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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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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元嘉十五年이요 魏太延四年이라
春二月 宋以吐谷渾慕利延으로 爲隴西王하다
◑三月 注+以其彊壯, 罷使爲民, 以從征役.하다
◑髙麗殺故燕王弘하다
燕王弘至遼東이어늘 高麗王璉 遣使勞之曰 龍城王馮君 爰適野次하니 士馬勞乎注+燕王都于龍城, 故號龍城王. 弘慙怒하여 稱制讓之한대
高麗處之平郭이러니 尋徙北豐하다 弘素侮高麗하여 政刑賞罰 猶如其國하니 高麗乃奪其侍人하고 取其太子王仁爲質한대
弘怨高麗하여 遣使求迎於宋하니 宋主遣使迎之어늘 高麗遂殺弘하고 并其子孫十餘人하다
秋七月 魏伐柔然하되 不見虜而還하다
漠北大旱하여 無水草하니 人馬多死니라
冬十一月朔 日食하다
豫章雷次宗 好學하여 隱居廬山이러니 嘗徴爲散騎侍郎한대 不就注+廬山在尋陽.니라
是歲 以處士徴至建康하여 爲開舘於雞籠山하여 使聚徒教授注+爲, 去聲. 雞籠山在臺城北郊.하다
宋主雅好藝文하여 使丹楊尹何尙之 立玄學하고 太子率更令何承天으로 立史學하고 司徒參軍謝元으로 立文學하여 并次宗儒學爲四學注+玄學, 老․莊之敎也. 晉志 “太子率更令主宮殿門戶及賞罰事, 職如光祿勳․衛尉.” 元, 靈運之從祖弟也.하다
宋主數幸次宗學館하여 令次宗으로 以巾褠侍講하고 資給甚厚하고 又除給事中한대 不就러니 久之 還廬山注+巾謂巾幘, 褠謂單衣. 江南人士交際以爲盛服, 蓋次於朝服.하다
司馬公曰 史者 儒之一端이요 文者 儒之餘事어니와 至於老莊虛無 固非所以爲教也 夫學者所以求道 天下 無二道 安有四學哉리오
◑宋主性仁厚恭儉하고 勤於爲政하여 守法而不峻하고 容物而不弛하니 百官皆久於其職하고 守宰以六朞爲斷하니 吏不苟免하고 民有所係
三十年間 四境之内 晏安無事하여 户口蕃息하여 出租供徭 止於歲賦 晨出暮歸 自事而已注+歲賦, 常賦也. 言不額外取民. 自事, 言民自事其事也.
閭閻之内 講誦相聞하여 士敦操尚하고 鄉恥輕薄하니 江左風俗 於斯爲美 後之言政治者 皆稱元嘉焉이러라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15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太延 4년이다.
[綱] 봄 2월에 宋主가 吐谷渾 慕容慕利延을 隴西王으로 삼았다.
[綱] 3월에 北魏가 沙門으로 나이 50세 이하인 자는 환속시켰다.注+① 〈“沙門五十以下者”는〉 힘이 세고 건장하기 때문에 그들을 그만두게 하여 백성으로 만들어 征役에 종사하게 한 것이다.
[綱] 高句麗가 前 北燕王 馮弘을 죽였다.
[目] 예전에 北燕王 馮弘이 遼東에 도착하자, 高句麗王 高璉(長壽王)이 사신을 보내 노고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龍城王注+① 北燕王은 龍城에 都邑하였으므로 龍城王이라 불렀다. 馮君께서 이렇게 들판에 와서 머물고 있으니, 군사와 말이 얼마나 피로합니까.”라고 하니, 풍홍이 부끄러워하면서도 분노하여 조서를 내려 고구려왕을 꾸짖었다.
高句麗는 풍홍을 平郭에 있도록 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北豐으로 옮겼다. 풍홍은 본래 고구려를 업신여겨서, 정령과 형벌을 시행하고 상과 벌을 줄 때 자기 나라에 있을 때처럼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마침내 풍홍의 시종을 빼앗고, 풍홍의 太子 馮王仁을 데려가서 볼모로 삼았다.
풍홍이 고구려를 원망하여 宋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영접해줄 것을 요청하니, 宋主가 사신을 보내 맞이하였다. 고구려는 결국 풍홍을 죽이고 풍홍의 자손 10여 명을 아울러 죽였다.
[綱] 가을 7월에 北魏가 柔然을 정벌하였으나 오랑캐를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目] 이때 漠北에 큰 가뭄이 들어서 물과 풀이 없으니, 사람과 말이 많이 죽었다.
