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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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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8)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齊永明十一年이요 魏太和十七年이라
春正月 齊以陳顯達爲江州刺史하고 崔慧景爲豫州刺史하다
顯達自以門寒位重이라하여 毎遷官 常有愧懼之色注+顯達, 南彭城人, 起於卒伍.하여 戒其子勿以富貴陵人이어늘 而諸子多事豪侈하니
顯達曰 麈尾蠅拂 是王謝家物이니 汝不須捉此라하고 取而燒之注+東晉王導․王․謝尙․謝安諸人, 嘗捉玉柄麈尾而談, 故曰 “是王謝家物.”하다
◑初 齊主造露車三千乘하여 欲歩道取彭城이러니 魏人知之하다 而劉昶亦數訴於魏主하여 乞處邊守하여 招集遺民하여 以雪私恥注+以蕭氏篡宋, 夷滅劉氏故也.어늘
魏主乃於淮泗間大積馬芻하니 齊主聞之하고 以慧景爲豫州刺史注+慧景, 祖思之族人也.하다
齊太子長懋卒하다
齊主晚年 好遊宴하여 尙書曹事分送太子省之하니 由是威加内外러라 太子性奢靡하여 治堂殿園囿過於上宮이어늘 而莫敢以聞者러니
及卒 齊主乃見其服玩하고 大怒하여 勅皆毁除하다 太子素惡西昌侯鸞하여 嘗曰 我殊不喜此人호되 不解其故하니 當由其福薄故也注+解, 曉也.라하더니 及鸞得政 太子子孫無遺焉하다
二月 魏主始耕藉田하다
◑齊雍州刺史王奐有罪하여 伏誅하다
奐惡寧蠻長史劉興祖하여 誣其構扇山蠻이라하여 殺之注+蕭子顯齊志 “寧蠻府屬雍州.”어늘 齊主大怒하여 遣中書舍人呂文顯曹道剛收奐하고 勅鎭西司馬曹虎會之
奐子彪素凶險이라 奐不能制러니 輒發州兵하여 閉門拒守어늘 奐門生鄭羽叩頭啓奐하여 乞迎臺使한대
奐曰 我不作賊하니 欲先遣啓自申호되 正恐曹呂軰小人相陵藉 故且閉門自守耳注+陵者, 侮之而出其上, 藉者, 蹈之使薦於下. 藉, 慈夜切.로라 彪遂出하여 與虎戰이라가 兵敗走歸어늘
司馬黄瑤起寧蠻長史裴叔業起兵攻奐하여 斬之하고 執彪及弟爽弼并誅之하니 彪弟肅獨得脫하여 奔魏하다
夏四月 注+昭業, 太子長懋長子.하다
東宮文武悉起爲太孫官屬注+東宮官屬, 文則太傳․少傳․詹事․率更令․家令․僕․門大夫․中庶子․中舍人․庶子․洗馬․舍人, 武則左右衛率․翊軍․步兵․屯騎三校尉․旅賁中郞將․左右積弩將軍․殿中將軍․員外殿中將軍․常從虎賁督.하다
五月 하다
魏主謂司空穆亮曰 自今朝廷政事 日中以前 卿等自先論議하고 日中以後 朕與卿等共決之라하더라
秋七月 하다
魏主以平城地寒하여 六月雨雪하고 風沙常起라하여 將遷都洛陽注+雨, 王遇切. 風沙, 大風揚沙也.호되 恐群臣不從하여 乃議大擧伐齊하여 欲以脅衆이라
命太常卿王諶筮之하여 遇革注+魏主齋於明堂左个, 使謀筮之,이어늘 魏主曰 湯武革命하여 順乎天而應乎人라하니 吉孰大焉이리오
任城王澄曰 陛下奕葉重光하여 帝有中土注+奕葉, 猶奕世也. 重光, 猶重華也.어늘 今出師而得革命之象하니 未爲全吉也니이다
魏主厲聲曰 社稷 我之社稷이어늘 任城 欲沮衆邪아하니 澄曰 社稷雖爲陛下之有 臣爲社稷之臣하니 安可知危而不言邪아하다
魏主還宮注+自明堂左个還宮.하여 召澄하여 屏人謂曰 平城用武之地 非可文治 移風易俗 其道誠難하니 朕欲因此遷宅中原하노니 卿以爲何如
澄曰 陛下欲卜宅中土以經略四海하시니 此周漢之所以興隆也注+比之周成․康, 漢光․明也.니이다
魏主曰 北人習常戀故하여 必將驚擾 奈何 澄曰 非常之事 故非常人之所及이니 陛下斷自聖心이면 彼亦何所能爲리오
魏主曰 任城 吾之子房也注+張良, 贊漢高帝遷都長安, 故以爲比.로다 於是戒嚴하니 齊主聞之하고 亦發揚徐民丁하고 廣設召募以備之하더라
中書郎王融自恃人地하고 三十内望爲公輔注+融有俊才, 故以人身自高, 且王弘曾孫, 故以門地自高.러니 嘗夜直省中이어늘 撫案歎曰 爲爾寂寂하니 鄧禹笑人注+爾, 如此也. 寂寂, 言冷寞也. 禹年二十四爲漢司徒, 融年已過之, 故云然.이로다
行逢朱雀桁開하여 喧湫不得進注+朱雀桁當建康朱雀門, 跨秦淮南北岸以渡行人, 大路所由也. 開謂時暫撤開之以通舟過也. 喧, 譁也. 湫, 子了切, 隘也. 謂因桁開而行人壅塞, 以致語聲喧囂, 道路湫隘, 不可前進也.한대 搥車壁歎曰 車前無八騶하니 何得稱丈夫注+搥, 音錐, 擊也. 車前有油壁. 自晉以來, 諸公․諸從公車前給騶八人. 騶者, 在車前傳呼辟開道止行人者.리오
竟陵王子良愛其文學하여 特親厚之하더라 融見齊主有北伐之志하고 數上書奬勸하고 因大習騎射러니
及聞有魏師하고 子良於東府募兵할새 板融寧朔將軍하여 使典其事注+宋泰始初, 南攻義嘉, 軍功者衆, 板不能供, 始用黃紙. 今板授融, 蓋重於黃紙也. 或曰 “未經勅用者謂之板授.”하니 融傾意招納하여 得江西傖楚數百人이러라
會齊主不豫 詔子良甲仗入侍하고 太孫間日參承注+間日, 隔一日也. 參, 候也. 承, 奉也.이러니 齊主疾亟하여 蹔絶하고 太孫未入注+蹔絶, 謂氣暫絶而不息也.하니 融欲矯詔立子良하여 詔草已立이러니
會太孫來어늘 融戎服絳衫으로 於中書省閤口 斷其仗不得進이러라 頃之 齊主復蘇하여 問太孫所在하여 召入하고 以朝事委僕射西昌侯鸞而殂하다
融以子良兵禁諸門이러니 鸞聞之하고 馳至雲龍門하여 不得進하니 鸞曰 有勅召我라하고 排之而入注+排, 推也하여 奉太孫登殿하고 命左右扶出子良하니 融知不遂하고 釋服還省하여 歎曰 公誤我矣注+釋服還省, 釋戎服還中書省也.라하더라
世祖留心政事하여 務摠大體호되 嚴明有斷하여 郡縣久於其職이요 長吏犯法이어든 封刃行誅하니 故永明之世 百姓豐樂하며 賊盜屏息이나
然頗好遊宴華靡之事하여 常言恨之호되 未能頓遣注+遣, 袪也, 逐也. 言未能袪逐遊宴之失也.이니라 鸞性儉素하고 居官名嚴能하니 世祖重之注+鸞初爲安吉令有嚴能之名.
