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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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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年(274)
晉泰始十年이요 吳鳳凰三年이라
春正月 日食하다
◑晉詔自今不得以妾媵爲正嫡하다
晉主以近世多由內寵以登后妃하여 亂尊卑之序 有是詔注+魏三祖立卞‧郭‧毛爲后.하다
三月 日食하다
詔又取良家及小將吏女五千餘人하여 入宮選之어늘 母子號哭於宮中하니 聲聞于外러라
吳殺其章安侯奮注+章安, 卽臨海之章安也. 奮初封齊王, 後廢爲庶人, 徙章安. 漢景耀元年, 吳封章安侯.하다
吳民間訛言奮當爲天子라하니 吳主誅之하고 及其五子하다
秋七月 晉后楊氏殂하다
晉主以太子不慧 恐不堪爲嗣하여 常密以訪后注+常, 當作嘗.어늘 后曰 立子以長不以賢이니 豈可動也리오
疾篤 恐晉主更立后以危太子하여 泣而言曰 叔父駿女芷有德色하니 願以備六宮하소서하니 晉主許之注+有德色, 言有德有色也.하다
旣葬 晉主及群臣 除喪하니 博士陳逵 議以爲今時所行 漢帝權制 太子無國事하니 自宜終服이니이다
尙書杜預曰 古者天子諸侯 三年之喪 始同齊斬注+謂齊衰‧斬衰之服, 其始自天子達於庶人, 無以異也. 旣葬除服하고 諒闇以居하여 心喪終制
周公 不言高宗服喪三年而云諒闇하니 此服心喪之文也注+周公作無逸曰 “其在高宗, 作其卽位, 乃或亮陰三年.” 杜預遂引此言以爲不服喪之證.
叔向不譏景王除喪이요 而譏其宴樂已早하니 明旣葬應除而違諒闇之節也注+左傳 “景王穆后崩, 晉荀如周, 葬穆后, 旣葬, 除喪, 以文伯宴. 叔向曰 ‘王其不終乎. 吾聞之, 所樂必卒焉. 今王樂憂, 若卒以憂, 不可謂終. 王一歲而有三年之喪二焉, 於是乎以喪賓宴, 樂憂甚矣. 三年之喪, 雖貴遂服, 禮也. 王雖弗遂, 宴樂以早, 亦非禮也.’” 樂, 音洛.
君子之於禮 存諸內而已 禮非玉帛之謂 喪豈衰痲之謂乎
太子出則撫軍하고 守則監國하니 不爲無事 宜卒哭除衰痲하고 而以諒闇終三年이니이다 晉主從之하다
司馬公曰 規矩主於方圓이나 然庸工無規矩 則方圓不可得而制也
衰痲主於哀戚이나 然庸人無衰痲 則哀戚不可得而勉也
杜預巧飾經傳하여 以附人情하니 辯則辯矣 然不若陳逵之言 質略而敦實也니라
濤典選十餘年注+晉主受禪, 濤自吏部郞遷尙書, 居母喪, 復奪情起典選. 每一官缺하면 輒擇才資可爲者啓擬數人注+才謂其才足以任. 資, 謂其資序當爲者.하고 得詔旨所向然後 顯奏之
晉主所用 或非擧首注+謂非薦擧之首名也.어늘 衆以濤輕重任意 爲言호되 晉主益親愛之러라
濤甄拔人物 各爲題目而奏之하니 時稱山公啓事注+
嵇紹嵇紹
甄, 察也. 拔, 擢也.
