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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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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年(252)
十五年이라
魏嘉平四年이요 吳主孫亮建興元年이라
春正月 魏以司馬師爲大將軍하다
◑吳立故太子和爲南陽王하다
吳主權 復封和爲南陽王하여 居長沙하고 奮爲齊王하여 居武昌하고 休爲琅邪王하여 居虎林注+奮‧休皆太子亮之兄也. 虎林濱大江, 吳置督守之.하다
夏四月 注+壽, 七十一.하다 太子亮立하여 以諸葛恪爲太傅하다
吳主權 疾病 潘后使人問孫弘以呂后稱制故事 左右畏后虐戾하여 伺其昏睡하여 縊殺之注+斯事也, 實吳用事之臣所爲也. 潘后欲求稱制, 左右小人正當相與從臾爲之, 安有不勝其虐而縊殺之之理. 吳史緣飾, 後人遂因而書之云爾.하다
權病困한대 召諸葛恪孫弘太常滕胤及將軍呂據侍中孫峻하여 屬以後事而卒注+㣧, 吳主壻也. 據, 範之子也.하니
弘素與恪不平이라 秘不發喪하고 欲矯詔誅恪이어늘 峻以告恪하니
恪請弘咨事하여 於坐殺之하고 乃發喪하고 諡權曰大皇帝라하다
太子亮卽位하여 以恪爲太傅하고 胤爲衛將軍하고 呂岱爲大司馬하니
恪乃命罷視聽하고 息校官하고 原逋責하고 除關稅하고 崇恩澤하니 衆莫不悅注+罷, 不御也. 視聽, 聲色之好也. 息, 屏去也. 校官, 卽校人, 周禮 “校人掌王馬之政.” 一說 “吳主權置校官, 典校諸官府及州郡文書, 專任以爲耳目.” 今息校官, 卽所謂罷視聽也. 原, 免逋欠也. 責, 與債通. 漢書註 “負官物, 亡匿不還者, 皆謂之逋.” 除關稅, 除去關市之稅斂也.이러라
吳徙其齊王奮於豫章하다
諸葛恪不欲諸王 處濱江兵馬之地하여 乃徙齊王奮於豫章하고 琅邪王休於丹陽하니
奮不肯徙어늘 恪遺之牋曰 帝王之尊 與天同位
是以 家天下하고 臣父兄하여 仇讐有善하면 不得不擧하며 親戚有惡하면 不得不誅하니 所以承天理物하고 先國後身注+先‧後, 皆去聲.이라
蓋聖人立制 百代不易之道也 大行皇帝覽古戒今하여 慮於千載
是以 寢疾之日 分遣諸王하여 詔策勤渠하고 科禁嚴峻하니
誠欲上安宗廟하고 下全諸王하여 使百世相承하여 無凶國害家之悔也
大王宜上惟太伯順父之志注+惟, 思也. 周太王三子, 長曰太伯, 次曰仲雍, 次曰季歷. 季歷之子曰昌, 有盛德, 太王欲傳國季歷以及昌, 太伯‧仲雍遂逃之荊蠻, 讓國季歷以成父之志.하고 中念河間東海恭順之節注+漢河間獻王德, 於武帝兄也. 東海恭王彊, 於明帝異母兄也. 二王之事二帝, 極爲恭順.하고 下存前世驕恣荒亂之戒注+存, 察也.어늘
而聞頃至武昌以來 多違詔勅하고 不拘制度하여 擅發諸將하고 私殺左右하니 小大驚怪하여 莫不寒心이라
里語曰 明鑑 所以照形이요 古事 所以知今이라하니 大王宜深以魯王爲戒하여 改易其行注+前年魯王霸被殺.이니
若棄忘先帝法敎하고 懐輕慢之心이면 臣下寧負大王이언정 不敢負先帝遺詔
寧爲大王所怨疾이언정 豈敢令詔勅不行於藩鎭邪 奮懼遂行하다
冬十月 吳諸葛恪 修東興堤하니 十二月 魏人擊之어늘 恪與戰于徐塘하니 魏人敗走하다