遺詔子良輔政하고 鸞知尙書事어늘 子良素仁厚하여 不樂世務 乃更推鸞하다
齊主昭業少養於子良妃袁氏하여 慈愛甚著러니 及王融有謀 遂深忌之하여 以子良居中書省하고 使郎將潘敞領仗屯太極西階以防之注+中書省, 蓋在太極殿西, 故使屯於西階以防子良.러니
旣成服 諸王皆出할새 子良乞停至山陵호되 不許注+乞停中書省, 俟梓宮出葬而後出也.하다 稱遺詔하여 以鸞爲尙書令하고 子良爲太傅하다
蠲逋調하고 省御府池田邸治하며 減關市征稅注+逋, 久也. 調, 賦稅也. 治據蕭子顯齊書當作冶, 謂冶鑄之所也.하다 先是 蠲原之詔 多無事實하여 督責如故러니 及是恩信兩行하니 衆皆悅之하더라
魏山陽公尉元卒하다
諡曰景桓이라하다
魏主發平城하다
魏主發平城南伐할새 歩騎三十餘萬이러라 使太尉丕與廣陵王羽留守한대 羽曰 太尉宜專節度 臣正可爲副니이다
魏主曰 老者之智 少者之決이니 汝無辭也注+言老者經事多, 故智慮深遠, 少者氣盛, 故臨事有斷.어다
齊中書郎王融有罪伏誅하다
齊主昭業性辯慧하고 美容止어늘 而矯情飾詐하고 陰懐鄙慝하여 與左右群小共衣食하며 同卧起하더라
始從竟陵王子良在西州 文惠太子毎禁節之注+齊主少養於子良妃袁氏, 子良爲揚州刺史, 故齊主從在西州. 禁節, 謂禁其起居, 節其用度也.하니 昭業密就富人求錢하니 夜開後閤하여 淫宴諸營暑注+軍壘曰營, 官舍曰暑.하다
師史仁祖侍書胡天翼相謂曰注+王國有師掌導之敎訓, 侍書掌敎之書翰. 若言之二宮하면 則其事未易注+二宮, 謂上宮及東宮也. 易, 去聲. 若爲異人所敺하고 及犬物所傷이면 豈直罪止一身이리오 亦當盡室及禍이라하고 相繼自殺이어늘 二宮不知也러라
所愛左右 皆逆加官爵하여 疏於黄紙하여 使囊盛帶之하며 許南面之日 依此施行注+盛, 音成.하다
侍疾居喪 憂容號毁하다가 裁還私室 即歡笑酣飲注+裁與纔同.하다 常令女巫禱祀하여 速求天位러니 世祖有疾이어늘 與何妃書 作一大喜字하고 而三十六小喜字繞之注+何妃, 昭業妃, 戢之女也.하다
世祖不知하고 以爲必能負荷大業이라하여 臨終 執其手曰 若憶翁이어든 當好作이라하고 遂殂注+若, 汝也. 憶, 念也. 翁, 世祖自謂. 作, 將祚切, 造也.하다 大斂始畢 悉呼世祖諸伎하여 備奏諸樂하다
即位十餘日 即收王融下廷尉한대 融求援子良이어늘 子良憂懼하여 不敢救하여 遂賜死하니 時年二十七이러라
融欲與東海徐勉相識이어늘 勉謂人曰 王君名高望促하니 難可輕𧝬衣裾注+名高望促, 言名雖高而輕躁, 人知其必及禍, 故望促. 𧝬, 與敝通, 敗衣也, 言不可輕壞其身也. 以衣裾言者, 謂曳而從之也.니라
太學生魏準爲融所賞이라 常勸融立子良이러니 太學生虞羲丘國賓竊相謂曰 竟陵才弱하고 王中書無斷하니 敗在眼中矣
及融誅 召準詰問하니 惶懼而死어늘 擧體皆靑이라 時人以爲膽破하니 而勉由是知名이러라
九月 齊主追尊其父爲文皇帝하다
廟號世宗하다
魏主至肆州하여 道路民有跛眇者하고 停駕慰勞하고 給衣食終身注+後魏置肆州於九原, 非古九原. 漢末魯公所置定襄之九原縣也. 跛, 補火切. 跛者, 一足偏短. 眇者, 一目偏.하다
大司馬安定王休執軍士爲盜者하여 將斬之注+休, 景穆之子也.러니 魏主遇하여 欲赦之어늘
休曰 陛下親御六師하여 將遠清江表어늘 今始行至此어늘 而小人已爲攘盜하니 不斬之 何以禁姦이리오 魏主曰 誠如卿言이라 然王者時有非常之澤하니 可特赦之하라
旣而謂司馬馮誕曰 大司馬執法嚴하니 諸君不可不愼이라하니 於是軍中肅然注+誕, 熙之子也. 誕后戚, 旣親且貴, 故語之以儆百司.하더라
司馬公曰 人主之於其國 譬猶一身하니 視遠如視邇하고 在境如在庭이라 擧賢才以任百官하며 修政事以利百姓하면 則封域之内 無不得其所矣
是以先王黈纊塞耳하고 前旒蔽明하니 欲其廢耳目之近用하고 推聰明於四遠也注+黈, 他口切, 黃色也, 纊, 新綿也. 以黃綿爲丸, 用組垂之, 於冕當兩耳旁. 古者, 黈纊充耳, 所以塞聰, 示不外聽也. 旒, 垂玉也. 陸佃云 “王五冕旒, 皆十二, 不如是, 不爲蔽明. 其諸臣之就數, 雖不同, 然垂皆過目. 就, 成也.”
