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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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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元嘉四年이요 魏始光四年이라
春正月 魏主還平城하다
魏主還平城하니 統萬徙民道多死하고 能至平城者什纔六七이라 夏平原公定 帥衆向長安注+定, 勃勃之子也.하니
魏主聞之하고 伐木陰山하고 大造攻具하여 再謀伐夏러라
宋主謁京陵하다
高祖命藏微時耕具하여 以示子孫이러니 帝至故宮하여 見有慙色注+晉之東遷也, 劉氏自彭城移居晉陵丹徒之京口里, 陵墓及故宮在焉.이어늘 近侍或進曰
大舜躬耕歷山하시고 伯禹親事水土하시니 陛下不覩遺物이면 安知先帝之至德 稼穡之艱難乎리오
夏四月 魏遣使如宋하다
弘文有疾한대 被徵하여 自輿就路하다 或勸之待病愈하니 弘文曰 吾杖節三世 常欲投軀帝庭이러니 況被徵乎注+弘文父慧度․祖瑗, 三世鎭交州. 遂行이라가 卒於廣州하니 弘文 慧度之子也
五月 魏主發平城하다
魏奚斤與夏平原公定으로 相持於長安이러니 魏主欲乘虛伐統萬하여 五月 發平城하고 命將軍陸俟督諸軍鎭大磧하여 以備柔然하다
魏主至拔隣山하여 築城하고 捨輜重하고 以輕騎三萬으로 倍道先行注+拔隣山在黑水東北. 北史, 捨作舍, 當從之, 讀如字.하니
群臣咸諫曰 統萬城堅하니 非朝夕可拔이라 不若與步兵攻具一時俱往이니이다
帝曰 用兵之術 攻城最下 必不得已然後 用之 今以步兵攻具皆進이면 彼必懼而堅守
若攻不時拔하여 食盡兵疲하고 外無所掠이면 進退無地 不如以輕騎直抵其城이라
彼見步兵未至하고 意必寛弛 吾羸形以誘之하면 彼或出戰이니 則成擒矣리라
吾軍去家二千餘里하고 又隔大河하니 所謂置之死地而後生者也 以攻城則不足하고 決戰則有餘矣니라 遂行하다
宋中護軍王華卒이라
◑六月朔 日食이라
◑夏主及魏主戰于統萬이라가 敗走上邽하니 魏取統萬하다
魏主至統萬하여 分軍伏於深谷하고 以少衆至城下하니 夏將狄子玉降하여호되
夏主聞有魏師하고 召平原公定한대 定曰 統萬堅峻하니 未易攻拔이라 待我擒奚斤然後 徐往하여 內外擊之 蔑不濟矣리라 故夏主堅守以待之라하니
魏主患之注+患其不出戰也.하여 乃退軍以示弱하고 遣娥清及永昌王健하여 西掠居民注+健, 魏太宗子.이러라
魏軍士有亡奔夏者어늘호되 魏軍糧盡하고 輜重在後하며 步兵未至하니 宜急擊之니라 夏主從之하여 將步騎三萬出城하니