吳大帝築東興堤하여 以遏巢湖러니 後攻魏淮南하여하니 以內船이라
遂廢不治注+遏巢湖所以利舟師, 而反爲湖內之船所敗, 故廢而不治.러니 至是하여 諸葛恪更作大堤하여 左右結山하고 俠築兩城하고 各留千人하여 使全端留略守之注+俠, 讀曰夾. 胡三省曰 “今柵江口有兩山, 濡須山在和州界, 謂之東關, 七寶山在無爲軍界, 謂之西關. 兩山對峙, 中爲石梁, 鑿石通水.” 全端‧留略二人之姓名, 端守西城, 略守東城.하니
魏諸葛誕 言於司馬師曰 今因吳內侵하여 使文舒逼江陵하고
仲恭向武昌하여 以羈吳之上流하고 然後簡精卒하여 攻其兩城이면 可大獲也注+文舒, 王昶字. 仲恭, 毌丘儉字. 羈吳, 猶羈馬之義.리라
是時 征南王昶征東胡遵鎭南毌丘儉 各獻征吳之策이어늘 詔以問尙書傅嘏하니
嘏曰 吳爲寇六十年 君臣相保하고 吉凶同患하니 設令列船津要하면 則彼堅城據險하니
橫行之計 其殆難捷이라 今邊城之守 與賊相遠하고 羅落重密하여 間諜不行注+羅, 布也. 落, 與絡同, 聯絡也. 羅落, 謂設烽燧, 遠候望, 以羅落邊面也. 重, 直龍切.이어늘
而擧大衆하여 臨巨險하여 以徼功하니 先戰而後求勝 非長策也
唯有進軍大佃 最差完牢注+佃, 讀曰田. 差, 初加切, 猶愈也. 可詔昶遵等擇地居險하여 三方竝進이니
奪其肥壤하여 使還塉地 一也注+塉, 秦昔切, 薄土也. 兵出民表하여 寇抄不犯 二也
招懐近路하여 降附日至 三也 羅落遠設하여 間構不來 四也
賊退其守하여 佃作易立 五也 坐食積穀하여 士不運輸 六也 釁隙時聞하여 討襲速決 七也
凡此七者 軍事之急務也 不進據則賊擅便資 據之則利歸於國이니 不可不察也라하되 師不從하다
詔昶等三道擊吳하니 昶攻南郡하고 儉向武昌하고 遵誕 攻東興이어늘 恪將兵四萬하여 救東興하니
遵等作浮橋以渡하여 陳於堤上注+陳, 讀曰陣.하고 分兵攻兩城하니 城高峻하여 不可拔이러라
恪使將軍丁奉으로 與呂據爲前部하여 從山西上하니 奉曰 諸行緩하니 若賊據便地하면 則難與爭鋒이라 我請趨之하노이다
乃辟諸軍使下道注+辟, 讀如闢. 辟諸軍使避路而己軍前進也.하고 自率麾下三千人徑進하니 擧帆二日 至東關하여 遂據徐塘注+徐塘, 蓋近東關.하니
時天雪寒이라 遵方置酒高會어늘 奉見其前部兵少하고 使兵皆解鎧하고 去矛戟하고 但兜鍪刀楯하고 倮身緣堨注+兜鍪, 首鎧. 倮與裸通, 袒裼也. 堨, 其謁切, 堤堰也. 謂脫衣露體, 緣循堨堤而進也.하니
魏人望見하여 大笑之하고 不卽嚴兵이라
吳兵得上하여 便鼓譟하여 斫破其前屯하고 據等繼至하니
魏軍驚擾散走하여 爭渡橋壞하니 相蹈藉溺死者數萬이라
吳獲車乘牛馬驢騾各以千數하고 資器山積이러니 振旅而歸하다
昶儉聞東軍敗하고 各燒屯走注+時三道伐吳, 東關最在東, 故曰東軍.하다 朝廷欲貶諸將한대
師曰 此我不聽公休過也 諸將何罪리오 悉宥之하고 惟削其弟昭爵而已注+公休, 諸葛誕字也. 先嘗諫征吳, 司馬師不聽, 今兵敗而引咎歸己.러라
後雍州刺史陳泰 求勅幷州討胡하여 未集한대 而鴈門新興 以遠役驚反注+雍州在幷州西南, 而鴈門‧新興二郡, 幷州北鄙也, 其道里相去遠.하니
師又曰 此我過也 非陳雍州之責이라하니 是以人皆愧悅이러라
習鑿齒曰 司馬師引二敗以爲己過한대 過消而業隆注+二敗, 謂東關師敗及幷州胡反也.하니
若推過歸咎하고 執其功而隱其喪하면 則上下離心하고 賢愚解體矣注+推, 吐雷切. 隱, 蔽而不言也. 喪, 四浪切, 謂喪師也.