彼廢疾者宜養인댄 當命有司均之境어늘 今獨施於所遇 則所遺者多矣
況赦罪人以撓有司之法 尤非人君之體也 惜哉 孝文 魏之賢君 而猶有是乎인저
◑至并州하여 刺史王襲 治有聲迹하여 魏主嘉之인대 襲教民多立銘道側하여 虛稱其美하다 魏主怒하여 降襲號二等注+號者, 所領將軍號也.하다
九月 至洛陽하여 詣故太學하여 觀石經注+故太學, 漢魏所營者.한대 霖雨不止하여 詔諸軍前發하다
魏主戎服하고 執鞭乗馬而出이어늘 群臣稽顙於馬前하고 曰 今者之擧 天下所不願이라 臣不知陛下獨行何之注+言違衆南伐, 無異獨行. 臣等敢以死請하노이다
魏主大怒曰 吾方經營天下하여 期於混壹이나 而卿等屢疑大計하니 斧鉞有常이라 卿勿復言하라
策馬將出이어늘 於是安定王休等竝慇勤泣諫한대 魏主乃諭群臣曰 今者興發不小하니 動而無成이면 何以示後리오 苟不南伐이라도 當遷都於此리니 王公以爲何如 欲遷者左하고 不欲者右하라
安定王休等相帥如右어늘 南安王楨進曰 成大功者 不謀於衆하나니 今陛下苟輟南伐之謀인대 遷都洛邑 此臣等之願이요 蒼生之幸也로소이다 群臣皆呼萬歳하더라
時舊人雖不願内徙로되 而憚於南伐하여 無敢言者 遂定遷都之計注+舊人, 謂與魏同起於北荒之子孫, 卽所謂國人.하다
李沖曰 願陛下暫還代都하여 俟經營畢功하고 然後臨之하소서 魏主曰 朕將巡省州郡하여 至鄴小停이라가 春首即還하리니 未宜歸北注+不肯歸北, 蓋慮北人歸代復戀土重遷也.이니라
乃遣任城王澄還平城하여 諭留司百官 曰 此眞所謂革矣 王其勉之注+謂前筮之遇革, 今之遷都眞以革北方之俗. 易說卦曰 “革, 去故也.”어다 又使將軍于烈鎭平城注+烈, 栗磾之孫也.하다
魏關中亂討平之하다
北地民酉聚衆數千하여 起兵於長安北하고 遣使告齊梁州刺史陰智伯한대 智伯遣兵數千應之하니
秦雍七州民皆響震하여 衆至十萬이라 各守堡壁하여 以待齊救注+七州, 雍․岐․秦․南秦․涇․邠․華也.어늘 魏河南王幹及穆亮與戰이나 皆不利하니
酉等進向長安이어늘 盧淵薛胤等拒擊하여 大破之하니 降者數萬이라 淵唯誅首惡이요 餘悉不問하고 獲酉斬之注+淵, 度世之子. 胤, 辯之曾孫也. 辯, 謹之父.하다
冬十月 魏營洛都하다
魏主徴穆亮하여 使與尙書李沖將作大匠董爾經營洛都할새 設壇於滑臺城東하여 以告行廟注+董爾, 北史作董爵. 奉神主而行, 故有行廟.하다
任城王澄至平城하여는 衆始聞遷都하고 莫不驚駭어늘 澄援引古今하여 徐以曉之하니 衆乃開伏注+開, 發也. 伏, 厭伏也. 言北人安土重遷, 蔽於此說, 不肯降心以相從, 澄援引曉喩以發其蒙, 莫不厭伏也.이러라
澄還報한대 魏主喜曰 向非任城이면 事不成矣러니라
魏以王肅爲輔國將軍하다
王肅見魏主於鄴하여 陳伐齊之策하니 魏主與之言 不覺促席移晷注+是年三月王肅奔魏, 今方得見魏主. 降人初至, 君臣情分甚爲闊疏. 言有當心, 故促席近前以聽之, 不覺其分之疏也, 與之言而弗厭倦, 日爲之移晷, 不覺其久也. 自是器遇日隆하여 人莫能間이요 或屏左右하고 語至夜分하여 自謂相得之晚이러라
時魏主方議興禮樂하여 變華風하니 凡威儀文物 多肅所定이러라
悛罷廣司二州 傾貲以獻世祖하고 家無留儲러니 任益州하여 作金浴盆하고 餘物稱是
及齊主即位 以悛所獻減少라하여하여 欲殺之注+悛傳云 “悛作金浴盆等, 欲以獻世祖. 還都而世祖晏駕, 鬱林新立, 遂減其所獻.”어늘 西昌侯鸞救之하여 得免호되 猶禁錮終身하다


나라 세조世祖 무제武帝 소이蕭頤 영명永明 11년이고,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태화太和 17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가 진현달陳顯達강주자사江州刺史로 삼고 최혜경崔慧景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았다.
[] 진현달陳顯達注+① 陳顯達은 南彭城 사람으로, 병졸 출신이다. 스스로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고 여겨 관직을 옮길 때마다 늘 부끄러워하고 두려운 기색이 있었다. 그리하여 아들에게 부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능멸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는데, 여러 아들이 호사스럽게 구는 일이 많았다.
진현달이 말하기를 “고라니 꼬리로 만든 먼지떨이와 파리채는 왕씨王氏사씨謝氏 같은 존귀한 가문의 물품이니注+② 東晉의 王導․王衍․謝尙․謝安 등 여러 사람들이 옥으로 된 자루에 고라니 꼬리로 만든 총채를 잡고 담화를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是王謝家物”이라고 하였다., 너희는 이런 물건을 쓸 필요가 없다.”라고 하고, 빼앗아 불태웠다.
[] 예전에 제주齊主(소색蕭賾)가 노거露車 3천 을 만들어서 육로로 팽성彭城을 취하려고 하였는데, 북위北魏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 유창劉昶이 또한 자주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에게 하소연하여 변방의 수비 지역에 머물면서 유민遺民을 불러 모아 자신의 치욕을 설욕하기를 청하였다.注+① 蕭氏가 宋나라를 찬탈하고 劉氏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위주魏主가 이에 회하淮河사수泗水 사이에 말이 먹을 건초를 많이 쌓아놓았다. 제주齊主가 그 소식을 듣고는 최혜경崔慧景注+② 崔慧景은 崔祖思의 族人이다.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았다.
[] 나라 태자太子 소장무蕭長懋하였다.
[] 제주齊主(소색蕭賾)가 말년에 놀며 연회를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상서尙書의 일을 나누어 태자太子에게 보내어 살피도록 하니, 이로 말미암아 태자의 위세가 안팎에 더해졌다. 태자는 성품이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여 궁전과 동산을 제주齊主의 궁전보다 지나치게 꾸몄는데도 감히 태자의 일을 보고하는 자가 없었다.
태자가 하자 제주齊主가 마침내 태자의 의복과 장신구를 보고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려서 모두 없앴다. 태자는 평소에 서창후西昌侯 소란蕭鸞을 미워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 사람을 몹시 싫어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으니注+① 解는 이해한다는 뜻이다., 응당 그가 박복하기 때문이리라.”라고 하였다. 소란이 정권을 잡게 되자 태자의 자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 2월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처음으로 적전藉田에서 친경親耕하였다.
[] 나라 옹주자사雍州刺史 왕환王奐이 죄를 지어 죽임을 당했다.
[] 왕환王奐영만장사寧蠻長史注+① 蕭子顯의 ≪齊齊書≫ 〈州郡志〉에 “寧蠻府는 雍州에 속하였다.”라고 하였다. 유흥조劉興祖를 미워하여 유흥조가 산만山蠻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무고하여 그를 죽였다. 제주齊主(탁발굉拓跋宏)가 크게 노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 여문현呂文顯조도강曹道剛을 파견하여 왕환을 체포하도록 하고, 진서사마鎭西司馬 조호曹虎에게 명을 내려 그들과 회합하도록 하였다.
왕환의 아들 왕표王彪가 평소 흉악하고 음흉하여 왕환이 통제할 수가 없었다. 왕표가 갑자기 의 군사를 출동하여 성문을 닫고 방비하여 지켰는데, 왕환의 문생門生 정우鄭羽가 머리를 조아리며 왕환에게 아뢰어 대사臺使(조정의 사신)를 맞이하기를 청하였다.
왕환이 말하기를 “나는 도적질을 하지 않았으니, 먼저 사람을 보내 아뢰어서 스스로 해명하려고 하였는데, 바로 조도강과 여문현 등 소인小人들이 우리를 업신여기고 짓밟는 것이注+② 陵은 업신여겨 그 위로 나가는 것이다. 藉는 짓밟아 아래에 까는 것이다. 藉(짓밟다)는 慈夜의 切이다. 두려웠기 때문에 우선 문을 닫고 스스로 방비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왕표가 마침내 나가서 조호와 싸우다가 군사들이 패하여 달아나자 돌아왔다.
사마司馬 황요기黄謠起영만장사寧蠻長史 배숙업裴叔業이 군사를 일으켜 왕환을 공격하여 목을 베고 왕표와 동생 왕상王爽, 왕필王弼을 잡아 모두 죽이니, 왕표의 동생 왕숙王肅만이 탈출하여 북위北魏로 달아났다.
[] 여름 4월에 제주齊主(소색蕭賾)가 손자 소소업蕭昭業注+① 蕭昭業은 太子 蕭長懋의 長子이다. 세워서 태손太孫으로 삼았다.
