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8)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齊世祖武帝賾永明元年이요 魏太和七年이라
齊復郡縣官田秩하고 遷代 以小滿爲限하다
詔以邊境寧晏이라 治民之官 普復田秩注+復, 還也. 田, 職田. 秩, 祿也. 宋文帝元嘉二十七年, 有魏師, 以軍興減百官奉祿. 淮南太守諸葛闡求減俸祿, 比內百官, 於是諸州郡縣丞尉竝悉同減. 至明帝時, 軍旅不息, 府藏空虛, 內外百官, 竝斷奉祿.하다
宋末 以治民之官 六年過久라하여 乃以三年爲斷하고 謂之小滿호되 遷換去來하여 又不能依三年之制러라 至是乃詔自今一以小滿爲限하다
夏四月 齊殺其尙書垣崇祖 散騎常侍荀伯玉하다
齊主之爲太子也 自以年長하고 與創大業하여 朝事率皆專斷하니 所信任左右張景眞 驕侈僭擬호되 內外莫敢言이러니
司空諮議荀伯玉 素爲太祖所親厚 密以啓聞注+諮議, 卽諮議參軍.한대 太祖怒하여 命檢校東宮하여 宣勅詰責하고 使以太子令으로 收景眞殺之하니
齊主憂懼稱疾이라 月餘 太祖怒不解러니 王敬則叩頭啓曰 官有天下日淺이어늘 太子無事被責하니 人情恐懼 願官往東宮解之하소서
因宣旨裝束한대 太祖不得已至東宮하여 召諸王宴하여 盡醉乃還하니 伯玉由是愈見親信하니 而齊主深怨之 豫州刺史垣崇祖亦不親附太子
太祖臨終 指伯玉以屬齊主러니 至是齊主誣崇祖招結江北荒人하여 欲與伯玉作亂이라하고 皆收殺之하다
閏月 하다
魏主後宮林氏生子恂하니 馮太后以恂當爲太子라하여 賜林氏死하고 自撫養之하다
敬兒好信夢하니 初爲南陽守 妻尙氏夢一手熱하고 爲雍州 夢一胛熱하고 爲開府 夢半身熱注+胛, 古狎切, 背胛也. 一曰闔也, 與胸脅相會闔也.이러니
敬兒意欲無限하여 謂所親曰 吾妻復夢擧體熱矣라하니 齊主聞而惡之러라 會有人告敬兒貨易蠻中하니 疑有異志注+貨易, 即貿易也.한대
會齊主於華林園設齋러니 於坐 收敬兒하니 敬兒脫冠貂投地曰 此物誤我라하니 遂殺之注+設齋, 通鑑作設八關齋. 釋氏之戒, 一不殺生, 二不偷盜, 三不邪淫, 四不妄語, 五不飲酒食肉, 六不著花鬘瓔珞, 香油塗身, 歌舞倡伎故往觀聽, 七不得坐高廣大床, 八不得過齋後喫食, 已上八戒, 故爲八關.하다
敬兒女爲征北諮議謝超宗子婦注+超宗, 靈運之孫也. 超宗謂丹楊尹李安民曰 往年殺韓信하고 今年殺彭越하니 尹欲何計 安民具啓之한대 收付廷尉賜死하다
秋七月 齊以王僧虔으로 爲特進光祿太夫하다
齊主以侍中王僧虔爲左光祿太夫開府儀同三司한대 僧虔固辭開府하고 謂兄子儉曰 汝行登三事하니 我若受此 是一門二台司也 吾實懼焉이라하고
累年不拜러니 至是許之하고 加特進注+三公, 主天․地․人之事, 故曰三事. 行登, 謂行將登此位也.하다 儉作長梁齋호되 制度小過하니 僧虔不悅하여 竟不入戶한대 儉即日毀之하다
王弘與兄弟集會하여 任子孫戲適注+適, 樂也.하니 僧達跳下地하여 作虎子하고 僧綽正坐하여 采蠟燭珠爲鳳皇하니 僧達奪取打壞호되 亦復不惜하고 僧虔累十二博棋하여 旣不墜落하고 亦不重作하니
弘歎曰 僧達 俊爽當不減人이로되 然恐終危吾家 僧綽 當以名義見美 僧虔 必爲長者하여 位至公台라하더니 而皆如其言이러라
冬十月 熒惑逆行入太微하다