러라
晉以嵇紹爲秘書丞注+晉制, 秘書監屬官有丞有郞.하다
康之子也 以父得罪 屏居私門이러니 至是하여 山濤薦徵之하니 紹欲辭不就어늘
濤謂之曰 爲君思之久矣注+爲, 去聲, 下同. 天地四時 猶有消息이어든 況於人乎아하니 紹乃應命하다
東關之敗注+事見漢後主延熙十五年. 文帝問寮屬曰 近日之事 誰任其咎 安東司馬王儀對曰 責在元帥注+文帝時爲安東將軍, 監諸軍. 儀, 脩之子也.니이다
文帝怒曰 司馬欲委罪孤邪아하고 斬之러니 儀子裒痛父非命하여 隱居敎授하니 三徵七辟 皆不就하고 未嘗西向而坐注+徵, 詔召也. 辟, 公府及州郡辟也. 裒居城陽, 晉朝在洛陽, 故未嘗西向.러라
廬於墓側하여 旦夕攀柏悲號하니 涕淚著樹하여 樹爲之枯注+著, 直略切.하고
讀詩至哀哀父母生我劬勞하여는 未嘗不三復流涕하니 門人爲之廢蓼莪注+三, 息暫切. 以裒悲慘, 故廢蓼莪之篇, 不敢講習.러라
家貧하되 計口而田하고 度身而蠶注+度, 大各切.하며 人或饋之어든 不受하고 助之어든 不聽하며
諸生密爲刈麥이어든 裒輒棄之하니 遂不仕而終하다
司馬公曰 昔 舜誅鯀而禹事舜 不敢廢至公也
嵇康王儀 死皆不以其罪하니 二子不仕晉室 可也 嵇紹苟無蕩陰之忠이면 殆不免於君子之譏乎注+蕩陰之戰, 嵇紹死之, 事見後惠帝永興元年.인저
吳大司馬荊州牧陸抗卒하다
抗疾病 上疏曰注+疾有加而無瘳曰病. 西陵建平 國之蕃表注+蕃, 籬也. 表, 外也. 謂二郡爲藩籬於外也. 旣處上流하고 受敵二境注+謂二郡之境, 西距巴‧夔, 北接魏興‧上庸, 二面皆受敵也.하니
若敵汎舟順流하여 星奔電邁 非可恃援他部以救倒縣이니 此乃社稷安危之機也注+縣, 讀曰懸.
臣父遜 昔上言호되 西陵 國之西門이니 雖云易守 亦復易失이라
若有不守 非但失一郡이라 荊州非吳有也 如其有虞어든 當傾國爭之라하니이다
今臣所統見兵 財有數萬이요 羸敝日久하여 難以待變注+見, 賢遍切. 財, 與纔同.이니
臣以爲諸王幼冲하니 無用兵馬하고 及黃門宦官開立占募之人注+通鑑 上年吳主悉封其子弟爲十一王, 王給三千兵. 乞特詔簡閱하여 以補疆埸受敵常處注+句.하니
使臣所部 足滿八萬하여 幷力備禦 庶幾無虞리니 臣死之後 乞以西方爲屬注+屬, 之欲切, 下同.하소서
及卒 吳主使其子晏景玄機雲으로 分將其兵이라 機雲皆善屬文이라 名重於世러라
周魴之子處 膂力絶人이나 不修細行하니 鄕里患之러니
處嘗問父老曰 今時和歲豐而人不樂 何邪오하니 父老嘆曰 三害不除하니 何樂之有리오
處曰 何謂也오하니 曰 南山白額虎 長橋蛟 幷子爲三矣注+胡三省曰 “南山, 今湖秀以南諸山也. 長橋, 在今常州宜興縣. 子, 謂周處.”
處曰 若所患止此 吾能除之리라하고 乃射虎殺蛟하고 遂從機雲受學하여 篤志讀書하고 砥節礪行하니 比及朞年 州府交辟이러라
杜預以孟津渡險으로 請建河橋於富平津注+杜佑曰 “富平津, 在河陽縣南.”한대 議者以爲殷周所都 歷聖賢而不作者 必不可立故也注+殷都河內, 周都洛, 二代夾河建都, 不立河橋, 故以爲言.
預固請爲之러니 及橋成 晉主從百寮臨會하여 擧觴屬預曰 非君이면 此橋不立이라하니
對曰 非陛下之明이면 臣亦無所施其巧라하더라
諡曰厲라하다 芳之廢也 太宰中郞陳留范粲 素服拜送하여 哀動左右러니
遂稱疾陽狂不言하고 寢所乘車하여 足不履地하며 子孫有婚宦大事 輒密諮焉하면 合者則色無變하고 不合則眠寢不安이러라
子喬等 侍疾家庭 足不出邑里러니 及晉代魏 詔以二千石祿養病하고 加賜帛百匹한대
喬以父疾篤으로 辭不敢受하니라 粲不言凡三十六年이러니 年八十四 終於所寢之車注+自邵陵厲公之廢, 至是方二十一年, 史因公卒而究言之.하다


甲午年(274)
나라 世祖 武皇帝 司馬炎 泰始 10년이고, 吳主 孫皓 鳳凰 3년이다.
[] 봄 정월에 일식이 있었다.