長孫翰等皆言호되 夏兵步陳難陷하니 宜避其鋒注+陳, 讀曰陣.이니라
魏主曰 遠來求賊 唯恐不出이러니 今旣出矣어늘 乃避而不擊이면 彼奮我弱이니 非計也라하고 遂收衆僞遁하여 引而疲之하다
夏兵爲兩翼하여 鼓譟追之러니 行五六里 會有風雨從東南來하여 揚沙晦冥하니
宦者趙倪曰 今風雨從賊上來하니 我向彼背 天不助人하니 願攝騎避之注+攝, 收也.하소서
崔浩叱之曰 是何言也 吾千里制勝이어늘 一日之中 豈得變易注+言先定必勝之計, 故千里行師, 不可以風雨之故, 變易成筭於一日之間.이리오 賊貪進不止하여 後軍已絶하니 宜隱軍分出하여 奄擊不意 風道在人이라 豈有常也注+言風在人用之, 分兵出其後, 順風擊之, 則風爲我用, 豈有常勢哉.리오
魏主曰 善 乃分騎爲左右隊以掎之러니 魏主馬蹶而墜하여 幾爲夏兵所獲이러니 拓跋齊以身捍蔽注+齊, 翳槐之玄孫也.하니
魏主騰馬得上하여 身中流矢한대 奮擊不輟하니 夏衆大潰하다
魏人乘勝逐夏主하여 至城北하니 夏主遂奔上邽어늘 魏主微服逐奔者하여 入其城하니 夏人覺之하고 諸門悉閉
魏主與齊等入其宮中하여 得裙繫之槊上하여 乘之而上하여 僅乃得免하다
明日入城하여 獲夏王公卿校及婦女以萬數하고 馬三十餘萬匹이요 牛羊數千萬頭 府庫珍寶車旗器物不可勝計 頒賜將士有差하다
夏世祖性豪侈하여 築統萬城이어늘 高十仞이요 基厚三十步 上廣十步 宮牆高五仞이요 其堅可以礪刀斧하다 臺榭壯大하고 皆雕鏤圖畫하고 被以綺繡하니
魏主曰 蕞爾國而用民如此하니 欲不亡이나 得乎
納夏世祖三女爲貴人하다 夏平原公定 聞統萬破하고 奔上邽하니
魏主詔奚斤等班師한대 斤言호되 赫連昌亡保上邽하여 鳩合餘燼하니 今因其危하면 滅之爲易注+鳩, 聚也. 燼, 火餘也. 以喩收合已敗之遺兵也. 請益鎧馬하여 平昌而還이라한대
不許러니 固請 許之하고 給兵萬人 馬三千匹하고 幷留娥清丘堆하여 使共擊夏하다
魏主還할새 以常山王素爲征南大將軍假節하고 鎭統萬注+素, 遵之子也.하다
秦遣使入貢于魏하다
◑秋八月 魏主還平城하다
魏主壯健鷙勇하여 臨城對陳 親犯矢石하고 左右死傷相繼호되 神色自若하니 由是將士畏服하여 咸盡死力注+鷙, 脂利切, 凡鳥之勇銳, 獸之猛悍者, 皆名鷙也.이러라
性儉率하여 服膳取給而已러라 群臣請峻京城修宮室하여 曰 此易所謂設險守國이요 蕭何所謂天子以四海爲家하니 不壯不麗 無以重威者也
魏主曰 古人有言在德不在險注+吳起之言.이라하고 屈丐蒸土築城而朕滅之하니 豈在城也리오
今天下未平 方須民力하니 土工之事 朕所未爲 蕭何之對 非雅言也注+雅, 正也.