齊有司以請禳之한대 齊主曰 應天以實이요 不以文이라 我克己求治하여 思隆惠政이니 災若在我 禳之奚益이리오
齊遣將軍劉纘如魏하다
纘屢至魏하니 馮太后遂私幸之러라
十二月朔 日食하다
◑魏秦州刺史于洛侯有罪伏誅하다
洛侯性殘酷하여 刑人 或斷腕拔舌하고 分懸四體하니 州民皆反이라 有司劾之한대 魏主遣使至州하여 宣告吏民하고 然後斬之하다
齊州刺史韓麒麟爲政尙寬하니 從事劉普慶說曰 公杖節方夏하고 而無所誅斬하니 何以示威오하니
麒麟曰 刑罰 所以止惡이니 仁者不得已而用之 今民不犯法하니 又何誅乎리오 若必斷斬然後 可以立威 當以卿應之라한대 普慶慙懼而退하다


나라 세조世祖 무제武帝 소색蕭賾 영명永明 원년이고,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태화太和 7년이다.
[] 봄에 나라가 군현郡縣의 관리에게 전질田秩(직전職田녹봉祿俸)을 회복시켜주고, 관리를 승진시키고 교체하는 것을 소만小滿을 기한으로 삼았다.
[] 조서를 내려서 “변경이 편안해졌으니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에게 널리 전질田秩을 회복시키라.”注+① 復은 돌이키는 것이다. 田은 職田이고 秩은 祿俸이다. 宋나라 文帝 元嘉 27년(450)에 北魏의 침략이 있어서 군대를 일으킨다는 이유로 百官의 녹봉을 줄였다. 淮南太守 諸葛闡이 봉록을 줄여 중앙의 백관에 견주어 달라고 요청하자, 이에 諸州와 郡縣의 丞․尉가 모두 함께 봉록을 줄였다. 明帝 때에 이르러 전쟁이 그치지 않아 國庫가 텅 비자, 중앙과 지방의 백관들이 모두 봉록을 줄였다. 하였다.
나라 말기에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가 6년을 재임하는 것은 지나치게 오랜 기간이라고 하여 마침내 3년으로 제한하여 이를 ‘소만小滿’이라고 하였는데, 관리가 승진하고 바뀌어 오고가서 또 3년 만기의 제도에 의거할 수도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조서를 내려 “지금부터 일률적으로 소만小滿을 기한으로 하라.”라고 하였다.
[] 여름 4월에 나라가 상서尙書 원숭조垣崇祖산기상시散騎常侍 순백옥荀伯玉을 죽였다.
[] 제주齊主(소색蕭賾)가 태자였을 때 스스로 〈황자들 중에〉 나이가 제일 많고 태조太祖(소도성蕭道成)와 함께 대업을 열었다고 하여 조정의 일을 대략 모두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였다. 곁에 두고 신임하던 장경진張景眞이 교만하고 사치하였으나 안팎에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공부司空部자의참군諮議參軍注+① 諮議는 諮議參軍이다. 순백옥荀伯玉은 평소 태조가 가까이하고 두텁게 여겼던 사람이이서 비밀리에 태조에게 알리자, 태조는 화가 나서 동궁을 조사하도록 명령하였고, 칙령을 선포하여 힐책하고 태자의 명령으로 장경진을 잡아들여 그를 죽이게 하였다.
