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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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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主義符景平元年이요 魏泰常八年이라
春正月 魏取宋金墉하다
魏于栗磾攻金墉하니 河南太守棄城走어늘 魏主以栗磾爲豫州刺史하여 鎭洛陽하다
宋以廓爲吏部尙書하니 廓謂傅亮曰 選事若悉以見付하면 不論注+句.이어니와 不然이면 不能拜也注+不論者, 不復置議論於辭受之際也.리라
亮以語徐羨之한대 羨之曰 黃散以下 悉以委蔡어니와 以上 故宜共參同異注+黃․散, 謂黃門侍郞及散騎常侍․侍郞也.니라
廓曰 我不能爲徐干木署紙尾라하고 遂不拜하니 干木 羨之小字也注+爲, 去聲.
選案黃紙 錄尙書與吏部尙書連名이라 故廓云然注+選按, 選曹文按也.하니라
沈約曰注+約, 吳興武康人. 仕至梁尙書令, 齊永明中, 披勑撰宋書. 廓固辭銓衡 恥爲志屈이니 豈不知選錄同體하여 義無偏斷乎注+吏部典選, 錄尙書兼錄諸曹尙書事.리오 良以主闇時難으로 不欲居通塞之任하니 遠矣哉注+銓衡之任, 得其人則賢路通, 不得其人則賢路塞.
魏以刁雍爲青州刺史하다
宋檀道濟軍于彭城이러니 魏叔孫建入臨淄 所向奔潰어늘 宋青州刺史竺夔聚民하여 保東陽城하고 不入城者 使各依據山險하여 芟夷禾稼하니 魏軍至 無所得食이라
刁雍見魏主於鄴한대 魏主曰 叔孫建等入青州 民皆藏避하고 攻城不下하니 彼素服卿威信이라 今遣卿助之注+雍先聚兵河濟之間.하노라
乃以爲刺史하여 給騎하고 使行募兵하여 以取青州하니 魏兵濟河하여 向青州者凡六萬騎 雍募兵得五千人하고 撫慰士民하니 皆送租供軍이러라
二月 하다
柔然宼魏邊이어늘 魏築長城하여 自赤城으로 至五原 二千餘里 置戍以備之하다
涼吐谷渾 入貢于宋하다
◑魏攻宋虎牢하여 不克하니 殺其將公孫表하다
魏奚斤公孫表等 共攻虎牢할새 魏主自鄴遣兵助之러니 毛德祖於城內穴地入七丈하고 分爲六道하여 出魏圍外하고
募敢死士四百하여 從穴中出하여 襲其後하다 魏兵驚擾하니 斬首數百하고 焚其攻具而還이러니 魏兵退散復合한대 攻之益急하다
斤別攻潁川太守李元德於許昌하여 敗之하니 德祖出兵하여 與表大戰하여 從朝至晡하여 殺魏兵數百이러니 會斤自許昌還하여 合擊德祖하여 大破之하다
德祖在北 與表有舊注+德祖本滎陽人. 武帝未取關洛, 德祖自北來歸.러니 表有權略하니 德祖患之하여 乃與交通音問하고 密遣人說奚斤하여호되 表與之連謀하고
每答表書 輒多所治定하니 表以書示斤한대 斤疑之以告魏主하니 魏主使人夜就帳中縊殺之하다
魏攻宋東陽城이어늘 宋檀道濟帥師救之하다
魏主如東郡陳留하고 叔孫建將三萬騎하여 逼東陽城하니 城中文武纔一千五百人이라 竺夔及濟南太守垣苗悉力固守하고 時出奇兵擊魏하여 破之러니
魏步騎繞城列陳十餘里하여 大治攻具注+陳, 讀曰陣.어늘 夔作四重塹하니 魏人塡其三重하고 爲撞車以攻城이어늘 夔遣人從地道中出하여 以大麻絙挽之令折하다
魏人復作長圍하여 進攻逾急하니 歷久城壞하여 戰士多死러니 檀道濟至彭城이나 以司青二州竝急하고 而所領兵少하니 不足分赴
青州道近하고 竺夔兵弱일새 乃與王仲德兼行先救之하다
夏四月 하다
魏主遣幷州刺史伊樓拔하여 助奚斤攻虎牢注+樓, 與婁同. 伊樓, 虜複姓.어늘 毛德祖隨方抗拒하여 頗殺魏兵이나 而將士稍零落이러라
四月 魏主如成皐하여 絶虎牢汲河之路注+北史 “虎牢乏水, 城內懸綆汲河. 魏主令連艦, 上施轒轀, 絶其汲路.” 轒轀, 攻城之車.하고 停三日 自督衆攻城이나 竟不能下하고 遂如洛陽하여 觀石經하고 遣使祀嵩高注+石經, 後漢蔡邕所書者. 嵩高, 中嶽也.하다
魏攻東陽城이나 不克而退하고 留刁雍戍尹卯하다
叔孫建攻東陽하여 墮其北城三十許步注+墮, 讀曰隳.하니 刁雍請速入호되 建不許하니 遂不克이러니 及聞檀道濟等將至하고 雍又謂建曰
賊畏官軍突騎하니 以鎻連車爲函陳하소서 大峴已南 處處狹隘하여 車不得方軌注+陳, 讀曰陣. 函陳, 方陳也. 雍請將所募兵五千하여 據險以邀之 破之必矣리라
時天暑하니 魏軍多疫이라 建曰 兵人疫病過半한대 若相持不休 兵自死盡이니 何須復戰이리오 今全軍而返 計之上也
道濟軍於臨朐어늘 建等燒營及器械而遁하니 道濟以糧盡으로 不能追하다
竺夔以東陽城壞하여 不可守 移鎭不其城注+其, 音基. 不其縣, 前漢屬琅邪郡, 後漢屬東萊郡, 晉屬長廣郡.하다 魏留刁雍鎭尹卯하니 招集民五千餘家하여 置二十七營以領之注+水經 “濟水自須昌縣西北逕漁山東, 又北過穀城縣西.” 註云 “濟水側岸有尹卯壘, 南去漁山四十餘里. 是穀城縣界, 故春秋之小穀城也.”하다
諸蠻入貢於魏하다
諸蠻居江淮間이러니 其後種落滋蔓하여 東連壽春하고 西通巴蜀하고 北接汝潁이라 在魏世不甚爲患이러니 及晉 稍益繁昌하여 漸爲寇暴러니
及劉石亂中原 諸蠻漸復北徙하여 伊闕以南 滿於山谷矣注+據史, 此諸蠻乃盤瓠之後也.러라
涼攻晉昌하여 克之하다
唐契及甥李寶奔伊吾하여 招集遺民하다 歸附者二千餘家어늘 臣於柔然하다 恂弟子也
秦遣使入貢於魏하다
秦王熾磐謂群臣曰 今宋雖奄有江南하고 夏人雄據關中이나 皆不足與也 獨魏主奕世英武하고 賢能爲用하니 吾將擧國而事之하리라
乃遣使入見於魏하여 貢黃金二百斤하고 幷陳伐夏方略하다
閏月 하고 遂取司豫諸郡하다
