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두어서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송宋나라 황자皇子들로서 방진方鎭을 다스리는 이들은 대부분 어렸으므로 이때의 황제들은 모두 친근한 측근으로 전첨典籖을 임명하였다.
이때에 와서 비록 장성한 제후왕(황자)이 번진藩鎭을 다스리거나 한족寒族 출신 인물이注+① “素族”은 異姓이고 公族이 아니다.번진藩鎭으로 나와 자사刺史가 되더라도 모두 전첨이 교명敎命을 출납하니 자사刺史가 자기 직책을 전담할 수 없었다.
종각宗慤이 예주자사豫州刺史가 되었을 적에 오희呉喜가 전첨典籖으로 있으면서 매번 명령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종각이 크게 노하기를 “내 나이 60살이 다 되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는데, 겨우 말[두斗] 크기만 한 작은 주州를 얻었으니, 다시 전첨과 함께 다스릴 수 없다.”라고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正은 一本에는 止로 되어 있다. 하자, 오희가 이마를 조아려 피를 흘리자 종각의 노여움이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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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 7월에 송宋나라가 서양왕西陽王유자상劉子尙을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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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태부太傅유의공劉義恭은 송주宋主(효무제孝武帝)의 아들 유자상劉子尙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 하여 그를 피하고자 양주자사揚州刺史에서 물러났는데 송주宋主가 유자상을 양주자사로 삼았다.
이때 형혹성熒惑星이 남두성南斗星에 머물러 있자, 송주宋主는 서주西州 옛 관청을 폐기하고 유자상을 시켜서 동성東城으로 치소를 옮겨 재앙을 물리치게 하였다.注+① 南斗星은 揚州 分野이므로 재앙을 물리치게 하였다.별가别駕심회문沈懐文이 말하기를 “하늘이 변고를 보이시니 마땅히 선덕善德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비록 서주西州를 다 비워 이주시켜도 아마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송주宋主는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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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8월에 북위北魏가 이오伊吾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注+① 李寶가 伊吾․敦煌 지역을 가지고 北魏에 항복하였는데, 이보가 入朝하고 나서 이오가 다시 반란하였으므로 공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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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0월에 송宋나라가 강하왕江夏王유의공劉義恭을 태재太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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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11월에 북위北魏가 원하源賀를 기주자사冀州刺史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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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원하源賀가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렸다. “지금 북방 오랑캐(유연柔然)가 떠돌아다니며注+① “遊魂”은 정한 곳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소요를 일으키고 남쪽 도적(송宋나라)이 험준한 지형을 의지하여 위세를 부리니, 변경 지역에 여전히 방수防戍하는 군사가 있어야 합니다. 역적이나 고의로 사람을 쳐서 죽인 자가 아니면 도둑질에 걸리거나 과오를 저질러 사형을 받아야 할 자들을 모두 용서하여 변경으로 유배流配하여 변방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잘렸을 몸이 다시 사는 은혜를 받게 되고 요역徭役을 담당하던 집들이 휴식하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위주魏主(문성제文成帝)는 그 말을 따랐다.
얼마 뒤에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원하의 말을 써서 1년 동안에 살아난 자가 적지 않고 병력을 증강한 것도 많았다. 경卿들도 각기 원하처럼 한다면 짐朕이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 어느 사람이 원하가 모반했다고 고발하자,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원하는 정성을 다해 국가를 섬기니 짐朕이 〈그의 무고함을〉 경卿들에게 보증하겠다.”라고 하였다. 심문해보니 과연 무고誣告한 것이었다.
이에 고발자를 주살하고 이어서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원하의 충성으로도 오히려 무고와 비방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원하에게 못 미치는 이들은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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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12월에 송宋나라가 청주靑州․기주冀州의 치소治所를 옮겨 합쳐서 역성歴城에 진鎭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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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송주宋主(효무제孝武帝)가 청주靑州․기주冀州의 치소治所를 옮겨 역성歴城에 합하여 진鎭을 두려고 하였는데, 자사刺史注+① 〈垣護之가 맡은〉 刺史는 靑州․冀州刺史이다.원호지垣護之가 말하기를 “청주靑州는 북으로 황하黃河․제수濟水가 있고 또 호수가 많습니다. 북쪽 오랑캐(북위北魏)가 늘 침략해올 적마다 반드시 역성을 경유하니 2주州의 진鎭을 합하면 이는 국가를 장구하게 경영할 수 있는 계책입니다.