제주齊主(소색)는 근심하고 두려워 병이 났다고 하였다. 한 달 가량이 지나도 태조의 화는 풀어지지 않았다. 왕경칙王敬則이 태조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황제)께서는 천하를 소유하신 지가 얼마 안 되는데, 태자가 질책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으니,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께서는 동궁에 가셔서 이를 푸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경칙이 그로 인해 태조가 동궁으로 갈 뜻을 알리고 태조의 복장을 치장하게 하자, 태조는 마지못해 동궁으로 가서 여러 왕들을 불러서 연회를 열어 잔뜩 취해서 돌아왔다. 순백옥이 이 일로 인해 더욱 신임을 받자, 제주齊主는 순백옥을 깊이 원망하였다. 예주자사預州刺史 원숭조垣崇祖 또한 태자 편에 붙지 않았다.
태조가 임종할 때 순백옥에게 제주齊主를 부탁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주齊主가 원숭조가 장강長江 북쪽의 비루한 사람들과 결탁하여 불러들여서 순백옥과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고 무고하고 모두를 잡아들여서 죽였다.
[] 윤4월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의 아들 탁발순拓跋恂이 태어났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의 후궁 임씨林氏가 아들 탁발순拓跋恂을 낳으니, 풍태후馮太后가 탁발순을 마땅히 태자로 삼아야 한다고 하여 임씨를 죽이고는 자신이 돌보고 길렀다.
[] 5월에 나라가 거기장군車騎將軍 장경아張敬兒를 죽였다.
[] 장경아張敬兒는 꿈을 믿는 것을 좋아하였다. 예전에 남양태수南陽太守가 되자, 그의 처인 상씨尙氏가 한 손이 뜨거워지는 꿈을 꾸었고, 옹주자사雍州刺史가 되자 한쪽 어깨가注+① 胛(어깨)은 古狎의 切이니, 背胛이다. 일설에는 闔이니, 가슴과 옆구리가 만나는 곳이 闔이다. 뜨거워지는 꿈을 꾸었으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자 몸이 반이나 뜨거워지는 꿈을 꾸었다.
장경아는 욕심이 끝이 없어서 친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처가 다시 몸 전체가 뜨거워지는 꿈을 꾸어야 할 터인데.”라고 하니 제주齊主(소색蕭賾)가 이를 듣고 싫어하였다. 마침 어떤 사람이 장경아가 만족蠻族들과 물건을 교역한다고注+② “貨易”는 바로 貿易이다. 보고하자, 그가 다른 뜻을 갖고 있다고 의심하였다.
때마침 제주齊主화림원華林園에서 를 베풀었는데注+③ “設齋”는 ≪資治通鑑≫에는 “設八關齋(八關齋를 베풀었다.)”로 되어 있다. 불교의 戒律은 첫째는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사벽하고 음란한 짓을 하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고, 여섯째는 꽃다발과 구슬로 된 목걸이로 장식하지 말고 향유를 몸에 바르지 말고 춤추고 노래하지 말며 그런 것을 가서 보고 듣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높고 넓은 평상에 앉지 않는 것이며, 여덟째는 齋(小乘에서는 정오를 지나지 않은 식사)를 지난 뒤에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다. 이상이 八戒이므로 八關이라고 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장경아를 잡아들였다. 장경아가 관초冠貂를 벗어 땅에 던지고 말하기를, “이 물건이 나를 그르치게 하였구나!”라고 하니, 마침내 장경아를 죽였다.
장경아의 딸은 정북장군부征北將軍府자의참군諮議參軍사초종謝超宗注+④ 謝超宗은 謝靈運의 손자이다. 며느리가 되었다. 사초종이 단양윤丹楊尹 이안민李安民에게 말하기를 “‘왕년에 한신韓信을 죽이고, 금년에는 팽월彭越을 죽였구나.’라고 하였으니, 단양윤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안민이 이 사실을 갖추어 계문을 올리자, 그를 잡아서 정위廷尉에게 회부하여 죽음을 내렸다.
