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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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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孝建二年이요 魏太安元年이라
宋鎭北大將軍沈慶之罷就第하다
宋鎭北大將軍南兗州刺史沈慶之請老하여 表數十上하니 詔聽以公就第注+以始興公就第.러니
頃之 宋主復欲用慶之하여 使何尙之往起之하니 慶之笑曰 沈公不效何公으로 往而復返이라하니 尙之慙而止注+往而復返, 事見文帝元嘉二十九年.하다
秋八月 하다
渾與左右作檄文하여 自號楚王하고 改元永光하여 以爲戱笑하니 長史封上之한대 廢爲庶人하고 逼令自殺하니 時年十七이러라
注+晉氏南渡草創, 二郊無樂, 宗廟雖有登歌, 亦無二舞. 及破苻堅, 得樂工, 始有金石之樂. 文帝元嘉二十二年, 南郊始設登歌, 此所謂備樂, 非能備雅樂, 魏晉以來世俗之樂耳.하다
◑冬十月 하다
宋主欲削弱王侯하니 江夏王義恭等 奏裁損王侯車服器用樂舞制度凡九事한대
宋主因諷有司奏增廣爲二十四條하여 聽事 不得南向坐하고 施帳劍 不得爲鹿盧形注+聽, 平聲. 鹿盧, 井上絞繩而汲水之具, 古長劍首以玉作井鹿盧形, 上刻木作山, 如蓮花初生未敷時.하고 內史相及封內官長 止稱下官不得稱臣하고 罷官則不復追敬이라하니 詔可라하다
宋以楊元和楊頭爲將軍하다
元和 故氐王楊保宗子也 宋朝以其幼弱이라하여 未正位號하니 部落無定主러라 其族父頭 先戍葭蘆하여 母妻子弟竝爲魏所執이나 而爲宋堅守하여 無貳心이라
雍州刺史王玄謨 請以頭爲西秦刺史하여 安輯其衆하여 俟元和稍長하여 使嗣故業하고 若其不稱이어든 即以授頭 必能藩扞漢川하여 使無虜患이요 若葭蘆不守 漢川亦不可立矣라하니 不從하다


宋나라 世祖 孝武帝 劉駿 孝建 2년이고, 北魏 高宗 文成帝 拓跋濬 太安 원년이다.
[綱] 봄에 宋나라 鎭北大將軍 沈慶之가 관직을 그만두고 집으로 갔다.
[目] 宋나라 鎭北大將軍 南兗州刺史인 沈慶之가 연로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수십 차례 표문을 올리자, 조서를 내려 始興公으로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注+① 〈沈慶之가〉 始興公의 신분으로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宋主가 다시 심경지를 등용하고 싶어서 何尙之로 하여금 가서 그를 관직에 나올 것을 권하게 하니, 심경지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 沈公은 何公이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온 일을 본받지 않겠다.”注+② “往而復返”은 일이 文帝 元嘉 29년(452)에 보인다.라고 하니, 하상지가 부끄러워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綱] 가을 8월에 宋主가 그의 동생 武昌王 劉渾을 죽였다.
[目] 劉渾이 좌우의 무리들과 檄文을 지어 스스로 楚王이라고 칭하고 연호를 永光으로 고쳐 웃음거리를 삼았다. 長史가 〈劉渾의 격문을〉 봉함하여 올렸는데, 유혼을 폐위하여 庶人으로 삼고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니, 당시 나이가 열일곱이었다.
[綱] 宋나라 郊廟에 처음으로 완비된 음악을 두었다.注+① 晉氏가 남쪽으로 내려온 초창기에 二郊에는 음악이 없었으며, 宗廟에 비록 登歌가 있었지만, 역시 二舞(文舞와 武舞)가 없었다. 苻堅을 격파할 적에 樂工을 얻어 비로소 金石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두었다. 文帝 元嘉 22년(445)에 南郊에 비로소 登歌를 설치하였으니, 여기에서 이른바 ‘음악을 갖추었다[備樂]’라고 한 것은, 雅樂을 갖춘 것이 아니라 魏晉 이래 세속의 음악일 뿐이다.
鹿盧鹿盧
[綱] 겨울 10월에 宋나라가 王侯의 제도를 삭감하였다.
[目] 宋主가 王侯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니, 江夏王 劉義恭 등이 王侯의 수레와 의복, 기물과 용구, 음악과 춤 등의 제도 모두 9가지 사항을 삭각할 것을 상주하였는데,
宋主가 이로 인해 有司에게 넌지시 일러 24조목으로 늘려서 상주하게 하여 政事를 다스릴 적에는 남쪽을 향하여 앉지 못하게 하고, 검을 찰 때에는 鹿盧 모양으로 된 것을 가질 수 없도록 하고注+① 聽(다스리다)은 平聲이다. 鹿盧(도르래 고리)는 우물 위에 끈을 매어 물을 긷는 도구인데, 옛날에 長劍의 머리 부분에다 옥으로 우물의 鹿盧 모양을 만들고, 위에는 나무를 깎아 山의 모양을 만들었으니, 연꽃이 처음 나와 아직 펴지지 않았을 때의 모습과 같다., 內史와 相 및 封國 지역 내 관원의 우두머리는 단지 스스로를 下官이라고만 칭하고 臣이라고는 칭할 수 없도록 하며, 관직에서 파면되면 다시 추후에 경칭을 쓰지 못하도록 하니, 조서를 내려 그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綱] 宋나라가 楊元和와 楊頭를 장군으로 삼았다.