[] 동궁東宮문무文武 관속官屬注+① 東宮의 官屬은 文官은 太傳, 少傳, 詹事, 率更令, 家令, 僕, 門大夫, 中庶子, 中舍人, 庶子, 洗馬, 舍人이 있고, 武官은 左右衛率, 翊軍․步兵․屯騎의 3校尉, 旅賁中郞將, 左右積弩將軍, 殿中將軍, 員外殿中將軍, 常從虎賁督이 있다. 모두 태손太孫의 관속으로 삼았다.
[] 5월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직접 수감된 죄수들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사공司空 목량穆亮에게 말하기를 “지금부터 조정의 정사를 정오 이전에는 들이 스스로 먼저 논의하고, 정오 이후에는 이 경들과 함께 결정하겠다.”라고 하였다.
[] 가을 7월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자신의 아들 탁발순拓跋恂태자太子로 삼았다.
[] 북위北魏가 조서를 내려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정벌하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평성平城은 땅이 추워서 6월에 눈이 내리고 늘 모래 바람이 분다고 하여注+① 雨(내리다)는 王遇의 切이다. “風沙”는 바람이 크게 불어 모래가 날리는 것이다. 도읍을 낙양洛陽으로 옮기려고 하였는데,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 마침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정벌할 것을 논의하여 무리들을 협박하려고 하였다.
태상경太常卿 왕심王諶에게 점을 치도록 명하여 혁괘革卦가 나왔는데注+② 魏主가 明堂左个에서 재개하고 점을 치게 한 것이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탕왕湯王무왕武王혁명革命을 하여 하늘의 뜻에 따르고 사람들의 마음에 부응하였다.’라고 하니 이보다 더 큰 길조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임성왕任城王 탁발징拓跋澄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여러 대에 걸쳐 거듭 빛나注+③ “奕葉”은 奕世(여러 대)와 같은 뜻이다. “重光”은 重華(거듭 빛나다)와 같은 뜻이다. 황제로 중원의 토지를 소유하였는데, 지금 군사를 출동하면서 혁명革命괘상卦象을 얻었다고 하니, 완전히 길한 조짐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엄중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사직社稷은 나의 사직社稷인데, 임성왕任城王이 무리들을 막으려 하는구나.”라고 하였다. 탁발징이 말하기를 “사직社稷이 비록 폐하의 소유이지만, 신은 사직社稷의 신하이니, 어찌 위태로움을 알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위주魏主가 〈명당좌개明堂左个에서〉 궁으로 돌아와注+① 明堂左个에서 궁궐로 돌아온 것이다. 탁발징拓跋澄을 불러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평성平城은 전쟁을 해야 하는 땅이지 문치文治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풍속을 옮기고 바꾸는 길은 진실로 어려우니, 은 이것을 이용하여 터전을 중원中原으로 옮기고자 하니 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니,
탁발징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터전을 중원中原의 땅에 두어 사해四海를 경략하려고 하시니, 이것은 나라와 나라가 융성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注+② 周나라의 成王과 康王, 漢나라의 光武帝와 明帝에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북인北人의 습성은 늘 옛것을 그리워하여 반드시 소란이 발생할 것이니, 어찌해야겠는가?”라고 하니 탁발징이 말하기를 “일상적이지 않은 일은 본래 보통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폐하께서 스스로 마음속으로 결정을 하셨다면 저들 역시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임성왕任城王은 나의 자방子房이로구나.”注+③ 張良이 漢高帝를 도와 도읍을 長安으로 옮겼기 때문에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고, 이에 엄하게 경계를 하였다. 제주齊主(소색蕭賾)가 듣고서는 역시 양주揚州서주徐州민정民丁을 징발하고 널리 병사를 모집하여 대비하게 하였다.
[] 제주齊主 소색蕭賾하였다.注+① 향년이 54세였다. 태손太孫 소소업蕭昭業이 즉위하여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태부太傅로 삼고, 소란蕭鸞상서령尙書令으로 삼았다.
[] 중서랑中書郎 왕융王融이 자신의 뛰어난 재주와 문벌을 믿고注+① 王融은 뛰어난 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또 王弘의 曾孫이므로 문벌이 높다고 생각한 것이다. 30세가 되기 전에 공보公輔가 되기를 바랐다. 한번은 밤에 성중省中에서 숙직한 적이 있었는데, 책상을 어루만지며 탄식하기를 “이처럼 쓸쓸하니 등우鄧禹가 사람을 비웃겠구나.”注+② 爾는 이와 같다는 뜻이다. “寂寂”은 쓸쓸하다는 뜻이다. 鄧禹가 24세의 나이로 漢나라 司徒가 되었다. 王融의 나이가 이미 등우의 나이보다 많았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융이 길을 가다가 주작항朱雀桁이 열릴 때를 만났는데, 시끄럽고 좁아서 나아가지 못하자注+③ 朱雀桁은 建康의 朱雀門에 있는데, 秦淮河의 남쪽과 북쪽 연안에 걸쳐 있어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게 하니 大路가 경유하는 바이다. 開는 잠깐 〈배다리를〉 거두어 열어서 배가 통과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喧은 시끄럽다는 뜻이다. 湫는 子了의 切이니, 좁다는 뜻이다. 〈“行逢朱雀桁開 喧湫不得進”은〉 朱雀桁을 연 것으로 인해 행인들이 길을 막아서 말소리가 매우 시끄럽고 도로가 좁아서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수레의 벽을 치면서 탄식하기를 “수레 앞에 8명의 추졸騶卒이 없으니, 어찌 장부丈夫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注+④ 搥(부딪치다)는 음이 錐이니 부딪친다는 뜻이다. 수레 앞에 油壁이 있다. 晉나라 이래로 諸公 및 諸從公의 수레 앞에 8명의 騶를 두었다. 騶는 수레 앞에서 서로 외쳐서 길을 열고 行人을 정지하게 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은 왕융의 문학文學을 아껴서 특별히 그를 친애하고 후하게 대하였다. 왕융王融제주齊主(소색蕭賾)가 북벌北伐에 뜻이 있음을 알고 자주 상서上書를 올려 권면하고 그로 인해 말 타기와 활쏘기를 크게 익혔다.
북위北魏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소자량蕭子良동부東府에서 군사를 모집할 때에 왕융을 영삭장군寧朔將軍에 임명하여注+⑤ 宋나라 泰始 연간 초기에 남쪽으로 義嘉를 공격하여 軍功이 있는 사람이 많았는데 板으로 임명할 수 없어서 처음으로 黃紙를 사용하였으니, 지금 왕융에게 板授로 임명한 것이 黃紙보다 중하다. 혹자가 말하기를 “칙명을 거치지 않고 등용하는 것을 板授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 일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왕융은 마음을 기울여 사람들을 불러 받아들여 강서江西에서 사람 수백 명을 얻었다.
[] 마침 제주齊主(소색蕭賾)가 몸이 편치 않아 조서를 내려 소자량蕭子良에게 갑옷과 병장기를 휴대하고 입시하도록 하였고, 태손太孫은 하루걸러 찾아뵙고 곁에서 모셨다.注+① “間日”은 하루를 사이에 둔다는 뜻이다. 參은 찾아뵙는다는 뜻이다. 承은 모신다는 뜻이다. 제주齊主가 병이 심해져서 잠시 기절을 하였는데注+② “蹔絶”은 기운이 잠시 끊어져 숨을 쉬지 않는 것을 말한다., 태손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왕융王融이 조서를 고쳐서 소자량을 세우려고 하여 이미 조서의 초안을 잡아놓은 상태였다.
때마침 태손이 오자, 왕융이 군복에 붉은 적삼 차림으로 중서성中書省 합문閤門 입구에서 동궁東宮의 호위병을 막아 들어갈 수 없게 하였다. 얼마 후에 제주齊主가 다시 소생하여 태손이 있는 곳을 물어서 불러 들어오게 하고 조정의 일을 복야僕射 서창후西昌侯 소란蕭鸞에게 맡기고 하였다.