叔孫建就奚斤하여 共攻虎牢하니 虎牢被圍二百日 無日不戰이라 勁兵殆盡하고 而魏增兵轉多하여
毀其外城하니 德祖於內更築三重城以拒之러니 又毀其二重하니 德祖唯保一城하여 晝夜相拒하니 將士眼皆生創호되 德祖撫之以恩하니 終無離心注+人夜不得睡, 則眼眊燥, 以手揩之則生創.이러라
檀道濟劉粹等 皆畏魏兵彊하여 不敢進이라 魏人作地道하여 以洩城中井하니 城中人馬渇乏하여 被創者不復出血하고 重以飢疫注+重, 直用切.이러니
魏仍急攻之하여 城遂陷하다 將士欲扶德祖出走한대 德祖曰 我誓與此城俱斃하니 義不使城亡而身存也리라
魏主命將士호되 得德祖者어든 必生致之하라 將軍豆代田執以獻注+豆, 姓也.하고 將佐皆爲所虜한대
唯參軍范道基將二百人하여 突圍南還하고 魏士卒疫死者亦什二三이러라
奚斤等 悉定司兗豫諸郡縣하니 置守宰以撫之注+是時司州之地, 盡入於魏. 兗州之地, 自湖陸以南, 豫州之地, 自項城以南, 皆爲宋守, 魏未能悉定諸郡縣也.하다 魏主命周幾鎭河南하니 河南人安之러라
徐羨之傅亮謝晦以亡失境土 上表自劾이나 詔勿問하다
秋七月 柔然攻北涼하여 殺其世子政德하다
◑冬十月 魏廣西宮注+平城西宮也. 魏主珪天賜元年所築.하다
外垣周二十里러라
十一月 魏取宋許昌汝陽하다
注+壽, 三十二.하니 太子燾立하다
魏太宗殂하고 世祖即位하니 自司徒長孫嵩以下普增爵位하고 以盧魯元爲中書監하고 劉絜爲尙書令하고 尉眷劉庫仁等八人分典四部注+此又一劉庫仁, 非什翼犍所用之劉庫仁也. 四部, 東西南北四部也.하다
以羅結爲侍中外都大官하고 總三十六曹事하니 結時年一百七이로되 精爽不衰하니
燾以其忠慤으로 親任之하여 使兼長秋卿하여 監典後宮하고 出入臥內러니 年一百一十 乃聽歸老하고 朝廷每有大事 遣騎訪焉이러니 又十年乃卒하다
魏光祿大夫崔浩研精經術하고 練習制度하니 凡朝廷禮儀 軍國書詔 無不關掌注+硏精者, 窮其精力.이러라
不好老莊書하여 曰 此矯誣之說이라 不近人情注+託聖賢以伸其說, 謂之矯, 聖賢無是事, 寓言而加詆, 謂之誣.하니 老聃習禮 仲尼所師 豈肯爲敗法之書하여 以亂先王之治乎注+孔子師老聃之說, 肇於莊子. 莊子師老子, 故其著書, 獨推老子, 甚至假設孔子言語譽之. 漢儒輯禮記承其言曰 “聞諸老聃.” 司馬遷史記老子傳, 復增許多老子訓誨孔子言語. 孔鮒作家語, 著孔子事實, 因據以爲證. 由是堅後學之信, 不知莊子一書多駕空寓言. 時去孔子未遠, 知天下崇信其學, 故託時所最重者尊其師, 庶幾聃之道益隆, 此莊子抑孔子尊老子之迹也. 後儒不察禮記家語史記出莊子後, 而問禮老聃一語, 又備見諸書, 莫詳始自莊子. 不知老子之教厭薄禮學曰 “禮者, 忠信之薄亂之首也.” 莊子傳其所學, 從而有 等論, 則聃又何有禮之可問耶. 太史公謂 故後之宗老莊者, 蕩棄禮法, 蓬首垢面, 喪酒弔肉, 晉代可證已. 豈有以禮訓孔子, 而勖其徒則異是耶. 孔子於人之有善, 若管仲之仁․子產之惠, 皆亟稱不暇, 豈有聃其師而故沒之耶. 此爲莊子寓言無疑. 若孔子師聃之事, 莊子外篇著 藏, 書之所. 或者, 聃所掌多書, 孔子因往問聃焉, 容有此理. 不然. 魯論, 何無一言及聃, 而聃之禮, 何不盡傳其徒, 而甘爲棄名檢蕩禮教之罪人耶. 尤不信佛法하며 曰 何爲事此胡神이리오
左右多毀之하니 魏主不得已하여 命浩以公歸第 然素知其賢이라 有疑議 輒召問之러라
浩纖妍潔白 如美婦人하니 常自謂才比張良而稽古過之러니 旣歸第 因修服食養性之術하다
嵩山道士寇謙之 修張道陵之術注+謙之, 讚之弟也. 道陵, 後漢人, 修五斗米道, 俗所謂天師也.하고 自言嘗遇老子降하여 命繼道陵爲天師하고 授以辟穀輕身之術하여 使之清整道敎注+辟, 除也. 輕身之術, 卽遙興輕擧之케하고
又遇神人李譜文이어늘호되 老子之玄孫也 授以圖籙眞經하여 使之輔佐北方太平眞君하고 出天宮靜輪之法注+圖籙眞經, 道家仙籍之書也.하니
謙之奉其書하여 獻於魏主하니 朝野多未之信호되 浩獨師受其術하고 且上書曰
聖王受命 必有天應하니 河圖洛書皆寄言於蟲獸之文이라 未若今日人神接對하여 手筆粲然하며 辭旨深妙하니 自古無比 豈可以世俗常慮而忽上靈之命哉
帝欣然使謁者 奉玉帛牲牢하여 祭嵩嶽하고 迎致謙之弟子하여 以崇奉天師하고 顯揚新法하다
起天師道場於平城東南하니 重壇五層이라 月設廚會數千人注+水經注 “濕水南逕平城之東, 水左有大道壇, 寇謙之所建也. 濕水卽灅水.”이러라
司馬公曰 老莊欲同死生하여 輕去就하니 而爲神仙者 服餌修鍊하여 以求輕擧하고 鍊草石爲金銀하니 其爲術正相戾矣注+谷永說漢成帝曰 “諸言世有仙人, 服食不終之藥, 遙興輕擧, 登遐倒景, 覽觀縣圃, 浮遊蓬萊, 黃冶變化, 皆姦人惑衆, 挾左道, 懷詐僞, 以欺罔世主.” 服餌修鍊以求輕擧, 卽谷永所謂服食不終之藥遙興輕擧者也. 鍊草石以爲金銀, 卽谷永所謂黃冶變化者也.
是以劉歆七略敍道家爲諸子하고 神仙爲方技注+以其相戾, 故七略不得合爲一.하고 其後復有符水禁呪之術注+符水․禁呪, 卽張道陵之術.이러니 至謙之하여 遂合而爲一하여 至今循之하니 其訛甚矣
浩不喜佛老而信謙之之言 何哉


宋主 劉義符 景平 원년이고, 北魏 太宗 明元帝 拓跋嗣 泰常 8년이다.
[綱] 봄 정월에 北魏가 宋나라 金墉을 점령하였다.
[目] 北魏의 于栗磾가 金墉을 공격하니 河南太守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魏主가 우율제를 豫州刺史로 삼아서 洛陽에 鎭守하게 하였다.
[綱] 宋나라가 蔡廓을 吏部尙書로 삼으니 〈채확이〉 받지 않았다.