每以爲財者軍國之本이니 不可輕費니라 賞賜皆死事勲績之家 親戚貴寵未嘗橫有所及注+橫, 戶孟切.이러라
命將出師 指授節度한대 違者多致負敗러라 明於知人하니 或拔士於卒伍之中하여 唯其才用所長이요 不論本末하고
聽察精敏하니 下無遁情하고 賞不遺賤하며 罰不避貴하니 雖所甚愛之人이라도 終無寛假하여
常曰 法者 朕與天下共之 何敢輕也리오 然性殘忍하여 果於殺戮이니 往往已殺而復悔之注+如崔浩之類, 是也.러라
夏安定 降魏하다
◑冬十一月 魏封楊玄爲南秦王하다
十一月 魏主遣公孫軌하여 奉策拜楊玄爲南秦王注+軌, 表之子也. 封玄爲南秦王, 以別乞伏熾磐.이러니 及境 玄不出迎이어늘 軌讓之하고 欲奉以還하니 玄懼하여 乃出郊迎하다
注+徵, 召也.하다
字淵明이요 潯陽人이니 侃之曾孫也 少有高趣하여 博學不群이러니 以親老家貧으로 爲州祭酒라가 少日 自解歸하고
召主簿어늘 不就注+潛本傳, 召上有州字.하고 躬耕自資하여 遂抱羸疾이러라 後復爲彭澤令하여 不以家自隨하고 送一力하여 給其子注+力, 僕也.하고 書曰 此亦人子也 可善遇之하라
在官八十餘日 郡遣督郵至縣하니 吏請曰 應束帶見之라한대 潜歎曰 我豈能爲五斗米折腰하여 向鄉里小兒리오 即日解印綬去하다
賦歸去來辭하고 著五柳先生傳以自見하고 徵著作郎이로되 不就注+淵明, 門栽五柳, 因以爲號焉.하다 妻翟氏亦與同志하여 能安勤苦하니 夫耕於前하고 妻鋤於後러라
潜自以先世爲晉輔 恥復屈身後代하여 自宋高祖王業漸隆으로 不復肯仕하니 是歲將復徵之러니 會卒하니 世號靖節先生이러라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4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始光 4년이다.
[綱] 봄 정월에 魏主가 平城으로 돌아왔다.
[目] 魏主가 平城으로 돌아왔다. 統萬에서 백성을 평성으로 이주시키는데 길에서 많이 죽었고, 평성에 도착한 사람은 열에 겨우 예닐곱 명이었다. 夏나라의 平原公 赫連定이注+① 赫連定은 赫連勃勃의 아들이다. 무리를 인솔하고서 장안으로 향하였다.
魏主가 그것을 듣고 陰山에 나무를 베고 성을 공격하는 기구를 대규모로 만들어서 다시 夏나라를 칠 것을 도모하였다.
[綱] 宋主가 을 배알하였다.
[目] 예전에 宋나라 高祖가 빈천할 때 썼던 농기구를 보관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라고 명령하였다. 宋 文帝가 옛날 궁정에注+① 晉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갈 적에 劉氏가 彭城에서 晉陵 丹徒의 京口里로 옮겨와 살았기 때문에 陵墓와 故宮이 여기에 있다. 이르러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얼굴색이 있었는데 측근 중에 어떤 사람이 나아가 말하기를
“舜임금이 몸소 歷山에서 농사를 지으셨고, 禹임금이 친히 물과 흙을 다스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陛下께서 遺物을 보지 않으시면 어찌 선제의 지극한 덕과 농사의 어려움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綱] 여름 4월에 北魏가 사신을 파견하여 宋나라로 보냈다.
[綱] 宋나라 前 交州刺史 杜弘文이 卒하였다.
[目] 杜弘文이 병이 있었는데 조정의 부름을 받아서 직접 수레에 타고 길을 가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병이 쾌차하기를 기다렸다가 가기를 권유하였다. 두홍문이 말하기를 “내가 3代에 걸쳐 부절을 받아 交州를 진수하였는데注+① 杜弘文의 아버지 杜慧度와 할아버지 杜瑗이 3대에 걸쳐 交州를 진수하였다. 항상 조정에 몸을 바치고자 하였다. 더구나 부름을 받은 경우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가다가 廣州에서 卒하였다. 두홍문은 杜慧度의 아들이다.
[綱] 5월에 魏主가 平城을 출발하였다.
[目] 北魏의 奚斤이 夏나라의 平原公 赫連定과 함께 장안에서 서로 대치하였다. 魏主가 빈틈을 타서 統萬을 치고자 하여, 5월에 魏主가 평성을 출발하고 장군 陸俟에게 명령을 내려서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으며 大磧에서 진수하면서 柔然을 대비하게 하였다.