君人者苟統斯理하여 以御國하면 行失而名揚하고 兵挫而戰勝이니 雖百敗라도 可也 況於再乎注+行, 去聲.
○ 魏光祿大夫張緝 曰 恪其不免乎인저한대 司馬師曰 何也
緝曰 威震其主하고 功蓋一國하니 何以能久리오


壬申年(252)
[] 나라(蜀漢) 後主 延熙 15년이다.
[] 魏主 曹芳 嘉平 4년이고, 吳主 孫亮 建興 원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가 司馬師大將軍으로 삼았다.
[] 나라가 太子 孫和를 세워 南陽王으로 삼았다.
[] 吳主 孫權이 다시 孫和를 봉하여 南陽王으로 삼아 長沙에 살게 하고 孫奮齊王으로 삼아 武昌에 살게 하고 孫休琅邪王으로 삼아 虎林에 살게 하였다.注+孫奮孫休는 모두 太子 孫亮의 형이다. 虎林大江(長江)의 물가인데 나라가 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吳主 孫權하였다.注+향년이 71세였다. 太子 孫亮이 즉위하여 諸葛恪太傅로 삼았다.
[] 吳主 孫權이 병이 들자 潘后가 사람을 시켜서 孫弘에게 반후의 측근들이 그녀의 포학함을 두려워하여 그녀가 잠든 틈을 엿보아서 목을 졸라 죽였다.注+이 일은 실제로 나라의 정권을 잡은 신하가 한 짓이다. 潘后稱制를 하려고 하자, 측근의 소인들이 바로 서로 함께 아첨하여 그것을 하도록 하였으니 어찌 포학함을 감당하지 못하여 목을 졸라 죽일 리가 있겠는가. 나라 史官이 꾸며서 기록하였고, 후인들이 마침내 이것을 따라서 기록했을 뿐이다.
손권의 병이 위독해지자 諸葛恪, 孫弘, 太常 滕胤, 將軍 呂據, 侍中 孫峻을 불러서 뒷일을 부탁하고 하였다.注+滕胤吳主의 사위이고, 呂據呂範의 아들이다.
손홍은 평소 제갈각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초상을 비밀로 하여 공표하지 않고 가짜 조서를 만들어 제갈각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손준이 이를 제갈각에게 고하였다.
제갈각이 손홍에게 일을 자문하겠다고 청하여 앉은 자리에서 손홍을 죽이고 마침내 초상을 공표하고 손권의 시호를 大皇帝라고 하였다.
太子 孫亮이 즉위하여 제갈각을 太傅로 삼고 등윤을 衛將軍으로 삼고 呂岱大司馬로 삼았다.
제갈각이 마침내 명하여 신하들의 동정을 監察하는 관리를 없애고 校官을 물리치고 미납한 조세를 면제하고 關市의 세금을 면제해주고 은택을 크게 베풀자,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注+는 다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視聽”은 음성과 얼굴빛의 좋음이다. 은 물리친다는 뜻이다. 校官은 곧 校人이니, ≪周禮≫에 “校人은 왕의 마필에 대한 일을 관장한다.” 하고, 일설에 “吳主 孫權校官을 두어 여러 관부와 州郡의 문서를 교감하는 일을 담당하고 耳目의 직무를 전임시켰다.” 하였다. 지금 校官을 물리친 것은 곧 이른바 ‘罷視聽’이다. 은 미납한 조세를 면제하는 것이다. (빚)는 와 통용된다. ≪漢書≫ 〈武帝紀에 “관청의 재물을 오랫동안 빌리고 망실하거나 숨겨서 돌려주지 않는 것을 모두 라고 한다.” 하였다. “除關稅”는 關市의 세수를 없앤 것이다.