[目] 宋나라가 蔡廓을 吏部尙書로 삼았는데, 채확이 傅亮에게 말하기를 “관리를 선발하는 일이 만약 전부 나에게 맡겨진다면 다시 논의할 것이 없지만注+① 여기서 句를 뗀다.注+② “不論”은 벼슬을 사양하고 받는 때에 다시 의논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임명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부량이 이것을 徐羨之에게 말하자 서선지가 말하기를 “黃門侍郞․散騎常侍․散騎侍郞注+③ “黃․散”은 黃門侍郞과 散騎常侍․散騎侍郞을 말한다. 이하는 다 채확에게 전담시키더라도 그 이상의 관원은 같고 다른 점에 대해 공동으로 논의해야 한다.”라고 하니,
채확이 말하기를 “나는 徐干木을 위하여注+④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임명하는 서류 끝에 서명할 수 없다.”라고 하여 마침내 임명되지 않았다. 干木은 서선지의 아명이다.
관리를 임명하는 문안이注+⑤ “選按”은 選曹(吏部)의 공문서이다. 쓰인 黃紙에 錄尙書와 吏部尙書가 공동으로 署名을 하였으므로 채확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目] 沈約이注+① 沈約은 吳興 武康 사람이다. 벼슬이 梁나라 尙書令에 이르렀고 齊나라 永明 연간에 칙서를 받아 ≪宋書≫를 편찬하였다.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蔡廓이 굳게 銓衡하는 일을 사양한 것은 뜻을 굽히는 것을 부끄러워한 것이니, 어찌 吏部尙書와 錄尙書가注+② 吏部는 인재의 선발을 관장하고, 일체가 되어 원칙상 편파적인 결정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참으로 군주가 어리석고 시대가 어려웠기 때문에 인재를 소통시키고 막히게 하는 선발 임무에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니, 원대하구나.”注+③ 인재를 선발하는 임무에서 적당한 사람을 얻으면 현인이 벼슬할 길이 통하게 되고,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현인이 벼슬할 길이 막히게 된다.
[綱] 北魏가 刁雍(조옹)을 青州刺史로 삼았다.
[目] 宋나라 檀道濟가 彭城에 주둔하였다. 北魏의 叔孫建이 臨淄에 들어갔는데 향하는 곳마다 宋나라 군사들이 무너졌다. 宋나라 靑州刺史 竺夔가 백성을 모아서 東陽城을 지키고, 성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각각 험준한 산에 의지하면서 벼를 베게 하니, 북위의 군대가 도착하였을 때에 먹을 것을 얻을 수 없었다.
刁雍이 魏主를 鄴城에서 알현하였는데, 魏主가 말하기를 “숙손건 등이 靑州에 쳐들어갔을 적에 백성은 모두 숨고 피하고,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저들은 평소 경의 위엄과 신망에 승복하고 있으니, 지금 경을 파견하여 그를 돕게 하겠다.”注+① 刁雍이 먼저 黃河와 濟水 사이에서 병사를 모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옹을 靑州刺史로 삼아 기병을 주고 행군하면서 군사를 모집하여 靑州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황하를 건너서 靑州로 향하는 北魏의 병사가 모두 6만 기병이었다. 조옹이 군사를 모아 5천 명을 얻고 士民을 안무하고 위로하니, 모두 租糧을 보내와서 군대에 공급하였다.
[綱] 2월에 北魏가 長城을 쌓았다.
[目] 柔然이 北魏의 변경을 침략하였는데, 北魏가 長城을 쌓아서 赤城에서 五原에 이르기까지 2천여 리에 수비 군사를 두어 대비하였다.
[綱] 北涼과 吐谷渾(토욕혼)이 宋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綱] 北魏가 宋나라의 虎牢를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니, 그 장군 公孫表를 죽였다.
[目] 北魏의 奚斤․公孫表 등이 함께 虎牢를 공격할 적에 魏主가 鄴城으로부터 군사를 파견하여 그들을 도왔다. 毛德祖는 성안에서 땅속으로 굴을 뚫고 7丈을 들어가서 나누어 여섯 개의 길을 만들어 北魏의 포위망 밖으로 나갔다.
결사대 4백 명을 모집하여 굴을 통하여 나와서 北魏 군사들의 배후를 습격하였다. 北魏의 군대가 놀라 동요하니 참수한 것이 수백 급이고, 그들의 功城 무기를 불사르고 돌아왔다. 北魏의 병사들이 물러나 흩어졌다가 다시 결합하자 공격을 더욱 급하게 하였다.
해근이 다른 길로 가서 許昌에서 潁川太守 李元德을 공격하여 패배시키니, 모덕조가 군사를 내보내어 공손표와 크게 싸워서 아침부터 晡時(오후 3~5시)에 이르도록 北魏의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마침 해근이 허창에서 돌아와서 연합하여 모덕조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目] 처음에 毛德祖가 북방에 있을 때注+① 毛德祖는 본래 滎陽 사람이다. 모덕조가 북방에서 歸附하였다. 公孫表와 친분이 있었다. 공손표는 권모술수가 있었는데, 모덕조가 그것을 걱정하여 마침내 그와 함께 서로 편지를 왕래하면서 몰래 사람을 보내어 해근을 설득하기를 “공손표가 모덕조와 함께 연합하여 음모를 꾸민다.”라고 하였다.
모덕조가 공손표에게 편지로 답할 때마다 번번이 고친 곳이 많았다. 공손표가 편지를 해근에게 보였는데, 해근이 〈고친 흔적이 많은 것을〉 의심하고서 魏主에게 보고하였다. 魏主가 사람을 보내 밤에 그의 장막 안에서 목을 졸라 죽였다.
[綱] 北魏가 宋나라 東陽城을 공격하였는데, 宋나라 檀道濟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다.
[目] 魏主가 東郡․陳留로 갔고, 北魏의 叔孫建이 3만 기병을 거느리고 東陽城을 압박하니, 성안에 있는 문무관원이 겨우 1,500명이었다. 竺夔와 濟南太守 垣苗가 힘을 다하여 굳게 지켰고, 때로 奇兵을 내보내어 北魏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북위의 보병과 기병이 성을 둘러싸고 10여 리만큼 진을 펼치고서注+① 陳(진을 치다)은 陣으로 읽는다. 攻城 도구를 크게 정비하였는데, 축기가 네 겹의 해자를 만들어 방어하였다. 북위의 군사들이 그중 세 겹을 메우고, 撞車(성을 공격하는 수레)를 만들어서 성을 공격하였는데, 축기가 사람들을 보내어 지하도 속에서 나와서 굵은 삼밧줄로 撞車를 당겨서 무너뜨리도록 하였다.
北魏의 군사들이 다시 성을 에워싸는 긴 축대를 만들어서 더욱 급히 공격하니, 시간이 한참 지나 성이 무너져서 戰士는 대부분 죽거나 다쳤다. 檀道濟가 彭城에 도착하였지만, 司州와 靑州 두 주가 모두 급박하였고 통솔하는 병사가 적어 군대를 나누어 가기에는 부족하였다.
撞車撞車
靑州는 길이 가깝고 축기의 병사가 약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王仲德과 함께 행군 속도를 배가하여 먼저 東陽城을 구원하였다.
[綱] 여름 4월에 魏主가 虎牢를 공격하였지만 승리하지 못하였다.