[目] 楊元和는 故 氐王 楊保宗의 아들이다. 宋나라 조정에서는 그가 유약하다고 여겨 位號를 올바르게 하지 않으니, 部落에는 정해진 主軍이 없게 되었다. 그의 族父인 楊頭가 이전에 葭蘆를 지킬 적에 어머니와 아내 및 자제들이 모두 北魏에 잡혀갔지만 宋나라를 위해 굳게 지키고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雍州刺史 王玄謨가 청하기를 “양두를 西秦刺史로 삼아 그 무리를 편안하게 하여 楊元和가 장성하기를 기다려 옛날의 기업을 잇게 하고, 만약 걸맞지 않을 경우에는 즉시 양두에게 주시면 반드시 漢川(漢中) 지역을 지켜서 오랑캐의 환란을 근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葭蘆를 지키지 못하면 漢川 역시 설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宋主가 따르지 않았다.


역주
역주1 宋主殺其弟武昌王渾 : “劉渾이 檄文을 지어 楚王의 호칭을 만들고 연호를 永光으로 고쳐서 웃음거리로 삼은 것은 죄인데, 無罪로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宋主를 심하게 여긴 것이다. 유혼은 진실로 죄가 있지만, 나이가 성년이 되지 않았으니 八議로 처리해야 한다. 어떤 자들은 죽을죄에 해당하지 않았는데, 지금 죽였으니 심하다고 한 것이다.[渾作檄文 建號改元 以為戲笑則罪也 其以無罪書之 何 甚宋主也 渾則信有罪矣 年未成人 處以八議 或者罪不至死 今而殺之 甚矣]” ≪書法≫ ‘八議’는 종친이나 귀척을 함부로 죄줄 수 없어 논의에 부치는 일이다. ≪周禮≫ 〈秋官 司寇〉에 “죄를 따질 때는 왕의 친척인가, 친구인가, 어진 이인가, 유능한 사람인가, 공이 있는가, 신분이 귀한 이인가, 일에 부지런한 사람인가, 賓客인가 등을 따져서 이러한 이들의 죄는 감한다.”라고 하였다.
역주2 宋郊廟 初設備樂 : “‘처음[初]’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늦었다는 말이다. 앞에서 宋나라가 처음으로 郊廟의 음악을 갖추었다고 기록하였는데(445) 여기에서 〈다시〉 ‘처음으로 두었다.[初設]’라고 기록하였으니, 그렇다면 이전에 비록 음악을 갖추었으나 아직도 〈완비된 음악을〉 설치하지 않은 것이다. 宋나라 사람들이 郊廟에 게으른 것이 또한 심하였으므로 거듭 ‘初’라고 기록한 것이다.[書初 何 緩辭也 前書宋始備郊廟之樂矣 於是而書初設 然則前者雖備 猶未設也 宋人慢於郊廟 亦甚矣 故再書初]” ≪書法≫
역주3 宋裁損王侯制度 : “역적 劉劭의 변란에 宋나라 孝武帝가 藩王으로서 역적을 토벌하여 나라를 얻었으니, 劉氏가 멸망하지 않은 것은 이 일에 의지한 것이다. 公族은 국가의 枝葉이니, 만약 그 지엽을 제거하면 本根이 장차 무엇에 비호를 받겠는가. 지금 王侯를 깎아 약화시킨 것은 어째서인가.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이 여기에서 특별히 ‘王侯의 제도를 삭감하였다.[裁損王侯制度]’라고 기록하여 그 본래 뜻이 종족의 번성을 두려워하여 그 지엽을 약화시키려 한 것임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효무제가 여러 아우들을 사냥하듯 죽이는 것에 어려워하지 않으니, 또 어찌 문제가 제도에 있겠는가. 세상의 변화가 날마다 달라져 天理가 멸망하였으니 서글플 뿐이다. 슬프다.[逆劭之變 宋孝武以藩王討賊得國 劉氏之不滅 頼有是爾 夫公族 國之枝葉也 若去其枝葉 則本根將何所庇 今乃削弱王侯 何哉 故綱目於此 特以裁損王侯制度書之 以見其本志惟恐宗族之蕃衍 而欲削其枝葉也 雖然彼不難於獵其諸弟而殺之 又何有於制度哉 世變日下 天理滅亡 可哀也已 吁]” ≪發明≫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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