[] 나라가 齊王 孫奮豫章으로 옮겼다.
[] 諸葛恪은 여러 왕들이 長江 가의 군사적 요지에 머물지 않게 하고자 하여 齊王 孫奮豫章으로 옮기고, 琅邪王 孫休丹陽으로 옮겼다.
손분이 옮기려 하지 않자, 제갈각이 손분에게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帝王의 존귀함은 하늘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천하를 집으로 삼고 부형을 신하로 삼아서 원수라도 선행을 행하면 등용하며, 친척이라도 악행을 행하면 주벌하니, 이는 천명을 받들고 만물을 다스리며 나라를 우선하고 자신을 뒤로 여기기 때문입니다.注+(앞서다)과 (뒤로 미루다)는 모두 去聲이다.
聖人이 세운 제도는 百代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법칙입니다. 大行皇帝(孫權)께서는 옛날을 살피시고 지금을 경계하시어 천년 후를 염려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병환으로 누워 계실 때에 여러 왕들을 지방에 나누어 파견하면서 내리신 조칙이 간절하고 금령이 엄준하셨으니,
이는 진실로 위로는 宗廟를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여러 왕들을 온전하게 하여 百世토록 서로 계승하게 하여 나라에 재앙을 끼치고 집안에 해독을 끼치는 후회가 없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大王께서는 마땅히 위로 나라 太伯이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을 생각하고,注+는 생각한다는 뜻이다. 나라 太王의 세 아들은 장남이 太伯이고, 차남이 仲雍이고, 삼남이 季歷이다. 계력의 아들은 인데, 盛德이 있어 太王이 나라를 계력에게 전하여 창에게 미치게 하려고 하자 태백과 중옹이 마침내 荊蠻으로 도망을 가서 나라를 계력에게 양보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하였다. 注+나라 河間獻王 劉德武帝에게 형이고, 東海恭王 劉彊明帝에게 이복형이다. 두 왕이 두 황제를 섬긴 것이 지극히 공순하였다. 아래로 이전 시대의 교만하고 방자하며 황폐하고 혼란하게 했던 것을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注+는 살핀다는 뜻이다.
그러나 듣건대 대왕께서 일전에 武昌에 도착한 뒤로, 여러 번 조정의 명령을 어기고 제도에 구애받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을 제멋대로 출동시키고 사사로이 좌우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하니, 大小의 관리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며 한심해합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밝은 거울은 물건의 형체를 비추기 위한 것이고, 옛일들은 지금을 알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을 깊이 경계로 삼아 행실을 고치셔야 합니다.注+전년에 魯王 孫霸가 죽임을 당하였다.
만약 선제의 法敎를 잊어버리고 교만한 마음을 품으신다면 신하들이 차라리 대왕을 저버릴지언정 감히 선제께서 내린 遺詔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차라리 대왕에게 원망과 미움을 받을지언정 어찌 감히 조칙이 藩鎭에서 행해지지 않게 하겠습니까.” 손분이 두려워하여 마침내 〈豫章으로〉 옮겼다.
[] 겨울 10월에 나라 諸葛恪東興堤를 수리하였다. 12월에 나라 사람이 공격하자 제갈각이 그들과 徐塘에서 싸웠는데, 나라 사람이 패하여 달아났다.
徐塘의 전투에서 吳나라와 魏나라가 교전을 벌이다徐塘의 전투에서 吳나라와 魏나라가 교전을 벌이다
[] 예전에 나라 大帝(孫權)가 東興堤를 쌓아서 巢湖를 막았다. 뒤에 나라 淮南을 공격하여 패배하였으니, 〈巢湖〉 안에 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제방을 폐기하고 수리하지 않았는데,注+ 이때에 이르러서 諸葛恪이 다시 큰 제방을 만들어서 左右에 있는 산을 연결하고 제방을 끼고 두 개의 성을 쌓고는 각각 1천 명을 머물러서 全端留略으로 하여금 두 성을 지키게 하였다.注+(끼다)은 으로 읽는다. 胡三省이 말하기를 “지금 柵江 어귀에 두 산이 있으니 濡須山和州의 지역에 있어 東關이라고 하고, 七寶山無爲軍 지역에 있어 西關이라고 한다. 두 산이 서로 마주 버티고 있는데, 가운데에 돌다리를 만들어 돌을 뚫어서 물을 통하게 하였다.” 하였다. 全端留略은 두 사람의 姓名이니 전단은 西城을 지키고 유략은 東城을 지켰다.