[目] 魏主가 并州刺史 伊樓拔을注+① 樓는 婁와 같다. 伊樓는 오랑캐의 複姓이다. 파견하여 奚斤을 도와 虎牢를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毛德祖가 정세에 따라 항거하며 북위의 병사를 꽤 많이 죽였으나 자신의 장병들도 점차 손실을 입었다.
4월에 魏主가 成皐에 가서 虎牢城에서 황하의 물을 긷는 길을 차단하였다.注+② ≪北史≫에 “虎牢城에 물이 모자라자 성안에서 두레박줄을 매달아 河水를 길었다. 魏主가 함선을 연이어 놓게 하고 위에 轒轀을 설치하여 그 물 긷는 길을 단절하였다.”라고 하였다. 轒轀은 城을 공격하는 수레이다. 3일간 머물면서 직접 군대를 독려하여 성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항복시키지 못하고, 마침내 洛陽으로 가서 을 관람하고서 사신을 파견하여 嵩高山에 제사를 지냈다.注+③ 石經은 後漢 때 蔡邕이 쓴 것이다. 嵩高는 中嶽이다.
[綱] 北魏가 東陽城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여 퇴각하고, 刁雍을 남겨서 尹卯를 지키게 하였다.
[目] 北魏의 叔孫建이 東陽城을 공격하여 그 성의 북쪽을 30여 步 가량 무너뜨렸는데注+① 墮(무너뜨리다)는 隳로 읽는다., 刁雍이 속히 진입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숙손건이 허락하지 않으니, 마침내 승리하지 못하였다. 檀道濟 등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옹이 또 숙손건에게 말하기를
“적들은 官軍의 돌격 기병대를 두려워하니 쇠사슬로 연결한 수레를 가지고 函陣(方陣)을注+② 陳(진치다)은 陣으로 읽는다. 函陳은 方陣(정방형으로 만든 진)이다. 만드십시오. 大峴 이남은 곳곳마다 좁고 험하여 수레가 나란히 갈 수 없습니다. 저 조옹은 청하오니, 모집한 군사 5천 명을 거느려서 험준한 곳을 점거하였다가 그들을 요격하면 반드시 격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날씨가 더워 北魏의 군사들 중에는 전염병에 걸린 자들이 많았다. 숙손건이 말하기를 “군사 중에 전염병 환자가 절반을 넘는데, 만약 서로 버티면서 쉬지 않으면 병사는 저절로 죽어 없어질 것이니, 하필 다시 싸우겠는가. 지금 군대를 온전하게 보존하여 돌아가는 것이 최상의 계책이다.”라고 하였다.
단도제가 臨朐에 주둔하자 숙손건 등은 병영과 공성 무기를 불태우고 도망치니, 단도제는 양식이 고갈되어 쫓을 수가 없었다.
竺夔는 東陽城이 무너져 수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不其城으로注+③ 其는 음이 基이다. 不其縣은 前漢 때에는 琅邪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東萊郡에 속하였으며, 晉나라 때에는 長廣郡에 속하였다. 鎭을 옮겼다. 北魏는 조옹을 남겨서 尹卯를注+④ ≪水經注≫에 “濟水는 須昌縣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漁山의 동쪽을 경유하고, 또 다시 북쪽으로 흘러 穀城縣 서쪽을 통과한다.”라고 하고, 그 註에 이르기를 “濟水 측면 연안에 尹卯壘가 있으니 남쪽으로 漁山과의 거리가 40여 리이다. 이곳은 穀城縣 경계이니, 옛날 春秋時代에 小穀城이 있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진수하게 하니, 백성 5천여 가구를 불러 모아 27개 군영을 설치하고서 그들을 관장하였다.
[綱] 여러 蠻族들이 北魏에 조공을 바쳤다.
[目] 처음에 여러 蠻族들이 長江․淮河 사이에서 거주하였는데 그 후에 종족의 부락이 점점 늘어나서 동쪽으로 壽春에 이어졌고 서쪽으로 巴․蜀을 통하였고 북쪽으로 汝水․潁水와 접하게 되었다. 曹魏 때에는 그다지 근심거리가 되지 않았는데, 晉나라에 미쳐서는 더욱 번창하여 점점 침략하고 약탈하는 것이 심해졌다.
劉淵․石勒이 中原을 어지럽히자 여러 蠻族들이 점점 다시 북으로 옮겨와서 伊闕의 이남 지역에는 산과 계곡에 가득히 살았다.注+① ≪史記≫에 따르면 여기의 여러 만족들은 의 후손이다.
[綱] 北涼이 晉昌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目] 唐契와 생질 李寶가 伊吾로 도망하여 遺民을 불러 모았다. 귀의한 자가 2천 여 家戶나 되었는데, 柔然에 臣屬하였다. 李寶는 李恂의 조카이다.
[綱] 西秦이 사신을 파견하여 北魏에 조공을 바쳤다.
[目] 西秦王 乞伏熾磐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宋나라가 비록 江南을 소유하고 있고 夏나라 사람들이 關中에 웅거하고 있지만 모두 함께하기에 부족하다. 오직 魏主가 대물려 영명하며 용감한데다 賢能한 사람을 등용하니, 내가 장차 나라를 들어서 北魏를 섬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사신을 파견하여 北魏에 入朝하여 황금 200근을 바치고, 아울러 夏나라를 공격할 계책을 올렸다.
[綱] 윤4월에 北魏가 虎牢를 함락시키고, 宋나라 司州刺史 毛德祖를 사로잡고 마침내 司州․豫州의 여러 군을 차지하였다.
[目] 叔孫建이 奚斤에게 가서 함께 虎牢를 공격하였다. 虎牢는 포위된 지 200일 동안 하루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어서 강한 군사는 거의 다 없어지고 北魏에서는 병사를 증강시켜 더욱 많아졌다.
北魏가 그 외성을 무너뜨리자 毛德祖가 성안에 다시 세 겹의 성벽을 쌓아서 그들을 막으니, 〈北魏의 병사들이〉 또 그 가운데 두 겹을 무너뜨렸다. 모덕조가 한 개의 성벽만 보전하여 밤낮으로 막았는데, 장수와 병사의 눈에 모두 상처가 생겼으나注+① 사람이 밤에 잠을 자지 못하면 눈이 흐려지고 건조해져서 손으로 눈을 비비면 상처가 생긴다. 모덕조가 그들을 은정으로 위무하니 끝내 이반하는 마음이 없었다.
檀道濟와 劉粹 등이 모두 北魏 군사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北魏의 병사들이 지하도를 만들어서 성안에 있는 우물이 새어나가도록 하자, 성안에 있는 사람과 말은 목이 마르고 상처를 입은 사람은 다시 피가 나오지 않았으며, 거듭注+② 重(거듭)은 直用의 切이다.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하였다.
北魏는 이를 이용하여 급하게 공격하여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장수와 병사가 모덕조를 부축하며 성을 빠져나가려고 하였으나 모덕조가 말하기를 “나는 이 성과 함께 죽기로 맹세하였으니, 의리상 城을 잃고 내 몸만 보존하지 않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장수와 병사에게 명령하기를 “모덕조를 잡게 되면 반드시 산 채로 데리고 오라.”라고 하였다. 장군 豆代田이注+③ 豆는 姓이다. 모덕조를 잡아서 바쳤고, 장수와 보좌관이 모두 北魏의 포로가 되었다.
오직 參軍 范道基가 2백 명을 거느려서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北魏의 사졸 가운데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또한 열 명 가운데 두세 명이었다.