왕융이 소자량의 군사에게 여러 문을 차단하도록 하였는데, 소란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가 운룡문雲龍門에 이르렀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소란이 말하기를 “나를 부르는 칙명이 있었다.”라고 하고, 그들을 밀치고注+③ 排는 물리친다는 뜻이다. 들어가서 태손을 받들고 궁전宮殿에 오르게 하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소자량을 붙들고 나가라고 하니, 왕융이 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군복을 벗고 중서성中書省으로 돌아와서注+④ “釋服還省”은 군복을 벗고 中書省으로 돌아온 것이다. 탄식하기를 “(소자량)이 나의 일을 그르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세조世祖(소색蕭賾)는 정사政事에 유념하여 대체大體를 총괄하는 데 힘을 쓰면서도 엄격하고 분명하며 결단력이 있어 군현郡縣의 관리들이 오랫동안 그 직책을 맡았고, 장리長吏가 법을 저촉하면 검을 싸서 보내주어 죽게 하였다. 그러므로 영명永明(483~489) 연간에는 백성들이 풍요롭고 즐거우며 도적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놀고 연회를 베풀며 화려하고 사치한 일을 제법 좋아하여 항상 이것이 한스럽다고 말은 하였으나, 대번에 제거하지는注+⑤ 遣은 제거한다는 뜻이며 물리친다는 뜻이니, 놀고 잔치를 여는 잘못을 제거하여 없애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못하였다. 소란은 성품이 검소하고 관직에 있을 때 엄하고 유능한 관리라고 이름이 있어注+⑥ 蕭鸞이 처음 安吉令이 되어서 엄격하고 능력이 있다는 명성이 있었다. 세조가 그를 중히 여겼다.
유조遺詔에서 소자량에게 정사를 보좌하도록 하고 소란을 지상서사知尙書事로 삼도록 하였는데, 소자량이 평소에 인후仁厚하여 세무世務를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소란을 추천하였다.
[] 제주齊主 소소업蕭昭業이 어렸을 때 소자량蕭子良 원씨袁氏에게 양육되어 원씨의 사랑이 아주 특별했는데, 왕융王融의 모의가 있은 뒤에는 마침내 소자량을 매우 꺼려서 소자량을 중서성中書省에 머물러 있게 하고 낭장郎將 반창潘敞으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태극전太極殿 서쪽 계단에 주둔하여 그를 막게 하였다.注+① 中書省은 太極殿의 서쪽에 있다. 그러므로 서쪽 계단에 주둔하게 하여 소자량을 막게 한 것이다.
성복成服을 하고 나서 여러 왕들이 모두 나가려고 할 때에 소자량이 중서성에 머물러 있다가 산릉山陵으로 가겠다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注+② 中書省에 머물러 있다가 梓宮(천자의 관)이 장지로 나가기를 기다린 뒤에 나가기를 바란 것이다. 소소업이 무제武帝(소색蕭賾)의 유조遺詔라고 일컬어 소란蕭鸞상서령尙書令으로 삼고 소자량을 태부太傅로 삼았다.
미납된 세금을 견감해주고 어부御府지전池田저야邸冶의 세금을 줄여주었으며注+③ 逋는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調는 賦稅이다. 治는 蕭子顯의 ≪南齊書≫에 의거하면 마땅히 冶가 되어야 하니, 〈“邸冶”는〉 제련하여 鑄造하는 곳을 말한다., 관문과 저자에서 걷는 세금을 줄여주었다. 이에 앞서 원래 세금을 면제한다는 조서가 있었지만 대부분 그렇게 한 사실이 없어서 예전처럼 독촉을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은덕과 신의가 모두 행해지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 북위北魏산양공山陽公 울원尉元하였다.
[] 시호諡號경환景桓이라고 하였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평성平城에서 출발하였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평성平城에서 출발하여 남벌南伐할 때에 보병과 기병이 30여 만이었다. 태위太尉 탁발비拓跋丕광릉왕廣陵王 탁발우拓跋羽에게 평성에 머물면서 지키게 하자, 탁발우가 말하기를 “태위太尉는 의당 절도節度를 전담해야 하고, 은 바로 부관이 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나이든 사람은 지혜가 있고 젊은 사람은 결단력이 있으니注+① 〈“老者之智 少者之決”은〉 나이든 사람은 많은 일을 겪었으므로 지혜와 생각이 깊고 원대하며, 젊은 사람은 기운이 왕성하므로 일에 임해서 결단함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너는 사양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 나라 중서랑中書郎 왕융王融이 죄를 지어 죽임을 당했다.
[] 제주齊主 소소업蕭昭業은 성품이 말을 잘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용모와 행동이 아름다웠는데, 감정을 거짓으로 꾸미고 몰래 비열하고 사악한 마음을 품어서 좌우에 있는 소인배들과 의복과 음식을 함께하며 누웠다 일어나기를 똑같이 하였다.
예전에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을 따라 서주西州에 있었는데, 문혜태자文惠太子(소장무蕭長懋)가 매번 소소업의 행동을 금지하고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니注+① 齊主(蕭昭業)가 어려서 蕭子良의 妃 袁氏에게 양육을 받았는데, 소자량이 揚州刺史가 되었으므로 齊主는 西州에 따라간 것이다. “禁節”은 행동을 금지하고 사용하는 것을 제한함을 말한 것이다. 소소업이 몰래 부자에게 가서 돈을 요구하여 밤에 서주의 후문後門을 열고 영서營暑에서注+② 軍壘를 營이라고 하고, 官舍를 暑라고 한다. 지나칠 정도로 연회를 베풀었다.
스승인 사인조史仁祖시서侍書 호천익胡天翼注+③ 王國에는 師가 있는데 교훈을 인도하는 것을 담당하였고, 侍書는 문서를 가르치는 것을 담당한다. 서로 말하기를 “만약 이 사실을 이궁二宮注+④ 二宮은 上宮과 東宮을 말한다. 易(쉽다)는 去聲이다. 말한다면, 일이 쉽게 해결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에게 구타를 당하거나 개 같은 동물에게 몸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찌 다만 죄가 우리 한 몸에만 미치겠는가. 역시 온 가족에게 재앙이 미칠 것이다.”라고 하고, 함께 자살하였는데, 이궁二宮에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소소업은 총애하는 좌우의 신하들에게 모두 미리 관작官爵을 더해주어 황지黄紙에 써서 주머니에 넣어注+⑤ 盛(담다)은 음이 成이다. 허리에 차도록 시켰으며,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날에 그에 따라 시행할 것을 허락하였다.
[] 〈문혜태자文惠太子(소장무蕭長懋)가〉 병을 앓고 있을 때는 곁에서 모시고 을 당해서는 근심스런 얼굴로 몸을 상할 정도로 곡을 하다가, 사실私室에 돌아오자마자 즉시注+① 裁(겨우)는 纔와 같은 뜻이다. 기뻐하고 웃으며 술을 진탕 마셨다. 항상 여자 무당에게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게 하여 속히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세조世祖(소색蕭賾)가 병이 나자 하비何妃에게注+② 何妃는 蕭昭業의 妃이니, 何戢의 딸이다. 편지를 쓰면서 크게 희자喜字를 한 글자를 쓰고 36의 작은 희자喜字를 써서 빙 둘러쌓게 하였다.
세조가 알지 못하고 반드시 그가 대업大業을 계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임종 때에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네가 이 늙은이를 생각한다면 잘 해나가야 한다.”注+③ 若은 너라는 뜻이다. 憶은 생각한다는 뜻이다. 翁은 世祖 자신을 말한다. 作은 將祚의 切이니, 만든다는 뜻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하였다. 대렴大斂이 처음 끝났을 때에 세조의 기녀들을 모두 불러서 여러 음악을 갖추어 연주하게 하였다.