魏主가 拔隣山에 도착하여 성을 쌓고서 輜重을 남겨두고注+① 拔隣山은 黑水의 동북쪽에 있다. ≪北史≫ 〈魏本紀〉에 “捨는 舍(남겨두다)로 썼다.”라고 하였는데, 마땅히 이것을 따라야 하니 본음대로 읽는 글이다. 경무장한 기병 3만 명을 데리고서 두 배나 빠른 속도로 앞장서서 행군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간언하기를 “통만성은 견고하니 아침저녁 사이에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병․공성 기구와 일시에 함께 가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군사를 사용하는 술법 가운데 성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下策이니, 반드시 부득이하게 된 후에야 이 방법을 사용한다. 지금 보병과 공성 기구를 가지고 함께 나아간다면 저들은 반드시 두려워하고서 굳게 지킬 것이다.
만약 공격하여 적시에 탈취하지 못하여 식량이 다하고 병사는 피로해지며 외부에 약탈할 것이 없으면 나아가거나 물러날 곳이 없을 것이니, 경무장한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그 성으로 가는 것만 못하다.
저들이 우리의 보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반드시 느긋해지고 해이해질 것이니, 우리가 연약한 모습으로 그들을 유혹하면 저들이 혹시 나와 싸울 것이니, 그렇게 하면 사로잡을 수 있다.
우리 군사는 집과의 거리가 2천여 리이고 또 大河로 막혀 있으니 이른바 ‘死地에 놓은 뒤에야 살아난다.’는 것이다. 〈3만의 경무장 기병으로〉 성을 공격하면 부족하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여유가 있다.”라고 하고, 마침내 떠나갔다.
[綱] 宋나라 中護軍 王華가 卒하였다.
[綱] 6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綱] 夏主(赫連昌)가 魏主와 統萬에서 싸움을 하다가 패하여 上邽(상규)로 달아나니, 北魏가 통만을 점령하였다.
[目] 魏主가 統萬에 도착하여 군사를 나누어 깊은 골짜기에 숨기고, 적은 군사를 가지고 성 아래로 갔다. 夏나라의 장군 狄子玉이 北魏에 항복하여 말하기를
“夏主는 北魏의 군대가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平原公 赫連定을 불렀는데, 혁련정이 말하기를 ‘통만은 견고하고 험준하니 공격하여 탈취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奚斤을 사로잡기를 기다린 후에 서서히 가서 안팎으로 그들을 공격하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夏主는 견고하게 지키며 기다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魏主는 그들이 출전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注+① 〈“魏主患之”는 夏主가 성에서〉 나와 싸우지 않을까 근심한 것이다., 마침내 군대를 퇴각시켜 약함을 보이고 娥淸과 永昌王 拓跋健을注+② 拓跋健은 北魏 太宗의 아들이다. 파견하여 서쪽으로 가서 주민을 약탈하도록 하였다.
[目] 北魏의 군사 중에 夏나라로 도망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北魏의 군대는 식량이 다 떨어지고 輜重은 후방에 있으며 보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속히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夏主는 그 말을 따라서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성을 나갔다.
北魏의 長孫翰 등이 모두 말하기를 “夏나라 군대의 보병 진형은注+① 陳(진을 친다)은 陣으로 읽는다. 무너뜨리기 어려우니, 그 예봉을 피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말하기를 “멀리 와서 적을 찾는데 오직 성을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지금 이미 나왔는데도 마침내 피하고 공격하지 않으면 저들은 분발하게 되고 우리는 약해지게 되니 계책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군대를 수습하여 거짓으로 달아나 적들을 끌어들여서 그들을 피로하게 하였다.
[目] 夏나라의 군대가 兩翼으로 陣을 나누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쫓아왔는데, 5, 6리를 가자 마침 바람과 비가 동남쪽에서 와서 모래를 날려서 어두컴컴해졌다.
北魏의 환관 趙倪가 말하기를 “지금 바람과 비가 적진으로부터 오는데, 우리는 그것을 향하고 있고 저들은 그것을 등지고 있습니다. 하늘이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이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기병을 거두어注+① 攝은 거둔다는 뜻이다. 피하십시오.”라고 하였다.