해근 등이 司州․兗州․豫州에 있는 여러 郡縣을 다 평정하니注+④ 이때에 司州 지역이 다 北魏에 편입되었다. 兗州의 땅은 湖陸 이남부터, 豫州의 땅은 項城 이남부터를 모두 宋나라가 지켜서 北魏가 아직 여러 군현을 다 평정하지 못하였다., 수령을 두어 그곳을 위무하였다. 魏主가 周幾에게 河南을 진수하도록 명하니, 河南 사람들은 그것을 편안하게 생각하였다.
徐羨之․傅亮․謝晦는 영토를 잃은 것으로 표문을 올려서 스스로를 탄핵하였으나 〈宋主가〉 조서를 내려 죄를 묻지 말라고 하였다.
[綱] 가을 7월에 柔然이 北涼을 공격하여 그 世子 沮渠政德을 죽였다.
[綱] 겨울 10월에 北魏가 西宮을 넓혔다.注+① 平城의 西宮이니, 魏主 拓跋珪 天賜 원년(404)에 쌓은 것이다.
[目] 〈西宮〉 밖의 담장 둘레가 20리였다.
[綱] 11월에 北魏가 宋나라의 許昌과 汝陽을 점령하였다.
[綱] 魏主 拓跋嗣가 殂하니注+① 향년이 32세였다., 太子 拓跋燾가 즉위하였다.
[目] 北魏의 太宗이 殂하고 世祖가 즉위하니, 司徒 長孫嵩 이하 관원들에게 두루 爵位를 더하였다. 盧魯元을 으로 삼고, 劉絜을 尙書令으로 삼았으며, 尉眷(울권)․劉庫仁 등 8명에게 를 나누어 담당하도록 하였다.注+① 이는 또 한 명의 劉庫仁으로, 拓跋什翼犍이 채용한 劉庫仁이 아니다. 四部는 동서남북의 네 部이다.
羅結을 의 일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나결은 이때 나이가 107세였지만 정신이 맑고 쇠하지 않았다.
魏主 拓跋燾는 그가 충성스럽고 성실하다고 여겨 그를 가까이하고 신임하였다. 長秋卿을 겸직하게 하여 후궁을 감독하고 관장하며 침실에 출입하도록 하였다. 나이가 110세가 되어서야 고향으로 은퇴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조정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騎士를 보내어 찾아가 묻게 하였다. 또 10년이 지나서 마침내 卒하였다.
[綱] 北魏가 을 세웠다.
[目] 北魏의 光祿大夫 崔浩가 經術을 깊이 연구하고注+① “硏精”은 정신과 기력을 끝까지 기울이는 것이다. 制度를 능숙하게 익히니, 무릇 조정의 의례와 軍國의 詔書를 관장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최호는 老莊의 글을 좋아하지 않아서 말하기를 “이는 속이는 말이라注+② 聖賢에 의탁하여 그 설을 펴는 것을 矯라고 하고, 聖賢에게 이런 일이 없었는데 말을 가탁하여 비난을 더하는 것을 誣라고 한다., 人情에 가깝지 않다. 老聃(老子)이 예를 익힌 것은 仲尼(孔子)가 스승으로 여길 정도였으니注+③ 孔子가 老聃을 스승으로 섬겼다는 설은 ≪莊子≫에서 시작되었다. 장자가 老子를 스승으로 섬겼기 때문에 그 저서에 유독 노자를 추대하고 심지어 공자의 말을 가설하여 노자를 칭찬하였다. 漢나라 유학자가 ≪禮記≫를 纂輯하면서 그 말을 받아 말하기를 “노담에게서 들었다.”라고 하였고, 司馬遷의 ≪史記≫ 〈老子列傳〉에서는 다시 노자가 공자를 가르친 말을 많이 더하였고, 孔鮒가 ≪孔子家語≫를 지을 적에 공자의 事跡을 기록하였는데 이(공자가 노자에게 배웠다는 말)에 의거하여 증명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후학들의 믿음이 견고해져서 ≪莊子≫ 한 책에 터무니없는 寓言이 많은 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는 공자와의 거리가 멀지 않아 천하가 그의 학문을 존숭할 줄 알았다. 그러므로 당시 가장 중시된 자(공자)에 의탁하여 자신들의 스승을 높여서 노담의 道가 더욱 융성하기를 바랐으니, 이는 장자가 공자를 물리치고 노자를 높인 흔적이다.
후대의 유학자들은 ≪예기≫․≪공자가어≫․≪사기≫가 ≪장자≫ 이후에 나온 것을 알지 못하였고, ‘공자가 노담에게 예를 물었다.’는 한마디 말이 또다시 여러 글에 자세히 보이니, 이 때문에 그 말들이 ≪장자≫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자세히 알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노자의 가르침이 禮學을 꺼려 업신여겨 말하기를 “禮는 忠信이 야박해진 것이고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시초이다.”라고 하며, 장자가 그 학문을 전함에, 그를 따라서 말[斗]을 부수어버리고 저울대를 꺾고, 仁義를 몽둥이로 쳐버리고, 부절을 태우며 옥새를 깨버리고, 聖明함을 단절하며 지혜를 버려야 한다는 등의 논의를 한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노담에게 또다시 어찌 물을 만한 예가 있겠는가. 太史公(司馬遷)이 道家는 虛無를 體로 삼고 因循을 用으로 삼으며, 법이 있으나 법이 없다고 여기고 度가 있으나 度가 없다고 여긴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후대에 노자와 장자를 종주로 하는 자들은 禮法을 쓸어버리고 쑥대머리와 때 묻은 얼굴을 하고 喪中에 고기와 술을 마셨으니 晉나라 시기에 증명할 수 있다. 어찌 예로 공자를 가르치고서 그 무리들을 힘쓰게 하는 것이 이처럼 다름이 있는가. 공자는 남에게 善이 있는 것에 대해 예컨대 管仲의 어짊과 子產의 은혜를 모두 자주 칭찬하기에 겨를이 없었는데, 어찌 노담을 스승으로 삼고서 일부러 칭찬을 매몰시켰겠는가. 이것이 ≪장자≫의 寓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자가 노담을 스승으로 섬겼다는 일을 말하자면 ≪장자≫ 〈外篇〉에 노담이 周나라 藏史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藏’은 도서를 보관하는 곳이니, 혹자는 노담이 관장하는 책이 많아 孔子가 그 때문에 가서 노담에게 예를 물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만약 사실이라면〉 에 어찌 한 마디 말도 노담을 언급한 것이 없으며, 노담의 예가 그 무리들에게 모두 전해져서 그들이 명예와 예법을 버리며 禮教를 쓸어버린 죄인이 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겠는가.
張道陵張道陵
, 어찌 예법을 무너뜨리는 글을 써서 先王의 治道를 어지럽혔겠는가.”라고 하였고, 더욱이 佛法을 믿지 않아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 오랑캐의 神을 섬기는가.”라고 하였다.
측근들이 대부분 그를 헐뜯으니, 魏主가 어쩔 수 없이 최호에게 명령하여 公爵의 지위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였으나, 평소 그가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의심되는 논의가 있을 때마다 번번이 그를 불러서 물었다.
최호는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희고 깨끗함이 아름다운 여인 같았으니, 항상 스스로 생각하기를 재주는 張良에 비견하고 옛것을 상고하는 것은 그보다 낫다고 여겼다.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는 服食과 養性의 술법을 수련하였다.