[綱] 겨울 11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雷次宗雷次宗
[綱] 宋나라가 四學을 설립하고 雷次宗에게 給事中을 제수였는데, 받지 않았다.
[目] 豫章 사람 雷次宗이 학문을 좋아하여 廬山에注+① 廬山은 尋陽에 있다. 隱居하였다. 일찍이 불러서 散騎侍郎을 삼았는데 취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處士 신분으로 建康에 초빙되어 와서 그를 위하여 雞籠山에 學館을 열어注+② 爲(위하여)는 去聲이다. 雞籠山은 臺城 北郊에 있다. 學徒들을 모아 敎授하도록 하였다.
宋主는 文藝를 좋아하여 丹楊尹 何尙之를 시켜서 玄學(道敎를 공부하는 학교)를 세우고, 太子率更令 何承天을 시켜서 史學을 세우고, 司徒參軍 謝元을 시켜서 文學을 세우도록 하니注+③ 玄學은 老子․莊子의 가르침이다. ≪晉書≫ 〈職官志〉에 “太子率更令은 宮殿 門戶와 상벌의 일을 주관하니, 직무는 光祿勳과 衛尉와 같다.”라고 하였다. 謝元은 謝靈運의 6촌 동생이다., 뇌차종의 儒學과 함께 四學이 되었다.
宋主가 여러 번 뇌차종의 학관에 행차하여 뇌차종을 시켜서 巾褠(선비는 두건과 홑옷을 착용하여 盛服한다.) 차림으로注+④ 巾은 巾幘을 말하고, 褠는 單衣를 말한다. 江南 人士들은 교제할 때에 盛服을 차려 입는데, 대개 朝服 다음으로 입는 옷이다. 侍講하게 하고 물자 공급도 매우 후하게 주었고 또 給事中으로 임명하였는데 취임하지 않았다. 오랜 뒤에 廬山으로 돌아갔다.
[目] 司馬溫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역사는 儒學의 일부분이며 문학은 유학의 나머지 일이나, 老莊의 虛無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가르침으로 삼을 것이 아니다. 무릇 학문은 道를 탐구하는 방도이니 천하에 두 개의 道가 없는 것이다. 어찌 四學이 있겠는가.”
[目] 宋主는 성품이 인자하고 후덕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政事에 부지런하여 법을 지키면서 준엄하지 않고 남을 포용하면서 해이하지 않았다. 百官이 모두 오랫동안 직위에 있었고 지방관들은 6년을 임기로 결정하니, 관리는 구차하게 면직되지 않았고 백성들은 의탁하는 점이 있었다.
30년 동안 사방 영토 안이 편안하고 무사하여 戶口가 증가하여 세금을 내거나 요역을 제공하는 것이 歲賦에 그칠 뿐이었고, 아침에 나가 저녁에 귀가할 때까지 백성들이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注+① “歲賦”는 정규 세금이니, 〈“止於歲賦”는〉 규정 세액 이외의 것을 백성들에게 취하는 것이 없음을 말한다. 自事는 백성이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 민가에서는 글을 읽는 소리가 서로 들려서 선비들은 志操를 돈독히 하고, 향촌에서는 경박함을 부끄러워하였다. 江左(宋나라)의 風俗이 이 당시에 아름다웠기 때문에 후세에 정치를 말하는 자는 모두 元嘉時代를 칭송하였다.


역주
역주1 魏罷沙門五十以下者 : “廢佛(魏武의 法難)의 징조이다. 이 뒤로 6년 만에 사사로이 沙門을 양육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있게 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僧侶를 가려낸 것을 기록한 것이 세 번이다(이해(438)와 唐 高祖 武德 9년(626), 玄宗 開元 2년(714)이다.).[廢佛教之漸也 後六年而有私養沙門之禁矣 終綱目 書沙汰僧尼三(是年 唐高祖武德九年 玄宗開元二年)]” ≪書法≫
역주2 宋立四學……不受 : “‘立四學’이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무란 것이다. 道는 하나일 뿐이니, 儒學은 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또다시 史學과 文學의 구분을 두는 것은 본디 이미 잘못된 것이다. 玄學이 무엇을 하는 것인데, 유학과 나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資治通鑑綱目≫에서 ‘立學’을 기록한 것은 모두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오직 漢나라 靈帝의 鴻都門學과 劉表의 學校와 宋나라 四學만이 나무라는 말이 된다.[書立四學 何 譏也 道一而已 儒無不通 又有史學文學之分 固已非矣 玄何爲者 而可與儒竝列哉 綱目書立學 皆美也 惟靈帝鴻都門學 劉表學校與宋四學爲譏辭]” ≪書法≫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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