소소업蕭昭業이 즉위하고 나서 10여 일이 지나자 곧바로 왕융王融을 잡아 정위廷尉에게 내려 보내자 왕융이 소자량蕭子良에게 구원해주기를 바라니, 소자량이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구원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왕융에게 죽음을 내렸으니 당시 나이가 27세였다.
[] 예전에 왕융王融동해東海 사람 서면徐勉과 서로 알았는데, 서면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왕군王君(왕융王融)은 명성이 높으나 조급하게 성공하기를 바라니, 가벼이 함께하기가 어렵다.”注+① “名高望促”은 명성이 비록 높으나 경솔하고 경박하여 사람들이 그에게 반드시 재앙이 미칠 것을 알았기 때문에 “望促”이라 한 것을 말한다. 𧝬는 敝와 통용하니 해진 옷이다. 〈“難可輕𧝬”는〉 몸을 가벼이 망가뜨려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衣裾”라고 말한 것은 옷을 끌면서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태학생太學生 위준魏準이 왕융에게 칭찬을 받아 항상 왕융에게 소자량蕭子良을 황제로 세우라고 권유하였는데, 태학생太學生 우희虞羲구국빈丘國賓이 몰래 서로 말하기를 “경릉왕竟陵王(소자량蕭子良)은 재주가 미약하고 왕중서王中書(왕융)는 결단력이 없으니, 그의 실패가 눈앞에 있다.”라고 하였다.
왕융이 죽임을 당했을 때 위준을 불러서 심문을 하니 두려움에 떨다가 죽었는데, 온 몸이 모두 푸른 색깔로 변하자, 당시 사람들이 쓸개가 터져서 죽었다고 말하였다. 서면은 이로부터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 9월에 제주齊主(소소업蕭昭業)가 자신의 부친(소장무蕭長懋)을 추존하여 문황제文皇帝로 삼았다.
[] 묘호廟號세종世宗이라고 하였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낙양洛陽에 이르러서 군사를 해산하였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사주肆州에 이르러 도로道路의 백성 중에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고 한쪽 눈이 먼 자를 보고는注+① 後魏(北魏)가 九原에 肆州를 두었으니, 옛날의 九原이 아니라 漢나라 말기에 魯公이 설치한 定襄郡 九原縣이다. 跛(절뚝거리다)는 補火의 切이다. 跛者는 한쪽 다리가 짧은 사람이고, 眇者는 한쪽 눈이 먼 사람이다. 수레를 멈추어 위로하고 종신토록 옷과 음식을 주도록 하였다.
대사마大司馬 안정왕安定王 탁발휴拓跋休注+② 拓跋休는 拓跋景穆의 아들이다. 군사 중에 도둑질을 한 자를 잡아서 목을 베려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우연히 이 상황을 만나서 그를 사면해주려 하자,
탁발휴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친히 육사六師를 거느리고서 멀리 장강長江의 남쪽을 정벌하려고 하는데, 지금 비로소 행군이 여기에 이르렀는데 소인小人들이 이미 도적질을 하고 있으니, 이들의 목을 베지 않으면 어떻게 간악한 짓을 금지시키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진실로 의 말과 같다. 그러나 왕은 때로는 특별한 은택을 베풀기도 하니 특별히 그들을 사면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윽고 사마司馬 풍탄馮誕에게 말하기를 “대사마大司馬을 엄하게 집행하니, 제군諸君들은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니, 이에 군중軍中이 숙연해졌다.注+③ 馮誕은 馮熙의 아들이다. 풍탄은 馮太后의 친척으로 이미 친하고 또 귀하다. 그러므로 그에게 말하여 百司를 경계하게 한 것이다.
冕旒冕旒
[]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인주人主는 그 나라에 대하여 비유하면 한 몸과 같으니, 먼 곳을 보면서 마치 가까운 곳을 보는 것처럼 하며 변방에 있으면서 마치 조정에 있는 것처럼 해야 한다. 어진 인재를 천거하여 백관百官을 맡기며, 정사政事를 닦아서 백성百姓을 이롭게 하면 봉역封域 안에서는 제자리를 얻지 못한 자가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선왕先王들은 황색 귀막이 솜으로 귀를 막고, 앞쪽에는 면류관 줄로 빛을 가리게 하였으니, 눈과 귀가 가까운 곳에 쓰이는 것을 막고, 눈과 귀의 총명함을 사방 먼 곳까지 미루어보고 들으려 한 것이다.注+① 黈는 他口의 切이니, 黃色이다. 纊은 새 솜이다. 황색 솜으로 丸(알)을 만들어 끈을 사용하여 드리우니, 면류관에서 두 귀의 옆에 해당한다. 옛날에 황색 솜으로 귀를 막은 것은 총명함을 막아 외부의 소리를 듣지 않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旒는 옥으로 꿴 술을 드리운 것이다. 陸佃이 말하기를 “왕의 의 旒는 모두 12줄이니, 이와 같지 않으면 빛을 가리지 못한다. 여러 신하들의 면류관의 줄의 수를 이룬 것[就]은 비록 같지 않지만, 드리운 줄은 모두 눈앞을 지나간다. 就는 이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저들 가운데 불구자를 의당 양육해야 한다면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서 경내의 불구자들에게 모두 균등하게 조치를 해야 하는데, 지금 오직 도로에서 만난 사람에게만 은혜를 베푼다면 나머지 빠뜨린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물며 죄인罪人을 용서하여 유사有司가 집행하는 법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더욱 인군人君의 모습이 아니니, 애석하다. 효문제孝文帝북위北魏현군賢君이었는데도 이런 점이 있었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병주并州에 도착하자 병주자사并州刺史 왕습王襲이 다스림에 명성과 치적이 있어서 위주魏主가 그를 가상하게 여겼는데, 왕습이 백성에게 길옆에 돌비석을 많이 세우게 하여 자신의 미덕을 거짓으로 칭송하게 하였다. 위주魏主가 진노하여 왕습의 칭호를注+① 號는 통솔하는 장군의 칭호이다. 2등급 강등시켰다.
[] 9월에 낙양洛陽에 이르러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옛날 태학太學注+① 옛날 太學은 漢나라와 魏나라 때에 세운 것이다. 가서 석경石經을 관람하였는데, 장맛비가 그치지 않아 조서를 내려 제군諸軍에게 먼저 출발하게 하였다.
위주魏主가 군복을 입고 채찍을 잡고서 말을 타고 나갔는데, 군신群臣들이 말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이번 행차는 천하가 원하지 않는 일입니다. 은 폐하께서 홀로 어디로 가시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注+② 〈“臣不知陛下獨行何之”는〉 무리들이 南伐을 반대하니 혼자 가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등이 감히 죽음으로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크게 진노하여 말하기를 “나는 막 천하를 경영하여 통일을 기약하는데, 들이 누차 대계大計를 의심하는구려. 부월斧鉞을 늘 가지고 있으니, 들은 다시 말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말을 채찍질하여 나가려고 하니, 안정왕安定王 탁발휴拓跋休 등이 아울러 간절히 울면서 간언을 하자 위주魏主가 마침내 군신群臣들을 깨우치며 말하기를 “지금 군대를 일으켜 출동하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니, 움직였다가 성취함이 없다면 후대에 무엇을 보이겠는가. 만일 남벌南伐을 하지 않더라도 도읍은 여기에 옮겨야 하니, 왕공王公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천도를 원하는 자는 왼쪽으로 서고, 천도를 원하지 않는 자는 오른쪽에 서시오.”라고 하였다.