나라 諸葛誕司馬師에게 말하기를 “지금 나라가 내침한 기회를 이용하여 文舒(王昶)에게는 江陵을 압박하게 하고
仲恭(毌丘儉)에게는 武昌으로 향하게 하여 長江 상류의 나라 군대를 견제하고 나서 정예 병사를 선발하여 〈동흥제의〉 두 성을 공격하면 크게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注+文舒王昶이고, 仲恭毌丘儉이다. “羈吳(나라를 견제한다)”는 말에 굴레를 씌워서 통제한다는 뜻과 같다.라고 하였다
[] 이때에 征南大將軍 王昶征東將軍 胡遵鎭南將軍 毌丘儉이 각각 나라를 정벌할 계책을 올렸는데, 조서를 내려서 尙書 傅嘏(부하)에게 물으니,
부하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나라의 군신이 서로 보존하고 길흉을 함께 근심하였습니다. 설령 나루와 요충지에 軍船을 배치한다 하더라도 저들이 성을 견고하게 지키고 험준한 곳을 의거하고 있으니,
〈우리가 長江을〉 가로질러 가는 계책으로는 아마도 이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변방 성곽의 수비가 적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적의 감시망과 연락망이 중첩되고 엄밀하여 우리의 간첩이 들어가지 못합니다.注+는 편다는 뜻이다. 과 같으니, 연락한다는 뜻이다. “羅落”은 봉화를 설치하여 멀리서 망을 보는 것으로써 변방에 연락망을 펼쳐놓는 것을 말한다. (거듭하다)은 直龍이다.
그런데 大軍을 동원하여 매우 험한 곳에 가서 공을 이루려고 하니, 먼저 싸움을 하고 뒤에 승리를 구하는 것은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오직 군대를 전진시켜 크게 屯田을 하는 것이 가장 견고한 방책입니다.注+(둔전하다)은 으로 읽는다. (낫다)는 初加이니, 와 같다. 왕창‧호준 등에게 조서를 내려 지역을 선택해서 험준한 곳을 점거하여 세 방향에서 나란히 전진하게 해야 합니다.
적들의 비옥한 땅을 빼앗아서 저들을 척박한 땅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注+秦昔이니, 척박한 땅이다. 우리 병사들이 백성들이 사는 지역 밖으로 나아가서 적이 침탈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두 번째이고,
가까운 지역의 사람들을 회유하여 투항하고 귀의하는 자를 날마다 오게 하는 것이 세 번째이고, 감시망과 연락망을 멀리까지 설치하여 적의 간첩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네 번째이고,
적들이 지키는 곳을 뒤로 물려서 둔전을 세우기 용이하게 하는 다섯 번째이고, 앉아서 쌓아놓은 곡식을 먹어서 병사들이 양식을 운송하지 않는 것이 여섯 번째이고, 적의 약점을 알았을 때 기습하여 속전속결하는 것이 일곱 번째입니다.
무릇 이 일곱 가지는 군사의 급선무입니다. 전진하여 점거하지 않으면 적들이 유리한 조건을 마음대로 활용할 것이고, 점거하면 이익이 국가에 돌아오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司馬師는 따르지 않았다.
[] 王昶 등에게 조서를 내려 세 길로 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창은 南郡을 공격하고, 毌丘儉武昌으로 향하고, 胡遵諸葛誕東興을 공격하였는데, 諸葛恪이 병사 4만을 거느리고서 동흥을 구원하였다.
호준 등이 浮橋를 만들어 건너가서 제방 위에 진을 치고注+(진을 치다)은 으로 읽는다. 병사를 나누어 두 성을 공격하였는데, 성이 높고 험준하여 함락하지 못하였다.