[] 가을 7월에 나라가 왕승건王僧虔특진特進 광록대부光祿太夫로 삼았다.
[] 예전에 제주齊主(소색蕭賾)가 시중侍中 왕승건王僧虔좌광록대부左光祿太夫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삼으려 하자, 왕승건이 개부의동삼사를 굳게 사양하여 조카 왕검王儉에게 말하기를, “너는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를 것이니注+① 三公은 天․地․人의 일을 주관하기 때문에 “三事”라고 한 것이다. “行登”은 앞으로 이 지위에 오르게 됨을 말한 것이다., 내가 만약 이것을 받게 된다면 한 집안에서 두 명의 태사台司(삼공三公)가 있게 되는 것이니, 나는 실로 두렵구나.”라고 하였다.
여러 해 동안 관직을 받지 않으니, 이때 이르러 허락하고 왕승건에게 특진特進을 덧붙여주었다. 왕검이 긴 대들보를 올린 재실齋室을 지었는데, 제도로 보아 조금 지나쳤다. 왕승건이 이를 보고 기뻐하지 않고 끝내 문에 들어가지 않자, 왕검이 그날로 허물어버렸다.
예전에 왕홍王弘이 형제들과 모임을 가지면서 자손들에게 마음대로 즐겁게注+② 適은 즐긴다는 뜻이다. 놀게 하였다. 왕승달王僧達은 땅에 뛰어 내려가서 호랑이 흉내를 내었고, 왕승작王僧綽은 똑바로 앉아서 촛불에서 떨어지는 촛농을 가져다가 봉황을 만드니, 왕승달이 빼앗아 부수었지만 역시 다시 애석해하지 않았으며 왕승건은 12개의 바둑알을 쌓아서 이미 떨어지지 않게 되자 역시 다시 만들지 않았다.
왕홍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왕승달은 뛰어나고 시원스러워 다른 사람보다 못하지는 않지만, 끝내 우리 집안을 위태롭게 할까 걱정이고, 왕승작은 이름과 의리로 좋은 명성을 얻을 것이며, 왕승건은 반드시 장자長者가 되어서 지위가 재상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모두 그의 말처럼 되었다.
[] 겨울 10월에 형혹성熒惑星이 역행하여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 나라에서 유사有司가 푸닥거리를 하라고 청하자 제주齊主(탁발굉拓跋宏)가 말하기를 내가 사욕을 극복하여 잘 다스리기를 구하여 어진 정치를 융성하게 할 것을 생각해야 하니 재앙이 만일 나에게 달려 있다면 푸닥거리를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 나라가 장군 유찬劉纘북위北魏에 보냈다.
[] 유찬劉纘은 여러 번 북위北魏에 가니, 풍태후馮太后가 드디어 사사롭게 그와 사통하였다.
[] 12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북위北魏가 처음으로 동성 간에 혼인을 금지하였다.
[] 북위北魏 진주자사秦州刺史 우락후于洛侯가 죄를 저질러 죽임을 당했다.
[] 우락후于洛侯는 성품이 잔혹하여 사람에게 형벌을 줄 때 팔을 자르고 혀를 뽑고 사지를 나누어 걸어놓기도 하였는데, 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배반하였다. 유사有司가 그를 탄핵하니 위주魏主(소색蕭賾)가 그 로 사자를 파견하여 관리와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 나서 그의 목을 베었다.
제주자사齊州刺史 한기린韓麒麟은 정치를 할 적에 항상 관대하였는데, 종사從事 유보경劉普慶이 유세하기를 “공께서 부절을 가지고 중원 지역(제주齊州)을 다스리면서 사람의 목을 베는 일이 없으니, 어떻게 위엄을 보이실 것입니까?”라고 하니
한기린이 말하기를, “형벌이라는 것은 악한 일을 그치게 하는 것이니, 인자仁者는 부득이한 경우에 이를 쓰는 것이다. 지금 백성들이 법을 어기지 않으니, 또 무슨 목을 벨 일이 있겠는가. 만약에 반드시 목을 베는 일을 결행한 뒤에 위엄을 세울 수 있다면 마땅히 경으로 그에 응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보경은 부끄럽고 두려워 물러갔다.