崔浩가 그를 질책하기를 “이 무슨 말인가. 우리는 천 리를 달려와서 勝機를 장악하였는데, 하루사이에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注+② 미리 필승할 계책을 세웠으므로 천 리에 군사를 행군하였으니, 비바람이 몰아친다는 이유로 세워놓은 계책을 하루 사이에 바꿀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적들은 전진하는 것을 탐내어 멈추지 않고 후방의 군대는 이미 끊어졌으니, 마땅히 군대를 감추고 나누어 출동시켜 적이 예상치 못했을 때 습격해야 한다. 바람이 부는 방향도 사람이 쓰는 데에 달려 있지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注+③ 바람은 사람이 쓰는 데에 달려 있어서 군대를 나누어 그 뒤로 나가 순풍을 타고 그들을 치면 바람이 우리에게 쓰이게 되니 어찌 일정한 형세가 있겠는가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말하기를 “훌륭하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기병을 나누어서 좌우 부대로 만들어 적을 협격하게 하였다. 魏主가 탄 말이 넘어져 떨어져 거의 夏나라의 군사에게 잡힐 뻔했는데, 拓跋齊가注+④ 拓跋齊는 拓跋翳槐의 현손이다. 몸으로 막고 가렸다.
魏主가 말을 타고 일어나서 몸에 날아오는 화살을 맞았지만 분발하여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夏나라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다.
[目] 北魏의 군사들이 승세를 틈타 夏主를 쫓아서 성의 북쪽에 이르니, 夏主는 〈성에 들어가지 못하여〉 마침내 上邽로 달아났다. 魏主가 변복 차림으로 달아나는 사람을 쫓아서 그 성에 들어가니, 夏나라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서 여러 성문을 모두 닫았다.
魏主는 拓跋齊 등과 함께 夏나라 궁전 안으로 들어가서 부인의 치마를 얻어서 그것을 창날 끝에 매고 그것을 타고서 성가퀴에 올라서 겨우 탈출해 나왔다.
다음 날 統萬城에 들어가서 夏나라 親王과 公․卿․校尉 및 부녀자들을 잡았는데 1만 명 정도였으며, 말이 30여만 필이고, 소와 양이 수천만 마리이고, 府庫에 있는 진귀한 보물․수레․깃발․기물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장수와 병사에게 차등을 두어 나누어주었다.
[目] 예전에 夏나라의 世祖 赫連勃勃은 성격이 호방하고 사치하여 통만성을 쌓을 적에 다음과 같이 하였다. 성벽의 높이가 10길[仞]이고 토대의 두께가 30步였으며 윗부분의 너비는 10보이고 궁궐의 담장은 높이가 다섯 길이고 그 견고함이 칼이나 도끼를 갈 만하였다. 樓臺가 장대하였고 모두 무늬와 그림을 새기고 비단을 입혔다.
魏主가 말하기를 “작은 나라가 백성을 부리는 것이 이와 같으니, 망하지 않으려고 한들 가능하겠는가.”라고 하였다.
[目] 〈魏主가〉 夏나라 世祖의 세 딸을 받아들여 貴人으로 삼았다. 夏나라의 平原公 赫連定은 統萬이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上邽로 달아났다.
魏主는 조서를 내려서 奚斤 등에게 회군하게 하였는데, 해근이 말하기를 “赫連昌이 도망하여 상규를 지키고 남은 병사들을 모으니注+① 鳩는 모은다는 뜻이다. 燼은 불씨가 남은 것이니, 〈“鳩合餘燼”은〉 싸움에 이미 패하고 남은 병사들을 수합함을 비유한 것이다. 지금 그들의 위태로움을 이용하면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쉽습니다. 청컨대 戰馬를 보태주어 혁련창을 평정하고 돌아가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으나,
魏主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해근이 강경히 청하자 이를 허락하고, 해근에게 군사 1만 명과 말 3천 필을 주고, 아울러 娥清․丘堆를 남겨서 그와 함께 夏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魏主가 돌아와서 常山王 拓跋素를注+② 拓跋素는 拓跋遵의 아들이다. 征南大將軍으로 삼고 假節(符節을 줌)하여 통만에 진수하도록 하였다.