[] 나라가 조령을 내려 오늘 이후로 妾媵(侍妾)은 정실이 될 수 없게 하였다.
[] 晉主(司馬炎)가 근세에 안으로 총애를 받다가 后妃에 오른 이가 많아 尊卑의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조서를 내렸다.注+
[] 3월에 일식이 있었다.
[] 나라가 良家의 딸을 취하여 궁에 들였다.
[] 조령을 내려 또 良家와 하급 장령과 관리의 딸 5천여 명을 취하여 궁에 들여 선발하게 하였는데, 母子가 궁중에서 부르짖으니, 그 소리가 밖에서도 들렸다.
[] 나라가 章安侯 孫奮을 죽였다.注+章安臨海章安이다. 孫奮은 처음에 齊王에 봉해졌다가 뒤에 폐하여 庶人으로 삼고 章安으로 옮겼다. 蜀漢 景耀 원년(258)에 나라가 章安侯로 봉하였다.
[] 나라 백성들 사이에서 孫奮이 마땅히 왕이 되어야 한다는 訛言이 나돌자, 吳主(孫皓)가 손분을 죽이고 그의 다섯 아들까지 죽였다.
[] 가을 7월에 나라 황후 楊氏하였다.
[] 예전에 晉主(司馬炎)는 태자가 지혜롭지 않아 後嗣를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일찍이 몰래 황후에게 물었는데,注+으로 써야 한다. 황후가 말하기를 “후계자는 長子로써 세우니, 현명함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변동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晉主가 다시 황후를 세워 태자의 자리도 위태로워질까 염려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숙부 楊駿의 딸 楊芷가 덕과 미색을 지니고 있으니, 六宮에 충원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晉主가 허락하였다.注+有德色”은 덕과 미색이 있음을 말한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 晉主와 여러 신하들이 상복을 벗었는데, 博士 陳逵가 논의하기를 태자에게는 國事가 없으니, 끝까지 喪服을 입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尙書 杜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 천자와 제후가 三年喪에 있어서 처음에 齊衰(자최)와 斬衰(참최)를 〈백성들처럼〉 똑같이 하였지만,注+〈“始同齊斬”은〉 齊衰服斬衰服이 처음에는 天子부터 庶人까지 공통된 것이어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른다. 장례를 치른 뒤에는 상복을 벗고 諒闇(임금이 居喪에 거처하는 곳)에 거처하며 心喪으로 삼년상을 마쳤습니다.
그러므로 周公高宗이 3년간 服喪을 했다는 말을 하지 않고 諒闇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心喪을 입었다는 글입니다.注+周公을 지어 “高宗 때에는 일어나 즉위하시어 亮陰(諒闇)에서 3년 동안”이라고 하였는데, 杜預가 드디어 이 말을 끌어다 服喪하지 않는 증거로 삼았다.
叔向景王이 상복을 벗은 것을 나무라지 않았고, 그가 연회를 열어 즐기는 것이 너무 이른 것을 나무랐으니, 이미 장사를 지낸 뒤에는 응당 상복을 벗는 것이지만 諒闇에 거처하는 절차를 어긴 것을 밝힌 것입니다.注+春秋左氏傳昭公 15년에 “나라 景王穆后하자 나라의 荀躒(순력)이 나라로 가서 목후를 會葬하였는데, 경왕이 장례를 치르고 나서 상복을 벗고 文伯(순력)에게 잔치를 해주었다. 그러자 叔向이 말하기를, ‘경왕은 아마도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내 듣건대 즐기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즐기는 것으로 인해 죽게 된다고 하였다. 지금 경왕은 근심해야 할 때에 즐기고 있으니, 만일 근심으로 인해 죽는다면 제명에 죽었다고 할 수 없다. 경왕은 한 해에 삼년상을 두 번 당했으면서도 이런 때에 조문을 온 빈객과 주연을 열고 근심해야 할 때에 즐김이 심하였다. 삼년상은 비록 귀한 사람이라도 상복 기간을 마치는 것이 이다. 경왕이 비록 상복 기간을 마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잔치하여 즐김이 너무 빨랐으니 또 예에 맞지 않는 것이다.’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즐기다)은 음이 이다.