[目] 예전에 嵩山의 도사 寇謙之가 의 술법을 수련하고注+① 寇謙之는 寇讚의 동생이다. 張道陵은 後漢 사람으로, 五斗米道를 수련하였는데 세속에서 말하는 天師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老子가 강림했을 때를 만났는데, 노자가 나에게 장도릉을 이어서 天師가 되라고 명하고, 을 전수해주어서注+② 辟은 제거한다는 뜻이다. “輕身之術”은 바로 일어나 멀리까지 단숨에 가고 가볍게 허공을 뛰어오를 수 있는 술법이다. 나에게 道敎를 깨끗이 정비하도록 하였다.
또 神人 李譜文을 만났는데 그가 노자의 현손이라고 하였다. 나에게 ≪圖籙眞經≫注+③ ≪圖籙眞經≫은 道家에서 신선의 명부를 적은 책이다. 을전수해주고서 北方의 太平眞君(北魏 拓跋燾)을 보좌하도록 하고 天宮靜輪의 술법을 내어주었다.”라고 하였다.
구겸지는 그 책을 받들어 魏主에게 바쳤는데, 조정과 재야에서는 대부분 그것을 믿지 않았으나 崔浩는 홀로 그 술법을 스승으로 삼아 전수받고, 또 上書하기를
“聖王께서 천명을 받을 적에는 반드시 하늘의 감응이 있었으니, ≪河圖≫와 ≪洛書≫가 모두 벌레와 짐승의 무늬에 기탁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지금에 인간과 신이 대면하여 직접 쓴 필적이 빛나며 말의 뜻이 깊고 오묘한 것만 못하니, 예로부터 비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찌 세속 사람의 범상한 생각으로 천상의 신령스런 명령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황제가 기뻐하며 謁者를 시켜서 옥․비단․희생을 받들어 嵩嶽에 제사를 지내고, 구겸지의 제자를 맞아들여서 天師를 받들게 하고 새로운 술법을 드러내었다.
天師道場을 平城의 동남 지역에 세웠는데, 단을 5층으로 층층이 쌓았다.注+④ ≪水經注≫에 “濕水는 남쪽으로 흘러 平城의 동쪽을 지나가며, 물의 왼쪽에 大道壇이 있는데 寇謙之가 세운 것이다. 濕水는 곧 灅水이다.”라고 하였다. 매달 주방을 개설하여 수천 명을 모아 연회를 열었다.
[目] 司馬溫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老子≫와 ≪莊子≫는 生死를 동일시하여 세상의 거취(부귀영화)를 가볍게 여기려 하였는데, 신선이 된 사람은 단약을 복용하고 鍊氣術을 수련하여 허공에 가볍게 올라가기를 바라고, 풀과 돌을 정련하여 금과 은을 만드니, 그 술법은 바로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注+① 谷永이 漢나라 成帝를 설득하기를 “세상에 신선이 있어서 불사약을 복용하여 일어나 멀리까지 단숨에 가고 가볍게 허공에 뛰어오르고, 멀리 해와 달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그림자가 거꾸로 나타나고, 〈곤륜산의〉 縣圃(仙境)를 구경하고, 蓬萊山을 떠돌아 노닐고, 丹砂를 황금으로 변화시킨다고 말하는 여러 가지 것들은 모두 간사한 사람이 대중을 현혹시키는 것이며 異端을 끼고서 속일 마음을 품어 세상의 군주를 속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服餌修鍊 以求輕擧”는 바로 곡영이 말한 불사약을 복용하여 일어나 멀리까지 단숨에 가고 가볍게 허공에 뛰어오르는 것이다. “鍊草石 以爲金銀”은 바로 곡영이 말한 丹砂를 황금으로 변화시킨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劉歆의 ≪七略≫에서 道家를 〈諸子略〉으로 神仙을 〈方技略〉으로 서술하였다.注+② 그 술법이 서로 어그러졌기 때문에 〈劉歆이〉 ≪七略≫에서 합하여 하나로 만들지 못했다. 그 후 다시 을 갖게 되었는데注+③ 符水와 禁呪는 곧 장도릉의 술법이다. , 寇謙之에 이르러 마침내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졌으며 지금까지 그것을 따르니, 그 잘못이 심하다.
崔浩가 부처와 노자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구겸지의 말을 믿은 것은 어째서인가.”


역주
역주1 宋以蔡廓爲吏部尙書 不受 : “‘不受’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蔡廓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 宋나라 시대가 끝날 때까지 ‘以爲吏部尚書’로 기록한 것이 여섯 번이고(蔡廓, 江湛, 謝莊 등과 袁粲 등과 蔡興宗, 褚淵), ‘免’이라고 기록한 것이 한 번이고(庾炳之), ‘殺’이라고 기록한 것이 한 번이다(王僧綽). 庾炳之 이외에는 모두 名士이니, 宋나라 시대에 인재를 선발할 때 적당한 사람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書不受何 嘉廓也 終宋之世 書以爲吏部尚書六(蔡廓․江湛․謝莊等 袁粲等 蔡興宗․褚淵) 書免者一(庾炳之) 書殺者一(王僧綽) 自庾炳之外 皆名士也 宋世典選 多得其人]” ≪書法≫
역주2 錄尙書는……겸한다 : 錄尙書는 錄尙書事의 줄임말이니, 국가의 機務를 총괄하는 관직이며, 일반적으로 겸직을 한다. 錄諸曹尙書事는 ‘諸曹(각종 部署)의 일을 모두 다스린다’는 뜻이다. 漢나라 武帝 때 左右曹의 諸史들이 尙書의 일을 分掌하고 樞要를 담당한 이가 尙書의 일을 겸직하여 領尙書事라고 불렀고, 東漢 章帝 初에 錄尙書事로 바뀌었다. 錄은 總領한다는 뜻이다. 他官으로 겸직하다가 南齊 때에 비로소 단독으로 임명하였고, 北齊 때는 錄尙書라고 일컬었는데 지위가 尙書令의 위에 있었다. 隋나라 때 폐관되었다.
역주3 魏築長城 : “秦나라에서 처음으로 ‘築長城’이라고 기록한 이후로 지금까지 627년인데, 지금에 와서 다시 보인다. 이 이후로 東魏에서 이어 쌓았고(梁나라 癸亥年(543)), 北齊가 세 번 쌓았고(梁나라 壬申年(552), 乙亥年(555), 丙子年(556)), 隋나라는 네 번 쌓았으니(辛丑年(581), 乙巳年(585), 大業 2년(606)과 4년(608)), 백성의 힘이 고단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自秦始書築長城 至此六百二十七年 於是再見 自是而後 東魏繼築(梁癸亥年) 齊三築(梁壬申年乙亥年丙子年) 隋四築(辛丑年乙巳年大業二年四年) 民力可勝困哉]” ≪書法≫
역주4 宋……전에 : 宋 武帝가 後秦을 멸망시킨 것을 이른다. 後秦은 洛陽과 長安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역주5 魏主攻虎牢 不克 : “魏主와 여러 나라의 군주는 여기서부터 이름을 쓰지 않았으니, 正統이 없기 때문이다(晉나라가 망하기 이전에 모두 이름을 기록한 것에 의거한 것이다.).[魏主及諸國主 自是不名 無正統也(據晉未亡以前皆名)]” ≪書法≫
역주6 石經 : 儒家의 經典을 돌에 새긴 것으로 後漢 靈帝 熹平 4년(175)에 蔡邕이 六卿의 定本을 확정하여 隷書로 돌에 새겼는데, 이를 ‘熹平石經’이라 한다.