[綱] 西秦이 사신을 보내 北魏에 조공을 받쳤다.
[綱] 가을 8월에 魏主가 平城으로 돌아왔다.
[目] 魏主는 건장하고 용맹하여注+① 鷙(흉맹하다)는 脂利의 切이니, 무릇 새가 용감하고 날래며 짐승이 사납고 빠른 것을 모두 鷙라고 부른다. 적의 성에 다가가 공격하고 적진과 대치하여 교전할 때에 친히 적의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싸웠고, 좌우에 죽고 다치는 사람이 계속 생겨나도 정신과 기색이 태연자약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장병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모두 죽을힘을 다하였다.
蕭何蕭何
성격이 검소하고 소박하여 의복과 음식은 꼭 필요한 만큼만 취할 뿐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京城의 성벽을 더 높이고 궁실을 수리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이는 ≪周易≫에 이른바 는 것이고, 또 蕭何가 이른바 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魏主가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注+② 〈“在德不在險”은〉 吳起의 말이다.라고 하였다. 가 흙을 쪄서 統萬城을 쌓았으나 짐이 그것을 없앴으니 〈나라의 존망이〉 어찌 성에 달려 있겠는가.
지금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아서 한창 백성의 힘을 필요로 하니 토목공사는 짐이 행하지 않을 것이다. 소하의 대답은 올바른注+③ 雅는 바르다는 뜻이다. 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魏主는 늘 재물은 군대와 나라의 근본이니 가볍게 소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상을 내리는 데에는 모두 죽음으로 섬기고 공훈을 쌓은 가문에게 주었으며, 친척과 귀족이나 총애하는 사람이라도 상을 함부로注+④ 橫(그릇되다)은 戶孟의 切이다. 준 적이 없었다.
장군에게 명령하여 군대를 출동시킬 적에 통제할 것을 지시해주었는데 그것을 어긴 사람은 대부분 패하였다. 사람을 알아보는 일에 밝았으니 혹 인사를 군졸 중에서 발탁하기도 하여 그 재간의 장점을 따르고 출생과 이력은 따지지 않았다.
듣고 살피는 것이 세밀하고 영민하니 아랫사람은 실정을 숨길 길이 없었고, 포상에는 천한 사람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처벌에는 귀한 사람을 피하지 않으니 비록 매우 애지중지하는 사람이라도 끝내 너그럽게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항상 말하기를 “법은 짐이 천하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니 어찌 감히 가볍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잔인하여 살육에 과감하였으니, 이따금 이미 죽이고 나서 다시 후회하기도 하였다.注+⑤ 〈“往往已殺而復悔之”는〉 예컨대 崔浩의 부류가 이것이다.
[綱] 夏나라 安定城이 北魏에 항복하였다.
[綱] 겨울 11월에 北魏가 을 봉하여 南秦王으로 삼았다.
[目] 11월에 魏主가 公孫軌를 보내서 책서를 받들어 楊玄을 임명하여 南秦王을 삼으려고 하였다.注+① 公孫軌는 公孫表의 아들이다. 楊玄을 봉하여 南秦王으로 삼고 乞伏熾磐과 다르게 예우하였다. 국경에 도달하였는데 양현이 나와 맞이하지 않자, 공손궤가 양현을 꾸짖고 책서를 받들고 돌아가려고 하였다. 양현이 두려워서 마침내 교외로 나와서 영접하였다.
[綱] 晉나라의 注+
陶靖節陶靖節
① 徵은 부른다는 뜻이다.