역주
역주1 魏子恂生 : “아들 출생은 기록하지 않는데 여기서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太后의 잔인함 때문이다. 北魏 故事에 太子를 세우면 그 모친을 죽였다. 이때에 林氏가 拓跋恂을 낳자 太后는 그가 太子가 될 것이므로 바로 林氏를 죽이고서 자신이 양육하였으니 또한 매우 잔인하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아들 출생을 기록한 것이 5번이고 손자 출생을 기록한 것이 1번이니(漢 武帝 太始 3년(B.C.94)에 자세하다.) 모두 연고가 있었다. 탁발순은 또 겸하여 아버지를 배반한 것으로 기록되었다.[子生不書 此其書 何 太后忍也 魏故事 立爲太子 乃殺其母 於是林氏生恂 太后以其當爲太子也 即殺林氏 自撫養之 亦大忍矣 終綱目書子生五 孫生一(詳漢武帝太始三年) 皆有故者也 恂又兼以叛父書]” ≪書法≫
역주2 齊殺其車騎將軍張敬兒 : “이에 謝超宗에게 죽음을 내렸는데 어찌하여 기록하지 않았는가. 謝超宗은 말로 선동하여 그 죄가 컸다. 張敬兒가 蠻에 가서 交易을 하였는데 逆心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을 하였으나 죄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그를 죽였다. 그 官爵을 특별히 기록한 것은 齊나라를 심하게 여긴 것이다.[於是賜超宗死 則何以不書 超宗言語扇動 其罪大張 敬兒貨易蠻中 疑有異志 則罪未白也 而遽殺之 特書其官爵 所以甚齊也]” ≪書法≫
역주3 하늘에……되오 : 漢나라 때 王嘉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백성을 감동시킬 때는 행동으로 해야지 말로 하지 않으며, 하늘에 응대하는 것은 실지로 해야지 꾸밈만으로 해서는 안 된다.[臣聞動民以行 不以言 應天以實 不以文]”라고 하였다.(≪漢書≫ 권45 〈蒯伍江息夫傳〉)
역주4 魏始禁同姓爲昏 : “夷狄이 夫婦의 한 가지 윤리에 대해서는 지저분함이 더욱 심하였다. 자기 영역 안에서는 괴상할 것이 없으나 이미 중국 지역에 들어와서 중국 사람들과 섞이고 중국의 풍속을 익히면서도 여전히 사모해 본받을 줄을 몰랐으니, 이들은 秉彛(늘 지닌 성품)의 성품과 羞惡의 마음이 없어서 사람의 도리로 대우할 수 없다. 元魏(北魏)가 華夏에 들어와 살면서 일마다 중국 聖人의 가르침을 사모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또 同姓 간에 혼인 금지법을 만들었다. 蒙古의 아들이 아버지의 첩을 이어받고 형이 아우의 아내를 거두어들여 나라가 끝마칠 때까지 변할 줄 몰랐던 것에 비하면 다른 것이다. 이것이 ≪資治通鑑綱目≫에서 특별히 기록하여 인정해준 이유이다.[夷狄於夫婦一倫 瀆亂尤甚 在其域中 無足恠者 既入中國之地 雜中國之人 習中國之俗 猶不知所慕傚 則是無秉彛之性 羞惡之心 不可以人理待之矣 元魏入居華夏 事事慕中國聖人之敎 至是又有同姓爲昏之禁 其視蒙古之子承父妾 兄收弟婦 至於國終而不知變也異矣 此綱目所以特書而予之]” ≪發明≫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9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