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目] 상上의 둘째 아들인 회양헌왕淮陽憲王 유흠劉欽은 법률을 좋아하였고, 총명하고 통달하고 재능이 있었으며, 헌왕憲王의 어머니 장첩여張倢伃는 더욱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상上이 이 때문에 태자太子를 소원히 하고 헌왕을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자주 헌왕을 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하고, 항상 그를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황제가 미천할 때 태어났고, 상上이 젊은 시절 허씨許氏에게 의지하였었는데 즉위하자 허황후許皇后가 곽씨霍氏에게 독살을 당하였기 때문에, 차마 폐위하지 못하였다.
오랜 뒤에
상上이
위현성韋玄成을
회양淮陽의
중위中尉로 제수하니,
하여, 이로써 헌왕을 감동시켜 깨우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目
[目] 사마공司馬公(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모두 인仁과 의義를 원조元祖로 하여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한 이를 부리며, 선善한 사람에게 상賞을 주고 악惡한 사람에게 벌을 주며, 포악한 자를 금지하고 혼란한 자를 주벌하니, 다만 명칭과 지위에 높고 낮음이 있고 공업功業에 크고 작음이 있을 뿐 흑黑과 백白, 단맛과 쓴맛처럼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한漢나라가 삼대三代의 정치를 회복하지 못한 이유는 군주가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선왕先王의 도道가 다시는 후세에 행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유자儒者는 군자君子가 있고 소인小人이 있으니, 저 속된 유자들은 진실로 함께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없지만, 어찌 참된 유자를 구하여 쓸 수 없단 말인가.
효선제孝宣帝가
태자太子를 보고 ‘나약하여 뜻을 확립하지 못하고 정치의 요체에 어두우니, 반드시 우리
한漢나라를 어지럽힐 것이다.’라고 한 것은 괜찮지만,
注+나懦는 음이 연軟이고 또 내란乃亂의 절切이니, 약함이다. ‘
왕도王道를 행할 수 없고
유자儒者를 쓸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지나치지 않겠는가.
이는 참으로 자손들에게 가르쳐 보여주고 장래에 법으로 전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目
[目]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제왕帝王의 덕德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지식을 지극히 하여, 그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아서 집안을 가지런하게 함에 근본하지 않음이 없다.
조정을 바로잡고 백관百官을 바로잡아 만민萬民을 바르게 하는 것은 이로부터 미루어갈 뿐이니, 내內와 외外, 본本과 말末, 정精과 조粗, 선先과 후後가 크게 다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패五霸로 말하면 이와 다르니, 그들에게 과연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지식을 지극히 하는 학문이 있었는가.
그들의 뜻(생각)이 과연 성실하고 마음이 과연 바르고 몸이 과연 닦여지고 집안이 과연 가지런함이 있었는가.
그들이 행한 것이 과연 당唐, 우虞와 하후夏后, 상商, 주周의 교화와 똑같았는가.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왕도王道와
패술霸術은 바로 아름다운 옥과 옥과 비슷한 돌을 똑같이 놓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注+무부碔砆는 음이 무부武夫이니, 옥玉 다음으로 아름다운 돌이다.
사마씨司馬氏(사마온공司馬溫公)가 선제宣帝가 ‘왕도王道를 행할 수 없고 유자儒者를 쓸 수 없다.’고 말한 것을 비판한 것은 옳지만, ‘왕도와 패도는 도道가 다르지 않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目
[目] 좌이질자左伊秩訾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국가의 강하고 약함은 시운時運이 있는 법이니, 지금 한漢나라는 한창 강성하고 우리 흉노匈奴는 날로 쇠퇴하여 비록 이곳에서 강하게 버티고 있으나, 일찍이 단 하루도 편안하지 못하였다.
지금 한漢나라를 섬기면 나라가 편안히 보존되고 섬기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롭고 망할 것이니, 어느 계책이 이보다 더 낫겠는가.”
호한야呼韓邪가 그의 계책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남쪽 변방으로 가까이 와서 아들을 보내 들어와 황제를 모시게 하니, 질지郅支 또한 아들을 보내 들어와 황제를 모시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