제갈각이 將軍 丁奉으로 하여금 呂據와 함께 선봉으로 삼아 산의 서쪽을 따라 올라가게 하니, 정봉이 말하기를 “각 부대의 행군이 느리니, 만약 적이 유리한 지역을 점거하게 되면 그들과 다투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빨리 달려가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봉이 여러 군대를 물리쳐서 도로에서 비켜나게 하고注+(물리치다)은 과 같이 읽는다. 여러 군대를 물리쳐서 그들로 하여금 길에서 비켜나게 하고 자신의 군대는 전진하는 것이다. 자신은 휘하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곧바로 전진하였다. 배를 타고 돛을 올린 지 2일 만에 東關에 이르러 마침내 徐塘을 점거하였다.注+徐塘東關에 가깝다.
이때에 눈이 내려서 날씨가 추워서 호준이 한창 술자리를 마련하여 큰 연회를 열었는데, 정봉은 나라 선두 부대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병사들에게 모두 갑옷을 벗고 을 버리고 투구와 칼과 방패만을 가지고 웃통을 벗은 채 제방을 기어오르게 하니,注+兜鍪”는 투구이다. 와 통하니, 웃통을 벗는다는 뜻이다. 其謁이니, 제방이다. 〈“倮身緣堨”은〉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제방을 따라서 기어오르는 것을 말한다.
나라 군사들이 바라보면서 크게 비웃고는 곧바로 엄중히 대비하지 않았다.
[] 나라 병사들이 제방에 올라가서 곧장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나라의 선두 진형을 격파하였고, 呂據 등이 이어서 도착하였다.
나라 군사들이 놀라서 흩어져 달아나서 서로 다투어 浮橋를 건너려고 하다가 부교가 부서지니, 서로 짓밟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수만이나 되었다.
나라가 수레, 소와 말, 나귀와 노새를 획득한 것이 각각 천으로 헤아렸고 資材器物이 산처럼 쌓였는데, 부대를 정돈하여 돌아왔다.
[] 王昶毌丘儉東軍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주둔지를 불태우고 달아났다.注+당시에 세 길로 나라를 토벌하였는데 東關이 가장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東軍이라고 하였다. 朝廷에서 신하들이 여러 장군들의 관직을 낮추려고 하자
司馬師가 말하기를 “이는 내가 公休(諸葛誕)의 말을 따르지 않은 과실이다. 여러 장수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라고 하고, 모두 용서하고 오직 사마사의 동생 司馬昭의 작위만 낮추었다.注+公休諸葛誕이다. 이전에 나라를 정벌할 것을 간언한 적이 있는데 司馬師가 따르지 않았고, 지금 병사들이 패하자 과실을 자기에게 돌린 것이다.
[] 뒤에 雍州刺史 陳泰幷州에 조칙을 내려 胡人을 토벌하도록 요구하였다. 아직 군대가 모이지 않았는데 鴈門郡新興郡의 사람들이 멀리 출정하는 것이 두려워 반란을 일으켰다.注+雍州幷州의 서남쪽에 있고, 鴈門郡新興郡 두 군은 병주의 북쪽 변방 지역이니, 그 거리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司馬師가 또 말하기를 “이는 나의 과실이지, 陳雍州(진태)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부끄럽게 여기어 기꺼이 승복하였다.
[] 習鑿齒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司馬師가 두 번 패한 일을 가지고 자기의 과실이라고 말하자, 과실이 줄어들고 사업이 융성해졌다.注+二敗”는 東關 군사의 패배와 幷州 胡人의 배반을 말한다.
만약 남에게 과실을 미루고 허물을 돌리며 공적만을 고집하고 군사를 잃은 것을 숨겼다면 상하의 마음이 떠나고 현인이거나 우매한 사람에 관계없이 모두 흩어졌을 것이다.注+(미루다)는 吐雷이다. 은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四浪이니, 군사를 잃은 것을 말한다.