君子에 대해서는 마음에 보존하면 그뿐입니다. 玉帛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 어찌 衰痲(최마)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태자께서는 나가면 군대를 지휘하고 자리를 지키면 나라를 감독해야 하기에 나라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마땅히 卒哭을 하고 衰痲를 벗고는 諒闇에 거처하는 것으로 삼년상을 마치도록 해야 합니다.” 晉主가 그 말을 따랐다.
[] 司馬公(司馬光)이 말하였다. “그림쇠와 곱자는 네모나 원을 그리는 것을 위주로 하지만 보통 匠人은 그림쇠와 곱자가 없으면 원이나 네모를 만들 수가 없다.
衰痲(최마)는 애통함과 슬픔을 위주로 하지만, 보통 사람은 衰痲를 입지 않으면 애통함과 슬픔을 권면할 수가 없다.
杜預는 교묘하게 經傳을 수식하여 당시 사람들의 마음에 부합하였으니, 말은 참 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陳逵의 말이 질박하고 소략하지만 돈독하고 내실이 있는 것만 못하다.”
[] 나라가 山濤吏部尙書로 삼았다.
[] 山濤는 관리를 선발하는 일을 10여 년 동안 맡았는데,注+晉主禪讓을 받을 때에 山濤吏部郞에서 吏部尙書로 승진하였는데, 어머니의 喪中에 다시 出仕하게 하여 나와서 관리의 임용을 맡은 것이다. 한 명의 관리가 결원이 될 때마다 번번이 재주와 자격을 살펴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서 몇 명을 나란히 아뢰어注+는 그 재주가 임무를 맡기기에 충분한 것을 말하고, 는 그 자격이 할 만한 자를 말한다. 황제의 뜻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파악하고 난 뒤에 드러내어 上奏하였다.
晉主(司馬炎)가 등용한 사람이 혹 제일 먼저 추천되지 않은 경우에는注+〈“非擧首”는〉 薦擧에 첫 번째로 이름이 오르지 않은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산도가 輕重을 제 마음대로 한다고 말하였으나, 晉主는 그를 더욱 가까이하여 아꼈다.
산도가 인물을 살펴서 선발할 적에는 각각 인물에 대해 題目을 만들어 아뢰니, 당시에 山公啓事라고 일컬었다.注+은 살피는 것이며, 은 발탁하는 것이다.
[] 나라가 嵇紹秘書丞으로 삼았다.注+나라 제도에 의하면 秘書監屬官秘書丞秘書郞이 있다.
[] 嵇紹嵇康의 아들이다. 그의 자기 집에서 은거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山濤가 천거하여 徵召하니, 혜소는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산도가 말하기를 “그대를 위해 생각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도 동일하다. 天地四時도 오히려 消長의 변화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라고 하니, 혜소가 명에 응하였다.
예전에 東關에서 패전하였을 때,注+ 文帝(司馬昭)가 寮屬에게 묻기를 “근래의 일은 누가 그 허물의 책임을 맡아야 하는가.”라고 하니, 安東司馬 王儀가 대답하기를 “책임은 元帥에게 있습니다.”注+文帝는 이때에 安東將軍이 되어 諸軍을 감독하였다. 王儀王脩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문제가 진노하여 말하기를 “司馬(나)에게 죄를 떠넘기려 하는 것인가.”라고 하고, 목을 베었다. 왕의의 아들 王裒는 아버지가 非命에 죽은 것을 애통해하여 은거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지냈는데, 세 차례 徵召하고 일곱 차례 辟召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나라 서울이 있는〉 서쪽을 향하여 앉는 일이 없었다.注+은 조서로 부르는 것이다. 公府州郡에서 부르는 것이다. 王裒城陽에 살았는데, 나라 조정이 洛陽에 있었기 때문에 서쪽을 향해 앉지 않은 것이다.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서 아침저녁으로 측백나무를 붙들고 슬피 부르짖으니, 눈물이 나무에 묻어 나무가 그로 인해 말라 죽었고,注+(붙다)은 直略이다.
詩經≫을 읽다가 〈蓼莪篇〉의 “슬프고 슬프다. 우리 부모여! 나를 낳으시느라 수고하셨네.”라는 내용에 이르면 여러 번 반복하여 외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어서 門人들은 그를 위해 모두 〈蓼莪篇〉을 읽지 않았다.注+(여러 차례)은 息暫이다. 王裒가 슬프고 참혹했기 때문에 〈蓼莪篇〉을 폐하고 감히 강습하지 않았다.