陶潜이 卒하였다.
[目] 陶潜은 字가 淵明이고 潯陽 사람이니 陶侃의 증손자이다. 도잠은 젊어서 고상한 志趣가 있어서 널리 학문하여 일반 무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부모가 늙고 집이 가난하였으므로 州의 祭酒(좨주)가 되었다가 며칠 안 되어 스스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州에서 主簿로 불렀으나注+① 陶潛의 列傳에는 ‘召’ 위에 ‘州’자가 있다. 나아가지 않고 몸소 밭을 갈면서 생계를 마련하다가 마침내 고질병을 앓게 되었다. 뒤에 다시 彭澤令이 되어서 〈부임지에〉 가족을 데려가지 않고 하인注+② 力은 하인이다. 한 명을 보내어 그 아들에게 편지를 주면서 쓰기를 “이 사람도 사람의 아들이니, 잘 대우하라.”라고 하였다.
관직에 있은 지 80여 일 만에 郡에서 를 보내어 彭澤縣에 이르니, 관리가 청하기를 “당연히 관복을 갖추어 입고서 뵈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도잠은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 쌀 5말 녹봉 때문에 허리를 굽혀 시골 어린아이에게 굽실거리겠는가.”라고 하고, 그날에 직인과 인끈을 풀어놓고 떠났다.
〈歸去來辭〉를 읊고 〈五柳先生傳〉을注+③ 陶淵明은 문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그것으로 인하여 五柳로 號를 삼은 것이다. 지어 자신의 뜻을 보였고, 著作郞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아내 翟氏 역시 뜻을 같이하며 고생을 편히 여겼다. 남편은 앞에서 밭을 갈고 아내는 뒤에서 김을 매었다.
도잠은 스스로 선대에 〈陶侃이〉 晉나라의 재상이었으므로 다시 후대에 몸을 굽히는 것을 부끄럽다 여겨서, 宋나라 고조의 왕업이 점차 융성해지자 다시 벼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해에 다시 부르려 하였는데 마침 卒하였다. 세상에서는 靖節先生이라고 불렀다.


역주
역주1 京陵 : 興寧陵으로 劉裕의 부친 劉翹의 능이다.
역주2 宋前交州刺史杜弘文卒 : “전임 관원을 ‘卒’이라 한 것은 현명함을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전임 관원을 ‘卒’이라 한 것은 6번이니,(漢나라 獻帝 興平 원년(194)에 자세하다.) 이 이외에는 전임 관원을 ‘卒’이라 한 것이 없다.[卒前官 錄賢也 終綱目 卒前官六(詳漢獻帝興平元年) 舎是無卒前官者矣]” ≪書法≫
역주3 험난함을……지킨다 : ≪周易≫ 坎卦 〈彖傳〉에 “하늘의 험함은 오를 수 없고 땅의 험함은 산천과 구릉이니, 王公이 험함을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니, 險의 때와 用이 크다.[天險 不可升也 地險 山川丘陵也 王公 設險 以守其國 險之時用 大矣哉]”라고 하였는데, 이를 줄인 말이다.
역주4 천자는……못한다 : ≪史記≫ 권8 〈高祖本紀〉에 보인다.
역주5 국가는……아니다 : ≪史記≫ 권65 〈吳起列傳〉에 보인다.
역주6 赫連屈丐 : 赫連勃勃의 이칭으로 北魏 明元帝가 혁련발발을 경멸하여 이름을 屈丐로 바꿔 부른 것인데, 北方의 말로 굴개는 卑下의 뜻이다.(≪北史≫ 〈夏列傳〉)
역주7 楊玄 : 武道王 楊玄이 宋나라에 귀부하고 宋나라의 연호를 쓴 일이 본서 78쪽에 보인다.
역주8 徵士 : 조정의 초빙에 응하지 않은 학문 높은 隱士를 가리킨다.
