位 二則曰受禪 胡爲自漢而下 一何堯舜之多邪 今觀綱目於此 直以稱帝廢主 大書于冊 至於傳禪之說 絶不復擧 斯言一出 諸史皆廢 豈綱目好爲立異哉 亦不過求其實而已 嗚呼 亂臣賊子竊人家國 常患於取之無名 則必曲爲委折以文之 三家分晉 田氏併齊 借周人之命以自蓋 莽賊簒漢 欲求其說而不可得 乃以周公居攝稱之 至操丕 始以傳禪爲文 自後簒竊相繼 皆踵而行之 其原始於曹氏之作俑也 綱目旣破其說 然後姦僞之徒 始無以爲欺天下後世之具 其有補於名敎 豈不大哉 故曰 綱目修而亂臣賊子懼]” ≪發明≫
역주16 孝獻皇帝의……인용하였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三國志≫ 〈魏書 文帝紀〉 裴松之의 註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17 孔子玉板 : 漢나라 때 있었던 河圖의 讖緯書인 ≪河圖玉板≫으로 보이는바, 지금은 산일되어 전하지 않는다.
역주18 (李)[羊] : 저본에는 ‘李’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羊’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9 孔子는……하였고 : 顔淵이 孔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夏나라의 책력을 쓰고, 殷나라의 수레를 타고, 周나라의 면류관을 쓰고, 음악은 韶舞를 쓰고, 鄭나라 음악을 추방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放鄭聲 遠佞人]”라고 하였다.(≪論語≫ 〈衛靈公〉)
역주20 左氏는……하였으니 : 左氏는 左丘明으로 ≪春秋左氏傳≫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춘추좌씨전≫ 昭公 17년에 彗星이 나타나자 梓愼이 제후국에 火災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여 이르기를 “大火星이 出現하는 時期가 夏正(夏曆)으로는 3월이고 商正으로는 4월이고 周正으로는 5월인데, 夏나라의 曆數가 天時와 符合하니, 만약 화재가 발생한다면 아마도 宋‧衛‧陳‧鄭 네 나라가 화재를 당할 것이다.[火出 於夏爲三月 於商爲四月 於周爲五月 夏數得天 若火作 其四國當之 在宋衛陳鄭乎]” 하였다.
역주21 위엄을……경계입니다 : 원문의 ‘作威作福’은 刑罰을 내리기도 하고 賞을 내려 관직을 제수해주기도 하는 것으로 君王의 職分이다. ≪書經≫ 〈周書 洪範〉에 “오직 君主만이 福을 짓고 오직 군주만이 威嚴을 짓고 오직 군주만이 玉食을 할 수 있으니, 臣下는 복을 짓고 위엄을 짓고 옥식을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惟辟作福 惟辟作威 惟辟玉食 臣無有作福作威玉食]”라고 보인다.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9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