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8)

자치통감강목(8)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8)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丙寅年(66)
병인년丙寅年(66)
九年이라 夏四月 詔司隷, 刺史하여 歲考長吏殿最以聞하다
나라 현종 효명황제顯宗 孝明皇帝 영평永平 9년이다. 여름 4월에 사례교위司隷校尉()자사刺史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해마다 장리長吏고과考課하여 아뢰게 하였다.
詔司隷校尉, 部刺史하여 歲上墨綬長吏視事三歲以上으로 治狀尤異者各一人하여 與計偕上하고 及尤不治者 亦以聞注+後漢十三州部, 司隷治河南, 豫治譙, 兗治昌邑, 徐治郯, 靑治臨淄, 涼治隴, 幷治晉陽, 冀治鄗, 幽治薊, 揚治歷陽, 荊治漢壽, 交治廣信, 益治成都. 漢制, 千石ㆍ六百石, 墨綬, 三采靑ㆍ赤ㆍ紺, 長丈六尺, 八十首, 四百石ㆍ三百石, 長同. 此墨綬長吏, 謂大縣令以下.하다
사례교위司隷校尉부자사部刺史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해마다 사무를 본 지 3년 이상이 된 묵수墨綬장리長吏들 중에 치적이 가장 특별한 자 각각 한 사람을 상계리上計吏와 함께 올라오게 하고, 가장 고을을 다스리지 못한 자 또한 보고하게 하였다.注+후한後漢에는 13가 있었는데, 사례司隷하남河南, 예주豫州, 연주兗州창읍昌邑, 서주徐州(담), 청주靑州임치臨淄, 양주涼州, 병주幷州진양晉陽, 기주冀州(학), 유주幽州(계), 양주揚州역양歷陽, 형주荊州한수漢壽, 교주交州광신廣信, 익주益州성도成都를 치소로 하였다. 나라 제도에 천석千石육백석六百石은 검은 인끈[묵수墨綬]에 청색과 적색, 감색 세 채색인데, 인끈의 길이가 1 6이고 80이니, 사백석四百石삼백석三百石은 길이가 같다. 이 묵수墨綬장리長吏는 큰 현령縣令 이하를 이른다.
大有年注+五穀皆, 書하다
】 크게 풍년이 들었다.注+오곡五穀이 모두 잘 익어서 “대유년大有年”이라 쓴 것이다.
흉노匈奴가 아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帝崇尙儒學하여 自皇太子, 諸王侯 及大臣子弟 功臣子孫 莫不受經하다
】 황제가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황태자皇太子와 여러 로부터 대신大臣의 자제와 공신功臣의 자손에 이르기까지 경서經書를 배우지 않는 이가 없었다.
又爲外戚樊氏, 郭氏, 陰氏, 馬氏諸子하여 立學於南宮하니 號四姓小侯注+以樊ㆍ郭ㆍ陰ㆍ馬四姓, 非列侯, 故曰小侯. 胡三省曰 “予據東平王蒼傳 ‘送列侯十九枚, 諸王子年五歲以上能趨拜者, 皆令帶之.’ 意四姓小侯, 亦猶是也.”라하다
또 외척인 번씨樊氏, 곽씨郭氏, 음씨陰氏, 마씨馬氏의 여러 아들들을 위하여 남궁南宮에 학교를 세웠는데, 그들을 ‘사성소후四姓小侯注+번씨樊氏, 곽씨郭氏, 음씨陰氏, 마씨馬氏열후列侯가 아니기 때문에 소후小侯라 하였다. 호삼성胡三省이 말하기를 “내가 동평왕 유창東平王 劉蒼열전列傳을 근거해보니, ‘열후인列侯印 19개를 보내 여러 왕자들 중에 5세 이상으로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절할 수 있는 자는 모두 을 차게 했다.’ 하였으니, 짐작컨대 사성소후四姓小侯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라 하였다.
置五經師하고 搜選高能하여 以授其業하다 自期門羽林之士 悉令通孝經章句하다 匈奴亦遣子入學하다
오경五經의 스승을 두고서 학문이 높고 능한 자를 가려 뽑아서 학업을 전수하게 하였다. 의 군사로부터 모두 ≪효경孝經≫의 장구章句를 통달하게 하였다. 이에 흉노匈奴 또한 아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역주
역주1 殿最 : 지방관에 대한 고과성적 중 최하 등급을 殿, 최고 등급을 最라 하였다.
역주2 : 인끈을 세는 단위이다.