안정왕 탁발휴 등이 서로 거느리고 오른쪽으로 갔는데, 남안왕南安王 탁발정拓跋楨이 나서서 말하기를 “‘대공大功을 이룬 자는 무리와 도모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지금 폐하께서 만약 남벌南伐의 도모를 그만두신다면 낙읍洛邑으로 천도하는 것이 등의 소원이고, 백성들에게 다행스런 일입니다.”라고 하니, 군신群臣이 모두 만세萬歳를 불렀다.
당시에 구인舊人注+③ 舊人은 北魏와 北荒에서 함께 일어난 자들의 子孫을 말하니 바로 國人을 말한 것이다. 비록 내지內地로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남벌南伐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천도하는 계책을 정하였다.
[] 이충李沖이 말하기를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잠시 대도代都(평성平城)로 돌아가셔서 낙양을 건설하는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시고, 일이 준비된 뒤에 왕림하소서.”라고 하니,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말하기를 “주군州郡을 순시하여 업성鄴城에 이르러 조금 머물러 있다가 초봄에 바로 돌아올 것이니,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注+① 〈孝文帝가〉 북쪽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은 것은 北人이 代都로 돌아가면 다시 고향땅을 그리워하여 천도하는 것을 어렵게 여길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위주魏主가〉 임성왕任城王 탁발징拓跋澄을 보내 평성平城에 돌아가게 하여 평성에서 유수留守하고 있던 백관百官을 깨우치게 할 적에 〈탁발징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진실로 이라고 말할 수 있소.注+② 앞의 점괘에서 革을 만났으니, 지금의 천도는 진실로 北方의 옛날 풍속을 버리게 됨을 말한 것이다. ≪周易≫ 〈說卦〉에 “革은 옛것을 버리는 것이다.” 하였다. 왕은 여기에 힘써야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또 장군將軍 우렬于烈에게注+③ 于烈은 于栗磾의 손자이다. 평성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 북위北魏관중關中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 북지北地의 백성 지유支酉가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장안성長安城의 북쪽 〈석산石山에서〉 병사를 일으키고는 사신을 나라 양주자사梁州刺史 음지백陰智伯에게 보내어 고하자, 음지백이 병사 수천 명을 보내서 호응하였다.
진주秦州옹주雍州 등 7注+① 7州는 雍州․岐州․秦州․南秦州․涇州․邠州․華州이다. 백성이 모두 메아리가 울리듯 진동하여 무리가 10만에 이르렀는데, 각각 보벽堡壁을 지키며 나라가 구원해주기를 기다렸다. 북위北魏하남왕河南王 탁발간拓跋幹목량穆亮이 함께 싸웠으나 모두 패배하였다.
지유 등이 장안을 향하여 진격하자 노연盧淵설윤薛胤 등이注+② 盧淵은 盧度世의 아들이다. 薛胤은 薛辯의 曾孫이다. 薛辯은 薛謹의 아버지이다. 막고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니, 항복한 자가 수만 명이었다. 노연이 오직 괴수만을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죄를 묻지 않았으며, 지유를 잡아서 목을 베었다.
[] 겨울 10월에 북위北魏낙양洛陽도성都城을 세우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목량穆亮을 불러서 상서尙書 이충李沖장작대장將作大匠 동이董爾와 함께 낙양洛陽도성都城을 건설하도록 할 때에 활대성滑臺城 동쪽에 제단을 설치하여 행묘行廟천도遷都를 고하게 하였다.注+① 董爾는 ≪北史≫에 董爵으로 되어 있다. 神主를 받들고 가기 때문에 行廟를 둔 것이다.
임성왕任城王(탁발징拓跋澄)이 평성平城에 이르러 무리들이 비로소 천도한다는 것을 듣고는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다. 탁발징이 고금古今의 일을 증거로 들어 천천히 깨우치니, 무리들이 마침내 복종하였다.注+② 開는 발동한다는 뜻이다. 伏은 만족하여 굴복한다는 뜻이다. 〈“澄援引古今……衆乃開伏”은〉北人이 살고 있는 땅을 편안히 여기고 옮기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 천도에 대한 설에 몽매해서 자신의 마음을 굽히고 남을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인데, 拓跋澄이 고금의 일을 증거로 들어 깨우쳐서 어리석은 생각을 일깨워주니 만족하여 굴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음을 말한 것이다.
탁발징이 돌아와 보고를 하자 위주魏主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지난 일은 임성왕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 북위北魏왕숙王肅보국장군輔國將軍으로 삼았다.
[] 왕숙王肅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를 업성鄴城에서 뵙고 나라를 토벌할 계책을 아뢰니, 위주魏主가 그와 함께 말을 하면서 가까이 다가앉아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注+① 이해 3월에 王肅이 北魏로 도망쳐서 지금 막 魏主를 만나본 것이다. 항복한 사람들이 처음에 이르렀을 때, 君臣의 마음이 거리감이 있었는데, 말한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으므로 다가오게 하여 가까이 가서 그의 말을 들으면서 관계가 소원함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와 함께 말을 하면서 싫증이 나거나 피곤을 느끼지 않아 해가 저물도록 오랜 시간이 지나도 깨닫지 못했다. 이로부터 특별한 대우가 날로 높아져 이간질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좌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왕숙과 이야기를 하다가 한밤중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서로 만난 것이 늦었다고 말하였다.
당시에 위주魏主는 한창 예악禮樂을 부흥시키고 화풍華風(한족漢族 혹은 중원의 풍속)으로 바꿀 것을 의논하니, 모든 위의威儀문물文物이 대부분 왕숙이 제정한 것이었다.
[] 나라 익주자사益州刺史 유순劉悛(유순)이 뇌물죄에 걸려 금고禁錮를 당하였다.
[] 예전에 유순劉悛광주廣州사주司州 2자사刺史를 파면당했을 때에 모든 재산을 털어 세조世祖(소색蕭賾)에게 바치고 집안에는 쌓아둔 물건이 없었는데, 익주益州에 부임해서는 금욕분金浴盆을 만들고 나머지 물건도 이에 걸맞게 하였다.
제주齊主(소소업蕭昭業)가 즉위함에 이르러 유순이 바치는 물건이 감소하였다고 여겨注+① ≪南齊書≫ 〈劉悛傳〉에 “劉悛이 金浴盆 등을 만들어 世祖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도성에 돌아왔을 때 세조가 세상을 떠나 鬱林王(蕭昭業)이 새로 즉위하니, 마침내 유순이 바치는 물건을 줄였다.” 하였다. 화가 나서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서창후西昌侯 소란蕭鸞이 그를 구원하여 죽음을 면하였지만 오히려 죽을 때까지 금고禁錮를 당하였다.