임금이 진실로 이런 이치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면 행실이 잘못되어도 명성이 드러나고, 병사들의 사기가 꺾여도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니, 비록 백 번 패배를 하더라도 괜찮다. 하물며 두 번 진 것에 있어서랴.”注+(행실)은 去聲이다.
[] 나라의 光祿大夫 張緝이 말하기를 “諸葛恪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司馬師가 말하기를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장집이 말하기를 “그의 위엄이 군주를 떨게 하고 공로가 온 나라를 뒤덮었으니, 어찌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역주
역주1 吳主權卒 : “漢나라가 衰微해지면서 群雄들이 할거하여 貢物을 바치지 않아서 ≪資治通鑑綱目≫에서 이를 취하여 기록함이 없었다. 仲謀(孫權)가 孫策을 대신하여 섰을 때에 ≪資治通鑑綱目≫에서 기록하여 인정한 것은 세 번이니, 曹操에게 인질을 보내지 않은 것이 첫째이고, 조조를 맞아 공격한 것이 둘째이고, 연호를 바꾸어 魏나라에 항거한 것이 셋째이다. 그러나 江陵을 습격해 취하고 關羽의 퇴로를 막아 죽여서 마침내 魏나라를 더욱 강화시키게 하였고 漢나라를 부흥할 수 없게 하였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유독 크게 죄를 주었다. 그러므로 昭烈(劉備)이 〈관우를 복수하기 위해 吳나라에〉 출병했을 때 특히 ‘伐’이라고 기록하였다.[自漢室衰微 群雄竊據 不修職貢 綱目無取焉 仲謀代立 綱目書予之者三 不遣任子一也 迎擊曹操二也 改元拒魏三也 而襲取江陵 邀殺關羽 遂使魏益以強 漢不可復 綱目獨深罪之 故昭烈之師特書伐]” ≪書法≫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4권 하 蜀漢 昭烈帝 章武 원년(221) 綱에 “帝自將伐孫權(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손권을 정벌하였다.)”이라 하였다.
역주2 呂后가……물었다 : 呂后는 漢 高祖 劉邦의 后 呂雉이다. 稱制는 황제의 명령인 制를 칭하는 것으로, 황제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다. 漢 高祖가 죽은 뒤에 여치의 아들 惠帝가 즉위하였으나 7년 만에 죽고 태자 劉恭(少帝)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여치가 臨朝 稱制하여 8년 동안 정치를 맡았다.(≪漢書≫ 〈高后本紀〉)
역주3 (欠)[久] : 저본에는 ‘欠’으로 되어 있으나, ≪漢書≫에 의거하여 ‘久’로 바로잡았다.
역주4 다음으로……생각하고 : 河間獻王 劉德은 漢나라 景帝의 셋째 아들로, 서적을 수집하고 儒學을 숭상하며 禮樂을 닦아 山東의 諸儒들이 많이 따랐다.(≪漢書≫ 〈河間獻王傳〉)
東海恭王 劉彊은 後漢의 光武帝 劉秀의 長子로 郭皇后의 소생이다. 곽황후가 폐위되고 貴人인 陰氏가 황후가 되자 황태자로 있던 유강은 태자의 자리를 사양하니, 東海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劉陽이 태자로 책봉되었다.(≪後漢書≫ 〈光武帝紀 下〉)
역주5 魯王(孫霸)의 일 : 魯王 孫霸는 太子 孫和의 아우인데, 손화와 화목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손권에게 알려지자 손권은 그들의 왕래를 금지시키고 학문에 정진할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손패는 손화를 죽이려 하였고 이 사건이 발각되어 赤烏 13년(250)에 죽음이 내려졌다. 그의 徒黨 全寄 등도 주살되었다.(≪三國志≫ 〈吳書 孫霸〉)
역주6 巢湖를……않았다 : ≪資治通鑑≫ 註에 正始 2년 芍陂의 패전을 말한다고 하였다.
역주7 吳나라와……동안 : 漢나라 建安 13년(208) 赤壁大戰부터 이때까지가 모두 55년이고, 吳나라와 魏나라가 통한 것은 3년뿐이다.(≪資治通鑑≫ 註)
역주8 (君)[軍] : 저본에는 ‘君’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軍’으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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