북쪽으로는 또 황하와 가까워서 귀순歸順하는 자들도 편의합니다. 가까이로는 백성의 걱정을 그치게 하고 멀리로는 제왕의 위엄을 펼 수 있으니, 변경을 안전하게 하는 상책上策입니다.”라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이를 결정하였다.注+② 靑州의 본래 東陽에 치소를 두었고 冀州의 본래 歴城에 치소를 두었는데 지금 합하여 하나의 鎭으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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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북위北魏정주자사定州刺史허종지許宗之가 죄가 있어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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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허종지許宗之는 백성을 착취하는 데에 절제가 없었는데, 정주定州 백성 마초馬超가 자기를 비방하였다고 하여 때려죽이고 그 가족들이 고소장을 올릴까 두려워하여 글을 올려 마초가 조정 정사를 비방했다고 하였다.
위주魏主(문성제文成帝)가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거짓이다. 짐朕이 천하의 임금이 되어 마초에게 미움을注+① 惡(미워하다)는 烏路의 切이다. 받을 것이 무에 있어서 이런 비방하는 말이 있겠는가. 반드시 허종지가 죄를 겁내어 마초를 무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조사해 증험해보자 과연 그러하였으므로 마침내 허종지를 참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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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송宋나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안연지顔延之가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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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안연지顔延之의 아들 안준顔竣이 지위가 높고 직임이 중하여 그가 보내오는 물건들을 안연지는 일절 받지 않았고, 예전과 같이 조촐하게 삼베옷을 입고 초가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늘 여윈 소가 끄는 허름한 수레를 탔는데 안준의 노부鹵簿(의장대)를 만날 때에는 즉시 길 옆으로 숨었다.注+① 笨은 部本의 切이니, 대나무 속껍질이다. 일설에는 “정밀하지 않은 것이다.”라 한다. 행차에 따르는 안내자와 수행원을 鹵簿라고 한다.
늘 안준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생 권력자를注+② “要人”은 권력이 있고 지위가 높은 자를 이른다. 만나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 불행하게도 너를 만났구나.”라고 하였다. 안준이 집을 짓자 말하기를 “잘 행동해서 후세 사람들이 너의 졸렬함을 비웃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안연지가 아침 일찍 안준에게 간 적이 있었는데 빈객들이 문안에 가득한데도 안준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 안연지가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낮은 신분에서 나와 높은 지위에 올라서서는 갑자기 오만하기가 이와 같으니 오래갈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안준이 부친의 상을 당한 지 한 달이 지나서 그를 우장군右將軍으로 기용하고 예전과 같이 단양윤丹楊尹으로 삼았다. 그러자 안준이 굳이 사퇴하고자 표문表文을 열 번이나 올렸는데도 허락하지 않았다. 중서사인中書舍人을 보내서 안준을 부축하여 수레에 올라서 그를 싣고 군郡의 관청으로 가게 하였고, 채색한 풀솜을 채운 포의布衣(베로 만든 옷) 한 벌을 내리고서 주의主衣를 보내서 그의 몸에 입히게 하였다.注+③ 之는 간다는 뜻이다. “郡舍”는 丹楊尹의 官舍이다. 綸(풀솜)은 솜과 비슷하면서 가늘다. “絮以綵綸”은 彩色한 綸을 하사한 布衣 안에 넣음을 말한다. 主衣는 官名이니, 尙衣라는 말과 같다. 就衣의 衣(입다)는 於旣의 切이다.
역주
역주1宋孝建三年 魏太安二年 :
421년에서 588년까지는 無統이다. 朱熹의 凡例를 보면 正統인 경우 歲年(干支) 다음에 國號, 諡號, 姓名, 年號, 年度 등을 大字로 쓰는 데 반해, 無統일 경우 위처럼 小字로 쓴다. 본서의 내용은 無統에 해당하므로 이 부분을 모두 小字로 표기하였다. 隋나라 文帝가 천하를 통일한 589년 이후로는 隋나라를 정통으로 삼아서 大字로 표시하였다.