역주7 盤瓠 : 전설 속 名犬의 이름이다. 옛날 高辛氏가 오색 빛의 털을 가진 반호라는 개를 길렀는데 매우 영리하였다. 고신씨가 재위할 적에 犬戎의 吳將軍이라는 자가 자주 반란하여 침입하자, 고신씨는 오장군의 머리를 베어오는 자에게 막내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하였다. 뒤에 이 개가 오장군의 머리를 가져오자 고신씨는 자신의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 그 자손들이 남방에서 번성하여 南蠻이 되었다고 한다.(≪後漢書≫ 〈南蠻傳〉)
역주8 魏拔虎牢 執宋司州刺史毛德祖 : “‘執’은 훌륭하다는 말이니, 힘이 다하여 잡힌 것이다.[執 善辭也 力屈而被執也]” ≪書法≫
역주9 魏主嗣殂 : “北魏는 여기에서 비로소 〈군주가 죽었을 때〉 ‘殂’라고 기록하였으니 東晉이 망했기 때문이다.[北魏於是始書殂 晉亡也]” ≪書法≫
역주10 中書監 : 中書省의 장관 중 하나이다. 中書省은 三國時代 魏나라 黃初 원년(220)에 두었다. 章奏 등 문서의 출납과 詔令을 짓는 일을 담당하였다. 東晉 때 이러한 권한이 散騎常侍 등에 옮겨져 한직이 되었으나 南朝 때 다시 중서성으로 돌아갔다. 北朝에서는 그 권한을 유지하였다. 北魏의 경우 中書監은 從一品中, 中書令은 從二品中이었다.
역주11 四部 : 北魏는 明元帝 泰常 2년(417)에 전 국토를 天․地․東․南․西․北 6部로 나누었는데, 이 중 東․南․西․北 4部를 말한 것이다.
역주12 侍中……36曹 : 侍中은 秦나라 때 설치되었고, 前漢 때는 加官으로 이 직책을 겸하면 궁중에 입시할 수 있었다. 後漢 때 정식 관직이 되어 殿內 門下의 일을 관리하고 황제의 顧問에 응하고 간쟁과 규찰을 담당하였다. 魏晉時代에 門下省이 설치되면서 그 장관이 되었다. 이후 中書省이 문서의 출납과 조칙 짓는 일을 나누어 가지면서 그 권한이 증대되었다. 外都大官은 外都坐大官의 준말로 北魏만의 독특한 제도이다. 中都坐大官․內都坐大官과 함께 三都大官이라 한다. 刑獄과 백성의 소송을 다스렸다. 속관을 두며 종실의 諸王, 外戚, 重臣들이 임명되었는데 그 권한이 커서 弔祭 시에 그 지위가 三公과 尙書令 위에 있었다. 36曹는 北魏 尙書省 각부에 소속된 기구의 총칭이다. 後漢 때 尙書에 尙書郞 36인을 두었고 三國時代 魏나라에 25曹를 두었고 西晉 때 36曹가 되었다. 北魏 明元帝 神瑞 원년(414)에 尙書의 제도를 폐지하고 8大人官을 두어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太武帝 초기에 侍中 外都坐大官에게 36曹를 관장하게 하였다. 36曹는 北魏 때 각 시기별로 바뀌었으며 각 曹의 명칭도 史書에 다 전해지지 않는다. 36曹는 孝文帝 때 완비된다. 北魏는 尙書令의 직책을 항상 두지 않았으며 상서령이 36曹를 관할하지 못하였다. 상서령이 실제 권한을 갖는 것은 孝文帝 이후의 일이다.
역주13 天師道埸 : 天師를 위한 道場이다. 天師는 道敎에서 道術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尊稱이고, 道場은 道敎에서 經典을 읽거나 神을 제사하는 장소이다.
역주14 魏立天師道場 : “道敎의 번성은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삼가 기록한 것이다. 拓跋珪가 처음 황제가 되었을 때 ‘置五經博士(오경박사를 두었다.)’를 기록하였고, 拓跋燾가 처음 황제가 되었을 때 ‘立天師道塲’을 기록하였으니, 두 황제의 차이를 또한 볼 수 있다. ‘天師’를 기록함은 여기서 시작하였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天師’를 기록한 것은 두 번이다(이해(423), 五代 乙未年(935)에 〈閩國의 天師〉 陳守元).[道敎之盛自此始 故謹書之 珪之始帝也 書置五經博士 燾之始立也 書立天師道塲 二祖之異 尚可見矣 書天師始此 終綱目 書天師二(是年 五代乙未年 閩陳守元)]” ≪書法≫“晉 孝武帝는 精舎를 세웠고 拓跋燾는 道塲을 세웠는데, 효무제는 張貴人의 재앙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탁발도 역시 宗愛의 손에 죽었으니 인과응보를 쓴 것이 어찌 이리도 분명한가. 直筆로 기록하였으니, 의리가 자연히 드러난다.[晉孝武立精舎 拓跋燾立道塲 孝武不免張貴人之禍 而燾亦殞於宗愛之手 報應之説 何其爽歟 直筆書之 義自見矣]” ≪發明≫“丘濬이 말하였다. ‘道家의 法이 여기서 비로소 번성했다. 아! 道家者流는 그 근원이 老子에게서 나와서 漢나라 초기에 그 法은 37家가 있었는데 큰 취지는 健羨(탐욕)을 버리고 沖虛(겸손)에 처할 뿐이다. 無上天官․符籙 등의 일은 東漢 말기에 張道陵이 그 법을 처음으로 창시하였다. 그러나 오직 사사로이 民間에서 서로 주고받고 하였지 아직 천하에 모두 퍼진 것은 아니었다. 이에 이르러 嵩山의 寇謙之가 張魯의 法을 수련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노자를 만났는데 명을 내려 장도릉을 이어서 天師가 되라 하고 ≪雲中音誦科誡≫라는 책을 하사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後世에 도사를 불러 제를 올리는 科條가 일어나게 된 이유이다. 玉女․服氣․導引의 法을 전수하였으니, 이것이 後世에 곡식을 안 먹는 修養이 일어나게 된 이유이다. 또 말하기를 「노자의 玄孫 李譜文이 ≪圖籙眞經≫을 주고, 주술을 외워 百神을 불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후세에 符籙과 귀신을 부르는 주술이 일어나게 된 이유이다. 銷鍊․金丹․雲英․八石․玉漿이 있으니, 이것이 後世에 丹藥을 삶아 단련하는 기술이 일어나게 된 이유이다. 寇謙之는 스스로 말하기를 「직접 李君(노자)이 쓴 글을 얻었는데, 〈이보문이〉 이 책을 주면서 받들어 가지고 가서 北方의 太平眞君(北魏 拓跋燾)을 보좌하도록 하였으며, 天宮靜輪의 술법을 내어주었다.」 하였다. 구겸지가 그 책을 北魏에 바치자 사람들이 대부분 그것을 믿지 않았으나 崔浩는 홀로 글을 올려 그 일을 신성시하였다. 魏主는 사신을 보내어 그 弟子들을 嵩嶽에서 맞이하고 代都에 제단을 세워서 崇奉하여 드날리게 하고, 친히 法駕를 준비시켜서 符籙을 받았다. 