王裒의 문인들이 〈蓼莪〉 詩를 읽기를 그만두다王裒의 문인들이 〈蓼莪〉 詩를 읽기를 그만두다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식구 수를 계산하여 농사를 지었고 자신의 처지를 헤아려 누에를 쳤으며,注+(헤아리다)은 大各이다. 어떤 사람이 혹 음식을 접대하면 받지 않았고, 도와주려고 해도 따르지 않았으며,
제자들이 몰래 보리를 베어주면 왕부는 번번이 그것을 버렸으니,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 司馬溫公(司馬光)이 말하였다. “옛날에 임금이 을 주벌하였는데 가 순임금을 섬긴 것은 감히 지극히 공적인 뜻을 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嵇康王儀는 모두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으니, 그 두 아들이 나라 황실에 벼슬하지 않는 것이 옳다. 嵇紹에게 만약 蕩陰에서 목숨을 바친 충성이 없었더라면 아마 군자의 비난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注+ 그 일은 뒤의 惠帝 永興 원년(304)에 보인다.
[] 나라 大司馬 荊州牧 陸抗하였다.
陸抗陸抗
[] 陸抗이 병이 들자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려 말하였다.注+이 악화되어 나아지지 않는 것을 이라 한다.西陵建平은 우리나라의 바깥 울타리인데,注+은 울타리이고, 는 바깥이니, 〈“蕃表”는〉 두 이 외부에서 울타리가 됨을 말한다. 〈적들이〉 이미 上流에 위치하고 있어 두 방면(북쪽과 서쪽)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注+의 경계가 서쪽으로는 에 도달하고, 북쪽으로는 魏興上庸과 접하고 있어 두 방면으로 모두 적군의 공격을 받을 것임을 말한 것이다.
만약 적들이 배를 타고 물길의 흐름을 타고 별똥별과 번개처럼 신속히 들이닥치면 다른 지역의 원조에 의지해서 위급함을 구원할 상황이 아니니, 이는 社稷의 안위가 걸린 문제입니다.注+(매달리다)으로 읽는다.
의 아비 陸遜이 옛날에 上奏하기를 ‘西陵은 우리나라의 서쪽 문이니 비록 지키기가 쉽다고 말을 하지만 역시 잃기도 쉬운 곳입니다.
만일 지키지 않는다면 다만 하나의 을 잃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荊州는 우리 나라의 소유가 아닐 것이니, 만일 근심이 생기면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서라도 이를 쟁탈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신이 거느리고 있는 현재 병사는 겨우 수만인데 여위고 지친 지가 오래되어 변란에 대처하기가 어렵습니다.注+(현재)은 賢遍이며, (겨우)는 同字이다.
신의 생각으로는 여러 왕들이 어리므로 兵馬를 사용하는 일이 없고, 또 黃門 宦官創設하여 募集한 인원들 가운데注+資治通鑑≫에 의하면 지난해 吳主子弟 11명을 다 왕으로 봉하고 왕에게는 3천 명의 병사를 주었다. 특별히 조서를 내려 선발하여 늘 적을 마주하고 있는 지역에 배치해주실 것을 바랍니다.注+여기서 를 뗀다.
신이 거느리는 부대에는 8만의 군사를 채워서 힘을 합쳐 방어하게 하시면 거의 근심이 없을 듯합니다. 신이 죽은 뒤에도 서쪽 지방에 관심을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注+(부탁하다)은 之欲이니, 아래도 동일하다.
육항이 하자 吳主가 그의 아들인 陸晏, 陸景, 陸玄, 陸機, 陸雲에게 그 병사를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 육기와 육운은 모두 글을 잘 지어 세상에서 명성이 높았다.
예전에 周魴의 아들 周處가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나 세세한 행실을 닦지 않자 鄕里에서 근심을 하였다.
주처가 父老에게 묻기를 “지금 시대는 화평하고 풍년이 들었는데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라고 하니, 부로가 탄식하기를 “세 가지 해로운 일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무슨 즐거워할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주처가 말하기를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부로들이 말하기를 “南山에 있는 이마가 흰 호랑이와 長橋에 있는 교룡과 그대를 합하여 셋이오.”注+胡三省이 말하기를 “南山은 지금의 남쪽의 여러 산이다. 長橋는 지금의 常州 宜興縣에 있다. (그대)는 周處를 말한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주처가 말하기를 “만약 근심거리가 여기에 그친다면 제가 제거할 수 있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호랑이를 활로 쏘아 죽이고 교룡을 죽이고는 이윽고 육기와 육운을 따라 수학하여 뜻을 독실하게 하고 독서를 하였으며 지조와 행실을 닦으니, 1년 정도가 되자 州府에서 서로 辟召하였다.