역주3 (熱)[熟] : 저본에는 ‘熱’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熟’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大有年 : “≪春秋≫의 필법은 좋은 일과 나쁜 일에 같은 말을 쓰는 것을 혐의하지 않는다. ≪資治通鑑綱目≫은 ≪춘추≫를 본받아 말이 같으나 뜻이 다른 경우도 있고, 따로 義例를 세워서 ≪춘추≫의 필법에 구애되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요점은 배우는 자가 자세히 살펴봄에 달려 있을 뿐이다. ≪춘추≫에 12명의 魯나라 公 가운데 유독 桓公 3년에 有年을 썼고 宣公 16년에 大有年을 썼으니, 先儒들이 이르기를 ‘옛날 史書에 災異와 祥瑞를 함께 기록하였기 때문에 有年과 大有年을 經에서 볼 수 있으니, 만약 옛날 史書가 남아 있지 않다면 ≪춘추≫에서도 덧붙여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춘추≫의 242년 동안에 진실로 농사를 힘쓰고 곡식을 소중히 여기며 비가 오지 않는 것을 근심하고 비가 오는 것을 기뻐한 군주가 있었으나 모두 有年이라고 쓰지 않았으니, 이는 聖人(孔子)이 삭제한 것이다.’ 하였다. ≪춘추≫는 재이를 기록하고 상서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유독 두 公에게 有年을 쓴 것은 어째서인가. 泰山 사람 孫明復(孫復)이 ≪春秋尊王發微≫를 지어서 말하기를 ‘桓公이 재위한 18년 동안 오직 이때에 有年을 쓴 것은, 일찍이 有年이 없었으니 이것을 써서 백성들을 위해 노력하거나 농업을 힘쓰지 못한 실제를 드러낸 것이요, 宣公이 재위한 18년 동안 오직 이때 大有年이라고 쓴 것은, 백성들의 양식이 크게 풍족하였는데 이것을 써서 부도덕하게 백성들에게 세금을 많이 거두어 백성들이 항상 부족함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살펴보면 ≪춘추≫에서 일찍이 두 公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程頤子(程伊川)가 깊은 뜻을 발명함에 이르러서는 두 公에게 有年을 쓴 것을 가리켜 재이를 기록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두 公이 부도덕한 것으로 나라를 얻었으니 마땅히 흉년과 재앙을 얻어야 하는데, 이제 도리어 정상과 반대의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에 ≪춘추≫에 재이라고 여겨서 특별히 써서 남겨둔 것이다. 더구나 두 公이 재위한 것이 모두 18년이었는데, 유독 한 해에만 有를 썼으니, 그렇다면 다른 해에는 흉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이다. 胡安國이 ≪춘추≫에 傳을 낼 때에도 또한 이 뜻에 근본하였다. 그렇다면 ≪춘추≫에 有年을 쓴 것은 바로 재이를 기록한 것이지만, ≪資治通鑑綱目≫에 이것을 쓴 것은 어찌 재이를 기록한 것이겠는가. 周나라 威烈王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러 해가 되었으나, 유독 이때에 처음 大有를 썼으니, 비록 前漢의 文帝와 景帝의 전성기라도 전혀 없었고, 班固와 范曄의 두 史書(≪漢書≫와 ≪後漢書≫)를 상고해보더라도 오직 東都(後漢)에서 이해에 ‘有年’을 기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資治通鑑≫에 따라서 기록하고 ≪자치통감강목≫도 마침내 이것을 게시하여 썼으니, ≪춘추≫에서 재이를 기록하고 상서를 기록하지 않음은 ≪춘추≫의 특별한 필법이요, ≪자치통감강목≫에서 재이와 상서를 모두 기록함은 ≪자치통감강목≫이 史法을 겸하여 실제를 기록한 것이다. 顯宗 당시 군주의 德이 청명하고 정사가 잘 닦여서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동하였으므로 有年의 응함을 얻은 것이다. 예전의 史冊에서 이 일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므로 ≪자치통감강목≫도 따라서 썼는바, 바로 당시에 다스리는 효험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것이니, 先儒가 麟筆(춘추필법)을 발명한 뜻과는 진실로 본래 나란히 행해져서 모순되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때문에 자세히 변론하여 후세에 ≪자치통감강목≫을 보는 자에게 고하는 바이다.[春秋之法 美惡不嫌同詞 綱目取法春秋 亦有詞同而旨異者 亦有自立義例 不以春秋之法爲拘者 要在學者審觀之爾 春秋十二公 獨桓公三年 書有年 宣公十六年 書大有年 先儒謂舊史災祥竝記 故有年大有年得見於經 若舊史不存 春秋亦不得而附益之 有如二百四十二年之間 固有務農重穀閔雨喜雨之君 而皆不以有年書者 是聖人削之也 春秋記異 不記祥 獨於二公 書有年 何哉 自泰山孫明復 著春秋發微 謂桓十八年 惟此書有年者 是未嘗有年 書之 以著其不能勤民務農之實 宣十八年 惟此書大有年者 是民食大足 書之 以見其不道重斂于民 常不足爾 審此則是春秋未嘗予二公也 至程頤子發明奥旨 則指二公有年之書 謂之紀異 蓋謂二公以不道得國 宜得凶災 今乃反常 故春秋以爲異而特存之 況二公享國 俱十八年 獨一年書有 則他年之歉 可知 胡氏安國傳春秋 亦本此義 然則春秋之書有年 乃紀異也 綱目書此 豈紀異乎 自周威烈王至今 凡幾年矣 獨此始書大有 雖先漢文景盛時 亦闕然無之 及考班范二史 惟見東都是年載此 故通鑑因而紀之 綱目遂得揭而書之 蓋春秋記異 不記祥 是春秋之特筆也 綱目災祥竝記 是綱目兼史法而紀實也 顯宗是時 君德清明 政事修擧 天人交感 故獲有年之應 前史備而錄之 綱目因而書之 正所以著當時治效之美 其與先儒發明麟筆之意 固自有竝行而不相悖者 臣故詳而辨之 以告後之觀綱目者云]” ≪發明≫
역주5 匈奴遣子入學 : “특별히 쓴 것이다. 文治가 이때에 지극히 성하였으니,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한 번 썼다.[特書也 文治 於是極盛矣 終綱目一書而已]다” ≪書法≫
역주6 期門과 羽林 : 期門은 관명으로 병기를 잡고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는바, 뒤에는 虎責郞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羽林은 禁衛軍의 명칭이다.
역주7 (卽)[印] : 저본에는 ‘卽’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印’으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8)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