이 이후로 陶弘景․趙歸眞․杜光庭의 무리들이 또 따라서 推演하며 張大하게 하여 그 가르침이 마침내 세상에 크게 시행되어 유교․불교와 함께 나란히 서서 셋이 되었다. 그중에 더욱 어긋나는 것은 道士를 일컬어 天師라고 한 것인데 후세에 이로 인해 마침내 漢나라 張道陵을 칭송하게 되었다. 아! 하늘보다 큰 것이 없고 임금보다 높은 것이 없어서 萬乘의 帝王도 겨우 「하늘의 아들[天子]」이라고 하거늘 일개 方士를 마침내 「하늘의 선생[天師]」이라고 한다. 저 장도릉․구겸지의 무리들은 자신이 태어날 때 모두 부모에게서 胎를 받고 천지에게서 기운을 받아 피와 살로 된 몸을 갖추며 妻子의 가속을 두니, 비록 道德이 있다고 할지라도 또한 하늘이 낳은 것일 뿐인데, 어찌 하늘의 선생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늘에 선생이 있다면 이는 昊天上帝가 도리어 〈신하 위치로〉 北面을 하고서 그 가르침을 받는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 이후로 장도릉을 대물려 계승한 자들은 대대로 모두 「天師」로 일컬었다. 우리나라(宋나라)에 와서 비로소 그 참람하고 망측한 칭호를 바꾸어 바로 이른바 「眞人」으로 일컬었다. 아! 太武帝(拓跋燾)가 최호의 말을 믿어서 구겸지를 숭봉하면서부터 그 법이 마침내 천하 후세에 만연하여 유전되어 혹세무민하는 무당의 하찮은 술수가 되니, 다시 ≪道德經≫ 5천 자의 남은 뜻이 없어졌다. 그 뒤 장도릉과 구겸지는 모두 온당하게 죽지 못했으니 어쩌면 하늘을 속여서 하늘 역시 그들을 미워한 것이 아니겠는가.’[◯丘濬曰 道家之法 始盛於此 嗚呼 道家者流 其原出於老子 漢初 其法有三十七家 大旨去健羨處沖虛而已 無上天官符籙等事 東漢之末張道陵 始創其法 然惟私相授受於民間 未盡傳布天下也 至是嵩山寇謙之 修張魯之法 自言嘗遇老子 降命繼道陵爲天師 賜以雲中音誦科誡之書 此後世齋醮科儀所由起也 授以玉女服氣導引之法 此後世辟榖修養所由起也 又言老子玄孫李譜文 授以圖籙眞經 劾召百神 此後世符籙攝召之術所由起也 銷鍊金丹雲英八石玉漿 此後世烹鍊丹藥之技所由起也 謙之自言親得李君手筆 付以奉持 輔佐北方太平眞君 出天宫靜輪之法 謙之獻其書于魏 人多不信 崔浩獨上書 神其事 魏主遣使 迎其弟子於嵩嶽 起壇宇於代都 而崇奉顯揚之 親備法駕 而受符籙焉 自是以來 有陶弘景趙歸眞杜光庭之徒 又從而推演張大之 而其敎遂大行於世 與儒釋竝立而爲三 其尤悖者 謂道士爲天師 後世因之 遂以稱漢張道陵 嗚呼 莫大於天 莫尊於君 萬乘帝王 僅得以爲天之子 而一介方士 乃得以爲天之師 彼道陵謙之之徒 其生也 皆受胎於父母 稟氣於天地 具血肉之軀 有妻子之屬 縱有道德 亦天生者耳 安能爲天之師哉 天而有師 則是昊天上帝 反北面而受其敎也 豈有此理哉 然自是以後 嗣道陵之世者 世皆以天師稱之 至我朝 始革其僭妄之號 而即其所謂眞人者稱之 嗚呼 自夫太武信崔浩之言 而崇奉謙之 其法遂蔓延於天下後世 流而爲淫巫小術 無復五千言道德之餘意矣 厥後二人 皆不得其死 豈矯誣上天 天亦惡之歟]” ≪發明≫
역주15 魯論 : ≪論語≫는 漢나라 이후 孔子의 故宅에서 나온 ≪古論≫, 魯나라에 전해진 ≪魯論≫, 齊나라에 전해진 ≪齊論≫이 있었는데, 지금 전해지는 ≪논어≫가 바로 ≪魯論≫이다.
역주16 [而] : 저본에는 ‘而’가 없으나, ≪老子道徳經≫ 〈德論〉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7 剖斗折衡 : ≪莊子≫ 〈胠篋〉에 “말을 부숴버리고 저울대를 꺾어 버려야 한다.[剖斗折衡 而民不爭]”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곧 聖人의 禮法을 비난하는 뜻에서 한 말이다.
역주18 椎提仁義……絕聖棄知 : “椎提仁義”는 ≪莊子≫ 〈胠篋〉에 ‘攘棄仁義(仁義를 물리쳐 버린다.)’를 변형한 것으로 보이며 ‘焚符破璽’와 ‘絕聖棄知’는 〈거협〉에 그대로 보인다.
역주19 道家以虛無爲本……有度無度 : ≪史記≫ 권130 〈太史公自序〉에서 초록한 것이다.
역주20 聃爲周藏史 : ≪莊子≫ 〈天道〉에 “제(子路)가 들으니 周나라의 徵藏史 중에 老聃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만두고 鄕里에 돌아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夫子(孔子)께서 著書를 收藏케 하고자 하신다면 그에게 가서 소개를 부탁하시지요.[由聞周之徵藏史 有老聃者 免而歸居 夫子欲藏書 則試往因焉]”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21 (度)[庋] : 저본에는 ‘度’로 되어 있으나, ≪辨惑編≫ 〈異端〉에 의거하여 ‘庋’로 바로잡았다.
역주22 (海)[每] : 저본에는 ‘海’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권119 〈營陽王 景平元年〉에 의거하여 ‘每’로 바로잡았다.
역주23 張道陵 : 後漢 때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陵이다. 벼슬을 버리고 龍虎山에 은거하여 煉丹과 符呪의 도술을 익혀 道敎의 創始者가 되었다. 본래 太學生으로 儒學에 통달했으나, 나중에 유학을 버리고 도교를 공부하였다. 그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쌀 다섯 되를 냈기 때문에 그의 술법을 五斗米道라고 하였다.(≪神仙傳≫ 〈張道陵〉)
역주24 辟穀하고……술법 : 辟穀은 곡식을 먹지 않는 도교의 수련법으로 솔잎이나 대추 등을 먹으면서 道引을 수련한다. 道引은 좌선과 호흡 등으로 신체의 관절과 혈기를 조절해서 몸을 가볍게 하여 신선이 되는 수련법이다. ≪史記≫ 〈留侯世家〉에 “辟穀을 배우고 道引을 하여 몸을 가볍게 하였다.[乃學辟穀 道引輕身]”라고 하였다.
역주25 (甫)[術] : 저본에는 ‘甫’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集覽≫에 의거하여 ‘術’로 바로잡았다.
역주26 符水와……술법 : 巫師나 道士들이 물에다 符籙을 태워서 띄우거나 또는 직접 물에다 부적을 그리고 주문을 외워서 이를 통해 邪氣를 쫓고 병을 고치는 행위이다.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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