周處擊蛟圖周處擊蛟圖
[] 나라가 黃河에 교량을 만들었다.
[] 杜預孟津의 나루가 건너기 험한 것으로 인해 富平津黃河를 건너는 교량을 건설하기를 청하였는데,注+杜佑가 말하기를 “富平津河陽縣 남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라와 나라가 도읍한 곳에 역대의 성현들이 다리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필시 설치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 있어서입니다.”注+나라는 河內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는 洛陽에 도읍하여 나라와 나라에서는 黃河를 끼고서 都邑하였으면서도 黃河를 건너는 교량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두예가 굳게 청하였는데, 다리가 완성되자 晉主가 백관들을 거느리고 연회에 참석하여 술잔을 들고 두예에게 권하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이 다리는 설치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폐하의 명철함이 아니었다면 역시 재주를 펼치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나라 邵陵公 曹芳하였다.
[] 諡號라고 하였다. 예전에 曹芳이 폐위되었을 적에 太宰中郞陳留 사람 范粲이 흰옷을 입고서 배웅하여 슬픔이 좌우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윽고 병을 핑계 대고 겉으로 미친 척하여 말을 하지 않았으며, 타고 다니는 수레에서 잠을 자고 발로 땅을 밟지 않았고, 자손들 중에 혼인을 하거나 관직에 나아가는 큰일이 있어 그때마다 남몰래 자문을 구할 적엔 합당하면 안색에 변화가 없었고, 합당하지 않으면 잠자리를 불편해하였다.
아들 范喬 등이 집에서 병든 부친을 모시면서 발자취가 읍리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나라를 대신해 나라가 세워지고 나서 조서를 내려 2천 의 녹봉으로 병을 봉양하게 하고 비단 100필을 더 하사하자,
범교가 부친의 병이 위독한 것으로 사양하고 감히 받지 않았다. 범찬이 말을 하지 않고 산 세월이 도합 36년이었는데, 84세에 기거하던 수레에서 세상을 떠났다.注+
[] 나라가 근래 3년 동안 큰 역병이 생겼다.


역주
역주1 魏나라……되었다 : 三祖는 曹操, 曹丕, 曹叡를 말한다. 卞氏는 魏나라 조조의 두 번째 부인이었는데 나중에 王后가 되었다가 曹丕가 황제에 즉위하고 아버지 조조를 武皇帝로 추존할 때에 皇后로 격상되었다. 郭氏는 文帝 曹丕의 황후이고 毛氏는 明帝 曹叡의 황후이나 이들은 모두 正妻가 아니다.
역주2 晉取良家女入宮 : “지난해에 公卿의 딸을 후궁으로 선발하였는데 이때에 또 良家의 딸을 취하여 많게는 5천 명이나 되었다. ‘選’이라고 기록하는 것은 괜찮은 것이고, ‘取’라고 기록한 것은 심한 것이다.[往年選公卿女矣 於是復取良家女 而多至五千人 書選可也 書取甚哉]” ≪書法≫
“太王(古公亶父)이 여색을 좋아하였지만 반드시 안으로 원망하는 여인이 없게 하고 밖으로 홀아비가 없게 하였다 한 것은 孟子가 齊나라 임금을 위하여 말한 것일 뿐이다. 晉 武帝는 內寵의 色慾에 빠져서 작년에 막 ‘公卿의 딸을 선발하여 六宮을 충당하였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지금 또 ‘良家의 딸을 취하여 궁에 들였다.’라고 기록하였으니 무제가 後庭에서 놀며 술자리를 벌인 잘못은 진실로 吳나라를 평정한 이후를 기다리지 않고도 볼 수 있다. 제 몸을 잃고 나라를 망치는 것은 그 허물이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이를 기록하여 경계로 삼은 것이다.[太王好色 必使內無怨女 外無曠夫 此猶是孟子爲齊君言之耳 晉武沈溺內慾 去年方書選公卿女備六宮 今此又書取良家女入宮 則其遊宴後庭之失 固不俟平吳而後見也 喪軀亡國 咎將誰歸 書之以爲鑑耳]” ≪發明≫ “內無怨女 外無曠夫”는 ≪孟子≫ 〈梁惠王 下〉에 보인다.
