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는 老莊의 글을 좋아하지 않아서 말하기를 “이는 속이는 말이라
注+② 聖賢에 의탁하여 그 설을 펴는 것을 矯라고 하고, 聖賢에게 이런 일이 없었는데 말을 가탁하여 비난을 더하는 것을 誣라고 한다., 人情에 가깝지 않다. 老聃(老子)이 예를 익힌 것은 仲尼(孔子)가 스승으로 여길 정도였으니
注+③ 孔子가 老聃을 스승으로 섬겼다는 설은 ≪莊子≫에서 시작되었다. 장자가 老子를 스승으로 섬겼기 때문에 그 저서에 유독 노자를 추대하고 심지어 공자의 말을 가설하여 노자를 칭찬하였다. 漢나라 유학자가 ≪禮記≫를 纂輯하면서 그 말을 받아 말하기를 “노담에게서 들었다.”라고 하였고, 司馬遷의 ≪史記≫ 〈老子列傳〉에서는 다시 노자가 공자를 가르친 말을 많이 더하였고, 孔鮒가 ≪孔子家語≫를 지을 적에 공자의 事跡을 기록하였는데 이(공자가 노자에게 배웠다는 말)에 의거하여 증명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후학들의 믿음이 견고해져서 ≪莊子≫ 한 책에 터무니없는 寓言이 많은 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는 공자와의 거리가 멀지 않아 천하가 그의 학문을 존숭할 줄 알았다. 그러므로 당시 가장 중시된 자(공자)에 의탁하여 자신들의 스승을 높여서 노담의 道가 더욱 융성하기를 바랐으니, 이는 장자가 공자를 물리치고 노자를 높인 흔적이다.
후대의 유학자들은 ≪예기≫․≪공자가어≫․≪사기≫가 ≪장자≫ 이후에 나온 것을 알지 못하였고, ‘공자가 노담에게 예를 물었다.’는 한마디 말이 또다시 여러 글에 자세히 보이니, 이 때문에 그 말들이 ≪장자≫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자세히 알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노자의 가르침이 禮學을 꺼려 업신여겨 말하기를 “禮는 忠信이 야박해진 것이고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시초이다.”라고 하며, 장자가 그 학문을 전함에, 그를 따라서 말[斗]을 부수어버리고 저울대를 꺾고, 仁義를 몽둥이로 쳐버리고, 부절을 태우며 옥새를 깨버리고, 聖明함을 단절하며 지혜를 버려야 한다는 등의 논의를 한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노담에게 또다시 어찌 물을 만한 예가 있겠는가. 太史公(司馬遷)이 道家는 虛無를 體로 삼고 因循을 用으로 삼으며, 법이 있으나 법이 없다고 여기고 度가 있으나 度가 없다고 여긴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후대에 노자와 장자를 종주로 하는 자들은 禮法을 쓸어버리고 쑥대머리와 때 묻은 얼굴을 하고 喪中에 고기와 술을 마셨으니 晉나라 시기에 증명할 수 있다. 어찌 예로 공자를 가르치고서 그 무리들을 힘쓰게 하는 것이 이처럼 다름이 있는가. 공자는 남에게 善이 있는 것에 대해 예컨대 管仲의 어짊과 子產의 은혜를 모두 자주 칭찬하기에 겨를이 없었는데, 어찌 노담을 스승으로 삼고서 일부러 칭찬을 매몰시켰겠는가. 이것이 ≪장자≫의 寓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자가 노담을 스승으로 섬겼다는 일을 말하자면 ≪장자≫ 〈外篇〉에 노담이 周나라 藏史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藏’은 도서를 보관하는 곳이니, 혹자는 노담이 관장하는 책이 많아 孔子가 그 때문에 가서 노담에게 예를 물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만약 사실이라면〉 에 어찌 한 마디 말도 노담을 언급한 것이 없으며, 노담의 예가 그 무리들에게 모두 전해져서 그들이 명예와 예법을 버리며 禮教를 쓸어버린 죄인이 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겠는가.張道陵 , 어찌 예법을 무너뜨리는 글을 써서 先王의 治道를 어지럽혔겠는가.”라고 하였고, 더욱이 佛法을 믿지 않아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 오랑캐의 神을 섬기는가.”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