역주
역주1 (行)[衍] : 저본에는 ‘行’으로 되어 있으나, ≪御批資治通鑑綱目≫에 의거하여 ‘衍’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 齊主立其孫昭業爲太孫 :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立太孫(太孫을 세운 것)’을 기록한 것은 3번인데, 晉나라 司馬臧, 唐나라 李重照는 모두 온당한 죽음을 맞지 못한 자들이고, 오직 蕭昭業만 1년 동안 즉위했을 뿐이다.[終綱目書立太孫三 晉臧 唐重照 皆不終者也 惟昭業立一年而已]” ≪書法≫
역주3 魏主親錄囚徒 : “앞에서는 ‘親決疑獄(직접 의심스러운 옥사를 판결하였다.)’이라고 기록하고, 여기에서 다시 ‘親錄囚徒’라고 기록하였으니 魏主(拓跋宏)는 형벌의 집행을 신중히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前書親決疑獄 於是復書親錄囚徒 魏主可謂能恤刑矣]” ≪書法≫
역주4 魏主立其子恂爲太子 : “아들 拓跋恂의 출생을 일찍이 기록하였는데 太子를 삼는 데에서는 ‘魏主’를 지적하여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탁발순은 이때에 태어난 지 11년이 지났는데,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고 태자로 세운 지 3년 만에 심지어 아버지를 어겨가며 도망을 쳐서 반란하여 恒州․朔州를 점거하려 하였다. 이처럼 그의 악행이 점차적으로 유래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태자로 세웠을 적에 ‘魏主’를 기록하고 그를 죽일 때에 ‘魏主’를 기록하였으니, 자상하지 않음을 허물한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太子를 세우는 데에 ‘主’를 지적하여 기록한 것이 4번이니(宋나라 丙申年(456)에 자세하다.) 모두 비판한 것이다.[子恂生嘗書矣 立爲太子 則斥書魏主 何 恂於是生十一年 性不好學 立之三載 至欲違父逃叛 跨據恒朔 其惡如是 所由來者漸矣 綱目立書魏主 殺書魏主 咎不詳也 終綱目立太子斥書主者四(詳宋丙申年) 皆譏也]” ≪書法≫
역주5 魏詔大擧伐齊 : “앞에서 ‘侵齊(齊나라를 침략했다.)’라고 기록하고 여기서는 다시 ‘伐(정벌했다)’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北魏가 조서만 내렸을 뿐, 事實이 아니기 때문에 ≪資治通鑑綱目≫에서 따라 기록하여 속임수임을 드러낸 것이다.[前書侵齊矣 此復書伐 何 魏詔云耳 非事實也 綱目因而錄之 以著其譎焉]” ≪書法≫“옛날에 殷나라 盤庚이 遷都할 적에 그 백성이 윗사람에게 오만하게 굴고 안일을 따라서 〈천도하는 것을 반대하여〉 서로 함께 한탄하고 원망하였다. 반경이 그 백성들을 조정으로 나아오게 하고 올라오게 하면서 왕의 뜰에서 번거롭게 있지 말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열어서 정성껏 고한 뒤에 널리 알려서 그 뜻을 숨기지 않고 정성스럽게 고하고 타이르기를 마치 가족과 父子 간에 서로 문답하듯이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도할 적에〉 하나의 법도 바꾸지 않고 한 명의 백성도 죽이지 않게 되자 백성들이 마음으로 기뻐하며 성심으로 감복하여 그 임금을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뒤에 백성들에게 살 곳을 정하여 편안하게 해주어서 中興의 공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는 백성을 위세로 승복시키는 것이 백성을 도리로 승복시키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지금 魏主(拓跋宏)가 천도를 하려고 하면서 대중들과 널리 계책을 논의하지 않고 마침내 갑자기 뜻을 결정하여 시행하였으므로 ≪資治通鑑綱目≫(鋼)에서는 ‘詔大擧伐齊’라 기록하고, 分注(目)에서는 아래에 ‘欲以脅衆(대중을 위협하려 하였다.)’는 말을 기록한 것이다. 천도의 큰 사업은 당연히 대중에게 묻고 상의하여 그 의견이 같아야 하는데, 어찌 다만 위엄으로 협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魏氏가 洛陽으로 천도한 이후에 누차 반란이 일어나고 人心이 승복하지 않아 재차 전하지 못해 마침내 쇠미하게 된 까닭이다. 아! ≪자치통감강목≫에 실린 拓跋氏가 遷都한 일을 살펴보고 〈盤庚〉 3편의 훈계를 비교한 뒤에 과거의 명철한 왕들이 큰 사업을 거행하고 큰 의혹을 결정할 때에 그들이 널리 계책을 논의하여 대중의 의견을 따르고 권세로 백성에게 강요하지 않은 사실을 알 수 있으니, 어찌 후세에서 미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아, 슬프다.[昔盤庚遷都 其民傲上從康 相與咨嗟胥怨 盤庚方且登進厥民咸造 勿䙝在王庭 敷其心腹腎腸 播告之修 不匿厥指 諄諄然告之諭之 若家人父子之相唯諾 遂至不變一法 不戮一民 莫不心悅誠服 以從其上 然後奠厥攸居 迄成中興之業 蓋服民以勢 不若服民以理故也 今魏主將欲遷都 不廣謀於衆 乃率然决意行之 故綱目書詔大擧伐齊 而分注載其欲以脅衆之語於下 夫遷都大事 自當詢謀僉同 烏可但脅之以威 此魏氏遷洛之後 所以屢形反叛 人心不服 不再傳而遂微者也 嗚呼 觀綱目所載拓䟦遷都之事 而參之盤庚三篇之訓 然後知古先哲王 擧大事 決大疑 其廣謀從衆 不彊民以勢者 豈後世所能及哉 噫]” ≪發明≫
역주6 齊主賾殂……蕭鸞爲尙書令 : “이때에 遺詔를 칭하여 조세를 감면하고 관문과 시장의 세금을 줄인 몇 가지 일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삭제한 것이다. 어째서 삭제하였는가. 蕭昭業이 蕭子良이 정치를 보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속여 遺詔라 칭하여 太傅로 삼고, 이어서 다시 이를 가탁하여 사람들에게 신임을 구하려고 하였다. 이것을 정리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삭제한 것이다.[於是稱遺詔蠲租調 減關市數事 不書 何 削之也 曷爲削之 昭業不欲子良輔政 矯稱遺詔以爲太傅 因復假此求信於人 以是爲非情也 故削之]” ≪書法≫
역주7 傖楚 : 傖은 강남 사람이 중원 사람을 경시하는 말이고, 楚는 荊州를 가리킨다.
역주8 魏主至洛陽 罷兵 : “앞에서 ‘大擧伐齊(크게 군사를 일으켜 齊나라를 정벌했다.)’라고 기록하고 여기에서는 ‘至洛陽罷兵’라고 기록하고 이어 수록하였으니, 속임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옛날의 遷都는 이와 같이 속이지는 않았다.[前書大擧伐齊 此書至洛陽罷兵 因而錄之 所以著譎也 古之遷都 不若是之欺矣]” ≪書法≫
역주9 (君)[郡] : 저본에는 ‘君’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郡’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0 (音)[盲] : 저본에는 ‘音’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盲’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1 五冕 : 천자가 제사 지낼 때 쓰는 다섯 가지 冠으로 裘冕․袞冕․鷩冕․毳冕․絺冕이다.(≪周禮≫ 〈夏官 弁師〉)
역주12 (曰)[內] : 저본에는 ‘曰’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內’로 바로잡았다.
역주13 (文)[支] : 저본에는 ‘文’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支’로 바로잡았다.
역주14 齊益州刺史劉悛坐贓禁錮 : “劉悛이 공물을 바치는 것이 감소했다는 문제로 죄를 얻었는데 ‘坐贓’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유순을 추궁하여 죄준 것이다. 공물을 올릴 때에는 일정한 수효가 있는데 유순이 3州에 刺史가 되어서는 모든 재물을 쏟아부어 世祖에게 아첨하였다가 지금에 와서 계속하지 않으니 뒤를 이은 임금이 노여워한 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坐贓’이라고 기록한 것은 아랫사람에게 각박하게 거두어 윗사람을 받드는 것을 경계한 것이니, 그 뜻이 깊다.[悛以進奉減少獲罪 書坐贓 何 追罪悛也 上供有常數 而悛刺三州 皆傾貲以媚世祖 及是不繼 嗣主怒之 綱目書曰坐贓 所以爲剝下奉上之戒也 其旨深矣]” ≪書法≫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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