역주3 지금……것입니다 : 漢 文帝의 ‘以日易月制’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231쪽에 보인다.
역주4 無逸 : ≪書經≫ 〈周書 無逸〉을 가리킨다.
역주5 (躁)[躒] : 저본에는 ‘躁’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躒’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晉山濤爲吏部尙書 : “吏部尙書는 아직까지 기록한 적이 없었는데 山濤를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 직책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이부상서를 기록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이부상서를 기록한 것은 스무 번이고(山濤‧蔡廓‧江湛‧謝莊 등이고 蔡興宗 등인데 채흥종은 두 번 기록되었으며, 〈나머지는〉 褚淵‧何戩‧王晏‧郭祚‧徐勉‧崔亮‧辛術‧徐陵‧孔奐‧牛宏‧馬周‧褚遂良‧裘光庭‧楊國忠이다.) 知選事는 세 번 기록되었다.(劉祥道‧李嶠‧宋昱) 兩晉(西晉‧東晉)에 기록된 이는 山濤 한 사람뿐이다.[吏部尙書 未有書者 書山濤 何 善其職也 書吏部尙書始此 終綱目 書以爲吏部尙書二十(山濤蔡廓江湛謝莊等 蔡興宗等 興宗再書 褚淵何戩王晏郭祚徐勉崔亮辛術徐陵孔奐牛宏馬周褚遂良裘光庭楊國忠) 知選事三(劉祥道李嶠宋昱) 兩晉所書山濤一人而已矣]” ≪書法≫
역주7 아버지……때문에 : 嵇康은 司馬昭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것은 본서 177쪽에 보인다.
역주8 이 일은……보인다 : 본서 88쪽에 보인다.
역주9 蕩陰의……전사하였으니 : 晉 惠帝 永安 원년(304)에 東海王 司馬越이 혜제를 받들고 成都王 司馬穎과 싸우다가 蕩陰에서 패하였다. 이때 嵇紹가 侍中으로서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엄호하다가 황제 옆에서 쓰러져 죽으며 그 피가 御衣를 적셨다. 사태가 안정된 뒤에 좌우의 측근이 그 옷을 세탁하려 하자, 혜제가 “이것은 嵇侍中의 피이니, 없애지 말라.[此嵇侍中血 勿去]”라고 하였다.(≪晉書≫ 〈嵇紹列傳〉)
역주10 晉作河橋 : “黃河에 교량을 만든 것을 기록한 것은 공로를 기록한 것이다. 교량을 만든 것을 기록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교량을 만든 것을 기록한 것은 세 번이다.(이해(274)의 河橋, 唐 玄宗 開元 9년(721)의 蒲津, 憲宗 元和 8년(813)의 吐蕃烏蘭)[書作河橋 記功也 書作橋始此 終綱目 書作橋三(是年河橋 唐玄宗開元九年蒲津 憲宗元和八年吐蕃烏蘭)]” ≪書法≫
역주11 晉邵陵公曹芳卒 : “이때에 邵陵厲公이 폐위된 지 21년인데, 晉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卒하였으니, 魏나라의 풍속이 여전히 후한 데에 가까웠기 때문에 기록하여 허여한 것이다.[於是邵陵廢二十一年矣 及晉始卒 魏之俗 猶近厚也 故書予之]” ≪書法≫
역주12 邵陵厲公이……것이다 : 曹芳이 司馬師에게 폐위된 것이 嘉平 6년(254)이고 卒한 것이 이해(274)이므로 그 기간이 햇수로 21년이다. 그리고 范粲의 生沒이 202년에서 285년인데, 조방이 卒한 이후 범찬은 햇수로 12년을 더 산 것이다. 모두 합해도 33년을 넘기지 못하는데 여러 기록에는 36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13 吳比三年大疫 : “≪資治通鑑綱目≫에서 역질을 기록한 것이 열다섯 번인데, ‘比三年’이라고 기록한 것은 아직 없었다. 3년 동안의 큰 疫疾에 백성들이 어떠했겠는가. 吳나라의 멸망이 분명한 것이다.[綱目書疫十五 未有書比三年者 三年大疫 民何如哉 吳之亡決矣]” ≪書法≫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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