역주2魏主立其子弘爲太子 :
“‘立太子(太子를 세웠다.)’라고 기록한 것이 많은데 여기서 ‘魏主’라고 지척하여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나무란 것이다. 이때에 拓跋弘은 태어난 지 겨우 3세였는데 그 어머니를 시켜서 부탁할 일을 조목별로 기록하게 한 뒤에 이전의 관례에 따라 죽음을 내렸으니 이는 또한 조금 늦출 수 없는 것인가. 잔인하구나, 文成帝가 임금 노릇 한 것이여! 그러므로 지척하여 ‘主’라고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太子를 세우는 경우에 지척하여 ‘主’라고 기록한 것은 4번이니, 成漢에서 형의 아들 李班을 세운 것(晉 明帝 太寧 2년(324)), 北魏에서 아들 拓跋弘을 세운 것(이해(456)), 아들 拓跋恂을 세운 것(癸酉年(493))이, 梁나라에서 아들 蕭綱을 세운 것(辛亥年(531))이니, 모두 나무란 것이다.[書立太子多矣 此其斥書魏主 何 譏也 於是弘生甫三歲 使其母條記所託 依故事賜死 是亦不可少緩乎 忍哉 其爲君也 故斥書主 終綱目 立太子斥書主者四 成立兄子班(晉明帝太寧二年) 魏立子弘(是年) 立子恂(癸酉年) 梁立子綱(辛亥年) 皆譏也]” ≪書法≫書法은 ‘筆法’이란 말과 같다. 朱子는 ≪자치통감강목≫을 편찬할 적에 孔子의 ≪春秋≫ 筆法을 따라 綱과 目으로 나누었는바, 綱은 ≪春秋≫의 經文을, 目은 ≪春秋左氏傳≫의 傳文을 따랐다. ≪자치통감강목≫의 筆法을 밝힌 것으로는 劉友益(宋)의 ≪綱目書法≫, 尹起莘(宋)의 ≪綱目發明≫이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두 책은 현재 淸나라 聖祖(康熙帝)가 엮은 ≪御批資治通鑑綱目≫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이 필법은 綱에 주안점이 맞춰져 있는데, 우리나라 학자들이 특별히 이 ≪자치통감강목≫을 愛讀한 이유는 바로 이 필법에 있다. ≪어비자치통감강목≫에는 이외에도 汪克寬(元)의 ≪綱目凡例考異≫ 등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나, 본서에서 다 소개하지 못하고 ≪강목서법≫과 ≪강목발명≫의 중요한 것만을 발췌하여 수록하였다. 또한 陳濟(明)의 ≪資治通鑑綱目集覽正誤≫를 인용하여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각각 ≪書法≫, ≪發明≫, ≪正誤≫로 요약하여 표기하였다.
역주3典籤 :
≪南史≫ 〈恩倖 呂文顯傳〉에서 “故事에, 府州의 부서 내에서 일을 논할 때에는 늘 쪽지[籤]의 앞쪽에다 논하는 일을 순서대로 써놓았는데, 훗날 이를 謹籤이라 하고 날짜 아래에 아무개 관리의 아무개 쪽지라고 표시를 했다. 그리하여 府州에서는 典籤을 두어 그 일을 맡겼는데, 본래는 五品의 관리였다가 宋代 초에 七職으로 바뀌었는데, 宋朝가 들어서자 나이 어린 皇子를 藩鎭으로 내보내면서 당시 군주들이 다들 가까운 측근을 전첨으로 임명함에 따라 그 권한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趙曦明) ≪唐六典≫ 29에 “親王의 官府에 전첨이 있는데, 宣傳과 敎令의 일을 관장한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4切 :
反切音을 표시한 것이다. ‘反(번)’은 뒤집는다(되치다)는 뜻으로 번역을 의미하고, ‘切’은 자른다는 의미이다. 앞 글자의 初聲을 따고 뒷글자의 中聲과 終聲을 따서 읽는다.
역주5宋金紫光祿大夫顔延之卒 :
“顔延之에게는 官爵을 기록하고 卒이라고 기록하여 이처럼 칭창한 것은 그의 淸儉한 德과 아들을 아는 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延之書爵 書卒 褒美如此 所以著其淸儉之德 知子之明也]” ≪發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