역주9 晉徵士陶潜卒 : “陶潛이 宋나라에서 卒하였는데 晉나라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도잠은 처음부터 끝까지 晉나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절개를 허여하였으므로 ≪資治通鑑≫에서 기록하지 않은 것을 여기에서 특별히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晉나라가 망했으나 도잠은 晉나라에 마음을 두었으니 卒하였을 때 ‘晉’이라고 기록하고, 唐나라가 망했으나 張承業이 唐나라에 마음을 두었으니 卒하였을 때 ‘唐’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徵士를 ‘卒’이라고 기록한 것은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한 사람일 뿐이다.[潛卒於宋 書晉 何 潛始終晉人也 綱目予節 故通鑑不書 於是特書之 是故晉亡矣 潛心乎晉 則卒書晉 唐亡矣 張承業心乎唐 則卒書唐 徵士書卒 終綱目 一人而已矣]” ≪書法≫“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이 심하구나. 君子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것이다. 揚雄이 ≪太玄經≫을 지어서 ≪易經≫에 견주고, ≪法言≫을 지어서 ≪論語≫에 견주었으니, 스스로 보기에 ≪荀子≫나 ≪孟子≫ 이하는 말할 거리도 못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양웅은 역적 王莽에게 벼슬하여 절개를 잃었기 때문에 ≪자치통감강목≫에서 양웅이 죽었을 때 기록하기를 ‘莽大夫揚雄死(王莽의 大夫 揚雄이 卒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양웅이 비록 자신을 해명하려 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陶潛은 晉나라에 있을 때에 太尉 陶侃의 후손으로 초년부터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 대략 이미 볼만한 점이 있었다. 劉宋으로 나라가 바뀜에 이르러 다시 몸을 굽히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벼슬을 하지 않고 끝내 명예와 절개를 보전하였다. 그러므로 ≪자치통감강목≫에서 특별히 晉나라의 處士로 기록하였으니, 宋나라에 절개를 잃지 않아서 홀로 晉나라에 대한 절개를 보존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資治通鑑≫에서는 이해에 도잠의 일을 기록하지 않았기에 ≪자치통감강목≫에서는 이전 역사에서 취하여 천년 미래의 청렴한 기풍을 격동시킨 것이다. 臣이 일찍이 이것에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晉書≫ 〈隱逸傳〉에는 그 굽히지 않은 뜻을 드러내지 않았고, ≪南史≫에 비로소 그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또 檀道濟가 일찍이 진미를 보냈을 적에 물리쳐 되돌려 보낸 일을 수록하였으니, 도잠의 이 뜻이 훤하여 명백하다. 지금 分注(目) 역시 이것에 근본을 두어 말하였으니, 세상의 교화에 관련되는 점이 크다. 이런 까닭으로 자세하게 논의하여 후일의 군자들에게 고한다.[甚哉 出處之際 君子所當致謹也 揚雄草太玄以擬易 作法言以擬論語 其自視荀孟以下 若不足道 然失身於莽賊 故綱目於其没也 書曰 莽大夫揚雄死 雄雖欲自解 不可得也 陶潛在晉 乃太尉侃之孫 自其初年 出處大致 已有可觀 至劉宋移國 恥復屈身 遂不出仕 卒能保全名節 故綱目特以晉處士書之 明其不失身於宋氏 獨得爲晉全人也 然通鑑是年 不載其事 綱目取諸前史 以激千載之清風爾 臣嘗因是考之 晉隱逸傳 不見其不屈之意 至南史 始著其説 且載檀道濟嘗餽粱肉 麾而去之之事 則潛之此意 顯然明白 今分注亦本此爲説 其有關於世敎多矣 玆故詳而論之 以詔後之君子云]” ≪發明≫
역주10 督郵 : 漢나라 때 설치한 官名으로 太守를 보좌하여 屬縣을 감찰하고 관리의 성적을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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